2013년 5월 2일 목요일

파루부터 란파루루~★






( 바보같은 란파루루.jpg - _-; )













 파루부터 란파루루~★
                                               
                                                  written by.녀놘













 한 여름의 뙤약볕이 넓은 마당 사이로 내리쬐며 마치 쨍쨍- 거리는 숨 막히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들려오고 있는 듯하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2주 정도가 지난 무렵, 나는 싫다고 하는 것을 란란의 손에 이끌려 기어이 란란의 친가로 내려와 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거대한 규모의 전통 가옥 안에서 나는 마당이 훤히 내다보이는 마루 위에 걸터앉아 조금씩 흘러내리는 땀을 열심히 손부채로 식혀가며 멍하니 란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봐도 아지랑이가 이글이글 피어오르고 있는 덥디더워 보이는 마당 한 가운데에서 란란은 지금 누런 시바견 한 마리와 질리지도 않고 뛰어다니며 웃고 떠들고 뒹굴며 깔깔대고 있다. 쟤는 일사병이란 말은 들어보기나 했을까? 저게 정말로 평범한 17세 여고생으로서 가능한 일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란란이 즐거워하며 크게 웃을 때마다 햇살 사이로 환하게 드러나는 기분 좋은 입가의 굴곡과 목덜미 아래로 흘러내리는 작은 땀방울들. 나는 벌써 30분 째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란란의 모습을 한동안 더 지켜보다가 그대로 벌렁 차가운 마루 위로 드러누워 버렸다.


 아...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뻑뻑해진 눈가를 꾹꾹 손바닥으로 눌러가며 뒷머리를 쿵쿵 바닥에 찧는다. 뭔가에 단단히 홀려버린 기분이었다. 이렇게 방학기간 동안 친척도 아닌 친구의 집에 놀러 내려와 있어 보기는 처음이다. 아니.. 단순히 친구의 집에 신세를 져보는 게 처음인 것 같다. 나는 그 때 왜 란란의 말을 제대로 뿌리치지 못 했을까. 아무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이 집에서 하루 종일 있는 다는 건 나로서는 엄청난 스트레스다. 싫고 좋고를 떠나서 그 낯 섬이 몸서리치게 불편하다.


 그런데 왜 난 그럴 것을 뻔히 알고도 란란을 따라와 버렸던 걸까. 어째서 평소에는 채 몇 분도 버티질 못 하는 이 한 여름의 열기 속에서 이토록이나 집요하게 란란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으로 쫓고 앉아 있는 것일까....


 "으... 으..."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심함에 괴로운 신음성을 내뱉으며 나는 눈을 떠내 시선을 막는 지붕을 바라다보았다. 그 처마의 끝에 매달린 푸른색의 풍경이 때때로 작은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땡. 땡. 땡.


 그것이 마치 푸른 파문처럼 내 귓가에 번져와 문득 가슴 한 켠에 품고 있는 나의 푸른빛의 열쇠를 상기시켜 주었다.


 그래... 갑자기 모든 잡념들이 차분히 잠재워져 들었다. 나는 란란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단 하나의 창. 언제나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란란에게 감히 다가설 수 없는 겁쟁이. 나 같은 아이가 란란과 어울리지 않는 다는 건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단지 그녀가 만들어내는 햇빛의 음영 뒤에 숨어서 그녀가 언제까지고 더 환하게 빛날 수 있도록 싸울 것을 맹세했다. 그것이 내가 바랐던 단 한 가지의 소원. 그것이 나와 문의 계약.


 그래. 이것도 모두 란란의 보호를 위해 내 눈 앞에서 멀어지는 걸 원치 않아 무의식적으로 내가 택한 행동이었을 뿐일 거다. 그래. 단지 그 뿐이야. 정신 차려. 하루카.


 "무슨 고민이 있는 얼굴이군요."



 아...?!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자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자 분홍빛의 기모노를 정갈히 입고 있는 란란의 할머님이 어느새 내 옆에 앉아 계시는 것이 보였다. 튕기듯 일어나 앉은 나는 그 주름진 얼굴 가득한 인자한 미소를 피해 우물쭈물 고개를 돌려내 버렸다.


 어색한 침묵과 함께 나와 할머님은 마루 위에 앉아 여전히 마당 한 가운데서 뛰어놀고 있는 란란과 시바견의 모습을 얼마정도인가 지켜보고 있었다. 깨질듯이 내려쬐는 강한 햇볕 너머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네...?"


 할머님의 목소리에 흠칫 바라다보자 세월의 풍랑이 간직된 깊은 두 눈이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안심한 듯 란란을 지켜다 보고 있었다.


 "시마자키양이라고 했지요?"

 "아.. 네."

 "앞으로도 우리 스즈란을 잘 부탁합니다. 많은 것이 부족한 아이예요."

 "......"


 고개를 숙였다. 란란을 부탁해..? 마음속으로 고개를 힘껏 저었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이다. 오히려 부탁받아야 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다. 지금까지 란란과 나 사이에 보살핌을 받아왔던 쪽은 줄곧 내 쪽이었다. 나란 아이는 누구와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 하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는 아이이니까... 외톨이처럼 홀로 교실 한 쪽에 앉아 있던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와줬던 것도 란란이었고, 주변의 시선에 힘들어 할 때 다독여줬던 것도 란란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도대체 무엇을... 만약 이런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겨우 세계의 멸망을 방조하는 대가로 란란의 행복을 바라는 것 정도일 것 이다.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 하고 그저 시선만 피하고 있는 나를 잠잠히 바라보시던 할머님이 조용히 손을 뻗어 내 손을 가만히 쥐어주었다.


 "시마자키양. 스즈란은 어렸을 적에는 언제나 독불장군에 주변의 누구도 아끼질 않는 안하 무인한 아이였어요. 그런 아이가 지금은 이렇게 친구 분을 데리고 이 할미를 찾아와 주기까지 하니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앞으로도 언제까지고 스즈란의 곁에 함께 있어주세요."


 내 손을 감싸고 있는 따듯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에서 진심이 담긴 애정과 부탁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나는 할머님을 향해 물었다.


 "란란이 자기 혼자만 알던 아이였다고요?"

 "그랬었답니다."


 눈을 깜박였다. 선뜻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란란은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아이이다. 그것은 그녀의 소원으로 탄생된 녹빛의 열쇠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란란이 어렸을 적에는 전혀 정반대의 심성을 갖고 있던 아이였다는 걸 까?




 "스즈란이 어렸을 적에는 부모 모두가 사업에 바빴기 때문에 스즈란을 제대로 돌봐줄 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항상 그 아이들은 어린 스즈란에게 돈으로 해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누구 부럽지 않게 해주었답니다.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어느 하나 부족할 것 없이 해주었죠."

 "아...."


 란란의 부모님이 굉장한 부자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 친가 집만 봐도 그 위세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간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자라온 탓인지 가끔씩 이 할미의 집에 내려왔을 때 지켜본 스즈란의 모습은 참으로 걱정돼 보였어요. 집안의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을 모두 무시하며 부려먹는 것이 일수였고 때때로 집 밖을 나서기라도 하면 마을 아이들에게 행패를 부려서 이 할미가 불러놓아 혼내기라도 하려면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당당하게 나오곤 했었죠."

 "정말인가요? 솔직히... 저는 상상하기 힘들어요."

 "그러세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어릴 적 스즈란이 지극히 못 된 아이였다는 건 사실입니다. 이 할미의 매일의 걱정거리였죠. 그랬던 것이... 그래요. 딱 이 맘 때쯤이군요. 스즈란이 열 살 쯤 되던 해에 여름방학. 오늘같이 햇볕이 무더웠던 날로 기억해요. 그 때에 그 날 이후로 스즈란은 완전히 바뀌어져 버렸답니다. 아니, 실은 바뀌려고 노력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노력하게 되었다...? 물음표 투성인 나에게 할머님은 방긋 웃어 보이시며 자리를 일어나셨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짧은 말을 남기시고 사라지신 할머니는 곧 조그마한 낡은 함 하나를 들고 돌아오셨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정갈한 나뭇결의 뚜껑을 할머님이 열어 보이자 붉은 천에 담긴 작은 원통형의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양이 어렸을 적 추억의 어딘가에서 손에 쥐고 놀았던 한 장난감의 모양과 닮아 있었다.


 "만화경... 인가요?"

 "네, 맞아요."


 함 안의 만화경을 바라보는 할머님의 눈빛은 언젠가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때 나오는 노인 특유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 속에 젖어들어 갔다.


 "옛날, 이곳에는 팔이 아홉 개 달린 무서운 요괴가 살고 있었다고 해요. 어찌나 못된 짓을 많이 했는지 백성들의 호소에 영주가 직접 토벌대를 보내기도 했지만 번번이 모두 혼쭐이 나서 도망가고들 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에 요괴가 마을에 한 남자아이를 잡아간 모양이에요. 잡혀간 아이의 누이는 마을을 돌며 같이 찾으러 가주기를 마을사람들에게 간절히도 부탁했지만 당연하게도 모두 쉬쉬하며 거절할 뿐이었죠. 그래 누이는 동생과 먹으려고 고이 싸두었던 경단 알 세 개만을 품에 넣고는 용감히도 요괴가 사는 산 속으로 홀로 길을 떠났답니다. 산은 깊고 험하기 그지없었죠. 이리저리 긁히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누이는 그래도 씩씩하게 산 속을 나아갔어요."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옛날 어렸을 적 동화책에서나 언젠가 읽어봤었을 듯 한 내용이었다. 나는 동생을 찾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났을 누이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글쎄... 역시 그런 건 나라면 무리라는 마음뿐이다. 바보같이도 전보다 더 착잡해진 심경이 되어 있는 나를 탓하며 나는 남은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렇게 길을 향하던 누이 앞에 어디선가 스님 한 분이 나타나셔서 가는 길을 붙드셨대요. 누이가 바라보니 스님의 행색은 여간 말이 아니었나 봐요. 며칠을 산 속에서 지냈는지 몹시 남루한 옷에 피골이 보일 정도로 메마른 것이 참 안쓰러워 보였나 봐요. 그러자니 스님이 누이를 붙들고 하는 말이 '내 너무 배가 고파 그러니 그 품속에 있는 경단을 좀 얻어먹을 수 있겠나' 그러시더 라더군요. 누이는 제 품안에 고이 넣어둔 경단을 알아본 것에 깜짝 놀라며 선뜻 경단을 하나 스님에게 드렸어요. 스님은 누이에게 경단 알을 받자마자 단숨에 삼켜버리셨어요. 그러고는 다시 누이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너무 시장기가 도져 그러니 하나를 더 줄 수 없겠나 하셨어요. 조금 망설이던 누이는 순순히 경단 알을 하나 더 나눠 드리기로 했어요. 그런데 웬걸요? 하나를 더 건네받은 스님은 또 날름 삼켜버리시고는 다시 누이를 빤히 바라보시는 거예요. 그러자 이번에는 누이도 주저하며 말했어요. 이 마지막 한 알은 동생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드릴 수 가 없다고 말이죠. 그러자 스님이 껄껄 웃으시며 그럼 내 좋은 선물을 하나 줄 터이니 그것과 경단을 바꾸는 것은 어떤가 하시더래요."

 "선물이요?"

 "네, 선물이요. 반드시 나중에 누이에게 도움이 될 거라면서 말이죠."


  선물이라... 갑자기 문과 계약을 하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누이라면 그런 거래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스님의 부탁에 못 이긴 누이는 스님에게 마지막 하나 남은 경단 알 마저 건내드리고 말았어요. 그 한 알을 또 한 입에 꿀꺽 맛있게 삼키신 스님은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으로 웃으시며 소매사이에서 신비한 빛깔로 이루어진 붉고, 푸르고, 노란 주머니 세 개를 꺼내어 들고는 누이에게 내밀었어요. 누이가 그 신기한 주머니를 받아들자 앗! 하는 사이에 어느 샌가 스님은 사라져 버렸어요. 누이는 한동안 몹시 놀라고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길을 서두르기로 했어요."

 "그래서 누이는 요괴를 만났나요?"

 "네. 얼마 안 가 누이는 곧 요괴와 마주하게 되었죠. 요괴는 소문대로 기괴한 아홉 개의 팔에, 흉측한 얼굴에는 샛누런 눈알이 이글거리고 뾰족한 이빨이 피처럼 붉은 입 안 가득 빼곡히 박혀 있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어요. 누이가 요괴에게 동생을 돌려 달라 얘기하자 요괴는 단박에 코웃음을 치며 아홉 개의 팔을 누이에게로 뻗었어요. 요괴의 팔은 하나하나마다 천 개의 악몽과 공포의 허상을 뿜어내는 마수(魔手)였는데, 위기에 처한 누이는 퍼뜩 스님의 말이 떠올라서 주머니를 열어 보았어요. 첫 번째 붉은 주머니를 열자 갑자기 어마어마한 화염이 솟구치며 요괴의 왼쪽에 달려 있던 팔 네 개가 화르륵 녹아버리고, 두 번째 푸른 주머니를 열자 이번에는 매서운 눈보라가 불어 닥쳐 요괴의 오른편에 달려 있던 팔 네 개가 꽁꽁 얼어 버리고, 마지막에 노란 주머니를 열자 갑자기 하늘에서 번쩍 번개가 내리치며 정수리에 달려 있던 마지막 팔에 떨어져 요괴는 눈이 멀어 버렸대요. 그리고 그 눈부신 빛줄기 속에서 스님이 걸어 나오셔서 품안에서 만화경 하나를 꺼내어 드시더니 구천 개의 악몽과 공포로 이루어져 있던 요괴를 그 만화경 속의 수만 가지 허상 속에 가두어 주었다는 이야기에요."

 "......."

 "어때요. 시마자키양. 이 늙은이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나요?"


 나는 함 안의 만화경을 내려다보았다.


 "그 이야기와 란란의 변화가 관련이 있다고 하시는 거죠? 이건 그럼...."

 "그래요. 실은 전설대로 이 마을에는 예전 누이가 스님이 요괴를 봉인해준 후 떠나자, 그 만화경을 모셔두려고 세웠다는 사당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요. 지역의 소개란에 흥밋거리로 아주 작게 소개될 정도의 작고 관리가 소흘한 보잘 것 없는 장소입니다만, 어쩐 일인지 스즈란이 갑자기 변하게 되었던 날, 스즈란은 그 사당에서 이 만화경을 손에 꼭 쥔 채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스즈란이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집안사람들을 시켜 찾아 나섰는데 이 근방에 눈이 밝은 연세가 지긋하셨던 한 분이 결국 그 곳에서 스즈란을 찾아낸 것이죠."

 "그럼 이 만화경이 이야기 속의 그 만화경이란 말씀이신가요?"

 "글쎄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는 그 때 스즈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를 못 한 답니다. 일이 더 중요했던 부모들을 대신하여 제가 더 보듬어 주기로 분명 마음먹었는데도 여느 때 처럼 집을 나섰던 스즈란이 그런 곳에 늦은 밤이 되도록 방치된 채 쓰러져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는 바가 없어요. 이 이야기도 단순히 어렸을 때부터 저도 듣고 자란 마을의 구전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분명 스즈란이 쓰러져 있던 장소는 그 사당이었고 만화경까지 손에 쥐어져 있었어요. 저는 스즈란이 돌아온 후에 그 날 일에 대해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에게 빠짐없이 묻고 다녔답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누구도 그 날 스즈란의 행방에 대해 기억해내지 못 했어요. 제가 직접 사당을 찾아가 살펴보기도 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인지라 실제로 그 곳에 이 만화경이 있었을지 없었을지 조차 알 수 가 없었지요. 해서 이게 정말 그 이야기속의 요괴가 봉인된 만화경인가는 알 수가 없어요. 다만 그 이후로 스즈란은 너무도 많이 바뀌었고 이것과 관련되어 그곳에서 분명 무슨 일인가 스즈란에게 영향을 끼쳤었을 거라 짐작해 볼 따름입니다."


 지금껏 잠자코 듣고는 있었지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나는 조금은 무거워진 할머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빛이 조금 바래어 있는 차분한 두 눈에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과거에 대한 회한이 묻어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일이 어찌되었든 란란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게 되었던 건 할머님의 책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걸 계속 마음에 담아두시면서 자책하시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천방지축이었던 란란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건 바로 곁에서 마음을 써주시던 할머님 같은 분이 납득하지 못 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비이상적인 변화였다. 결과가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그 짧은 공백의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떠한 사건이 란란을 그렇게 변화시키게 되었는 가는 확실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할머님도 그 점이 계속해서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 일 테다. 나에게 있어 때로는 태양과도 같은 란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아이. 그런 아이의 정체성이 뒤바뀐 사건. ...이것은 나에게도 분명 중요한 일이다.


 자연스레 만화경으로 다시 시선이 간다. 분명 이것과 란란의 변화는 관련이 있다. 그것은 직감을 넘어선 확신이었다.


 "저... 제가 잠시 봐도 딜까요?"

 "네? 아, 괜찮아요. 시마자키양. 저도 몇 번인가 살펴보았지만 역시 요괴가 씌었거나 하는 물건은 아닌 거 같아요."


 할머님이 웃으시며 건네신 만화경에 조심스레 함 안으로 손을 뻗는다. 여름의 햇볕을 받아 온유한 기운이 스며 나오는 매끈한 나뭇결이 손끝을 자극하며 매만져져 왔다. 말씀대로 특별히 이상한 점이라고는 없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만화경.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오는 그 원통형이 물건을 얼마간 만지작거리다가 가볍게 눈앞으로 다가대었다.



 빨강,파랑,노랑,

 업화와 눈보라와 번뜩이는 번갯불.



 그 안에서 끝없이 솟구쳐 오르는....

 『검정,어두운푸른빛회색,밝은푸른빛회색,칙칙한회색,어두운회색,은색,밝은회색,백색,허깨비백색,꽃의백색,푸른빛,하늘색,짙은장미빛,상앗빛,연한자주색,희어진엷은황갈색,푸른빛녹색,이하의파랑,짙은검은빛을띤남빛,중간의연보라,중제비꽃빨강,내화,안장갈색,산호빛,잔디녹색,중봄녹색,어두운푸른정도,암록색을띤청색,어두운올리브녹색,어두운누른빛에엷은다색......』



 허덕이는 숨 사이로 시야를 압박하며 펼쳐지는 무수한 황홀경 속에서

 나는 무언가가 끌어당기듯 아득한 빛 속으로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



 햇볕이 따갑다. 눈을 떠 보자 밝은 햇살이 쏟아진다. 여긴 어딜까...? 손을 들어 이마위에 작은 그늘을 만들자 낯선 골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름의 햇살을 받은 푸른 나무들이 군데군데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 어쩐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나는 찬찬히 발길을 내딛었다.


 낮은 돌담들을 따라 돌자 그 밑에 작게 피어난 작은 들꽃들의 살랑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연스레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린아이들의 떠들썩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던 관목을 벗어나자 나무로 둘러싸인 공간에 웬 키가 낮은 하얀 석조건물 하나가 있었다. 목소리의 아이들은 그곳에 건물을 끼고 둥그렇게 모여 서 있었다.


 "비키란 말야. 거긴 우리들 자리라고!"

 "어서 내려오지 못 해?!"


 어쩐 일인지 아이들은 몹시도 성이 나서 소리치고 있었다.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겨우 어른 키를 조금 넘을만한 높이의 건물 옥상위에 한 여자아이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아무리 악을 써도 여자아이는 들은 체도 없이 그저 앉아서 빈둥거릴 뿐이다. 무슨 일일까?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려고 하는데 결국 밑에 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참지 못 하고는 옥상위로 손을 걸치고 기어오르려 하는 것이 보였다.


 "어딜 올라와!"


 그 순간 앉아 있던 여자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올라오려던 아이의 앞에 다가간 여자아이는 그대로 솜씨 좋게 옥상을 잡아 오르려 하는 손을 쳐내어 밀어 버렸다. 어, 어 하는 얼빠진 소리가 몇 번인가 있고 나서 오르려던 아이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고 말았다. 심하잖아. 저건... 나도 모르게 절로 인상이 찌푸려져 온다. 친구가 당하자 아이들의 흥분도 더더욱 심해져 갔다. 말려야 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쉽사리 몸은 앞으로 나서지 질 않는다. 어디의 누군가가 다투고 있든 나는 그곳에 쉽게 다가가지 못 한다. 오로지 방관자의 입장에서 나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 누군가의 잘못도 밝혀진 게 없다는 자위 섞인 판단과 함께 그런 오랫동안 베어온 내 삶의 습관은 이번에도 나를 냉철하고 무의미한 제 3자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 때 아이들 사이에서 한 여자아이가 걸어 나와 옥상위의 아이 앞에 섰다. 옥상위의 아이는 그런 여자아이를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뭐야, 할 말이라도 있어?"


 어린 아이 특유의 청명함이 무색해질 정도로 고압적인 목소리다. 확실하게 상대방을 아래로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기분 나쁜 목소리. 하지만 어딘지 낯이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그리운 목소리다.


 "거긴 우리 마을 아이들의 아지트 같은 곳 이야. 누군가 혼자 독점 한 다는 건 옳지 않아."

 "그래서?"

 "너, 야마우치 가의 아이지?"


 앞에 나선 여자아이가 손을 뻗어 가리키는 곳을 무의식중에 돌아본 내 앞에는 낮은 산 중턱에 위치한 거대한 전통 가옥의 모습이 들어왔다. 야마우치가의 가옥. 란란의 친가... 그래... 나는 이곳에 내려왔었지. 그리고 나는 마당에서 뛰어노는 란란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리고... 그리고...


 "그래. 너가 아니라 야마우치가의...."


 그리고 어떻게 된 거지? 무엇이었을까? 머릿속이 온통 하얗고 뒤엉켜서 어떤 것도 뚜렷이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스즈란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다시 되살아났다. 할머님과 했던 대화들. 만화경. 그리고 그것을 들어 바라보았던 것 까지도. 나는 옥상위의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스즈란...? 그제서야 아이의 모습이 또렷이 눈에 들어와 박힌다.


 어린아이의 모습이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란란의 모습을 쏙 빼어 닮아 있는 아이. 아까부터 짓고 있는 저 못난 표정을 쪼르륵 달려가 풀어주고 싶은 어린 모습의 란란. 어째서 어린 시절의 란란이...?


 "스즈란? 그래. 내 이름은 카고메야. 어쨌든 너도 야마우치가의 사람이라면 마을 아이들을 못 살게 구는 건 그만 두는 게 좋아. 야마우치가는 대대로 이 마을에서 존경 받는 큰집이야. 부모님의 이름을 욕보이기 싫다면 이제 그만 심통 좀 부리지 그러니."

 "뭐, 뭐가 어째?"


 어린 란란의 이마에 작게 힘줄이 불끈 솟아오른다. 나는 란란의 앞에 선 여자 아이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단지 평범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말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그것이 아닌 듯 했다. 부모님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인지 란란의 반응은 무척이나 예민했다. 그런 반응을 일부러 노렸다라고 생각됐다. 상대의 미숙한 평정심을 무너뜨릴 계획이다.


 "네가 뭐라고 떠들든 난 여기서 비켜주지 않을 거야! 여긴 이제부터 내 자리로 쓰기로 정했어. 알았으면 꺼져버리라고!"

 "결코 비켜주지 않겠다는 소리네?"

 "그래!!"


 화가 치밀었는지 란란은 되는대로 악을 쓰고 있었다. 자신을 카고메라 소개한 여자아이는 그런 란란의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너 이 마을의 요괴가 봉인된 만화경이 모셔져 있다는 사당을 알고 있지? 거길 갖다 올 수 있겠어?"

 "뭐? 무슨 소리야?"

 "네가 만약 그곳에서 만화경을 가져 온다면 널 인정해서 이 장소를 너에게 양보할게. 네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들어주겠다는 소리야. 어때?"

 "그런 식으로 꼬드기면 내가 이곳을 비켜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지? 어림없어!"

 "그래? 역시 아무래도 겁이 나는 모양이구나. 하긴 그곳에는 요괴가 나온다며 마을 아이들은 누구도 가지 않는 곳이니까 야마우치가의 따님이라도 별 수는 없겠지."


 유치한 도발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미 감정적이 되어버린 란란은 카고메라는 아이를 무섭게 쏘아보더니 훌쩍 옥상에서 뛰어내려 왔다.


 "약속 지켜라?"

 "물론."


 카고메의 앞에서 한 번 으르렁 거린 란란은 그대로 아이들을 밀쳐내며 어딘가로 향해 버렸다. 어린 란란다운 치기어린 행동이다. 잠시 멍해있었지만 나는 곧 깨달았다. 내가 어느 장소에 있는 것 인지,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 인지. 란란이 갑작스레 변하게 되었던 날. 란란의 어린 시절. 그 공백의 시간대에 나는 찾아 온 것 이다. 틀림없다. 방금 전 그 사당의 이야기. 란란은 오늘 그 사당으로 간 후 무슨 일인가를 겪게 되고 밤 늦게야 어른들에게 발견된다.


 찾아야 해. 빨리... 나는 서둘러 란란의 뒤를 쫓으려 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란란의 그 공백의 시간에 대하여 나는 알고 싶었다. 어쩌면 뻔뻔하고 주제 넘는 이기적인 행위일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거기 잠깐만요. 언니."


 황급히 내딛던 내 발걸음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하나가 붙잡았다. 돌아보자 어느새 카고메라는 그 여자아이가 내 앞에 다가와 서 있었다. 칠흑처럼 검고 곧은 머리사이로 빨아들일 듯 한 깊은 눈이 자리 잡고 있다.


 "아까부터 줄곧 보고 있었죠?"

 "어...? 네."


 분명 나보다 어린 나이일 텐데도 나는 완전히 카고메의 기운에 눌려 있었다. 내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나를 찬찬히 훍어 보던 카고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이 마을 사람이 아니죠? 아니, 그보다... 어딘지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온 것 같은 느낌이에요."

 "네... 그런가요?"


 나는 흠칫 놀라 움츠러들었다. 뭘까 이 아이는...? 설마 내가 이 시공간대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걸 까?


 "아무튼 언니. 혹시 저 스즈란이라는 아이와 아는 사이에요?"

 "...아마도요."

 "그렇죠? 저 아이도 언니도 이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으니까 아마도 아는 사이일 거라 생각했어요. 게다가 아까부터 쭈욱 그 아이만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는 확신했구요."


 카고메는 방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볼수록 묘한 느낌의 아이이다. 영특하다기 보다는 이질감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부탁이지만 저 아이를 좀 따라가 잘 타일러 주세요. 이 장소는 마을 아이들이 줄곧 모여 놀던 아지트에요. 그런걸 괜히 심통을 부리고 싶어 독차지 하고 못된 짓을 벌이기에 골탕을 주려고 방금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고 언니가 따라가서 스즈란을 잘 설득해 보세요. 아마도 스즈란도 그 사당에 막상 가보면 겁이 나서 어쩌지 못 할 거예요. 거기 관리를 안 해서 생각보다 분위기가 정말 무섭거든요. 마을 아이들 사이에서는 요괴가 나온다고 발길도 안 내딛는 그런 장소고요."


 그렇게 말한 카고메는 어서 가보라며 나를 돌려 세우더니 내 등을 가볍게 툭 떠밀어냈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해 뒤돌아보자 카고메는 귀여운 표정으로 웃으며 서두르라는 듯 손짓을 해 보였다.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발개진 나는 황급히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며 란란이 사라진 방향으로 종종걸음을 내딛었다. 어느새 그 날쌘 몸놀림으로 사라졌는지 란란은 보이질 않는다. 뒤에서 마치 예상했다는 듯 카고메의 외침이 들려온다.


 "언니, 사당은 저쪽이에요~!"


 뒤돌아 카고메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살피자 마을의 외곽으로 높이 솟은 산 하나가 보였다. 아마도 사당은 그 산의 어딘가에 위치한 모양이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카고메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어쨌든 나는 란란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란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다. 그건 그러니까...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불안감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나와 과거의 란란이 만나버린다면 이후에 내가 실제로 존재하던 미래가 어떤 영향으로 변질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안 카고메. 그러니까 란란에게 다가갈 생각은 없어.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오늘 이후로 란란은 변할 테니까. 그리고... 못 된 일일지도 모를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꼭 그 이유를 엿보고 싶어. 그래야만 해. 그건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마을을 가로질러 산에 도착하는 길은 생각보다도 멀었다. 길을 한참이나 달려 나가 간신히 헤매인 끝에 산의 초입에 도착하자 이미 거의 모든 기력을 탈진한 몸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평소에 운동 좀 할 걸 같은 양심적인 후회도 없이 나는 귀찮게 흘러내리는 땀을 털어내고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푸른빛으로 피어오르고 있는 외진 산. 제대로 된 길도 나있지 않은 가파른 비탈을 바라보며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자꾸만 땅 속으로 푹푹 꺼져 들어가는 것 만 같은 발걸음이 무겁다.


 나에게 란란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어째서 나는 이렇게 필사적이 되어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것이 거짓말 같다. 이것은 거의 집착에 가깝다. 세계의 규칙을 깨어버릴 정도의 강렬한 소망으로 나는 란란에게 집중해 있었다. 아직까지도 이것이 무슨 감정인지 나는 알 수 가 없다. 덜컥 겁이 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이것이 정말 좋아한다는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일까? 나의 삶은, 나의 감정은 어딘가 지독히도 삐뚤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질척이는 땀내음과 어디선가 자꾸만 날아와 달라붙는 조그만 날벌레들이 나를 더 몰아붙여 갈 때 갑자기 등 뒤 저 멀리로부터 귀청을 찢을 것 같은 귀성이 울려 왔다. 돌아보자 저 너머의 마을을 낀 맞은편 산 중턱으로부터 붉게 피어오르는 기묘한 빛의 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기대 의지하고 있던 나무로 부터 서서히 몸을 떼 내어 그곳을 못 박힌 듯 응시하였다. 스멀거리며 농밀한 불안감이 온 몸을 죄어들어 온다. 저건 설마 만화경의 요괴? 하지만 분명 사당은 이 산에 있다고...


 "란란..."


 나는 품 안에서 시리게 빛나고 있는 열쇠를 꺼내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 일까. 마비된 이성 속에서도 열쇠를 쥔 손은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시공간을 뛰어넘은 이 곳에서 나는 내 소원을 이 세계에 구현시키려 하고 있었다.


 "약속의 문!!"


 열쇠를 꽂아 돌린 허공중에서는 즉각적으로 시리게 빛나는 푸른 문이 나타나 내 앞에 열렸다. 어느새 푸른빛의 복장으로 바뀐 나는 저 앞에서 아직까지도 계속해 피어오르고 있는 빛의 무리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내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무계획적이고 이성적이지 못 하다. 도대체 내가 왜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 인지, 어째서 갑자기 이리도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정확치가 않다. 하지만 지금 저 곳에서 란란이 위험에 쳐해있다라는 것은 안다. 바보 같지만 그게 너무도 절실히 전해져 온다.


 그리고 그 위험 앞에는 항상 나의 창이 자리하고 있을 것 이다.


 "그러기 위해 빌었던 소원이니까..."


 주먹을 움켜쥐며 창 위로 뛰어 올랐다. 창은 단숨에 내 의지를 따라 붉은 빛의 기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자 빛의 기둥 중심에서 다 무너져 가는 작은 사당의 모습이 보였다. 저곳이 바로 그 만화경이 있다는 사당일 것 이다. 창에서 뛰어 내리자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게 만화경을 꼭 쥔 채로 쓰러져 있는 란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 선 한 소녀가 있었다. 내 모습을 발견한 카고메의 미간이 곱게 찌푸려진다.


 "설마, 벌써...? 뭐죠 그 창과 복장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져서 일부러 멀리 떨어놓으려고 했것만. 언니 정체가 뭐에요?"

 "그러는 너야 말로 도대체 뭐야...?"


 붉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카고메의 눈은 노랗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오싹한 기분이 자꾸만 든다. 나를 유심히 살피던 카고메는 한 손을 들어내게 내밀어 보였다. 곧이어 강력하게 응축된 붉은 기운 덩어리가 그 손에 급격히 모여들었다. 너무도 눈 깜짝할 사이, 하지만 나의 창은 이미 카고메를 향하고 있었다.


 "가!!"


 선수필승, 일격필살. 방어형에 육탄전이 특기인 란란과 다르게 나에게는 거의 어떠한 방어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나의 능력은 단 일격으로 적을 꿰뚫을 수 있는 절대적인 공격뿐. 적에게 공격을 허용하지 않는다. 싸움이라는 것이 성립되기도 이전에 소멸시켜 버린다. 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정말로 저 카고메란 아이의 정체는 무엇인지. 나의 창은 마수를 멸하는 창. 이건 정말로 괜찮은 걸까...?


 한 줄기 빛처럼 쏘아져 가던 나의 창이 카고메가 뒤늦게 쏘아낸 붉은 기운에 맥없이 막혀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창을 집어삼키며 날아오는 강대한 기운의 파도에 나는 급히 몸을 굴렸다. 소름이 끼치는 기괴한 기운이 바로 얼마 간격을 두고 내 옆을 지나친다. 몇 번인가 땅을 구르다 일어나자 얼굴 가득 비웃음을 담고 카고메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대단할 건 없는 모양이군요. 그냥 하던 일에 집중 하는 편이 좋겠어요."


 나에게서 보란 듯이 등을 돌린 카고메는 쓰러진 란란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귀기한 울림이 이어지며 붉게 빛나는 무수한 가는 선들이 란란의 몸과 카고메의 손을 이으며 흐르기 시작하였다. 란란의 몸이 괴로운 듯 부들거리며 떨고 있다.


 "뭐 하려는 거야?"

 "글쎄요. 뭐랄까... 일종의 환생의식?"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카고메의 앞에서 나는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침착해져야만 돼. 하루카. 괴로워하는 란란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어내며 카고메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모든 것이 너무도 혼란스럽다. 저 아이는 무엇인지. 지금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그런 것을 모르고서야 함부로 어떠한 행동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미래에서 온 불청객일 뿐이다. 내가 란란의 과거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최소한의 의의가 필요하다. 겁쟁이. 바보. 저런 란란을 앞에 두고도 나는 어떠한 것도 못 하다니.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쨌든 나는 란란의 과거에 왔다. 그건 분명 어떠한 뜻이 있어서일 거다. 그렇다면 하나하나 차근히 따져가 보자. 일단은 이 상황에 대한 것부터 생각을 시작해보는 것이 좋겠다. 복잡한 머릿속을 흔들어 깨웠다.


 "그 만화경 말이야. 그 이야기는 사실인가?"


 내 질문에 카고메는 눈을 깜박이며 란란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응? 무슨 이야기요? 아, 그 요괴가 봉인되었다던 이야기 말인가요? 그거라면 뭐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리다고 할 수 있지요. 요괴가 실제로 이 마을에 존재했다는 건 사실. 하지만 봉인되었다는 건 훗날 사람들이 그저 지아낸 이야기일 뿐이에요."

 "뭐? 그럼 요괴가 봉인되지 않았단 말이야?"

 "그럼요. 바로 여기 이렇게 언니 앞에 버젓이 서 있잖아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카고메의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시선이 날 꼼짝없이 붙들어 매어 날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요괴..? 그 만화경의 요괴라는 것이 이 카고메란 말이야??


 "무슨 소리 하는 거지?"

 "말 그대로에요. 내가 바로 이 만화경의 요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아이의 몸을 빌어 현신해 있는 요괴라고 하면 되겠군요. 무수히 지나간 오랜 시간 동안 내 이야기는 여러 번이나 바뀌었어요. 아마 지금은 이 아이가 동생을 찾으러 갔다가 스님을 만나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죠?"

 "이 아이...? 설마.. 그 몸?"

 "그래요. 이 아이가 바로 그 이야기의 여자아이에요. 동생을 찾으러 갔다는 그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의 주인공. 크크큭"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깔깔대며 웃고 있는 카고메의 모습이 묘하게 일그러져 보인다. 할머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족히 백년은 되어 보이는 옛날 이야기였다. 그런 허구속의 이야기 같은 주인공이 내 눈앞에 있다. 그것도 이야기 속 만화경의 요괴를 속에 품고... 이건 무언가 잘못 되었다. 요괴의 말대로 이야기는 변질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비현실적인 여자아이가 한 마을에 이토록 오랫동안 살고 있음에도 아무런 의심도 없는 이 마을도 어딘가 이상하다. 갑자기 마음이 더 다급해진다.


 "그 이야기. 원래의 내용은 무엇이었던 거지?"

 "글쎄요. 언니가 알고 있는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이렇죠. 시작은 어디서부터 하는 게 좋을까요. 음... 그래요. 나는 이 마을에 오래전부터 뿌리내리고 있던 요괴였어요. 사람들의 온갖 정념이 모여 만들어진 요괴. 허나 불행히도 난 한 물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죠."


 카고메는 란란의 손에 꼭 붙들려진 만화경을 가리켰다.


 "바로 이 만화경. 사람들은 한 세기가 넘도록 이 만화경 안의 수만 가지 황홀경을 보며 자신들의 탐욕과 욕정, 분노, 공포, 기쁨, 증오심 등을 마음껏 꿈꿨어요. 감춰져 있던 그 감정들은 마구 소용돌이치며 오랜 세월을 거쳐 이 만화경 안에 차곡차곡 쌓여만 갔죠.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저에요. 사람들의 가장 본질적인 밑바닥의 추악함과 본능이 만들어낸 요괴. 저는 사람들이 꿈꾸는 그 어떤 허상도 보여줄 수 있었지만 실은 그저 그 뿐 이었어요. 누군가 내 안을 들여다 볼 때에만, 그 잠깐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이 저주받을 만화경 밖으로 나갈 수 가 없었지요.


 카고메의 얼굴은 몹시도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그 때의 그 분노와 절망감이 다시금 온 몸을 감싸고돌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카고메는 쓰러져 있던 란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아 그 얼굴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카고메의 눈은 어느새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차 번뜩였다.


 "그러던 제게도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어요. 이 지독한 감옥에서 고통 받던 저는 우연찮게도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악으로 가득찬 어린아이가 저를 발견하고 제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아이의 눈에 저의 허상을 보여주는 것 뿐만 아니라 제 모든 것들이 그 아이에게 전이되어 완전히 그 아이와 내가 하나가 되어 감을 느꼈어요. 그 영원 같기도 하고 찰나 같기도 한 시간의 끝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만화경을 손에 꼭 쥔 채로 얼떨떨하게 그 아이가 서 있던 아버지의 방에 서 있었죠. 빌어먹을 감옥에서 드디어 해방된 거예요. 나와 그 아이가 하나가 됨으로써!"


 뭐야 그게.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 같았다. 순수한 악? 아이와 하나가 된다? 도대체 이곳에서 과거에 란란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 일까? 카고메의 이야기를 빌자면, 결국 지금 카고메, 아니 만화경의 요괴는 어린 란란의 악한 마음과 몸을 통해 지금 다시 자유를 얻으려 하고 있는 것 이다. 그렇다면 뭐야? 미래의 내가 알던 란란은? 그건 어떻게 된 것이지? 할머님의 말대로라면 오늘 란란은 분명 변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설마 그것이 이 요괴와 결합하여? 거짓말.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정반대의 결과이다.


 "그 현신이라는 거, 아이가 바라지 않는데도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어 버리는 거야? 단순히 어린 아이의 그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여?"

 "그럴 리가요. 나는 원하는 바를 보여줘요. 언니. 이 몸의 아이 이전에도 나는 아홉 번의 현신을 거쳤어요. 이 아이를 포함하여 그 열 번의 거래 모두 아이들과 나는 서로의 원하는 바를 충실히 이행했죠. 바라지 않았다면 하나가 될 수도 없어요.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래. 그렇겠지. 예상했던 바이자만 어쩔 수 없이 속으로 작게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어린 란란은 분명 자신의 의지로 만화경의 요괴와 계약했다. 의식을 잃었음에도 저 작은 손에 꼭 쥐어진 만화경의 모습만 봐도 짐작이 간다. 거짓말! 뭔가 바보 같게도 배신당한 기분이 든다.


 "이야기의 원래 내용을 물으셨죠. 그래요. 원래는 이 아이가 내게 힘을 얻고자 찾아오는 내용이었어요. 아이들은 때때로 어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순수하게 탐욕스러워 지거나 잔혹해 질 수 있어요. 나는 지금껏 열 번의 거래동안 아이들이 바라는 대로 온갖 무소불위의 힘의 허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조금은 그들의 바람과 달랐었겠지만 그 꿈은 달콤했겠죠. 그리고 이제 이 아이가 열 한 번째에요. 뒤틀리고 어긋난 심성의 소유자. 이 아이로 인해 나는 다시 한 번 자유를 찾아 이 마을을 지배할 것 입니다. 나는 현신을 거듭할 때마다 조금씩 더 강력해지고 있어요. 이제 곧 나는 아이들의 도움 없이도 이 세상에 스스로의 힘으로 깨치고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 아이가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드디어... 드디어 내게도 자유가!!"


 광기에 휩싸인 채 카고메는 웃음을 터트렸다. 공기를 진동시키는 웃음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려퍼져왔다. 나는 창을 움켜쥐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진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일까. 나의 소원을 란란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저기 쓰러져 있는 저 아이는 정말로 란란인가? 내가 지키려 한 란란은, 내가 홀로 외로이 부유하고 있을 때 손을 내밀어 줬던 그 밝고 순수한 아이는 어디 있는 것 이지? 도대체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대로 과거의 사건이 진행되도록 방치해두어야만 란란은 내가 알던 그 모습으로 변화되어 주는 걸까? 아니면 이미 내가 이 과거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 버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다. 이 힘들고 괴로운 것으로 부터 제발 달아나 버리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이 단순히 꿈이기를. 아주 지독한 악몽 같은...


 깊은 상념의 한 켠에서 갑자기 끊어지는 듯 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자 이미 붉은 기운에 폭발할 듯 감싸여 있는 카고메의 앞으로 쓰러져 있던 란란이 부유하여 들어 올려진 채 카고메의 허상에 합쳐져 가고 있었다. 란란은 고통스러운 듯 입을 크게 벌린 채로 비명 지르고 있다. 그 입에서 무수한 붉은 선들이 쏟아져 나와 카고메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뭐랄까, 란란의 영혼과 몸이 모두 카고메에게 집어삼켜져 먹히고 있는 것만 같다. 저 비명소리가 단순히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절규의 목소리인지 란란이 스스로 터트리고 있는 비명인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무언가 가장 소중한, 잃고 싶지 않은 것이 꿈틀댔다.


 창은 찰나의 시간을 지나 카고메에게 꽂아졌다. 의식에 집중하던 카고메는 그 맹렬한 기세의 공격에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카고메의 주변에 무수히 피어오르던 붉은 빛들을 검게 비틀고 헤집으며 뚫고 들어간 소멸의 창은 카고메의 옆구리를 강타하며 그대로 숲에 처박혔다. 먹혔다. 공격이. 마수가 아닌 요괴에게도 소멸의 창은 꽂아졌다. 본래 요괴란 여러 사람의 공통된 원념이 쌓여 만들어진 것. 그렇다면 그런 불특정 다수가 믿고 있는 비현실이란 어찌 보면 큰 의미로 마수에 가까운 개념일지도 모른다. 비록 마수처럼 단번에 소멸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격할 수 있다면 싸워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저 아이도 란란이다. 비록 내가 알던 란란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외면해 버릴 수 는 없다. 나는 란란에게서 만큼은 도망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래. 도망치면 안 돼. 그릇된 선택을 했다면 이런 나라도 어떻게든 다시 끌어오고야 말겠어. 나는 겁쟁이라 쉽게 나서지 못 하지만, 마음먹은 것 만큼은 어떤 시선도 아랑곳없이 해버리고야 마는 아이이니까. 그런 바보 같은 성격이니 지금껏 혼자서 외로이, 그리고 세상의 파멸까지 묵인한 채 란란을 지키기로 했다. 과거가 어찌되건 이제 그건 중요치 않다.


 "무무슨슨짓짓이이에에요요? 언언니니."


 기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쓰러진 나무들을 날려버리며 일어선 카고메는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등으로 부터 꿈틀거리며 여덟 개의 팔이 돋아 나온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근육과 기형적인 뼈대들의 끔찍한 괴음들 후에 카고메의 몸속에서 만화경의 요괴는 노오란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입을 열 때마다 드러나는 시뻘건 혓바닥과 날카로운 이빨들 사이로 거친 입김이 새어 나온다. 요괴는 기분 좋게 포효했다.


 "이이 몸몸으으로로 현현신신한한 건건 실실로로 오오랜랜만만이이구구나나!! 그그래래. 소소녀녀여여. 너너는는 나나의의 의의식식을을 방방해해할할 생생각각이이냐냐?"


 "아마도. 할 수 있다면."

 "그그렇렇다다면면 내내겐겐 죽죽음음뿐뿐이이다다!!"


 요괴의 입 안에서 급격히 붉은 기운이 몰려 들어갔다. 단숨에 팽팽해진 공기가 나를 잡아당긴다. 이윽고 터져 나온 기운은 삽시간에 숲을 분쇄하며 내게 쇄도해 들어왔다. 나는 그 기의 파동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소멸의 창!!"


 내 부름을 받아 돌아온 창이 내 앞에서 강렬히 울부짖는다. 회피나 방어 따위는 서툴다. 이런 강력한 공격들이라면 애초에 어설프게 막을 바에야 공격해서 뚫어 버릴 뿐이다. 쏘아져 나간 내 창과 만화경 요괴의 붉은 기운이 맞닿자 어마어마한 폭음과 화염이 터져 나왔다. 그 기세만으로도 온 몸이 부수어져 내리는 것 만 같다. 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폭염을 뚫고 공격은 이어져 온다. 수만 가지의 갈래로 덮쳐오는 붉은 줄기들을 바라보며 지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창을 휘둘렀다. 주변을 물들이며 계속해 피어나는 폭염들. 무수한 폭음과 연기 속에서 나는 창을 거머쥐고는 솟구쳐 올랐다.


 저만치 연기 속에서 거대한 요괴의 몸뚱이가 꿈틀거리고 있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수가 아닌 요괴를 상대로 해서인지 창은 본래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 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원거리 타입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공격을 주고받는 계속된 공격이 이어진다면 승산이 없다. 게다가 장기전으로 들어가면 불리한 건 불 보듯 뻔히 내 쪽이었다. 애초에 그럴 지구력을 갖춘 전투형태가 아니다. 그렇다면 뚫으려면 이 방법뿐. 단숨에 저 요괴의 코앞까지 다가가서 그 제로 포인트 거리에서 온 일격을 다해 공격을 성공시킨다면 어쩌면 먹혀들지도 모른다.


 내가 연기 속에 더 이상 머물고 있지 않다는 걸 눈치 챘는지 공중에 있던 나를 발견한 요괴가 등에서 돋아난 여덟 개의 팔에서 무수한 광선을 하늘로 쏘아내었다. 이를 악물고는 더 망설일 것도 없이 나는 그 아찔한 빛다발의 한 가운데로 창을 내민 채 뛰어 들었다. 나의 의지에 따라 창은 거대한 돌격 창으로 변해 강렬한 푸른빛을 창신 가득 담아내었다. 울리는 소리만으로도 단박에 모든 것을 얼어 붙일 것 같은 그 매서운 냉기가 질주하며 다가오는 모든 기운들을 하얗게 물들여 산산이 부수어 버린다. 만화경의 요괴는 분노한 듯 소리쳤다.


 "소소용용없없다다!!"

 "...시끄러."


 전광석화! 거칠 것 없이 돌격하던 창은 정확히 요괴의 가슴을 꿰뚫기 전, 요괴가 뿜어낸 강력한 힘의 파동에 가로막아졌다. 요괴가 펼쳐내는 기운을 꿰뚫으며 어거지로 창을 밀어 넣으려 하자 강렬한 스파크가 번뜩이며 내 몸을 기어오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요괴가 펼쳐내는 기운에 막힌 채 창을 중심으로 거대한 얼음과 서리가 퍼져 나간다. 온 몸에 핏줄이 곤두서고 몸이 타오르는 것 만 같다. 제발, 제발 닿아라. 소멸의 창. 나는 지금 네 힘이 필요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지금 이렇게 간절히 원하고 있어. 나는 란란을 지켜야만 해. 도망치지 않을게. 도와줘!


 온 시야를 가득 채우는 푸른 빛.


 순간 온 몸이 떠오르듯 평온해지는 기분이다. 내려다보자 시리고 푸른 기운이 밝게 빛나며 내 몸 가득 뿜어져 나온다. 이 느낌. 마치 란란이 예전 나를 지키기 위해 각성하였을 그 때와 같다. 마치 방금 전까지의 그 필사적이었던 소음과 풍경이 거짓이었다는 듯이 고요한 공백의 시공간 속에서 나는 요괴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소멸의 창. 나는 주저 없이 요괴의 가슴팍으로 창을 밀어 넣었다.


 "크크아아아아와와아아!!!! 이이게게무무슨슨!!!!"


 온통 푸르던 공간이 사라지며 바라보자 창에 관통당한 요괴의 몸으로 부터 엄청난 빛무리가 뿜어져 나오며 폭발하고 있었다. 굉음과 아찔한 섬광의 열기가 눈앞에서 터져 나온다. 끔찍한 절규의 끝에서 모든 것이 걷히자 그 속에 쓰러져 있는 카고메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이글거리는 노오란 눈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는 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싸우기 힘든 상태였다. 등 뒤로부터 너덜거리거리고 있는 검은 팔들의 단면으로부터 그녀가 울부짖자 꿈틀대며 기분 나쁜 액체가 흩뿌려진다.


 "크아아아!! 네 년... 도대체 정체가 뭐냐!!"

 "내가 이겼어. 이제 그만 란란을 놓아줘. 그럼 나도 더 이상 내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을 거야."


 내 말에 카고메는 잠시나마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카고메는 웃기 시작하였다. 끅끅 거리는 소리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만 같다.


 "지금 그러니까 나를 봐주겠다는 거야? 네가? 아하하하하. 시건방진 소리 그만해!"

 "정말이야. 란란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난 이대로 돌아가겠어. 그 이후에 네가 어떤 짓을 하든, 다른 또 다른 아이와 계약을 하든 말든 그건 상관 안 할 거야."

 "뭐?"

 "너는 너만의 삶의 이유와 방식이 있겠지. 그런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어. 다만 그것이 내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일이라면 그건 지켜내고야 말거야."


 나를 바라보는 카고메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낯설고 기괴한 것을 마주하게 된 듯 한 불쾌함과 비슷한 그런 모종의 느낌이 그 눈빛에 비친다. 나는 요괴에게 조차도 이상한 존재로 보이는 것 일까? 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다. 이 세계의 것들은 모두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그 세계의 주인 각각이 보고 느끼는 세상은 그것 자체로 완전한 것 이다. 그것을 다른 세계의 주인이 비난할 자격은 없다. 다만 그것이 그만의 세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 침범해 들어온다면 그때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숨겨둔 발톱을 드러내 보이면 된다. 그러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요괴의 삶이라도 충분히 존재할 가치가 있다. 나와 마주보고 있던 카고메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딘지 지독히도 꼬여버린 녀석이로구나. 어쩌면 너와 계약하는 것이 좋았을지도 몰랐겠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와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떨어질 수 가 없으니까."

 "어째서!"


 내가 창을 들어 올리자 카고메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녀는 너덜거리는 팔을 들어 올려 저만치 쓰러져 있던 란란을 가리켰다.


 "나와 그녀의 계약은 서로가 영혼을 걸고 한 계약이다. 이건 나만의 계약이 아니야. 이 계약의 한 쪽은 그녀와 연결되어 있고, 그녀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계약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설사 내가 지금 여기서 계약을 끊더라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야."


 거짓말... 나는 어린 란란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한 손에 꼭 쥐고 있는 만화경이 보인다. 그래. 이 계약은 만화경이 보여준 허상에 대해 란란 스스로가 결정한 자신의 미래. 정말 바보. 어째서.. 어째서 너는 이렇게 어리석은 계약을 내 앞에서 미래에서도 과거에서도 계속해 하고만 마는 거지? 네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 결정에 절대 뭐라 하지 않았을 거야. 아주 조금의 관심마저도 갖지 않았을 거라고. 그건 그냥 그 사람의 결정이었다고 나는 수긍해 버리고 말 그런 스쳐가는 일이야. 하지만 너의 결정이라면 내가 그럴 수 없잖아. 어째서 하필 네가...


 ".......돌이킬 방법은 정말 없는 거야?"

 "글쎄, 그녀는 내가 그녀와 합쳐지게 되었을 때 얻게 될 강력한 힘에 대해 그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주는 것을 동의했어. 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음도 꽤나 비틀려 있는 상태였지. 이 마을 사람 전부, 특히나 그녀 부모를 마음껏 다룰 수 있다는 부분에 그녀는 꽤나 관심을 보였던 것 같아. 아마 어린 마음에 부모의 부재는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꽤나 큰 상처로 자리 잡고 있었겠지. 어쨌든 그런 것을 떠나서 이미 그녀는 순수한 어린 악이야.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녀의 소원도 바뀔 리는 없겠지."


 너무도 태연한 목소리다. 잠시간 숨을 고르던 카고메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더니 천천히 란란에게로 다가갔다. 뭐 하는 거야? 나는 황급히 창을 들어 올려 그 앞을 막아 세우고 소리쳤다.


 "멈춰! 어쩌려는 거지? 내가 란란을 돌려달라고 얘기했잖아! 너를 소멸시켜서라도 란란을 되찾겠어."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야. 그녀가 나를 원하고 있다니까?"


 이죽이 웃으며 내 창끝을 미는 카고메의 손끝에 힘없이 창이 비켜 세워진다. 나를 지나쳐 란란의 곁에 무릎을 꿇은 카고메는 란란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제 시간이 다 됐어."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짓던 카고메의 몸이 서서히 붉게 방울져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 눈부신 빛의 물결은 허공을 퍼져나가다가 유려한 선들을 이으며 란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혼과 영혼이, 세계와 세계가 합쳐져 간다. 그 광경을 그저 나는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영원 같고 나락과 같은 시간이 끈덕지게 이어진다. 바람을 일렁이며 풀 숲 위로 빛을 발하며 떠올라 있는 란란의 작은 체구를 바라보며 한 없이 머릿속이 뒤엉켜 간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내가 무엇을 하던 애초에 이미 이 과거의 결말은 결정되어 있었다. 나는 결국 란란을 구해내지도 변화시키지도 못 했다. 그저 철저하게 무의미한 짓을 벌이고 있었을 뿐. 그럼 난 이곳에 왜 오게 된 것 일까? 나는 이 곳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닫게 되는 거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존재하던 미래는 진짜다. 그곳에서 언제나 내게 손 내밀어 주던 란란은 진짜야. 하지만 어째서...? 그럼 이제 란란은... 더 이상 란란은 없게 되는 거야? 결국 또 나의 잘못인가? 내가... 내가 모든 것을 망쳐 버린 게 분명하다. 내가, 란란을 사라지게 만든 거야.


 란란은 서서히 땅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휘날리는 긴 흑발의 머릿결 사이로 란란의 눈동자가 떠진다. 붉게 빛나는 작고 여린 입술이 벌어지며 달싹였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완전히 공포감에 사로잡힌 내 망막에 느릿느릿하게 파고들어 온다. 귓가로 마치 수만 명의 사람이 동시에 묻는 듯 한 기괴한 울림이 밀려온다.


 "너는... 누구지?"


 란란의 눈동자는 노랗게 빛나며 이글거리고 있었다.



 ***



 "시마자키. 뭘 보고 있어?"


 학기 초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언제나 매 년 그래왔듯이 홀로 떨어져 앉은 구석진 창가 자리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들이며 묻는 질문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작은 키에 밝게 빛나는 또렷한 두 눈이 내 앞에 있다.


 "아니, 그냥..."


 반사적으로 지어지는 겸연쩍은 웃음을 흐리게 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보통은 그걸로 끝이었다. 내 태도를 본 아이들은 다시는 더 나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혼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가벼운 인사라던가 일상의 대화 외에는 그냥 평온하게 나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면 되었다. 지금껏 그래왔고 그것에 만족했다. 이번에도 그런 것 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아이가 내 곁에 앉아 계속해 말을 건넨다. 자꾸만 나를 보며 웃어준다. 그 때 그 당시는 채 이름조차 알지 못 했던 '야마우치 스즈란'이란 그 아이는 이후로도 끊임없이 나의 세계에 침범해 들어왔다. 그것은 일종의 집착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와 고도 어울리지 않는 내게 그녀는 그녀 주변의 누구보다도 관심을 갖고 나를 대하여 주었다. 몇 번이고 밀어내기 위해 벽을 쳐 봤지만 계속해 깨어 버린다. 그것이 그저 동정이었는지, 나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비이상적인 나날들이 지난 후에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았을 땐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는 내가 존재했다.


 이제는 란란보다도 내가 란란에게 집착하는 마음 쪽이 더 크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면 그만일 뿐이었던 지금까지의 수많은 사람들과 동일시하기에는 란란에게 나는 너무도 빠져 있었다. 란란을 잃는다면 나 또한 망가져 버릴 것만 같다. 이미 한 번 나의 집 밖으로 나와 버린 이상 돌아갈 수 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까....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내 안의 무언가가 끊어져 내렸다.


 "흐아아아압!!!"


 나는 미쳐 있었다. 제대로 된 이성의 끈은 이미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그냥 다 부수어 버리고만 싶었다. 눈앞의 현실을 어서 빨리 외면해 버리고 싶다. 저런 란란의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내 의지를 담은 창이 기형적으로 휘며 모양을 갖추었다. 좋다. 지금의 내 마음과 너무도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소멸의 창. 부수자. 다 부수어 버리자. 내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라는 세계를 남김없이 산산이 부수어 버리자.


 눈부신 번뜩임과 함께 스파크가 튀며 휘두른 창이 란란의 머리위에서 붉은 기운에 막혀 으르렁 거렸다. 나는 재빨리 창을 크게 회수하며 그 반동으로 다시 있는 힘껏 창을 휘둘러 대었다. 다시 한 번 귀청을 짓이기는 소리. 그러나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는 란란의 모습에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다. 몇 번이나 더 찌르고 베어도 란란이 펼쳐내는 기의 방어막을 뚫릴 기미가 없어 보였다. 열 한 번째의 현신인 란란은 강력하다.


 "제발 그만 좀 사라져 줘! 없어지란 말이야!"


 악을 쓰며 창을 들고 뛰어 올랐다. 다시 한 번 돌격해 볼 생각이다. 아까 전은 우연찮게도 각성이 찾아와서 순간적으로 어떻게든 되었다지만 그런 행운이 이번에도 또 찾아와 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한다. 여기서 무엇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란란은 없을 것 만 같았다. 내게 밝게 웃어줄 아이의 미소가 사라져 버린다. 그것만은 안 돼. 과거의 너에게서 나의 란란을 돌려받고야 말겠어.


 창이 요동치며 검푸른 빛을 뿜어낸다. 내가 바라면 바랄수록 그에 상응하여 소원의 힘도 강력해진다. 나의 계약된 소원은 존재하는 모든 마수의 소멸. 하지만 그 근원의 끝에는 란란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란란을 돌려받고 싶다라는, 내가 알고 있던 란란의 미래를 지키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만은 진심이었다. 이것이 어긋나고 비틀어진 행동이라 해도 나는 멈출 수 가 없다.


 나의 기세에 반응하듯 란란의 등 뒤에서 밝은 빛에 감싸인 투명하고 거대한 손들이 뻗어 나와 나에게로 맹렬히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창에 의지하여 그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격렬하게 치고 찢이기고 갈라내며 란란에게로 날아들어 간다. 벌어진 손들의 틈새들 속에서 반짝이는 수 만 가지의 공허와 공포의 절규소리가 피어오르며 내 주위를 감싸 돌다 흩어져 멀어지기를 반복하였다. 그 눈도 뜨기 힘든 맹렬한 금빛의 틈새 사이로 서서히 란란의 모습이 들어온다.


 있는 힘껏 마지막으로 사력을 다해 단숨에 앞을 가로막던 손들을 꿰뚫어 버렸다. 끔찍한 파육음들과 함께 터져나가는 기운들 사이로 무미건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란란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창을 들이 밀었다. 이제 곧 그 얼굴을 부수어 주마.


 순간 눈앞이 밝아지며 뭐에라도 맞은 것 처럼 귀가 먹먹해지며 소리가 삼켜져 버렸다. 한순간의 정적 속에 곧 머릿속을 짓누르며 이명이 울려 퍼진다. 얼마간의 시간일까. 사실은 수초도 되지 않았을 그 시간 속에서 찌푸린 두 눈에 조금씩 상이 잡혀왔다. 내가 내지른 창은 어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밝은 빛 덩어리에 막혀 있었다. 란란의 모습을 한 요괴가 그 빛덩어리를 손에 쥔 채 서있다. 귓가를 타고 뜨거운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려 가는 것이 느껴진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빛과 소리를 집어 삼킬 것 만 같은 어처구니없는 빛 덩어리다.


 한순간 빛 덩어리의 중심부가 작게 꿈틀대었다. 설마! 온 몸의 근육이 경직되며 곤두선다. 응축되던 그것이 단숨에 내 창을 밀어내며 쏘아져 나왔다. 이를 악물었다. 버텨야만 한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안쓰러울 만치 연약해 보이는 창이 격렬하게 빛에 맞서며 서서히 녹아내린다. 이대로.. 이대로 끝내버릴 수는 없어. 도대체 이게 뭐야. 이런 과거를 내게 보여주고 있는 이유가 뭐냐고!!


 아슬아슬하게 버텨내던 창은 기운이 사그라듬과 동시에 단숨에 소멸하여 버렸다. 눈 앞 가득 빛이 쏟아져 온다. 시야를 압박하는 그 빛의 파도 앞에서 나는 눈을 감아 내렸다. 닫힌 눈꺼풀로도 채 막아내지 못 하는 이 밝은 빛이 원망스럽다.



 ***



 눈을 떴다. 어느새 석양이 지기 시작한 숲의 풍경사이로 내 앞에 선 란란의 모습이 보인다. 나를 내려다보는 란란의 금빛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뭐야. 이런 악몽이라면 그냥 깨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일어서 보려 했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몸이 전부 사라져 버린 기분이다. 최소한 아픔이라도 느껴진다면 이보다는 덜 공포스러울 것 같다.


 "이 아이의 영혼도 이제는 내게 거의 흡수 되었다."


 내게 말을 건네 오는 란란의 목소리는 어린 란란 본연의 목소리로 돌아가 있었다. 란란. 아니 이제는 거의 만화경의 요괴라고 봐도 무방한 어린 란란이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어쨌든 나는 너의 정체가 몹시도 궁금하다. 너는 결국 무엇 이었지?"

 "글쎄, 그나저나 그럼 이제 란란의 영혼은 없는 거야?"


 목 안 가득 거칠고 탁한 기운에 말을 이어놓고는 한참을 콜록대고 나자 온 몸이 기운이 빠져버려서 나도 모르게 사르르 눈꺼풀이 무거워 진다.


 "아니다. 나는 수만 가지 허상과 인간의 얼룩진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 내 안에 있는 이 아이의 영혼 또한 나의 일부이다. 이제 이 아이는 영원히 내 안에서 살아갈 것 이다. 단지 그녀의 영혼의 내게 받아들여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뿐. 허나 다행이도 이번에는 서로가 동화되는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는 구나. 이것도 다 나의 힘이 그만큼 강대해졌음을 알리는 반증이겠지. 계약대로 그녀의 잔류사념은 계속 남아 하나가 되더라도 앞으로 계속 내가 새로운 계약을 하기 전 까지는 내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물론 그것의 주체 자체가 그녀는 못 되겠지만 말이야."


 미소 짓는 요괴의 얼굴을 보며 모든 것이 허탈해진다. 바보 란란. 결국 란란을 지켜내지 못 했다. 빌어먹을 손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귀를 틀어막고 싶다. 그리고 네가 있던 그곳으로 어서 나를 돌려달라고 아우성 치고 싶었다.


 "아무튼 너란 존재는 특이하구나. 이 아이가 내게 녹아들며 전해진 그 어떠한 기억에도 너라는 아이는 없었다. 그런데 너의 그 행동. 너의 그 힘. 그것들은 도대체 뭐지? 너는 이 아이를 구하려고 왜 그리 발버둥 쳤나?"

 "나도 모르겠어."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요괴의 질문에 그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정말로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내 소망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약속의 문과 했던 계약의 진심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그 모든 것들 전부. 나라는 아이의 본질에 대해 나조차 가늠할 수가 없어. 나는, 시마자키 하루카라고 불리우는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지?


 "좋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무튼 그 힘만은 탐나는 구나. 이 열 한 번째의 아이를 흡수하고도 아직까지 나는 내 스스로 현신할 힘이 부족하다. 하지만 네 그 힘을 흡수한다면 단숨에 이 만화경안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몰라. 그 힘 내가 가져가 주마. 너만큼이나 비틀린 인간이라면 나의 계약자로도 적격이지. 자 이제 나를 봐."


 요괴를 몸에 품은 란란의 손이 내 얼굴을 잡아당겨 자신의 얼굴에 마주한다. 눈 안 가득 자리한 란란의 모습. 황금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일렁이며 나를 쏘아본다.


 "말해라. 너의 소원은 무엇인가?"


 요괴는 내게 소원을 물었다. 문득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그런가? 또 누군가 내게 소원을 묻는군. 그렇게도 다들 내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가? 그래... 나의 소원이라. 나는 지금껏 줄곧 혼자 있기를 바라오며 살아왔다. 나만의 세계에 제발 그냥 좀 나를 내버려 두기를 바라왔다. 그 평온함과 고즈넉함이 좋았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모든 것이 한 아이 때문에 전부 어지럽히고 부수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그 틈으로 자꾸만 다른 것들이 내게 이 세계와의 접촉을 강요한다. 그 아이와 만나고 부터 세상이 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고정되어 있던 내 세계는 이제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던 내 안에 이제는 기쁨도 행복도 괴로움과 아픔 따위가 움트고 있다. 이제 됐어. 그만해. 나도 이젠 지쳤어. 그러니 제발 그만 나를 혼자 내버려둬. 소원을 말하라면 한 가지야. 나를 혼자 있게 해줘.


 "말해라!!"


 란란이 내 손을 잡고 흔든다. 순간 정신이 번뜩였다. 란란의 작고 가녀린 손. 내 손을 움켜 쥔 그 손이 나를 마구 채찍질 한다. 빠르게 머릿속을 유린하며 추억들이 뒤섞여 녹아든다. 언제나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앞서 걷던 노을빛의 하굣길에 소리 없이 다가와 항상 상냥히 내 손을 잡아주던 란란의 손. 힘들고 지쳐서 위로 받고 싶던 때에 나를 일으켜주던 란란의,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그 일상의 소중했던 순간들이 시릴 만큼 내 가슴속을 적신다. 그 따스했던 감정들에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만 같다. 갑자기 나는 진심으로 소원해 버렸다. 꿈이라도 좋아. 제발 란란을 돌려줘. 마치 마음이 쥐어짜여지듯 주체할 수 없이 소용돌이친다.


 두근. 하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시야를 가득 물들이는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온다. 밝은 빛과 함께 앞섶을 헤치며 나의 푸른 빛 열쇠가 떠올라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와 란란을 감싸고 거대한 마법진의 문양이 펼쳐지며 회전한다. 무수한 마법의 문양들이 공간을 물들이며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것은 요괴의 거래에 따른 허상이 아니다. 이건... 내 소원의 힘?


 "무, 무슨 짓이냐?!"


 당황하던 란란의 몸으로부터 붉은 기운들이 뿜어져 나와 소용돌이치더니 만화경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흐름 속에서 발버둥 치던 요괴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금빛의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절규했다.


 "네 년, 이 아이의 본성을 뒤덮어 버린 것 인가?! 그런다고 내가 사라질 것 같아? 나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


 한껏 들린 요괴의 손이 내게 뻗어 온다. 갑자기 가슴이 크게 들리며 숨이 턱 막혀 온다. 마치 란란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들만큼이나 새빨간 혈선이 내 시야를 가리며 솟구친다. 쿨럭이며 목구멍 안 쪽으로부터 비릿한 액체가 넘어와 입 밖으로 토해져 나왔다. 하지만 이 고통보다도 내 마음속의 무언가가 나를 더 옥죄어 온다.


 안 돼. 이건 뭔가 잘못 되었어. 이래선 안 돼. 이건...


 시야가, 시야가 멀어진다. 차츰 어둠이 내려 앉아 나를 감싼다. 그 어둠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



 "파루루. 그게 뭐야?"


 만화경으로 부터 눈을 땠다. 잠시 사고가 정지한 듯 벙벙한 정신으로 돌아보자 마당위에서 뛰어 놀던 란란이 어느새 마루 곁으로 다가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거 말이야. 파루루가 들여다보고 있는 거."

 "어, 아...."


 들고 있던 만화경을 내려놓는 손이 마치 영원이었던 듯 저려왔다. 그리고 왈칵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파루루..?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당황한 란란이 허둥지둥 마루 위로 뛰어 올라와 할머님을 지나쳐 내 얼굴을 제 가슴 곁에 감싸 안는다. 바보 같은 아이. 그 품에 안긴 채로 나는 모든 것을 쏟아버릴 듯이 울어 대었다. 안아 줄 필요 없어. 란란. 나는 내가 안쓰러워 해 줄 만한 자격이 있는 아이가 아니야. 이 모든 게 다 나 때문이었어. 모든 것의 원흉이 바로 나 였다고!


 방금 내가 겪고 온 과거. 란란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던 그 날. 그건 전부 바로 내 소원 때문 이었다. 자기만 알고 어떻게든 남들을 자신의 발 밑 아래 두려 애썼던 어린 란란이 남들을 위해 애쓰게 된 건 전부 내가 란란을 그렇게 만들어 버려서이다. 나의 소원이 그녀를 돌려받기 위해 란란의 본성을 강제로 변질 시킨 거다. 그런 란란을 나는 지금껏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저 먼 곳에 사는 다른 세계의 아이처럼 경외하며 지켜오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아. 이제서야 모든 게 이해된다. 때때로 이해되지 않으리 만큼 남을 도우는 일에 전심으로 대하던 란란의 모습들. 보통의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서는 있기 힘든 그 행동들은 사실은 내 소원으로 인해 비틀려 버린 란란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 이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곪고 문드러져야 그것이 세계를 파멸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소원을 만들어 내는 걸까.


 이 이기주의자! 항상 혼자 있고 싶다고, 누구도 곁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주제에 가슴 한 켠에 누군가 손 내밀어 주기를 바라왔던 지도 모른다. 이런 나라도 받아들여 줄 수 있을 만큼 비현실적인 그런 허상의 아이가 자신을 찾아와 주길. 그리고 그 소원을 이리도 진실하게 지켜내고 있다. 결국 처음부터 내 소원이란 남을 위해, 란란을 위해 소망 한 게 아니었다. 나를 위한 거였어. 언제까지고 내 환상이 깨어지지 않게. 모든 세계의 파멸을 묵인하면서까지 그 꿈이 영원하도록.


 "파루루. 왜 이러는 거야? 응?"


 내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란란이 나를 응시한다. 그 여린 손가락으로 부터 나오는 체온이 너무도 아늑하고 따사로와 볼가가 얼얼하다. 내가 만들어낸 존재. 나로 인해 비틀리게 된 아이. 란란, 대답해줘. 이건 모두 꿈인 거지? 이거 모두 내 망상일 뿐이지? 이렇게 따듯한 손길을 가진 아이가 거짓일리 없잖아.


 그래, 그럴 거야. 비록 나의 소원이 그녀의 변화를 촉발 시켰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나의 계약된 소원의 형태에서 벗어난 힘이다. 아무리 내 소망의 근원이 란란을 향하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계약은 마수의 소멸. 그러니 그런 연약한 소원의 힘 따위가 란란의 본질을 완전히 변화시켰을 리가 없다. 한 마디로 지난 세월 동안 란란이 살아온 삶의 흔적들은 모두 그녀 자신의 자유의지가 포함된 것 이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 있는 그녀를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할 수는 없어. 맞을 거야. 아니, 그럴게 분명해.


 나는 뿌옇게 물든 시선 너머 마루 위에 놓인 만화경을 내려다보았다. 모르겠어. 이것은 단지 내가 보여주는 만 가지의 허상중 하나일 뿐인 걸 까? 아니면 숨 막힐 듯 피어오르는 한 여름날의 열기가 만들어낸 한낱 신기루? 나의 간절한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만화경은 그저 오롯하게 침묵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어디선가 엷은 바람 하나가 불어오며 풍경을 치고 있었다.


 그 푸른 울림 속에서 나는 그저 란란에 기대 하염없이 울었다.



 .

 .

 .


 (fin)




 ***



 사실 이 글은 '오늘부터 란파루루~★' 를 쓰고 난 직후부터 계속해 썼던 글 입니다. 전편을 쓰면서 몹시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 란란이라는 아이에 대해 너무 일차원적으로만 기술하고 있다라는 점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그저 아낌없이 자신을 희생하기만 하는 아이. 사실은 속이 여리지만 남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려 하는 아이. 그런 너무 극단적인 성향만이 드러나고 있어서 란란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 했다고 계속 생각하게 되었죠.


 실제의 란란은 물론 위와 같은 성향도 분명 있는 아이입니다만, 낚시꾼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계산된 측면들도 존재하고 캐릭터 만들기 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과거 연습생 때는 오랜 시간 해온 골프라는 스포츠의 영향으로 단체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서 독단적인 측면이 강하고 어울리지 못 하다가 아버지의 따끔한 충고로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팀원들과 동화된 전례도 존재합니다. 그런 밝은 면 뒤에 존재하는 어둠. 좀 더 속 깊은 캐릭터들을 제대로 그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전편 내내 란란이라는 아이에 대해 시종일관 자신 없는 태도로 열등감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던 파루루에게 조금은 희망을 주자는 취지가 있었습니다. 란란이라는 아이도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 어둠을 란란이 극복해 내는데 파루루가 도움을 주게 함으로써 이 아이의 자존감을 살려보고자 한 것 이죠.


 그런 희망찬 분위기로 시작한 글이었습니다만 어쩐지 쓰다 보니 영 진도가 나가질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의 이야기 전개는 과거로 가서 란란이 만화경 요괴를 만나는 부분까지는 동일하지만 스스로 계약을 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요괴가 란란을 집어 삼키는 것으로 마법 소녀인 파루루가 요괴와 싸워 그것을 구해주고 마을 아이들이 그곳에 뒤늦게 찾아와 요괴가 보여주던 끔찍한 악몽에서 풀려난 란란이 자신이 항상 괴롭혔음에도 자신을 구하러 와준 마을 아이들의 모습에 뉘우치며 변화되게 된다라는, 그리고 잔상처럼 남은 마법소녀 파루루의 모습을 동경하고 있었다가 현재의 지금 만화경을 들고 있는 파루루의 모습을 보며 갑자기 그 모습이 겹쳐 보이는 허상에 눈을 비비며 끝나게 되는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파루루는 지금의 란란을 존재하게 한 자신의 뜻밖의 면에 조금은 자신도 란란의 곁에 동등한 자리에서 함께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파루루가 란란을 구해 내냐는 것 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란란의 심성을 갱생시키는 방법 말이죠. 마을아이들이 찾아와 란란이 눈을 뜨고 주변의 아이들을 보며 뉘우치는 것은 지극히 보너스 적인 컷으로 실질적인 란란의 변화는 파루루와 요괴가 싸우는 과정 중에 발생해야만 했었습니다. 그게 원래 이 이야기의 취지와도 부합하죠. 그래서 원래는 파루루가 요괴의 허상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란란에게 대화를 하여 어둠속에서 끄집어내는 식으로 써보려고 했습니다만 쓰는 도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파루루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혼자선 살아갈 수 없어. 우리는 모두 함께야. 자 손을 내밀어. 내가 너의 곁에 있어줄게.' 라고 말하는 파루루를 상상해 보세요. 소름 돋지 않나요? 그러니까 애초에 이 내용은 어딘가 허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취지였던 란란의 변화로 인한 파루루의 자존감 회복이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것이죠. 물론 제가 아는 파루루라면 그리고 이 글의 파루루라면 비록 겁쟁이고 항상 현실에서 도망치는 편이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도망치지 않고 맞서는 면도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에요. 파루루의 그런 극적인 면은 자기 자신 안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도망치지 않기 위해 이겨내는 내용이지 남을 변화시키거나 하는 여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그런 상황이 생긴다 해도 상대방과 정면으로 마주쳐서 하는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옆에서 말없이 표현하는 형태의 소극적 전달이 될 거에요.


 뭔 말을 이리 주절주절 하고 있나 싶습니다만 어쨌든 그런 연유로 이 글은 일 년여간 그냥 내팽개쳐져 버렸습니다. 도대체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최근에서야 다시 글을 써볼까 하는 마음에 이 글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파루루의 입장에서 글을 주욱 읽어 보고 있으니 자연히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요. 처음부터 이 글은 이렇게 흘러갔어야 됐는지도 모릅니다. 파루루가 할 수 있는 선택에 따라야 했어요. 결국 이번 이야기에서도 파루루는 도망쳐 버렸습니다. 요괴에 흡수되어 버린 란란을 보며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도피해 자기 세계에서 소원을 빌어 버립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현실을 비틀어 비극으로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열혈 용자물의 주인공이었다면 분명 이 글의 원본 내용처럼 요괴 속의 란란을 진심으로 빡! 하고 부딪혀 끄집어내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무튼 이렇게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파루루도 조금씩은 성장하게 되지 않을까 바라봅니다.


 그리고 사실 파루루가 요새 무슨 차세대 에이스화 되어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심통 부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ㅅ; 일 년 정도 덕질을 쉬고 있었더니 세대교체의 일환으로 어찌된 일인지 파루루가 푸쉬를 받고 있는데 그 모습들이 영 달갑지가 않네요. 파루루가 잘 되는 것은 좋지만 에이스의 자리에서 서는 것은 원치 않았거든요. 팀4 정도의 에이스라면 상관없겠지만 48그룹 전체의 에이스라니... 비슷한 성격의 둘이지만 48그룹의 최전선에 우리 돈자가 있을 수 있었던 것 과 파루루와는 경우가 다릅니다. 아무튼 그런 고로 최근 파루루는 자신의 캐릭터도 부분부분 망가져 버려서 기존에 제가 좋아하던 파루루의 매력도 떨어져 버렸고 현재의 그 위치 때문에 정이 점점 떨어지네요. 그래서 에라이 하고 좋지 않은 엔딩을 덥썩 쓰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래도 애정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최근에 보니 아무래도 파루루에 대한 푸쉬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서 걱정되기도 해요. 애초에 아예 푸쉬가 없었다면 모르겠는데 푸쉬가 이뤄지다 갑자기 끊긴다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보니까요. 지금껏 그렇게 고인이 된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니... ㅠㅠㅠ


 아... 어쨌든 길고 길었던 이 글이 끝났습니다. 실제로 쓴 기간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쓸데없이 고민하느라 시간이 너무 흘러 버렸네요. 이번에도 파루루와 란란에게는 똥만 줬으니 분명 다음 이야기를 또 쓰게 될 것 같습니다만 굳이 다음 이야기를 쓴다면 이번에는 이 세계관 안의 다른 아이들 이야기를 좀 써보고 싶어요. 예전처럼 막장에 개그도 좀 해보고... ㅇ ㅁㅇ;


 그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제가 란파루루를 독점해도 되겠죠~?! ★ > _<!!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오늘부터 란파루루~★






( 바보 란파루루... - _-;)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받아들이게 돼.
 그래. 모두는 각자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세상에는 존재하는 생명체 수만큼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 
 모두 자신을 축으로 돌아가고 있는 세계의 중심에 서 있어.



 자신만의 세계에서라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어!





 하지만...?


 '현실' 이라는 커다란 주머니에 모두는 담겨져 있는 거야.

 수많은 각자의 세계가 모아져 있는 '현실' 이라는 세계.

 '현실' 에선 각자의 세계에서 누리던 능력 따위는 사용할 수 없어.




 그러니까, 


 아무리 자신의 세계에서 전지전능했던 자라도

 '현실' 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남의 세계' 또 한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그저... '비현실' 이라는 이름의 사슬로 봉인된, 자신의 세계에서만 여전히 자유로울 뿐...

 그래... 그저 그 뿐...



 그것이... 지금껏 지켜져 온 이, '현실' 이라는 세계의 룰.



 자, 그럼 이제 말해봐.

 '너의 소원은 무엇이지...?'






 오늘부터 란파루루~★
                                        written by. 녀놘


 "시마자키."


 교실의 창가 밖으로 초여름의 햇살을 받으며 드리워져 있는 플라타너스의 푸른빛에 잠시 시선을 잃고 있었다. 때때로 가는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 널찍한 잎새들의 움직임사이로 금빛이 일렁여 보인다. 그 움직임을 따라 어린 내 마음도 두둥실 떠올라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어서 나는 두근대는 가슴을 달래고 있어야만 했다. 


 "시마자키!"


 들뜬 마음에 빠져있던 내 옆구리를 옆자리의 아이가 슬며시 찔러오고 나서야, 나는 아차! 싶은 생각과 함께 교탁 앞에서 시뻘게진 얼굴을 한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돌아 볼 수 있었다. 


 "아....? 네!"

 "오늘 발표 네 순서지? 어서 나와서 발표해 보거라."


 미간을 좁히고 계신 선생님의 손짓에 서랍 안쪽에서 노트를 꺼내 쥔 채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서자, 방금 전의 일 때문인지 웃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이 그제야 사방에서 느껴져 왔다. 재미있다는 듯 다 같이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나는 가슴 안쪽으로 노트를 꼭 쥔 채 조금 빠른 걸음으로 교탁 앞까지 걸어 나가야만 했다. 머뭇거리며 교탁 앞에 선 채 숙이고 있던 고개를 조금 들어 교실 안을 바라보자 여전히 히죽거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저만치서 입주위로 양 손을 둥글게 말아 쥔 채 무어라 입모양을 외치고 있는 란란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벙긋거리고 있는 입 모양새를 봐서는 '힘내! 파루루'.


 "자, 발표 시작해 봐."

 "아.... 네."


 나는 조금 전부터 점점 더 달아올라 이제는 화끈거리기 시작한 얼굴을 원망하며 최대한 노트를 높이 펴들었다. 


 "........그럼,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       *        *
                                                        
 "너무 신경 쓰지 마."

 "응...."


 나는 삐걱거리는 란란의 자전거 바퀴 소리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


 "발표 수업은 다음에도 또 있으니까 그 때 잘하면 되. 그 때는 보란 듯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그치? 으쌰으쌰!"

 "그래..."

 "그나저나 선생님도 너무 심했어. 파루루는 원래 목소리가 작은 것뿐인 데 그런 것도 모르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반 아이들 보는 앞에서 막 뭐라고 하시고 말야. 이렇게 말야,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더 귀를 기울이고 들을 마음을 가지셨더라면 분명 파루루의 예쁜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을 거야."

 ".....란란, 우리 다른 얘기 하면 안 돼?"


 굳이 계속 곱씹어주지 않아도 창피하니까 이제 그만 좀 말 하란 말야. 제발! 경직된 내 시선에 당황했는지 란란이 그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 눈을 피해 조금 벌어져 버린 입을 다물지 못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란란의 안절부절 거리는 순해빠진 모습을 보고도 특별한 죄책감도 없이 그저 오도카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 저기 파루루. 내가 방금 무슨 잘못했...?"

 "됐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채 날 바라보는 란란을 지나쳐 그대로 다시 걸음을 옮기자 란란의 종종걸음이 다급히 따라와 붙어왔다. 안색을 굳힌 채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가는 내 옆모습을 불안스레 흘깃흘깃 훔쳐보는 란란의 입에서 자꾸만 '어....' '에....' 하는 얼빠져 보이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음... 그러니까...."

 "..........."

 "어... 있잖아.. 그러니까 그게....."

 "......."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슈퍼☆걸즈 앨범발매일 아니었어?"

 "............"

 "아니... 야....?"

 "맞아. 오늘."


 이길 수가 없어서,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자꾸만 물어오는 란란의 물음에 결국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란란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삐걱거리는 자전거 소리에 리듬이라도 맞추려는 것처럼 다시금 재잘거리며 떠들어온다.

 "그렇지?! 어... 그럼 언제 사러 갈 거야? 오늘? 아니면..."

 "아마 이번 주말쯤...."

 "그래? 그럼 그 날 나도 같이 가! 같이 가서..."


 어느새 방글방글 웃고 있는 란란.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심통 맞게 바라보며 입술을 샐쭉이 다가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기대어오고 있는 란란의 발걸음을 그대로 내버려두며 나는 길을 걸어갔다.


 야마우치 스즈란. 애칭으로는 란란. 너무 착해빠진 성격 탓인지 조금이라도 힘들어 보이거나 안타까운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고 달려가서 도와야지만 성미가 풀리는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든 특이한 아이. 그래서였을까? 학기 초 같은 반 아이들 속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 하고 맴돌고 있는 나에게 유일하게 살갑게 대해줬던 것은 이 바보 같은 란란뿐. 그런 란란을 나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아니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좋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자꾸만 어떤 불쾌감이 쌓이는 것을 나는 어찌할 수가 없다.


 뭐랄까... 마치 내가 길 잃은 새끼고양이가 된 것만 같은 비참한 기분. 란란을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면 사실은 그런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계속해 혹시 지금 내가 동정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내 마음이 비뚤어져 버린다. 그저 난 내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그건 그러니까 그저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조금 엇나간 길을 걸으며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뿐인데 왠지 란란의 눈에는 그 모든 게 틀렸다고, 자신이 도와서 고쳐줘야만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게 된다. 


 그래. 이 모든 게 속 좁은 나의 피해망상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래도 매 번 이런 일이 생기면 또 다시 화가 나버리는 걸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 했기에 란란은 나보고 다음 발표에는 더 잘해야, 고쳐져야만 한다고 말하는 걸 까? 난 그 때 정말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분명하게, 내가 낼 수 있는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었어. 그것의 어디가 틀렸다고 란란 너는 말하고 있는 거야? 란란, 역시 너는 정말 나를 동정하는 마음인 걸 까? 


 어쩐지, 분해... 마치 란란이 내 보호자라도 되려는 것 같잖아!


 ".......나보다 키도 작은 주제에..."

 "그래서 거기 가서... 응? 파루루, 방금 뭐라고 했어?"

 "응? ....아니. 나도 좋아한다고. 그 파르페. 좋아해. 그거..."

 "정말? 그럼 주말에 꼭 같이 가서 먹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싱글대고 있는 란란의 조그만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늘따라 밉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는 란란의 수다에 힘없이 고개만을 끄덕이며 나는 어서 빨리 집 앞에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이리 집이 먼 걸까. 줄곧 푹 숙이고만 있던 고개를 들어 이제 막 접어들던 골목길의 앞을 바라본 건 순전히 그런 샐쭉해진 마음에서 뿐이었다. 그냥 어디쯤이나 왔을까 싶은 투정 섞인 시선.... 그런 내 시야에 들어와야 했던 건 지금가지 수년을 걸어 다녀온 낯익은 하굣길의 골목 전경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곳이 이렇게나 낯설고 두려워 보이는 건지. 나는 나도 모르게 서두르고 있었던 발걸음을 조금씩 멈추며 멍하니 골목길을 응시하였다. 


 황혼녘의 그늘 아래로 저편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 낮은 담벼락들. 군데군데 서 있는 조금 낡아있는 불 꺼진 가로등. 그리고... 그늘을 드리우며 어두워져 가고 있는 회빛의 골목에서 서서히 번져 나오고 있는 비릿한 냄새 끝의 붉은 자욱들. 


 "란란..."

 "....어? 왜?"


 떨리는 손을 들어 이제 막 골목길로 접어들던 란란의 손을 잡아 세우자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란란이 나를 바라다본다. 


 ".........."

 "파루루...?"


 붙잡고 있던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꾹 쥐어졌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골목길을 가득 채우며 사방으로 터져나간듯 흩뿌려져있는 엄청난 양의 선혈... 그 위로 당장이라도 꿈틀될 것 마냥 번들거리며 흘러내리고 있는 붉은 살점들.... 


 그리고 그 지옥도의 한 가운데 서 있는 한 가녀린 여자의 인영.


 ....돌아가야 돼. 돌아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여 란란을 잡아끌고 골목길 밖으로 뒷걸음치기도 전에, 숨 막힐 듯 고요하던 적막함을 깨며 불현듯 골목길의 안쪽으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져갔다. 


 "아...."


 절망감으로 질끈 감겨져 버린 눈을 간신히 떠 내려다 보자, 길 위에 홀로 쓰러진 자전거의 바퀴가 삐걱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


 흠칫.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 한 하이톤의 가는 목소리가 어두운 골목길의 어둠으로부터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귀청을 찢을 듯 한 비명이 터져 나와 무방비 상태의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옆을 돌아보자 자전거의 핸들을 놓쳐버린 채 쓰러져 내린 란란이 그 작은 몸에서 상상하기 힘든 비명을 내지르며 얼굴을 감싸 안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어라라? 너희들 다 본 거야? 이히히히~ 다 봤어. 그치? 이상하네. 원래 볼 수 없는 건데. 꺄하하하하~"


 소름끼치는 광소와 함께 어둠속에서 그 여자의 인영은 서서히 걸어 나왔다. 어두운색 일관의 짧은 치마와 재킷. 그것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흰 피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덮을 정도로 붉게 흘러내리고 있는 핏자욱들을 온 몸에 뒤집어 쓴 그녀는 핏물에 진득하니 뭉쳐있는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마치 아이마냥, 가지런한 이빨 사이로 손톱을 깨물어가며 우리를 향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 누가 보면 곤란해~ 이히힛. 저기, 저기 있잖아. 심심한데 나랑 놀아주지 않을래? 내가 술래. 크큭. 그리고 너희는 도망치는 거야. 그러다가 너희가 잡히면.... 나한테 죽는 거야!!"


 기괴한 웃음소리가 늘어나는 듯 한 착각을 일으키며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그녀의 가녀린 몸체가 검은 안개처럼 쏘아져 달려들어 왔다. 일어나!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란란의 손을 잡아끌며 골목밖 어귀를 돌아 도망쳐 나갔다. 채 몇 걸음 더 내딛기도 전에 방금 전 우리가 튀어나온 골목의 입구가 산산이 박살나며 무시무시한 광풍과 잔해의 더미가 등 뒤로 쏟아져 흩날려왔다.


 "에헤~ 그래. 그렇게 어서 도망가. 따분한 사냥감은 재미없어~"


 흩어져 내리는 먼지구름 사이로 일어서며 여자는 재밌다는 듯이 히죽 거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좀 전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 한 건지 란란은 초점 없는 눈을 크게 뜬 채 그저 내 손이 이끄는 대로 비틀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 란란! 나는 벌써부터 가빠져 오르려 하는 숨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며 숨을 곳도 없이 그저 쭉 뻗어있는 길 위를 무작정 내달렸다. 여자는 마치 당장이라도 물어죽일 수 있는 쥐를 손 안에서 가지고 놀고 있는 고양이처럼 그런 우리를 느긋한 발걸음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다급한 시선으로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주변에는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장소도 보이질 않았다. 아니. 과연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도저히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여자의 그 움직임. 나는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제발 빨리 이 꿈에서 깨게 해줘. 싫어. 싫다고! 이런 거! 


 "아...!"


 무언가 발부리에 걸렸다고 느낀 순간 허공중으로 붕 떠오른 몸이 그대로 란란의 손을 잡은 채 까끌한 시멘트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뜨거운 마찰열과 함께 맨살이 쓸려나가며 엉겁결에 터져 나온 비명이 거짓말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뭐야? 벌써 끝인 거야?"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황급히 몸을 돌아보자 어느새 발 밑 아래 여자가 서 있었다. 웃음 일변이던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실망감으로 가득한 싸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렇게 죽는 걸까?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란란을 부축해 내면서 나는 본능적으로 심장을 옥죄어 오는 죽음이라는 강렬한 감정에 숨이 막혀왔다. 내 손에 이끌려 몸을 일으키던 란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바보같이도 의문도 모르고 아픔으로 잔뜩 찡그려진 얼굴을 한 채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파루루...?"

 "재미없는 장난감은 부셔버릴 거야!!"


 마치 심통난 어린아이 같은 여자의 새된 고함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끝에서 광풍이 몰아치며 우리를 향해 내리 꽂혀졌다. 채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 했던 놀란 란란이 그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날 덮치며 감싸 안아 들었다. 바보. 이런다고 의미도 없을 텐데... 감싸온 란란의 두근거리며 빠르게 약동하고 있는 심장소리를 느끼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콰강!!!!!!!!!


 갑자기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감고 있던 눈 사이를 비집고 강렬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놀란 눈을 떠보자 그 여자와 넘어져 있던 우리 사이의 공간을 헤집고 어떤 문이 가로막은 채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문이 펼쳐낸 무형의 막이 놀랍게도 강한 불꽃을 튀기며 여자의 손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난폭한 광풍을 막아내고 있었다. 


 "어라라? 뭐야, 약속의 문? 이히히힛~"


 놀란 듯 동그래진 눈을 크게 뜨던 여자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재차 팔을 내질렀다. 여자의 손에서 이는 검은 광풍이 난폭하게 소용돌이치며 다시금 문 앞의 막을 향해 불꽃을 번뜩이며 달려 들어왔다. 그러자 마치 그것에 대항이라도 하듯 여자를 막아서고 있던 문 앞의 무형의 막이 급속하게 응축되는 가 싶더니 그대로 터져 나오며 여자를 날려 버렸다.


 길을 여기저기로 사정없이 부수어가며 날아간 여자는 돌무더기를 던져버리며 일어 나왔다. 여자의 작게 키득거리고 있는 웃음 속에서 짙은 살기가 배어 나오고 있는 것이 느껴져 왔다.


 "뭐 하자는 거야. 문. 키히힛. 지금 날 방해하겠다는 거야?"


 여자의 질문에 답하듯 마치 남자인 것 같기도, 여자인 것 같기도 한, 어린아이인 것 같기도 나이 많은 노인 같기도 한 기묘한 목소리가 마음속에 직접 울리듯 들려왔다. 지독히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하고 고저가 없는 어투이다. 


 "이 아이들은 소원을 말할 존재로 선택되었다. 우리는 그저 계약을 맺기 위해 나타났을 뿐이다."

 "꺄하하하하~!" 


 무언가 여자 주변의 공간이 잠시 일그러졌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우리를 막아서고 있던 문 앞으로 방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불꽃이 터져 나갔다. 고개를 들어보자 폭발하듯 달려든 여자가 문 앞의 무형의 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여자의 온 몸에서 꿈틀대는 피의 흐름들이 용솟음치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게 뭐? 설마 내 소원 잊은 건 아니지? 계약위반이야. 방해다! 비켜!!"

 "네가 소망하는 한 약속된 소원은 반드시 일어난다.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뛰어넘을 만큼 소망하면 되는 일. 위반은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일을 할 뿐."

 "시끄러!!"


 여자의 손이 연속적으로 문이 펼치고 있는 힘의 막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 무자비한 행위가 만들어내는 엄청난 파괴행위 속에서 나와 란란은 그 폭음과 불꽃에 그저 무기력하게 귀를 틀어막고 움츠려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놀란 눈을 들어보자 여전히 여자는 문의 바깥에서 난폭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그저 방금까지 들려오던 끔찍한 소리만이 모두 사라졌다.


 "야마우치 스즈란. 시마자키 하루카. 너희는 소원을 비는 자로 선택 되었다."

 "에....?"


 당혹감에 가득찬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문은 그저 고요하게 부유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단 한 가지의 소원. 자기 자신이라는 범주 안에 해당되는 한 그 어떠한 소원이라도 너희는 소망한데로 하나를 이룰 수 있다."

 "소원....?"

 "그래. 어떠한 것이든 하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일까...? 나는 창백하게 식어있던 내 볼을 꼬집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치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 교실 밖 창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낯설어 보인다. 그저 옆에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란란만이 유일하게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내게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 모든 것들이 부당하다고 생각됐다. 언제나처럼 평범했던 우리의 일상에 제멋대로 갑자기 끼어들어와 마구 뒤흔들어 놓고 있는 주제에 당당하게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는 눈앞의 존재들에게 화가 났다. '당장 이 자리에서 저 여자와 함께 사라져줘!' 그렇게 나는 외치고 싶었다.


 "어떠한 소원이든 한 가지요?"

 "그래. 어떠한 것 이든."


 뜻밖의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자 무언가의 기대감과 열망에 반짝이고 있는 눈동자로 란란이 문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소원을 말할 것 같은 그 란란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 잡혀 버렸다.


 "란란! 잠깐만!"

 "....에? 파루루, 왜?"


 어떻게든 란란이 입을 떼는 것을 막고 싶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역시 이상하다. 요즘 세상에 유치원생이라도 모르는 아저씨 말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하물며 이런 거짓말 같은 상황에 어딜 봐도 수상쩍은 문이라는 존재가 대뜸 건내오는 계약 같은 거 순수하게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바보 같은, 사탕 없이도 모르는 아저씨 뒤를 졸졸 따라갈 순진한 란란 빼고는 말이다.  


 "이 계약... 분명 어떠한 대가가 있겠죠?"


 나는 고딕풍의 무늬가 음험함을 풍기고 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이런 엄청난 계약. 그렇다면 분명 그만한 대가가 숨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것들을 문은 전혀 말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악마의 달콤한 속임수처럼... 나는 문의 숨은 꿍꿍이를 들춰내길 바랐다. 하지만 되돌아온 문의 답변은 전혀 뜻밖이었다.


 "소원으로 인해 너희에게 되돌아올 대가는 없다."

 "무슨...?!"

 "단지 너희는 너희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얻을 뿐이다. 그것이 너희들이 얻게 될 전부다."


 뭔가에 뒤통수를 얼얼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대가가 없어? 그저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 질 뿐...? 나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세상에 주기만 하는 나무란 있을 수 없다. 분명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후에 일어날 것이다. 나는 문의 너머로 여전히 무형의 막을 내리치고 있는 여자를 건너보았다. 이미 난폭해질 대로 난폭해진 그녀의 힘에 의해 문이 펼쳐내고 있는 막은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듯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럼 저 여자를 이곳에서 사라지게 해달라고 할 수 있어요?"

 "남을 매체로 소원의 계약을 맺는 건 불가능하다. 계약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맺어져야 한다. 너는 저 여자가 사라지기를 소원할 수는 없지만 저 여자를 사라지게 하는 능력을 스스로 갖게 됨을 소원 할 수는 있다."


 문의 말에 나는 조금 생각해 보고서야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두 가지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자는 소원의 힘을 나와는 전혀 무관하게 남에게 쓰는 행위이다. 그에 반해 문이 말하고 있는 소원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계약이었다. 그 이후에 내가 그 능력을 사용하여 남에게 영향을 끼치고 말고는 자유이다.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소원의 모든 대가를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만 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로 모든 것을 규정지어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지 못 하게 한다. 지금 여기서 계약을 맺었다간 흔히 볼 수 있는 옛날이야기의 비극적 주인공들처럼 끝에는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결말이 반드시 올 것 같았다. 


 "이런 소원... 역시 할 수 없어. 우리는 소원을 빌지 않을 거예요. 그냥 돌아가요."

 "그, 그렇지만...!"

 내 말에 그동안 눈치를 보며 앉아있던 란란의 눈이 동그라니 커지는 것이 보였다. 나와 문을 번갈아 돌아보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모습이 역시나 란란은 문에게 소원을 말하려고 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누가 봐도 수상해 할 만한 계약이다. 이런 걸 그렇게 바보같이 덥석 해버리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서 돌아가요!"

 "소원을 빌지 않겠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것은 선택된 자의 권한.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계약이 끝나는 즉시 나는 이 자리를 떠날 것이고 그렇다면 너희는 다시 저 여자와 셋만이 남게 될 것이다.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소망해보는 것이 좋다."


 문의 말이 옳다. 갑자기 맥이 축 빠지는 기분이었다. 문이 이대로 사라져버린다면 란란과 나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하지만... 역시나 꺼림칙한 계약이었다. 이런 것, 평범한 상황이었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거지...? 어느 쪽도 선택할만한 용기가 선뜻 들지 않았다. 이런 선택, 역시 나에겐 무리라고 생각했다. 


 "나... 누구라도 힘들 때 의지할 수 있고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뭐...?! 돌아보자 말릴 새도 없이 란란의 입에서 소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란란!"

 "하지만, 파루루! 어째서 소원을 말하지 못 하게 하는 거야?""

 "바보야! 누가 봐도 수상쩍은 계약이잖아! 그러다 나중에 정말로 지금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내 질책어린 말에도 란란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상관없어. 어차피 말하는 것 밖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게다가 꼭 지금의 상황 때문에 이런 소원을 빌고 있는 건 아니야. 아주 어릴 적부터 내가 소망해오던 소원이었어. 알잖아? 그러니까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설사 대가가 있더라도 괜찮아. 받아들일 수 있어. 그리고 이 소원이라면... 내가 파루루를 지금 지켜줄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밝게 미소 지어 보이는 란란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진심이었다. 그런 란란에게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 같은 아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아이가 아니구나. 란란은... 진심으로, 진심으로 저런 것을 바라고 달려 나갈 수 있는 아이도 있구나. 라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멍하니 만들었다.


 "그럼 이것으로 정말 너의 소원은 괜찮은가?"

 "...응!"


 문의 질문에 란란은 망설임 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공명이라도 하듯 문과 란란 사이의 공간에서 기묘한 파동이 울려 퍼져갔다. 공간이 왜곡되고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신비한 문양들이 오래된 영사기의 노이즈 낀 화면들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시야를 어지럽혀 왔다. 단단히 디디고 있던 땅이 사라지고 무형의 공간속으로 집어던져진 기분이었다.


 "야마우치 스즈란. 너의 소망이 진실 됨이 입증되었다."


 갑자기 문으로 부터 눈뜨기 힘든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물결치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나오는 온유한 빛결 가운데, 서서히 란란의 앞으로 녹빛의 열쇠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너의 소망이 만들어낸 열쇠다. 이것으로 너는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란란이 손을 뻗자 열쇠는 란란의 손 안으로 떨어졌다. 그 열쇠로부터 푸른빛의 강인한 생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이것으로 소원을...?"

 "내가 바라는 소망의 힘이 진실하면 진실할수록 그 열쇠가 그에 합당한 문을 열어 줄 것이다."

 "내가.. 간절히 원하면 원할수록 소원의 힘도 더 강해진다는 거죠?"

 "그렇다."


 무언가의 결심이라도 하듯 입술을 꾹 다문 란란은 열쇠를 쥔 손을 가슴에 깊이 품어 보였다. 란란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것으로 정말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도울 다짐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시마자키"


 나를 부르는 문의 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소원을 말하겠는가?"

 "........"

 "시마자키?"

 "..........."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안 돼. 두려워. 무리야 이런 건. 내 침묵에 문은 알았다는 듯이 더 이상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시마자키 하루카. 하지만 너는 곧 소원을 말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뭐라고...?"

 "....이것으로 의식은 끝났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문의 말에 나는 문에게 따지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그동안 펼치고 있던 힘의 방벽이 산산이 부서지며 잠시 동안 잊고 있던 엄청난 폭음과 광풍의 난폭한 바람소리가 불어 닥쳤다. 여자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꺄하하하하~ 문, 넌 날 막을 순 없어!"

 "마음대로. 이미 우리는 일을 끝맞췄다."


 여자가 내지른 손가락 사이로 문이 마치 연기처럼 흩어져 내렸다. 여자가 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거짓말처럼 희미하게 맴돌며 사라져가는 연기 사이로 미간을 찡그리며 여자는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엉망진창으로 망가져내린 황혼녘의 어두운 길 위로 이제 다시 여자와 우리 둘 만이 마주보고 있었다. 여자의 손끝에서 다시 검은 광풍이 조그맣게 피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짜증나..."

 "........."

 "짜증난다고....!"

 ".....란란!"

 "다 죽여 버릴 거야!!!!!!!!!!!"


 여자의 손에서 다시 거센 광풍이 휘몰아치며 달려 들어왔다. 나는 란란을 끌어안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잊고 있던 죽음의 공포가 다시 덮쳐들었다. 하지마...! 그 때, 내 어깨를 따듯하게 꼭 감싸 쥐어 주는 란란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일렁이는 녹빛이 한순간에 펼쳐져 나왔다. 눈을 떠 보자 란란이 내 뻗은 손끝에서 그 열쇠가 여자의 공격을 막아서고 있었다. 


 "내 친구를 다치지 않게 할 거예요."

 "뭐?!"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할 거라고요!!"


 란란의 외침과 함께 여자의 손끝을 막아서고 있던 열쇠가 힘껏 돌아갔다. 그 순간 눈부신 빛을 발하며 란란의 앞으로 녹빛의 문이 나타나 열렸다. 여자가 무언가 더 해보기도 전에 그 문의 안쪽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빛이 여자를 튕겨내듯 길의 저편으로 날려 버렸다. 

 "란란... 이거?!"

 "걱정 마. 파루루. 내가 반드시 지켜 줄 테니까."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지은 란란은 그대로 열려진 문의 안쪽을 향해 일어나 뛰어 들어갔다. 온후한 녹빛으로 넘실대는 문의 안쪽으로 란란의 모습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때, 갑자기 부서진 지면의 거대한 돌덩이가 문에 날아와 들어왔다. 길의 저편에서 여자가 휘청 이며 일어서 있었다.


 "히히히힛.. 애송이 주제에... 웃기지 마!!"


 여자가 집어던진 돌은 무서운 속도로 문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리고 그 때, 란란이 걸어 들어갔던 문의 반대편 안쪽에서 거대한 은빛의 방패가 불쑥 튀어나와 그 앞을 막아섰다. 방패가 한순간 번쩍였다고 생각한 순간 날아들던 돌은 방패의 앞에서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흩어졌다. 

 흩어져 내리는 돌덩이의 먼지구름 사이를 걷히며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아름답고 정교하게 세공된 거대한 은빛 방패를 내민 채로 어느새 초록빛의 미니드레스 차림으로 바뀌어 있는 란란이 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던 모습 그대로 그 길고 검은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무서운 속도로 여자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 콰가가가각!!!!!!!!


 압도적인 기세로 들이받은 거대한 전신 방패가 여자가 내리친 손과 맞부딪히며 끔찍한 마찰음과 함께 불꽃을 튀어 냈다. 뒤이어 둘 사이로 찢어져 내린 대기가 채 아물기도 전, 란란의 팔이 재차 휘둘러지며 그대로 그 거대한 방패로 휘청 이던 여자를 강타해 쳐내어 버렸다. 단박에 땅을 부수며 꽂아지듯 처박힌 여자 위로 이번엔 비어있던 란란의 오른손이 녹빛으로 밝게 빛나며 내리꽂혀졌다. 


 압축된 공기들이 단박에 연달아 터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내리친 란란의 주먹 주변으로 연속적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지면이 들끓어 오르며 요동치고 부서져 올랐다. 그 위압적인 란란의 모습에 내가 멍해 있을 때 란란과 조금 떨어져 있던 지면을 터트리며 여자가 튀어 올라왔다. 아무렇지 않게 가벼운 모습으로 착지한 여자는 처음 우리와 만났던 모습 그대로 피투성이의 모습에 흰 이빨 사이로 손톱을 깨물며 웃어댔다.


 "이힛~ 이히힛~"


 여자의 주변에서 선홍빛의 아지랑이가 일렁이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위험해...! 직감적으로 느낀 위기감에 피부가 팽팽하니 당겨져 왔다. 란란도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방패를 곧추세우며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아~ 죽여줄게!!!!!!"

 "어이~ 레나."


 여자가 비죽하니 웃으며 막 달려들려던 참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시원스러운 목소리에 주위를 돌아보자 조금 떨어진 전봇대의 위에 한 인영이 올라선 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단발머리가 어울리는 큰 키에, 자신만만해 보이는 표정이 인상적인 교복차림의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만두를 크게 베어 물며 씨익 웃어 보였다. 


 "찾아 다녔다고. 레나." 

 "...쥬리나?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냥. 재밌어 보이는 바람이 불기에 거슬러 올라왔지." 


 갑작스러운 여자아이의 등장에 레나라고 불린 피투성이의 여자는 동요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방금 전까지 인간미라고는 느껴볼 수 없었던 서늘했던 얼굴에 얼핏 곤혹스러워 하는 빛이 비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그런 여자를 놀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남의 표정 변화 같은 것에는 둔감한 성격인 것인지 여전히 그 시원스런 미소를 띤 채 우리 모두를 내려다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럼 그쪽의 이름 모를 방패 언니. 미안하지만 나도 같이 참가해도 될까? 보고만 있자니 근질근질해서 말야."


 한 입에 남은 만두를 털어 넣은 아이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몸을 풀어 보이며 품에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열쇠를 꺼내어 들어 보였다.


 "준비 됐지? 마츠이 쥬리나. 간다!"

 ".......난 이만 돌아가겠어."


 이제 막 열쇠를 허공중에 꽂아 돌리려고 하던 쥬리나라는 여자아이가 전봇대 위에서 크게 휘청였다. 버둥대며 당황하던 여자아이가 간신히 균형을 잡은 채로 바라보자 이제껏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는 여자아이를 노려보던 레나라는 여자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돌아서 길의 저편으로 가버리고 있었다.


 "야! 야! 레나! 어디 가는 거야? 나는 이제 막 시작할 참이라고!"

 "......알 바 아니야."

 "에에...? 그런 심한 말을...."

 허둥대며 난처한 표정으로 외치고 있는 여자아이의 계속된 말에도 레나라는 여자는 그저 싸늘하게 그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정말로 골목길의 어딘가로 들어가 버리더니 그대로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아... 이제 재미 좀 보려던 참이었는데..."


 한순간 닭 쫓던 개마냥 멍한 상태가 되어버린 여자아이가 씁쓸히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아직까지도 긴장을 풀지 못 하고 있던 란란을 돌아보며 여자아이는 가볍게 이마 옆으로 손가락을 튕겨 인사를 해보였다.


 "뭐, 이렇게 됐으니까... 그럼 나도 이만."


 밝게 웃어 보인 아이는 그대로 지붕 위를 뛰어넘으며 사라져 갔다. 아이의 모습이 어두워져 가는 주택가 사이로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도대체 뭐였던 거야. 이 상황들은...?"


 한탄할 힘도 남아있지 않아 그대로 축 늘어져 있자니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나는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도 돌아가자. 파루루."


 붉은빛으로 저물어가는 석양을 등진 채로 다시 교복차림으로 돌아온 란란이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날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줄 거라는 듯이 따뜻하게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손. 나는 그 손을 힘껏 맞잡으며 일어나 섰다.


 "그래... 란란."


 아름답던 석양빛 탓인지, 아니면 지칠 대로 지쳐있던 마음에서 였는지 처음으로 란란이 멋져 보일 뻔 했던 것 같다. 아니 정말로 잠시 동안은 그렇게 느꼈었다는 걸 양심적으로 고백한다. 석양빛의 그늘에 가리어져 있던 란란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툭하면 울음부터 터트리던 그 소녀감성 란란이 어디갔을리가... 일어나 들여다보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서 못난이처럼 울고 있던 란란의 얼굴. 야... 란란. 넌 왜 또 울고 있어....? 너... 진짜... 아... 못 말려. 진짜!!!
                                                                         *       *        *
                                                        
  쉬는 시간의 교실. 언제나처럼 창가 옆 내 자리에 홀로 앉아 멍하니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지로부터 벌써 열흘이 넘게 지났다. 그 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면 안 된다면서 소원의 힘으로 란란이 부서져 엉망이 되었던 길가를 원상태로 돌려놓았기 때문인지 그 때의 일은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주택가가 많았던 지역에서 그 큰 소란이 일어났었는데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역시 이상하지만 그건 아마도 그 레나라는 여자의 능력에 의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하고 나와 란란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 피투성이의 여자와 쥬리나라는 여자아이... 결국 그 둘도 란란처럼 약속의 문과 계약을 맺은 자들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뭐였던 것일까? 그 여자의 소원...


 나는 슬쩍 주변을 훑어보고는 조심히 서랍 아래서 노트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부터 예전에는 전혀 보지 않고 있었던 신문이나 뉴스 등을 챙겨보게 되면서 나는 최근 일본 전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하나둘 점차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들 대부분은 분명 계약을 맺은 자들의 소원으로 이루어진 일들 일 거야..."


 짧은 메모와 함께 스크랩 해둔 기사들을 살펴보며 나는 확신했다. 특히나 최근에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묘한 연쇄 폭파 사건. 마지막 페이지 부근에 붙여 놓은 신문기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나는 표정을 굳혔다. 이런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분명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 하는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하나둘씩 계약을 맺은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들여다보고 있던 노트를 덮으며 나는 란란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사건 직후부터 란란의 자리에는 항상 사람이 끊이지 않고 모여들고 있었다. 원래부터 교우관계가 좋았던 란란이지만 최근에는 전혀 안면이 없던 다른 반의 아이들이나 선후배들까지도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유명 연예인의 팬 사인회를 방불케 할 모습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들 고민이 있어 상담을 원하고 있거나 문제가 생긴 아이들이었다. 전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음에도 란란에게 그런 것에 도움을 청하러 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기분이 미묘해지곤 한다. 오늘도 란란은 아침부터 계속해 하루 종일 자신의 자리에 붙들린 채로 그런 사람들의 고민이나 큰일 등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해결해 주고 있었다. 


 저 모든 게 란란이 원하던 일들이고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만 가끔씩 자신의 학용품을 잃어 버렸다며 같이 찾아달라는 부탁까지 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불끈 짜증이 솟구치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자, 그럼 이걸로 해결된 거지? 다음에도 또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쉬는 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도록 마지막 아이까지 밝은 모습으로 상담을 해결해준 란란이 기지개와 함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와 비어있던 내 옆자리로 털썩 주저앉았다. 어쩐지 란란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야. 란란?"

 내 핀잔 섞인 말투에 란란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혀. 오히려 남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기뻐."


 그런 말은 눈가에 늘어진 다크서클이나 지우고 얘기 하세요. 으이구~ 저러다 진짜 다크서클로 줄넘기 할 기세네. 아닌 게 아니라 란란의 몸 상태는 누가 봐도 지쳐있는 듯 보였다. 이대로 갑자기 혼절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걱정 될 지경이었다.


 "란란의 소원이란 거 말야. 그렇게 무리해서 까지 계속 소원력을 사용해야만 하는 거야? 지금처럼 계속 남들을 끌어들인다면 남의 가정사는 물론 하다못해 학용품 하나 찾아주는 것 까지 소원의 힘을 빌리다가 란란도 결국엔 지쳐서 쓰러지고 말 거야.

 "으응~ 아니야. 괜찮대도? 파루루, 혹시 스파이더맨이라는 영화 알아?"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내자 란란이 방긋 웃어 보였다.


 "거기 말이야. 이런 대사가 나오거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멋지지? 지금 난 충분히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큰 힘을 갖게 되었잖아. 그러니까 어떻게든 내 힘이 닿는 한 까지는 끝까지 노력해 보고 싶어. 지금까지는 돕고 싶었던 일에도 나라는 아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분할 때가 많았거든. 나는 왜 이렇게 힘없고 보잘 것 없나 생각하면서 말이지. 알겠지? 파루루. 난 지금 너무 행복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고 웃고 있는 란란의 모습이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 나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며 란란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란란의 모습이 잠시 어딘가 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아이인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너무 먼 거리에 위치한 아이라서 내가 아무리 손을 뻗어 붙잡으려 해봐도 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나는 문과 마주 했던 그 날. 언제나 내가 그래왔듯이 두려움 때문에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 했었다. 란란이 소원을 말했을 때는 심지어 조금은 안도했던 것도 같다. 란란이 나 대신 위험을 택해 준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겁쟁이. 나라는 아이는 비겁하다. 


 나는 란란의 인사에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때 란란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나에게 달려든 란란은 자리에 앉아 있던 나를 끌어안고는 교실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황하던 내 귀에 요란한 소리들이 뒤섞여 울려왔다. 란란의 품에 깔려 누운 채로 간신히 어지러운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믿을 수 없게도 방금 전까지 내가 앉아있던 책상 아래에서 굵직한 나무덩굴이 휘감기며 자라 올라와 있었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져 내리고 있는 내 책상의 파편들과 노트의 종잇조각들을 바라보며 나는 얼이 빠져 버린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뭐야?"


 이미 교실은 비명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 소란스러운 광경 안에서 아직도 자라나고 있는 것처럼 덩굴이 기분 나쁘게 꿈틀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갑자기 자라난 덩굴로부터 수없이 가는 줄기들이 나와 란란을 향해 빠르게 쏘아져 뻗어 왔다. 


 "아악!!"


 어떻게 손 써 볼 겨를도 없이 나는 발목이 붙들린 채로 나무 덩굴에게로 삽시간에 끌려 들어가 버렸다. 숨을 조여 오며 기분 나쁘게 온 몸을 조여 오는 덩굴에 휩싸여 나는 점점 나무 덩굴의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점점 희미해지는 좁은 시야 속에서 란란이 필사적으로 나를 잡아내려 줄기들을 뿌리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란란을 향해 있는 힘껏 손을 뻗어 보았다. 잡아줘. 란란! 나를 바라보며 란란이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너무 멀게 느껴져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가 없었다. 세상이 빙글 회전하는 기분이다. 의식이 멀어져 갔다.


 가죽 북이 터지는 것 같은 펑 소리와 함께 갑자기 막혔던 숨이 탁 트여오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 위로 떨어져 내린 나는 갑자기 들이마셔지는 숨에 콜록대며 쓰러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자 다급히 달려온 란란이 나를 일으켜 안아줬다. 란란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거리며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은은한 녹빛을 띄며 란란의 품안에서 열쇠가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파루루, 괜찮아?"

 "응..."


 란란의 품에 안겨 일어나며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란란의 소원력으로 인해 터져나간 덩굴은 금방이라도 다시 자라날 듯 꿈틀거리며 계속해 나에게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란란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 곳에 있으면 안 되겠어. 가자."

 아수라장이 된 교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뛰어가자 소란스러운 소리에 교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던 다른 반의 아이들이 모두 우리를 의아하게 바라다보았다. 


 "이렇게 아이들이 많아서는 여기서는 변신 못 해! 어떻게 하지?"

 "구관. 구관으로 가자. 거긴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란란의 손에 끌려 숨을 헐떡이면서 나는 답했다. 구관이라면 지금 방학 중에 예정된 증축을 위해 지난달부터 사용이 금지 되어 있었다. 그곳이라면 보는 시선에 자유롭게 란란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저지하려는 듯이 우리가 달려 나가고 있는 복도의 창가를 따라 계속해 어디선가 넝쿨이 자라와 뻗어 오고 있었다. 달리고 달려서 가까스로 구관으로 향하는 통로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급하게, 달려가던 란란의 손을 멈춰 세웠다.


 "란란, 저기!"


 통로 쪽 끝의 구관으로 들어서는 문 앞에 무언가가 서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얼핏 타조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뭐? .....위험해!!"


 란란이 급히 손을 내뻗음과 동시에 눈앞에 녹빛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방패의 현상이 그려지며 무언가 육중한 동체가 날아와 부딪혀 왔다. 그 갑작스런 상황에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 바라보자 우리의 앞으로 돌격해 온 건 생각보다도 더 끔찍한 생물이었다. 사람의 다리를 닮은 비대한 두 다리 위에 제멋대로 꼬여져 있는 번들거리는 근육덩이가 누군가의 실수로 붙여져 있는 듯 한 모습의 그 생명체가 부딪혀 온 그대로 버둥거리며 얼굴이라고 불러야 할 길게 뻗어있는 조그만 근육 덩어리에 나 있는 이빨을 꽥꽥 벌리며 끔직한 괴성을 터트려 내고 있었다. 


 "저, 저리가!!"


 생리적 혐오감에 굳어버린 란란이 반사적으로 품에서 열쇠를 끄집어내 있는 힘껏 휘둘러 그 생명체를 쳐내어 버렸다. 기분 나쁜 소리를 지르며 그것이 튕겨져 나가자마자 나와 란란은 구관을 향해 통로를 달려 들어갔다. 출입을 막기 위해 채워져 있던 두꺼운 자물쇠를 열쇠로 부숴버린 란란은 문을 열며 내 손을 잡고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입구를 막아야겠어."


 열쇠를 손에 쥔 채로 문가에 손을 뻗은 란란이 눈을 감고 소망을 품자 문 주위로 투명한 방패의 모습이 크게 펼쳐졌다. 방패가 막 모양을 다 갖추는 틈을 타 바깥으로부터 무언가 부딪혀오며 문이 떨어져 나갈 듯 흔들려 왔다. 완전히 겁에 질려버린 나는 란란의 손을 붙잡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방금 전의 생명체가 계속 들이 받고 있는 듯 문의 덜컹거림은 끝나지 않았다.


 "란란...."

 "괜찮아. 못 들어올 거야."


 란란을 돌아보았다. 긴장한 듯 입술을 꾹 다문 란란의 얼굴이 보였다. 애써 침착한 듯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란란도 지금 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괜찮은 척 밝은 척 주변에 기를 부어넣으며 으쌰으쌰하는 모습을 보이려 애쓰지만 란란이야말로 누구보다 겁쟁이고 감성이 여린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언제나 남보다 더 용기내고 있을 뿐이다. 


 그런 모습이 남들에게 들키는 게 싫어서, 정말로 남들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란란은 소원을 빌었다. 그렇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가 바뀌는 건 아니니까 그저 란란은 전보다 더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란란은 그만큼 전보다 더 무리하고 있다. 더 힘들고 지쳐가고 있을 텐데도 힘내고 있는 것이다. 


 요동치던 문이 점차 잠잠해져 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아끌고 구관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란란의 손길에 나는 급히 란란을 바라보던 안타까운 시선을 감췄다. 란란의 소망을 지켜주고 싶다. 그렇게 다짐했다.


 "어째서 저것들이 갑자기 학교까지 나타나 파루루를 노리는 거지?"

 "란란, 저게 뭔지 알고 있어?"

 "그다지."


 란란이 미간 끝을 찡그리며 무언가 고심하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요 며칠 사이에 저런 것들과 몇 번인가 마주쳐서 싸운 적이 있었어. 어디선가 갑자기 쿵! 하고 불안감이 전해져 와서 달려가 보면 항상 저런 이상한 생명체들이 있었거든. 하지만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특정한 무언 가만을 쫓아 달려드는 것은 본 적이 없어. 그저 언제나 이리저리 배회하며 피해만 주고 다녔는데...."

 "뭐? 잠깐! 그럼 요 며칠 동안 계속 혼자서 저런 것과 싸워오고 있었다는 거야?!"

 "그.. 그거야."


 이제야 란란이 극도로 피곤해 하는 모습을 보이던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다. 아무리 학교에 있는 내내 고민 상담에 시달리고 그것들을 해결해주느라 방과 후까지 바빴던 란란이라지만 그런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녹초가 되어가던 것은 역시 의문 이였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런 것들과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 내내 싸우고 있었다면 란란의 지금 몸 상태도 설명이 된다. 저것들과 싸우느라, 저것들에게 피해 입은 모든 것들을 되돌리느라 얼마나 란란이 자신의 소원력을 아낌없이 펑펑 써댔을지 짐작이 갔다. 


 "란란, 너 진짜 바보야?! 어째서 혼자서 그렇게......"

 - 쿠콰아아앙!!!!


 란란에게 화를 내던 내 말을 삼키며 커다란 소음과 함께 우리가 걸어가고 있던 복도의 벽을 부수면서 검은 두꺼비 같은 것이 뚫고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나 코도 없이 그저 무섭게 큰 입만을 가지고 있는 그 검은 덩어리 같은 것의 등 위로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금은보화들이 가득하게 비죽거리며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벽을 뚫고 나온 자신의 기세를 못 이겨 반대편 벽까지 부수며 벌러덩 뒤집어 진 그것은 살찐 몸을 주체하지 못 하고 조그만 다리들을 마구 허공중으로 휘저어 대며 버둥대고 있었다. 그 때마다 그것의 몸에서 금화며 장신구들이 땅에 떨어져 나와 복도 위를 요란스레 나뒹굴었다.


 "이쪽으로!"


 뚫린 벽 사이로 좀 전의 흉측한 근육덩어리 생명체와 나무 덩굴들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바라 본 란란이 급히 내 손을 잡아끌고는 꺾어진 다른 복도로 나를 이끌었다. 복도를 달리며 뒤를 돌아보자 이미 그 괴수들이 복도 안쪽으로 들어와 우리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하지. 란란?"

"계속 이대로 도망칠 순 없겠어. 이렇게 되면 싸우는 수밖에...."


 달려가던 란란이 열쇠를 치켜들어 허공중에 꽂아 넣어 돌리자 즉각적으로 온유한 녹빛이 물결쳐 나오며 열쇠를 닮은 정갈한 녹빛의 문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열렸다. 그 문을 통과한 란란은 며칠 전 봤었던 우아한 느낌의 단정한 미니드레스 차림에 자신의 키보다도 큰 은빛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뛰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란란이 뒤쫓아 오고 있는 괴수들을 향해 마주 섰다.


 - 키에에에엑!!!!!


 란란의 변신 모습을 본 좀 전의 근육덩어리 생명체가 크게 발을 구르는가 싶더니 순간적인 잔상을 남기며 빠른 속도로 좁혀 왔다. 란란은 지지 않고 마주 돌진하며 방패를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쾅! 하는 귀청을 짓이기는 충돌 음이 울려 퍼지며 둘 사이에 부딪힌 허공중에서 란란의 방패로부터 발산되는 신비한 문양이 번뜩였다. 충격에 버티지 못 하고 비틀대며 물러나던 란란은 이내 중심을 회복하고는 이를 악물며 다시 방패를 막아 세웠다. 막아선 방패 앞으로 무서운 기세로 나무덩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는 란란의 방패를 에워싸며 점점 나무덩굴들이 뻗어 들어왔다. 


 "파루루, 어서 도망쳐!"


 방패를 빼앗기지 않으려 기를 쓰며 란란은 나를 돌아보고 다급히 외쳤다. 역시나 란란 혼자서 막아서는 건 무리이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굳어버린 발을 떼지 못 한 채 갈등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저런 란란을 두고 나 혼자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절부절하지 못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옆의 벽을 무너트리며 방금 전의 그 두꺼비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벽이 무너지는 통에 휩쓸려 주저앉아 버린 내 앞에서 그것은 나를 내려다보며 두꺼운 혀를 날름거려 입가를 다셨다. 


 "꺄아악!!"

 "파루루!"


 단숨에 나를 휘감아 올린 끈적한 혓바닥으로 인해 그것의 입안으로 빨려들어 가던 내가 비명을 내지르자 돌아본 란란이 어거지로 힘을 방출해내 방패에 붙은 덩굴들을 끊어내고는 나를 향해 달려들어 왔다. 단번에 나를 삼키려던 두꺼비를 방패로 후려쳐낸 란란이 떨어지는 나를 받아내고는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괜찮아?"

 "아... 응."


 기분 나쁘게 끈적이는 점액질들에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라는 듯이 란란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란란이 몸이 붕 떠올라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돌아서 있던 란란을 단숨에 휘어감은 채 들어 올린 나무덩굴은 계속해 겹겹이 모여들며 엄청난 힘으로 란란을 쥐어짜듯 옭아 메기 시작했다. 듣기 싫은 뿌드득 거리는 소리들과 함께 온 몸을 조여 오는 고통 속에 란란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끔찍한 모습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고야 말았다. 너.. 너무해! 란란의 손에서 힘겹게 붙잡고 있던 은빛 방패가 결국 놓쳐져 떨어져 내렸다. 바닥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구는 방패를 바라본 나는 나도 모르게 겁도 없이 그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로 옆에서 나무덩쿨들이 꿈틀대며 요동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방패를 들어 올리려던 나는 생각보다도 더욱 무거운 방패의 무게에 그만 놀라 버렸다. 두 손으로 아무리 기를 써 봐도 조금밖에 들어 올리지 못 한 방패를 질질 끌며 나는 머리 위에서 나무덩굴들에 붙잡혀 있는 란란을 올려다보았다. 


 "란란!!"


 애타는 내 목소리에도 귀를 틀어막고 싶은 나무덩굴의 옥죄어 오는 소리 외에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제발, 어떻게든 란란! 간절히 란란을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앞으로 나타났다. 마치 잔상에 가까운 육중한... 내가 채 어떠한 대비도 하지 못 했을 때 내 손에 들려있던 은빛의 방패가 마치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듯 내 앞을 막아섰다. 


 쾅!!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나는 벽을 들이받으며 튕겨져 나가 버렸다. 뒤이어 날아온 방패가 맥없이 내 옆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왜인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괴, 괴로워... 마치 몸이 사라져 버린것 만 같은 기분. 온몸을 관통하는 고통에 신음조차 흘리지 못 하고 웅크리고 있는데 눈물이 맺혀져 뿌옇게 번져버린 시야 속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자가 가까워짐에 따라 기분 나쁜 더운 숨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내 눈 앞에까지 다가온 근육덩이의 괴수는 내 얼굴 가까이로 고개를 들이밀어 자신의 그 조그마한 얼굴을 갖다 대었다. 숨을 킁킁대며 냄새를 맡던 그것이 갑자기 그 조그마한 얼굴 전체를 기형적으로 활짝 벌리며 그 안으로 가득 찬 송곳니들을 드러내 보였다. 


 - 키에에에엑!!!


 냄새나는 타액과 함께 괴성을 토해내며 그것은 그대로 나를 향해 이빨을 박아왔다. 시, 싫어.... 저리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려냈다. 혐오감 섞인 구역질과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까맣게 포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괴수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뒤이어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보자 믿을 수 없게도 란란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엉망이 되어버린 드레스와 곳곳에 상처가 벌어져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으로 절룩거리며 힘없이 서 있는 란란의 한쪽 팔이 부자연스럽게 덜렁거리고 있었다. 


"라.. 란란!!"


비틀거리며 내 옆에 떨어져 있던 방패를 주워든 란란은 조용히 내 앞을 막아서며 돌아섰다. 


 "파루루. 분명 계약을 맺을 때 내가 간절히 바라면 바랄수록 더 강해질 거라고 약속의 문이 말했었지?"

 "뭐....?"

 "난 파루루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보다 더 간절히 바라볼게. 내 친구를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더 간절히 빌어보겠어."


 기도하듯 두 눈을 감으며 란란이 말해왔다. 그런 우리를 중심으로 괴수들이 틈을 보듯 배회하기 시작했다. 저만치 란란에 의해 날려나간 근육덩이가 버둥대며 일어나서는 괴성을 토해냈다. 화가 난 듯 꽥꽥 거리던 괴수의, 근육으로 뒤덮인 거대한 다리가 꿈틀대며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그 육중한 몸체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 들어 왔다. 


 - 콰가아아앙!!!!


 돌진해 오던 괴수는 갑자기 땅을 뒤흔들며 솟구쳐 오른 거대한 은빛의 방패에 막혀 튕겨져 나갔다. 근육덩이의 괴수가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나무덩굴 괴수와 두꺼비 모양의 괴수 주위로도 그 위압적인 방패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솟구쳐 나왔다. 란란의 방패에 새겨진 녹빛의 열쇠가 밝게 빛나며 란란의 몸에서 부드럽고 눈부신 초록빛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란란..."


 눈을 떠낸 란란의 눈동자가 녹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방패를 가볍게 그러지며 발을 구른 란란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더니,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근육덩어리 괴수의 머리 위에서 나타나 방패를 내리쳤다.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한 문양들이 허공에 드러나 흩어지며 엄청난 충격으로 괴수는 바닥으로 쑤셔 박혀졌다. 부서져 솟구치는 복도의 파편들 속에서 공중에서 내려앉으며 란란은 그대로 처박히고 있는 괴수를 향해 킥을 날렸다. 문양들이 번뜩이며 그 육중한 몸체의 괴수가 질량을 무시한 채 시끄러운 괴성과 함께 두꺼비 모양의 괴수를 들이받으며 벽에 처박혔다. 


 란란을 제지하려는 듯이 나무덩쿨들이 무시무시하게 자라나며 쏟아져 왔다. 돌아본 란란이 뼈가 부스러져 덜렁거리던 팔을 들어 그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빛이 감싸아 돌며 믿을 수 없게도 단숨에 상처가 재생되며 팔이 복구되어 제모양을 갖추어 돌아왔다. 회복된 란란의 손앞에서 빛이 발하며 방패 형상의 막이 펼쳐져 나오자, 덩굴들은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그 힘에 부딪히며 가지가지 부서져 흩어져 날렸다. 삽식간에 완전히 파쇄 되어 버린 그 수많은 덩굴들의 잔해에 내가 말을 잇지 못 하고 있을 때, 복도 저편으로 부터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눈을 들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자 혐오스럽게도 방금 전 같이 날아갔던 근육덩어리의 괴수를 그 검은 두꺼비 생김의 괴수가 입안으로 집어 삼키고 있었다. 온 몸을 흔들며 고개처럼 길게 뻗어있던 근육 끝의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던 근육덩어리의 괴수는 얼마 못 가 그대로 그 검고 맨들맨들한 두꺼비 괴수의 둥근 몸 안으로 완전히 삼켜져 버렸다. 깨객 거리는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란란의 앞으로 뒤뚱거리며 기어온 괴수가 이어서 무서운 속도로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나무덩쿨들을 계속해 입안으로 털어 넣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지막 남은 한 줄기까지 모두 먹어치운 그 두꺼비 같은 검은 괴수의 몸에서 점점 변화가 일어났다. 급작스레 몸이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골격과 근육들이 튀어나와 거대해지고, 나무덩굴과 온갖 값나가는 보석류들이 박혀 있는 몸 곳곳에서 제멋대로 팔과 다리 같아 보이는 것들이 뻗어 나오더니 땅을 짚으며 괴수는 일어나 섰다. 괴수의 어깨로부터 배를 가로질러 비스듬히 나있는 거대한 입이 벌어지며 란란을 향해 포효했다.


 - 크라라라라라!!!!!!!!!!


 순식간에 복도를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해진 그 끔찍한 생김의 괴수가 돌진해오며 란란을 향해 근육으로 뒤덮인 거대한 팔을 휘둘러 왔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란란의 앞으로 거대한 방패들이 연이어 튀어 올라오며 괴수를 막아섰다. 돌진을 늦추지 않은 채 괴수는 뒤엉킨 팔과 다리들을 거침없이 휘두르며 그 모든 방패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어대었다. 복도를 가득 메우며 떨어져 내리는 번쩍이는 방패의 파편들 속에서 란란의 앞까지 다다른 괴수가 크게 포효하며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란란이 무심히 자신의 은빛 방패를 들어 올렸다. 


 - 쾅!!!

 귀청을 짖이기는 굉음과 함께 괴수의 주먹을 막아낸 란란의 방패 앞으로 허공을 비산하며 신비한 불꽃들이 번쩍이며 퍼져나갔다. 미동도 하지 않는 란란의 방패 앞에서 찍어 누르고 있던 괴수의 주먹으로부터 꿈틀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나무덩굴들이 삽시간에 튀어나와 란란의 방패 앞에서 번쩍이던 신비한 문양 속을 파고들어갔다. 자신을 에워싸려 하는 나무덩굴들에 란란은 그대로 괴수의 주먹을 방패로 쳐내며 괴수의 비대한 몸을 향해 접근해 들어갔다. 전혀 예상외의 위치에 매달려 있던 괴수의 팔 다리들이 그런 란란을 막아서려 움직였다. 란란은 그것들 중에 괴수의 균형을 잡고 있던 팔 하나를 기술 좋게 방패로 쳐 쓰러트리고는 넘어지는 괴수의 몸통을 향해 그대로 방패를 들이받아 날려버렸다. 


 육중한 몸통이 복도를 사정없이 부수며 날아가서는 처박혔다. 거짓말 같은 빠르기로 그것을 따라잡은 란란이 처박히는 괴수를 향해 다시 한 번 방패를 휘둘러 쳐내버렸다. 란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날아가던 괴수는 제멋대로 돋아나 있던 손발을 솜씨 좋게 움직이며 균형을 회복해 착지하였다. 엎드린 괴수가 몸을 부풀리자 갑자기 괴수의 몸으로부터 금화며 금괴 같은 것들이 란란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란란이 가볍게 방패를 들어 올려 막아 세우는 자세를 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란란의 주변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나무덩쿨들이 쏟아져 올라오며 란란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먼지구름들이 걷히며 부서져 버린 복도에, 단단히 에워싼 나무덩굴들과 그것의 곳곳에 빽빽하게 꽂혀진 금은보화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저 그 뿐. 란란은 어느새 괴수의 머리맡에 올라타 있었다.


 쿵! 하며 괴수에게 란란이 손바닥을 쳐내자 삽시간에 괴수의 주변으로부터 강한 스파크가 일어나며 하얗게 빛나는 방패들이 둥글게 솟아올라 괴수를 감쌌다. 서로서로 공명하며 강렬한 파동과 함께 방패가 불꽃을 튀기자 괴수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 방패의 진 안에서 가볍게 뛰어올라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오고 있는 란란의 모습 뒤로 괴수의 몸이 조금씩 부서져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에서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휘몰아 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이 악몽 같던 시간이 드디어 끝났다는 작은 안도감 하나가 나를 안심시켰다.


 그 때, 걸어오던 란란이 서서히 쓰러져 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란란...? 나는 달려가 땅위로 쓰러지고 있는 란란을 붙잡아 안았다. 란란은 마치 죽은 것처럼 내 손에 힘없이 늘어져 닿아왔다. 란란?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왜 이래!


 - 크라라라라라!!!!!!!


 건물을 진동하며 터져 나온 포효소리에 놀라 바라보자 란란이 쓰러진 탓인지 힘이 약해진 방패의 진 안에서 괴수가 몸부림치며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 방패들이 위태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란란! 일어나봐! 란란!"

 "그녀는 이제 깨어날 수 없다."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묘한 목소리가 마음속에 울려와 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다보았다. 그곳에 거짓말처럼 약속의 문이 나타나 나와 란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란란이 깨어날 수 없다니 무슨 소리야?"

 "야마우치 스즈란은 스스로의 소망으로 인해 자신을 봉인한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녀 스스로 깨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문을 노려보았다.


 "시마자키 하루카. 너는 현실과 비현실의 의미를 알고 있나?"

 "뭐...?"

 "사람이라는 생명체는 모두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두 그 각자 자신만의 세계에서 삶을 영위해가고 있다. 그래서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이해하는 것들도 모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게 되지. 모두 한 공간 안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모두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아. 시마자키. 너라면 이 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이다."

 "무슨 뜻이야..?"

 "그 말 그대로의 의미일 뿐. 너라면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이라는 소리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 분하지만 문의 말이 이해될 것 같았다. 나는 이미 다른 사람과 나의 세계를 구분지어 놓고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세계가 다른 시간대로 흘러가길 바랐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만의 세계도 존중받아 주길 바랐다. 그런 나였기 때문에 애초에 지레 겁을 먹고 일찌감치 란란에게 손을 뻗어내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이 아이의 세계가 나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세계라는 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거리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뭐? 그게 지금 란란의 상태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야?!"

 "이야기를 천천히 듣는 것이 좋다. 시마자키. 너는 반드시 이 모든 이야기들에 대해 충분하게 이해하여야만 한다. 너는 그럴 자질이 있지. 그것이 야마우치의 짝으로 너를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란란의 짝...? 나는 안겨있는 란란을 내려다보았다. 나와 란란을 동시에 선택한 이유..? 모르겠어.... 도대체 왜 자꾸만 우리를 괴롭히는 거야!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무엇이든지 이뤄낼 수 있다. 모든 것에 오롯한 세계의 중심은 자신이고, 자신은 그 세계의 절대자이자 창조주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권능일 뿐.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의 세계와 뒤섞여 살아가고 있는 더 커다란 개념적 세계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알겠나, 시마자키? 언젠 부터인가 너희들이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이름의 세계는 단지 어떠한 개념적 주머니에 지나지 않아. 그 안에 너희들이 비현실 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해 버린 너희 자신들만의 세계를 몰아넣기 위해 급하게 날조된 너절한 구슬 주머니 같은 것일 뿐이야. 그 안에서 그저 작은 구슬들인 너희들은 모든 권능을 잃어 버린 채 그저 달그락달그락 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너희가 말하는 현실과 비현실의 진짜 의미이다. 시마자키."

 "...무슨 소리야. 날조된... 세계..?"

 "그래. 서로가 서로의 분리된 독립적 세계를 지켜내기 위하여 만들어낸 개념적 허상. 타인의 권능적 능력이 자신의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 하도록 방어하는 새로운 세계의 룰. 그래 정말로 마치 하나의 작은 구슬과 다르지 않아. 자신의 세계를 봉인하여 타인의 세계와 융화되지 못 하도록 단단히 막은 씌운 후 자신의 권능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주머니 속 세계에서 보잘것없는 한 알의 구슬로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인류라는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의 권능을 스스로 봉인했다는 거야? 도대체 자꾸 무슨 소리를..... 그게 란란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묻고 있잖....!"


 잠깐? 무언가 머리속을 스쳐지나 간다. 권능. 비현실. 자신의 세계.... 그렇다면 소원이라는 거....?! 나는 갑작스레 문과의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소원의 실체를 깨닫고 말았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 한하여 이루어지던 소원의 조건. 그 소원에 의하여 자신이 열망한 만큼 그 소망이 이루어지던 능력들... 그래. 만약 문의 말이 맞다면 그것들은 모두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가장 염원하던 자신의 소망. 말 그대로 자신의 비현실 이다. 


 "계략이란 거, 자신의 가장 열망하고 있던 자신 세계 안에서의 비현실 하나를 현실에 이뤄지게 해주고 있었던 거야...?"

 "그래. 이해했나? 우리는 자신의 비현실을 현실에 이루고 싶어 하는 너희의 강렬한 염원을 매개체로 너희가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개념적 세계의 룰을 뛰어넘어 그 현실이라는 구슬 주머니 안에서 너희 자신이 비현실이 퍼져나가도록 돕고 있었다. 너희 자신이 스스로 가지고 있던 권능을 이 현실이라는 세계에, 다른 수많은 개별적 타인의 세계에 융화시킬 수 있도록 해준 것이지." 

 "그래서 란란한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데?! 거짓말쟁이! 역시 무언가 대가가 있었던 거지?! 란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외침에도 문은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소원에 의해 그 자신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없다."

 "그럼 어째서 란란은?!"

 "우리는 이미 말 해 주었다. 그녀는 자신 스스로의 소망으로 자신을 봉인한 것이다."

 "무슨 소리야 그게...! 어째서 란란이 스스로를?!"

 "저것들이 보이는가?"


 문의 마치 가리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그 시선을 따라 돌아보았다. 란란이 마지막으로 펼쳐둔 방패들의 진을 밀어내려 애쓰며 괴수가 포효하고 있었다.


 "계약을 맺은 자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현실이라는 세계와 그 안에 갇힌 타인의 세계에 자신의 세계, 비현실을 자신의 강한 염원을 이용하여 융화시켜 나간다. 원래부터 견고하게 구분되어 있는 타인의 수많은 세계와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한 개념적 세계의 룰을 무너뜨리며 강제적으로 자신의 비현실을 주입시켜 나가는 것이지. 그 결과 서로 다른 세계들과의 벽이 극렬하게 맞부딪히는 과정에서 현실이라는 개념적 세계에 점점 소원자의 비현실로 오염된 틈이 벌어져 간다. 그 오염된 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저 마수들이야. 저것은 모두 어느 누군가의 소원들이 만들어낸 비현실의 산물이나 다름이 없다."


 뭐...? 저것들이 모두 소원의 영향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거짓말... 그럴 수가!


 "어째서 그런 것을 말해주지 않은 거야?! 애초에 너희들이 그런 것을 말해줬더라면 누구도 이런 소원 따위 빌지 않았을 거야. 저런 괴물 같은 거 누구도 만들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과연 그럴까? 우리는 너희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단지 너희를 돕기 위해 너희가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도록 묻지 않는 이상 말하지 않은 것뿐이다."

 "너무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최소한 란란이라면 절대 저런 것 원했을 리가...!!"


 문을 향해 소리치던 나는 란란의 쓰러진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란란이 스스로를 봉인하였다는 건...


 "그럼 란란은 저 마수를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봉인하였다는 거야?"

 "그래. 그녀의 소원은 다른 모두에게 힘이 되어주고 의지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 원래대로라면 소원 자에게는 어떠한 대가도 없이 단지 그 소원 자와 별게된 존재로서 마수가 태어나는 것뿐이지만 야마우치는 특별하게도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고 그것이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로부터 마수가 태어나는 것을 억제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현실이라는 세계의 틈바구니 속에 마수가 비집고 나가지 못 하도록 자신의 비현실 세계에 계속해 묶어두고 있었던 것이지. 하지만 그녀의 소망은 애초에 너무도 강력했다. 어떠한 특정한 형태도 범위도 지정되지 않은 무한한 잠재 가능성을 품은 소원이지. 그런 강한 소원에 의해 태어나는 마수를 언제까지고 그녀가 잡아둘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깨닫지 못 하고 있는 사이에 모두 그것을 막는데 소진시켜 버렸고 결국 최후의 방법으로 그녀 자신의 남은 힘으로 자신을 봉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 모두 그녀의 소망이 이끄는 무의식이 인과이므로 그녀에게 대가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마저도 그녀의 소원이기 때문에."


 그런... 무기력하게 내 품에 안겨있는 란란의 얼굴을 내려보며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란란. 그래서 그렇게 지쳐 있었던 거야? 그런데도 그렇게 모두를 위해 힘을 계속해 사용했었어? 그리고 마지막까지 나를 위해서....?


 "너희들.... 정체가 뭐야?"

 "태초의 완벽했던 세계에 혼돈의 방정맞은 장난질로 인류가 인해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해 오던 완전한 정신체. 하나이자 모두..."

 "그래서 인간을, 이 세계를 어떻게 하려는 건데?"

 "너희 소원 자들은 소원을 실현시켜감으로써 주변의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너희들도 모르는 새에 현실이라는 개념적 세계를 점점 오염시켜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소원에 맞는 마수를 계속해 탄생시켜 그 마수들이 너희들과는 별도로 다른 존재들의 세계를 침범해 오염의 속도를 촉진시키는데 공헌하고 있지. 그래. 너희가 더 많은 대상을 상대로 더 강력한 소원을 염원할수록 현실이라는 개념은 뭉그러지고 비현실이 개념을 지배하며 퍼져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완전히 이 현실이라는 주머니 속을 가득 채웠을 때 현실이라는 개념은 그 의미를 잃고 소멸하게 되겠지. 그때에 이르러서야 너희는 비로소 태초의 완벽했었던 본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세계가 공유되고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단일 정신체. 알겠나? 우리는 혼돈에 의해 퇴화되었던 너희들 인류를 다시 우리와 같은 완전체로 구원해주기 위해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가 당장이라도 스러질 것 만 같은 기분이었다. 단일 정신체..? 모두의 세계가 융합되어 버린 새로운 세상? 그런 거.. 그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세계가 파괴될 거란 소리와 다르지 않잖아! 아무리 자신의 소원을 열망하던 자라도 이 사실들을 알았다면 계약 같은 거 맺었을 리가 없어. 란란이 이런 걸 바랐을 리가 없다고! 란란은 그저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던 순수하고 착한 마음뿐이었다. 모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소원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이렇게 이용했었다는 거야? 너무해.. 너무하잖아. 정말!


 "나에게 이것들을 말해주는 이유가 뭐야?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야, 문?"

 "우리의 일은 언제나 하나. 시마자키 하루카.... 너에게 묻겠다."

 "........"

 "너의 소원은 무엇인가?"

 ".......뭐?"


 ......말문이 막혀왔다. 진심이야? 지금까지 소원에 의해 세계가 붕괴될 거라는 사실을 말해놓고는 내게 소원을 묻고 있다. 내게 계약을 맺기를 묻고 있다. 문과 처음 조우한 날. 문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왔다. '너는 곧 소원을 말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거 였을까...? 처음부터 모두 문의 뜻대로 였던 거야?


 나는 허탈한 눈으로 문을 올려다보았다. 문은 그저 나의 답을 기다리며 고요히 부유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창백하고 무기질적인 모습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빌게 될, 빌어야 할 소원이 무엇인지 직감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 문이 내게 기대하고 있는 대답임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정말로 원하는 소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소심하고 언제나 용기내지 못 하는 나라도 존재하는 모든 타인의 세계와 현실이라는 세계의 룰을 부수어낼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이 자리에서 간절히 갈망할 수 있는 소망 한 가지. 만약 지금 내가 이 소원을 문에게 말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상대로 한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누구든지 나를 비난한다 하여도 어쩔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소원을 문이 나에게 말하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것 외에 어떠한 방법도 없어. 지금 내가 또 다시 용기내지 못 한다면 나는 영원히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미안해. 하지만 이게 나인 걸.... 나는 남이 아니니까, 내가 정말로 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 움찔거리던 입술을 열어 나는 대답하였다. 

 "내 소원은...."

 "........."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마수를...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태어날 모든 마수를...."

 ".........."

 "소멸시킬 힘을 나는 갖고 싶어."

 ".........정말인가?" 

 "....응."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있어도 말이지?""


 나는 힘없이, 하지만 확실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란란을... 스스로를 봉인한 란란을 구해야만 한다. 지켜줘야 해. 나는 이해할 수도 따라 할 수도 없을 란란의 소망이지만 그 순수한 마음을 응원해주고 싶어. 란란이 언제까지고 행복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 주고 싶어! 그러니까, 그러기 위해선 란란이 자신의 소원력을 마수를 물리치는 일에 낭비하지 않도록 란란을 대신해 누군가 마수를 물리쳐 줘야해. 란란의 안에서 마수가 자라나지 못 하도록 막아줘야만 해. 설령 그것이 이 세계의 붕괴를 방치시키는 행위일지라도... 그것으로 란란이 행복할 수 있다면 내가 그렇게 하겠어. 어쩔 수 없잖아. 그것만이 지금 내가 진심으로 바랄 수 있는 소원이니까...


 "나는 란란처럼 세계의 모든 존재들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거나 하는 거 바랄 수 없어. 그런 건 나에겐 너무도 크고 무거운 그저 환상 같은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바로 내 옆에 있는 친구를 위해주는 것, 그 정도뿐.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들로부터 세계를 구하겠다거나 하는 소원 같은 것 역시 말할 수가 없어. 그런 건 진심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냥 나는 내 진심을 얘기할게. 란란을, 이 아이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어. 그래서 너희도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던 거지?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 해도 나는 너희들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이 모든 것을 이해하여야만 란란을 지켜낼 테니까. 그렇지? 문."


 떨리는 눈을 들어 문을 바라보고는 나는 웃음을 지어 보았다. 어떠한 대답도 없이 문과 나 사이의 공간이 일그러져 내려왔다. 심장의 고동소리처럼 두근대며 공간이 뛰어댄다. 눈 앞을 어질이는 온갖 신비한 문양들 속에서 나는 고요히 부유하고 있었다.


 "........... 너의 소망이, 진실 됨이 입증되었다."


 시야를 감싸며 눈부시게 빛나는 서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앞으로 어느새 푸른 빛결의 열쇠 하나가 서서히 내게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열쇠를 손으로 가만히 받아 쥐었다. 열쇠를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한기가 시리게 스며 나왔다. 이제 모든 것이 문의 뜻대로 되었다.


 문은 란란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문의 말 대로다. 란란의 소원은 그 형태도 깊이도 알 수 없는 무한한 잠재 가능성을 가진 순수하고 티 없는 소원이었다. 그 턱없이 강력한 소원의 힘으로 미래의 어느 날. 란란은 정말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자신의 소원의 힘을 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그 란란의 소원으로 인해 현실이라는 주머니에 담긴 모든 타인의 구슬이 란란의 비현실에 오염당할 것이다. 그것이 세계를 붕괴시켜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엄청난 소원의 결과로 최악의 마수를 탄생시켜낼 것 이다.


 그런 가능성을 가진 란란이 하필 그 어떤 계약자도 갖지 않았던 맹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의 소원이 란란을 속박하여 그녀가 어떠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전에 그녀 스스로를 봉인시킬 운명이었다. 그것을 못내 아쉬워하던 문에게 아마도 나라는 존재가 때마침 나타나 줬을 것이다. 


 아마도 그 날 문과 계약하기 전 우리가 그 피투성이의 여자를 만나게 된 것도, 요 며칠 간 란란의 주변에서 계속해 마수가 나타났던 것도, 그리고 지금 나를 쫓아오던 마수들까지 모두 문의 계획이었을 터다. 기억해 보면 레나라는 여자는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해왔었다. '이상하네. 원래 볼 수 없는 건데.' 모든 것을 알아버린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가 의아해했던 것은 아마도 그것이 그녀의 능력중 일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도 그녀가 방해받지 않는 것. 그렇기 때문에 골목을 부수어가며 우리가 쫓길 때에도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 했던 것이다. 그것을 아마도 문이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우리를 궁지에 몰아 넣어서, 란란에게 소원을 강요하기 위해. 내가 침착을 유지하며 란란을 막아설 수 없게.


 이제 란란에게는 그녀를 속박할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제 나라는 해독제가 곁에 있다.


 "그녀는 아직 영글지 않았지만 앞으로 점점 그녀가 자신의 힘에 눈을 뜰수록 그녀가 만들어낼 마수들은 그녀의 소원에 비례해 예측할 수 없을 변화를 가지며 계속해 강력해질 것이다. 시마자키. 네가 그 모든 마수들을 정말로 물리칠 수 있을까?"


 마치 확인하듯 묻는 문의 질문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들어 보였다.


 "할 수 있어. 란란이 아무리 많은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소망을 빈다 해도 나는 그만큼 더 란란만을 위해 소망할 거야. 란란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위해 무한대로 가능성을 펼친다면 나는 란란이라는 제로 포인트를 향해 무한히 간절해지겠어. 그건 전혀 반대의 방향이지만 그 소망의 간절함만큼은 동일한 거라 믿어. 나는 그 어떠한 마수도 소멸시킬 수 있어."


 열쇠를 뻗어내 허공에 끼워 돌려내었다. 시린 빛을 비추며 푸른 문이 눈앞에 열린다. 이윽고 나는 타이트한 푸른빛의 복장을 입은 채 서 있었다. 시선을 내려 보자 손 안에 시리게 빛나는 푸른 창이 존재했다. 내 염원이 만들어낸, 모든 마수를 소멸시킬 소망의 창.


 포효소리가 울려 퍼지며 이미 힘이 다 꺼져버린 란란의 방패들을 헤집으며 괴수가 복도 위로 뛰쳐나왔다. 분노에 차 으르렁 거리던 괴수가 우리를 향해 맹렬히 돌진해 들어왔다. 무서운 기세로 점점 더 가까워져 오는 괴수를 향해 나는 손을 들어 가리켰다.


 "가!"


 포효하며 크게 팔을 내질러 오던 야수의 품으로 창이 한 줄기 빛이 되어 꿰뚫었다. 커다랗게 뚫려버린 구멍사이로 빛을 폭사하던 괴수는 너무도 간단히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나는 허공중에 되돌아온 창을 잡고는 쓰러져 있던 란란에게로 창끝을 돌렸다.


 지금 이 행동으로 이 세계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파멸을 가질지도 모른다. 이를 악물었다. 상관없어. 그딴 거. 나는 힘껏 들어 올린 창을 란란의 가슴에 박아 세웠다. 란란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간 창끝으로 부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이것으로 의식은 끝났다."


 모든 것을 지켜보던 문은 연기가 되어 흩어져 갔다. 란란과 둘만이 남게 된 부서진 교정에서 나는 다시 교복차림으로 돌아온 모습으로 란란을 일으켜 안았다. 흘러내려와 있는 란란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겨주자, 꿈틀대던 란란의 눈 끝이 서서히 떠져왔다. 잠시 멍한 상태로 깜박이던 란란의 두 눈이 나를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파루루...?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전부 해치웠어. 고마워. 지켜줘서. 란란."


 여전히 조금 멍해있는 란란을 끌어안으며 나는 그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란란. 자꾸만 더 끌어안으려 애쓰는 내 모습에 당황해하던 란란의 손길이 이내 다독이듯 나를 마주 안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것을 꾸욱 참아내며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돌아가자... 란란."
                                                                         *       *        *
                                                        
 "파루루! 그리로 간다! 잡아!"

 "꺄악!!"


 여름의 햇살 아래서 가출한 고양이를 잡으러 우리는 뛰어 다니고 있었다. 란란이 쫓고 있던 노란빛의 고양이가 자전거를 지키며 멍하니 서있던 내 얼굴 위를 뛰어넘어 날아올랐다. 허공중을 날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한 컷 한 컷 눈에 들어와 박혔다. 물고 있던 버려진 생선 가시를 찰랑이며 늘어지듯 승리에 찬 앙칼진 소리를 내뱉고 있는 고양이의 입가가 둥글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 쿵!

 "아야야...."

 "파루루, 괜찮아?!"


 달려온 란란이 바닥위로 호되게 엉덩방아를 찧은 나를 일으켜 주며 걱정스레 물어 왔다. 나는 심술이 잔뜩 붙은 얼굴로 란란을 무섭게 쏘아 보았다.


 "그러니까 왜 네가 알지도 못 하는 후배의 집 나간 고양이까지 잡아줘야 되는 건데!!"

 "아, 저기..."


 쪼그라들고 있는 란란을 향해 머리를 헝클이던 나는 그냥 콱 란란의 발등을 밟아 주었다.


 "악!!"

 "아주 그냥 혼자서 잘 해봐!"

 "파, 파루루...!!"


 뒤돌아서 휙 하니 가버리고 있자 아픈 발등을 폴짝 거리며 울상이 된 란란이 자전거를 끌며 뒤쫓아 왔다. 아유.. 하여간 저걸. 뒤돌아보자 징징거리며 달려오고 있는 란란의 모습은, 언제나와 같은 란란 이었다. 생기 넘치는 때 묻지 않은 예쁜 눈을 반짝이며 졸망졸망 뛰어다니는 밝은 란란의 모습. 그곳에 더 이상 어떠한 어둠도 스며있지 않아 나는 남몰래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날 교정에서의 일들이 있었던 후, 때때로 란란은 더 이상 주변에서 괴수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며 이상하다고 내게 물어오곤 하였다. 그 때마다 내가 어물쩍 거리며 퉁명스런 답변으로 넘어간 탓인지 이제는 란란도 딱히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런 것들이 나오지 않는 다는 사실에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다시 회복된 자신의 컨디션에도 별 의문을 갖지는 않았다. 능력을 갖게 되면서 처음 며칠 동안 잠시 스치고 지나간 짧은 열병 같은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했다.


 달려오는 란란을 바라보며 나는 품 안쪽에서 시린 기운을 뿜고 있는 열쇠 위를 가만히 매만져 보았다. 잘 된 일이지?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앞으로도 비밀로 지켜져야만 한다. 란란이 언제까지고 알아차리지 못 한 채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내가 란란의 곁을 언제까지고 지켜낼 것이다.


 세계를 배신한 나는,

 세계의 붕괴를 방치하며 돕고 있는 나는,

 그 끝이 어딜지 모르더라도 시선을 돌려내서는 안 된다.


 다가온 란란을 향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런 쓸데없는 일까지 다 해결하려 하지 좀 말란 말이야!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 하고 있는 지 알아? 네가 무슨 부르면 무조건 달려가는 퀵서비스맨이라도 되?!! 


 "악! 왜 또 때려!!"

 "너 미워서 그런다! 왜!"


 아픈 머리를 매만지며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는 란란에게 흥 하며 코웃음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란란의 눈이 동그라니 커지는 것이 보였다.


 "파, 파루루! 저기! 다시 나왔어! 뒤!"

 "뭐...?!"


 황급히 뒤돌아보자 낮은 담장 위로 좀 전의 고양이가 느긋하니 앉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착 내려감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마지막 남은 생선의 살점을 발라먹은 고양이가 조롱하듯 먹고 난 생선가시를 우리에게 물어 던졌다. 퍽! 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기분 나쁜 감촉이 주르륵 얼굴 위를 훑고 내려가며 비린내가 풍겨 왔다. 어딘가 이마 위에서 불끈 힘줄이 치솟아 오르는 게 느껴졌다. 


 "란란... 변신해."

 "뭐?!"

 "저딴 고양이 변신해서 날려 버리란 말이야!!!"

 "찾아서 돌려주려고 온 사람한테 날려버리라고?!"

 "악!! 그딴 거 몰라! 날려버려!!"


 저 딴 고양이 하나를 위해 소원력을 낭비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저 고양이 날려버리란 말야. 란란! 아니면 내가 날려줄까?! 나도 열쇠를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줄까아아아아?!!


 란란의 열쇠를 빼앗아 들고 휘두르려는 나와 그런 나를 말리려고 내 팔을 잡고 버둥대고 있는 란란. 그리고 그런 우리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하품하는 망할 놈의 저 고양이. 그 슬프지만 웃을 수 있었던 여름... 



 그래. 란란.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한 다해도 상관없어. 무엇이든 소망해. 어떻게든 행복해져 란란.

 그래 정말이야. 그래도 돼.




 너의 곁에서...



 이제부터 내가 지켜줄 테니까.


               - 오늘부터 란파루루~★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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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년여 만에 글에 손을 댄 '오늘부터 란파루루~★' 입니다.

 왜 저런 제목이 붙었는지부터 설명하자면 먼저 초기에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한 달 전, 당시에 마법소녀 마레기를 인상 깊게 봤던 저는 '아... 나도 마법소녀 물 하나 써봐야 겠다!!' 라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커플링으로 물색한 것이 당연 최근 푸욱 빠져있던 란파루루... 그렇게 해서 [ 마레기 + 란파루루 ] 라는 느낌으로 글을 쓰게 됩니다만 마레기라는 작품이 말 그대로 꿈도 희망도 없는 멘붕 애니인지라 자연스럽게 그것의 영향을 받은 제글도 우중충해지고 귤연의 승연이와는 다르게 파루루로는 도저히 개드립을 칠 수 없어서 코믹요소 따위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런지라 란파루루 라고 하면 제 머릿속에 떠올라지는 소소한 달달함 같은 것이 전혀 글에 등장할 기회가 없어서 ( 그런 거 잘 쓰지도 못 하지만 - _-; ) 뭔가 올망졸망 상큼한 학원물의 분위기가 물 건너 가 버렸기에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제목이라도 그럼 하이틴 학원물의 상큼함으로 가자!' 라고 생각해서 지은 게 저 제목입니다. = _=;;;;

 아무튼 다 써놓고 보니 징글징글하게 복잡한 대사만 많고 재미 따위는 물 건너 간 글이 된 거 아닌가 싶습니다만 뭐... 그래도 란파루루니까 봐주자는 기분입니다. 란파루루는 짱이니까요. 가령 용암불이 들끓는 순도 500%의 지옥이라도 란파루루가 있으면 그곳은 천국이니까요.

 어쨌든 세계관 자체가 재미있겠다고 생각도 들고 이런  세계관이라면 충분히 다양한 아이들로 계속해 다른 이야기들을 계속 꾸려나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시작한 것이므로 ( 지극히 잡덕을 위한 배려 ) 중간 중간에 박군♡박양 이라던가 의문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같은 것들을 끼워 넣어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 그 아이들의 뒷 얘기라던가 하는 설정들도 모두 잡아두었는데 그것들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써보고 싶기도 하네요. 

 아! 그러고 보니 소원에 의해 태어나는 마수들은 각자 자신의 소원자의 소원형태에 따라 모습이나 능력이 결정 됩니다. 네. 그런 설정 이예요. 내용 중에 등장했던 다리괴물 같은 경우는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육상 꿈나무 아이의 소원. 즉 다리를 원상태로 돌려달라는 소원에 의해 탄생된 마수고, 금은보화 두꺼비는 일확천금을 바란 이의 소원에 의한 마수. 나무덩굴 마수는 도시에서 벗어나 대자연에 돌아가 살고 싶어 하던 이의 마수였습니다- 

 이번에는 세계관을 구구절절 설명해야만 되는 내용이었으므로 쓰기도 읽기도 골치가 아팠지만 아마도 다른 내용들에서는 전혀 세계관의 등장 없이, 그저 순수하게 소원의 힘을 가진 능력자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구성으로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 만약 쓴다면 말이죠.. - _-; ) 그런 내용에서라면 아마도 란파루루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방패소녀와 말없는 시크소녀 정도의 미스테리 콤비 조연으로 나올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소원 자들 사이에서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모든 마수를 일격에 소멸시키는 신비한 마법소녀 파루루 라던가... (핡?)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냥 다시 란파루루를 주인공으로 여름방학에 어디 외가에 같이 놀러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코믹하고 달달한 그리고 액션이 가미된 발랄상큼물이면 좋겠... //ㅅ//~♡

 그런데 서로를 지키기 위해 한 명은 방패가 되기를 원하고 한 명은 창이 되기를 원했던 게 가만 보니 돋습니다. 음.... 돋아요. 게다가 서로의 복장도 좀 돋습니다. 음... 음.... 음..... 

 아무튼 안 그래도 마이너한 양민 팬픽에 거기서도 초 마이너한 란파루루 팬픽을 이렇게 독점~!!

 실제의 란파루루와는 성격이나 관계나 조금 다르지만 뭐 어때요- ㅎㅎ


 여러분~ 그럼 이제 제가 란파루루 독점해도 되졐-? > ㅂ<?!!



 좋은 란파루루의 독점 선언이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