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해보세요."
"아아~"
초아씨가 입 안으로 밀어 넣어주시는 작은 스푼 위의 푸딩을 향해 한껏 애교 있게 입을 벌려 내었다. 달큰한 향이 느껴지는 탱글한 푸딩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고 생각된 순간 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입을 다물었다. 탁. 하는 짧은 치아의 마찰음이 들려온다.
"......?"
어찌된 건지 영문을 모를 얼굴로 멍청하게 바라보니 내 입가 바로 앞으로 일보 후퇴해 있는 푸딩이 얄밉게도 자신의 탄력 있는 몸놀림을 자랑하고 있다. 내 뻥져있는 모습에 살풋이 웃으시며 초아씨는 다시 자상하게 얘기하신다.
"다시, 아~"
"아아~?"
나도 모르게 그 나긋한 목소리에 홀리듯 입을 벌리자 또 내 입안으로 쏙 들어오는 스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닫자 또 허무한 치아의 마찰음이 한가한 가게 안을 조용히 퍼져 나갔다. 완전히 울상이 되어버린 내 얼굴을 보고 초아씨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우신지 벙글거리고 계셨다.
"아주 놀고들 있네."
카운터에 마주 앉아서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와 초아씨를 바라보며 가게의 테이블 한 구석에 엎드려 있던 민아신이 혀를 찼다. 민아신의 테이블 위에는 방금 전까지 맞추고 계셨던 기묘한 생김새의 입체적인 퍼즐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저렇게 짜증을 내시는 걸 보니 뭔가 맞추다가 잘 안 되셨구나.... 오랜 동거생활로 익숙해져 이제는 대강의 상황만으로도 민아신을 이해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져 버린 것 같다. 그러게 그 급한 성미에 퍼즐 맞추기 같은 건 왜 하셔가지고는....
"이리 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토라진 우리 신령님. 이럴 때 기분이 풀어지도록 달래주는 건 미우나 좋으나 어쨌든 수호령인 나밖에 없다. 나즉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카운터를 떠나 다가가 앉자, 다 귀찮다는 듯이 쓱쓱 팔로 퍼즐조각들을 밀쳐내시고는 민아신은 벌렁 의자에 몸을 뉘이며 한탄하였다.
"아 됐어. 됐어. 다 귀찮아. 아아... 심심해."
심심하면 나가서 악귀 퇴치를 하던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던가 하면서 좀 건설적인 일을 하시지... 속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리고 있자니 민아신은 끝도 없이 투덜투덜 이다.
"아, 그냥 하늘에서 뭐라도 떨어졌으면 좋겠다."
- 우당탕. 쿵. 푸드득. 퍽.
갑자기 민아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평온하던 가게의 적막을 깨고 가게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우며 온갖 물건들이 떨어지고 깨지고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하고 뽀얀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기가 막혀서 민아신을 바라보니 내 시선에 흠칫 놀란 민아신이 그 큰 눈을 자못 심각하게 부릅뜨고는 떨리는 시선으로 먼지구름을 노려보았다.
"......라고 말 한 건 취소."
그런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 되돌려 지냐!! 뭐라 버럭 하려는데 누군가 그 먼지구름 속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오는 인기척에 나는 반사적으로 긴장하며 몸을 돌렸다. 큰 키에 늘씬하게 뻗은 몸매 위로 살짝 헝클어져 있는 갈색빛깔의 머릿결에 친근한 웃음기를 띈 얼굴이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다.
"아하하. 초아씨. 죄송해요. 그만 도착지점을 잘못 설정한 거 같네요."
"신혜정...?"
민아신이 낯선 이름을 말한다. 누구지 이 여자? 민아신과 아는 사이인 건가? 하지만 의문을 갖기도 전에, 어째서인지 짜증이 듬뿍 들어간 얼굴로 민아신은 걸어 나온 인영을 향해 인사대신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던 퍼즐 조각 중에서 하나를 집어 드시고는 대뜸 여자를 향해 집어 던지셨다. 신력을 담은 퍼즐조각은 그 짧은 거리를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다가 여자가 살짝 고개를 튼 공간을 지나쳐 가게의 벽을 꿰뚫으며 처박혔다. 어마어마한 기세라 벽은 그 한 번의 충격으로 또 후두둑 무너져 내린다. 뭐... 뭐하는 거야? 민아신! 황당하고 어이없는 마음에 민아신을 노려보는데,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여자는 오히려 넉살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는 낯을 민아신이 죽어라 노려보고 있자 이내 머쓱해진 여자가 웃음을 거두고는 조금은 진지해진 태도로 물어왔다. 그 물음에 저도 모르게 나는 테이블을 벌떡 박차고 일어났다.
"여전하네. 민아신은. 그나저나 이웃 지역의 유나신에 관한 일인데 말이야.... 혹시 유나신의 실종에 대하여 아는 것 있어?"
신령님 프로젝트 #2
written by.녀놘
완전히 어질러져 있던 가게 안은 지금 빠르고 조용하게 원래의 상태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쓰러진 진열대의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채로 초아씨는 마치 지휘자가 지휘하듯 가볍게 손끝을 움직이고 있다. 손의 궤적을 따라 유려한 곡선이 그어질 때마다 물건들은 스스로 의지를 갖은 듯 자신의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그것에는 어쩐지 물건 하나하나에 대한 초아씨의 애정과 관심이 느껴져와 나는 옆에서 한아름 물건들을 끌어안고 정리를 도우는 와중에도 때때로 홀린 듯 그 아름다운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저리 좀 떨어져 주시지? 왠지 나도 모르게 또 뭐 하나 던질 거 같거든?"
"아... 요새 귀가 나빠졌나?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도통 아무도 보이질 않네?"
"야... 고개 안 내려?"
"어? 아! 깜짝이야! 말 좀 하지. 너무 쬐끄매서 그만 못 볼 뻔 했...."
"이게 진짜!!!!"
소란스러운 소리에 돌아보니, 가게를 어지럽힌 벌로 초아씨한테 혼나고 나서 가게의 한 구석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들고 있던 민아신과 혜정씨가 한창 청소가 바쁜 이 와중에도 여전히 티격태격 중이시다. 몇 번인가 초아씨가 "싸우지 말고 조용히." 라고 나긋하게 경고를 주실 때만 잠시 깨깽하고 조용해졌다가도 또 조금만 지나면 저러고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 도대체 무슨 사이신 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물론 아무래도 계속 시비조인 것은 민아신 쪽인 것 같지만....
"저.... 혜정씨라고 하셨죠? 아니면 감찰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좀 전에 들었던 유나신의 얘기에 걱정되는 마음을 결국 참지 못 하고 다가가 머뭇거리며 물었더니 마침 잘 됐다는 듯이 민아신을 무시하며 혜정씨가 내 쪽을 바라보시고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웃어 주셨다. 감찰사. 대강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감찰사란 상부에서 신령님들의 업무 세부사항들의 평가 및 교정을 위해 파견되는 관리직들이라고 하시는데 아마도 이번에 유나신의 지역에서 무언가 이상 현상이 발견되어 파견을 나오셨던 듯하였다.
"감찰사님은 무슨... 그냥 혜정씨라고 편하게 부르세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유나신이 실종되었다는 얘기.... 정말 사실인가요?"
지역의 신령님이 사라졌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신령님이란 일종의 그 지방의 터줏대감 같은 걸로 쉽게 그 지역을 벗어나거나 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무언가 정말로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긴박한 상황일 때만 신령님은 자신의 지역을 잠시 벗어난다. 그런데 혜정씨는 유나신을 잠시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니라 실종되었다고 표현하셨다. 어떤 확실한 이유가 없는 이상 그런 결론을 지었을 리가 없다. 어쩐지 자꾸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지금 이렇게 신령님이란 존재가 잊혀진 시대에 실종이란 단어는 어쩐지 존재의 소멸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만 만들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애써 되뇌이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 걱정에 싸인 시선을 의식하시는 건지 혜정씨는 난감한 듯 볼가를 긁적이시며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응.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그렇게 단정 하신 거죠?"
"그야... 아마 가보면 설현씨도 알 게 될 걸요? 아! 그러고 보니 마침 그 문제 때문인데...."
잊고 있었다는 듯 손뼉을 소리 나게 치며 소리치신 혜정씨가 대뜸 유나신을 향해 코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대었다. 그 갑작스런 접촉에 민아신의 조그만 체구가 움찔하며 기겁하듯 혜정씨를 향해 주먹을 붕붕 휘두른다.
"뭐... 뭐야?! 죽고 싶어?"
"야... 저기 민아신. 네 수호령씨, 나 당분간 좀 빌려줘라."
에에...?! 뜬금없이 두 분의 대화에서 튀어나온 나에 대한 말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던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빌려달라니? 저... 저는 물건이 아닌데요? 당황해 눈만 큼지막이 뜨고는 바라보는데 어째서인지 금방이라도 불같이 화를 낼 것 같던 민아신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민아신의 표정은 짧은 새에 몇 번이고 변화를 계속한다.
"그거 어쩔 수 없는 거지....?"
"그야 뭐, 인접 지역의 신령이 부제중일 때는 그 지역을 인근의 신령들이 관리해줘야 되는 게 관례니까 말이야."
낮게 신음하며 고민하시던 민아신은 힐끗 나를 바라보시더니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이셨다. 그러더니 일어나 터덜터덜 내게 다가와서는 조그만 손으로 내 어깨를 끌어다 내린다.
"가서 말썽부리지 말고 최대한 얌전히 있어. 알겠어?"
"네...?"
말썽이라니... 그런 걱정은 오히려 내가 민아신에게 해야 더 적당한... 하지만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민아신은 또 혜정씨 쪽을 쏘아보더니 사납게 으르렁 거린다.
"매일 저녁 시간 전 까지는 돌려 보내줘야해. 나 배고파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예. 예."
험악한 민아신의 말에도 혜정씨는 어깨를 으쓱이며 슬쩍 미소를 지어보이시고는 그대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아 이끄셨다.
"그럼 한동안 도움 좀 받겠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허리를 숙여 인사해오는 통에 마주 인사를 하면서도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혜정씨의 손길에 발걸음을 옮겼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를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데, 초아씨의 곁으로 다가간 혜정씨가 벽에 있는 문 하나를 초아씨에게 가리켰다.
"유나신의 지역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초아씨는 혜정씨의 말에 움직이던 손을 멈추시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모습에 허락을 받은 것처럼 혜정씨는 문 앞에 다가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안 쪽으로부터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온다. 가게는 온갖 시공간이 모여드는 장소이고 곧 이곳은 모든 시공간으로 향할 수 있는 장소라는 뜻이다. 가게의 주인의 뜻에 따라 열리는 시공간의 문. 들어는 봤지만 실제로 보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야! 신혜정. 잠깐만!"
짧은 작별인사 후 문으로 나를 이끌고 들어 가시려던 혜정씨를 민아신이 붙잡았다. 그러고는 무슨 일인지 내 쪽을 무섭게 노려보신다.
"설현이 너. 그 검... 사용하지 마. 자!"
민아신이 품에서 꺼내 던지신 물건을 받아 들었다. 바라보니 그것은 작고 앙증맞은 방울이다. 마치 고양이에게 달아주는 것이 어울릴 법한....
"그걸로 유나신의 지역에 있는 가게에서 무언가 거래하도록 해. 거긴 무기라면 넘쳐나는 곳이니까."
말이 끝나자, 민아신은 이제 볼 일은 없다는 듯이 뒤돌아서서는 그대로 가게 밖을 나서버렸다. 검을 사용하지 말라고....? 손 안에서 동글 거리며 감촉이 느껴져 오는 방울을 가만히 움켜쥐며 나는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에 차마 발길을 떼지 못 하고 민아신이 사라진 가게의 문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또 숨기고 계신 걸까? 퉁명스러운 태도이지만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어쩐지 신령님의 곁을 떠나는 게 수호령으로써 정말 괜찮은 일인가 망설여진다.
"그럼 이제 가볼까요?"
"아, .....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나는 몇 번이고 더 문가를 돌아보다가 혜정씨를 따라 초아씨가 열어주신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눈앞으로 온갖 빛깔의 색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수많은 색들이 휘몰아치며 모여 들더니 점점 더 눈을 뜨기 힘든 눈부신 하얀 빛줄기가 되어 번뜩였다. 그리고 잠시 눈을 깜박였다고 생각한 사이 나는 한 언덕위에 서 있었다. 마을의 풍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혜정씨는 조금 어두운 기색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그새 더 심해졌네요."
"뭐... 뭐에요. 이건?"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완연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수많은 검은 기운들이 마을을 감싸고 구석구석을 파고들며 마을의 중심부를 향해 휘몰아치며 모여들고 있다. 검게 소용돌이치며 용솟음쳐 오르고 있는 검은 기운의 기둥에 반사적으로 검집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제 아시겠죠? 어째서 유나신이 실종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말도 안 돼요...."
확실히 이 정도로 마을이 악귀에 잠식당해 있는 동안 그 지역의 신령님이 부재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유나신이 악귀에게 당하기라도 했다는 걸까? 그럴 리가 없어. 유나신의 곁에는 찬미씨가 있는데.... 혼란스러워 하는 도중에 어디선가 작은 비요 한 마리가 새로운 존재가 마을에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날아들어 왔다. 손가락 하나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올챙이 모양의 요괴는 손쉽게 혜정씨의 손에 붙들려 버둥거렸다. 사람에게 들러붙어 불행을 안겨주는 하급 요괴. 혜정씨가 조금 힘을 주자 그대로 소멸되어 재처럼 서늘한 바람에 흩날려 간다. 마을에는 이미 저 비요들의 무리가 거대한 덩어리처럼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되신 거야. 유나신....
"안 되겠어요. 당장이라도 저 검은 기운을 몰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절 부르신 거죠? 이 지역의 수호령의 대리로써...."
"잠깐 멈춰 봐요."
금방이라도 쏘아져 나갈 것처럼 몸을 웅크린 채 발도 자세를 취하던 내 어깨를 혜정씨가 붙잡았다. 의문스럽게 올려다보니 혜정씨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작게 고개를 가로저은다.
"민아신이 왜 그렇게 걱정하는지 알겠네요. 일단은 좀 진정하고 차분하게 가보도록 하죠. 그리고 그 검... 민아신이 방금 전에 쓰지 말라고 했는데 벌써 잊으신 거 아니죠?"
놀리듯 웃으시고는 혜정씨는 따라오라며 언덕 아래로 뛰어내리셨다. 아... 그렇구나. 민망해진 마음에 얼른 검에서 손을 떼고는 자신을 탓했다. 뭔가에 생각이 박혀 버리면 그것을 향해 앞 밖에 못 보고 달려 들어가 버리는 이 못난 성격. 머쓱하게 고개를 숙인채로 긴장된 마음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크게 내뱉고는 혜정씨의 뒤를 따라 언덕을 뛰어 내렸다. 꽤 높다랐던 곳을 가볍게 떨어져 내려 착지하자 유나신이 다스리는 마을의 외곽에 다다랐다. 언뜻 보기에 마을은 평범하고 한가로운 일상인 듯 하였지만 영기를 볼 수 있는 내 눈에는 곳곳에 들러붙어 있는 어두운 기운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딘지 우울하고 활기 없이 가라앉은 모습의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거리를 지나쳐 간다.
"일단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이유부터 조사해 봐야 갰네요. 설현씨 무기도 좀 찾아보고."
또 생각 없이 뛰어들기 전에요. 라는 뒷말을 슬쩍 흘리며 혜정씨는 여유 자작하니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걸어 나갔다. 약간 토라진 맘이 되어 나는 입술 끝을 비죽 내밀고는 그 뒤를 쿵쿵 거리며 쫓아갔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 자연스럽게 지나쳐 그들의 일상 속으로 사라져간다. 보이지 않는 존재. 잊혀진 존재. 이제 세상에는 신령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무관심으로 가득찬 거리를 걷고 있으니 어느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다는 기분이 나를 압박해온다. 그런 마음은 이미 결론을 내렸을 텐데... 잡념을 쫓기라도 하려는 듯 나는 고개를 도리질 하고는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기생하듯 붙어있는 비요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저 비요들을 그냥 놔두어도 괜찮은 건가요?"
"저것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이 어둠의 근원이 되는 악귀를 퇴마시키면 저런 잡귀들은 자연히 소멸될 거니까 걱정 하지 말아요. 으음.... 그나저나 가게가 어디쯤이었지?"
손가락 끝으로 턱을 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혜정씨는 막힘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어딘지 이 한가로우면서도 자신감 있는 태도는 민아신을 닮아 있는 것 같다. 항상 맹해 보이는 태도를 일관하는 민아신에 비하여 혜정씨 쪽은 좋은 의미로 유들유들하다는 것이 살짝 다른 점이랄까? 그리고 굳이 더 따지자면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지 항상 짐작키도 어려운데다가 막상 알아차린다고 해도 이상한 것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뻔 한 민아신에 비하여 혜정씨는 말할 때나 행동할 때나 언제나 계속해 나에게 시선을 맞춰 주시고 계시다는 것 정도.... 그러고 보면 민아신, 언제나 항상 나에게 무관심한 것 같아.
생각에 빠져 있는데 어디선가 불현듯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보니 저만치 건물 너머로 몸은 용 같기도 하고 머리는 꼭 새의 모습을 빼닮은 온통 검은 빛깔의 기분 나쁜 것이 날아가고 있었다. 꾸물거리며 느릿한 속도로 날고 있는 그것은 쉬지 않고 귓가를 틀어막고 싶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설현씨! 저 녀석 잡아야 해요!"
"네?"
"어서!"
혜정씨는 손으로 술법을 그리며 소리쳤다. 너무도 심각한 표정에 나는 뭐라 더 묻지도 못 하고 그대로 지면을 박차며 뛰어 올랐다. 건물의 옥상 사이를 건너뛰며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다가 문득 민아신의 당부가 떠올라 아예 검집채로 단단히 손에 틀어쥐었다. 급한 데로 검을 빼내어 들지 않고 이대로 몽둥이처럼이라도 휘둘러야 갰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는 검도 벤 다기 보다는 때린다는 느낌으로 항상 휘둘렀으니까 괜찮겠지.
바로 앞까지 다다르자, 요괴인지 마수인지도 모를 괴상한 것은 혜정씨가 펼쳐낸 듯 한 주술의 그물에 옥메어 공중에 붙들려 있었다. 그럼에도 딱히 당황하거나 버둥대는 것도 없이 그저 계속 울음소리를 내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무래도 위험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으신 거겠지... 입술 끝을 꾹 깨물며 있는 힘껏 기운을 불어넣어 검집을 녀석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빛깔의 기운들을 우그러뜨리며 검집을 둘러싸고 있던 하얀빛이 파고 든다.
- 끼에에에에에에엑!!!!!!!
"아악!"
갑자기 녀석의 부리 사이에서 튀어나온 엄청난 괴성에 나는 귀를 틀어막고 나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녀석을 묶고 있던 혜정씨의 주술도 산산이 끊어져, 몸이 자유로워진 것을 깨닫자 녀석은 쏜살같이 건물의 사이로 나 있던 골목으로 급강하하며 도망쳤다. 기가 차다. 방금 전의 그 일격으로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듯 한 움직임이다. 아무튼 이대로 놓칠 순 없어!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데 그만 휘청 이며 눈앞이 하얗다. 귓가가 축축한 게 어쩐지 피가 흘러나오는 기분이다. 비틀거리며 몸의 균형감각을 잃어 몽롱한 상태에서도 나는 무작정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순식간에 옥상의 끝을 박차고 떨어져 내리면서 나는 골목 사이를 헤집으며 달아나는 녀석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 무방비로 떨어져 내리던 짧은 사이에 어느새 어느 정도 몸의 상태가 회복된 것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괴물 같은 몸의 치유력에 혀를 차면서도 나는 공간감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자마자 바로 떨어져내리던 건물의 벽을 박차고 마주하는 건물과의 사이를 오가며 녀석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상당한 속도로 녀석이 도망치고 있음에도 있는 힘껏 발을 박차며 무식하게 힘에 의존해 어마어마한 추진력을 가속하며 따라붙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져 간다. 한 번 발을 구를 때마다 쾅하는 가죽북 터지는 듯 한 소리가 발아래에서 들려온다. 얼마 되지 않아 거의 따라붙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나는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망설였다. 민아신이 사용하지 말라 고는 했지만 역시 검을 뽑아들지 않고는 검이 제 위력을 발휘하기란 쉽지가 않다. 방금 전처럼 검집을 이용해 가격했다가 녀석을 자극하는 정도에 그쳐 버리면 이번에야 말로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역시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검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단 한 번의 발도로 끝내버리면 된다. 그 정도라면 딱히 문제 될 일도 없을 거야....
벽 사이의 허공을 가르며 지그재그로 움직이고 있는 나의 밑에서 녀석은 미끄러지듯 꿈틀 거리며 골목을 빠른 속도로 누비고 있었다. 기회는 단 한 번. 신중하게 발을 구를 타이밍을 재고는 기회라고 생각한 순간 단숨에 뛰던 방향을 바꾸며 녀석의 등 뒤를 향해 급격하게 발을 박차며 쏘아져 내려갔다. 그간 추격해오던 가속도까지 합쳐져 어마어마한 기세로 나는 녀석이 있는 지면가를 향해 검을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단숨에 벤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소름이 돋을 만큼 패도적인 검의 곡선이 녀석을 노리고 그어졌다. 처음으로 휘두르게 된 저주받은 귀검의 서늘한 칼날은 전에 쓰던 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오싹한 기운으로 날카롭게 공기를 베어 갈랐다.
그 때 눈앞을 가로막으며 시커먼 형상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이 무언가를 휘둘렀다고 생각이 든 순간 온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충격과 함께 내 검은 그대로 막혀 튕겨져 나왔다. 반동에 의해 한참을 뒤로 물러나다 간신히 멈춰 서고는 바라보는데 검을 쥐고 있는 손이 방금 전 충격 탓인지 그 일합만으로도 살같이 벗겨진 채 힘이 빠져 부들거리고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고는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목구멍 안으로 집어 삼켰다. 조금 거리를 두고 나와 대면하고 있는 존재는 온통 검은 기운으로 일렁이며 피어오르고 있는 마치 야수를 닮은 모양새였다. 그 어둠속에서 붉게 빛나고 있는 두 개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나를 노려다 보고 있다. 내 공격이 이 존재에 의해 막혀버린 탓으로 그 새의 머리에 용을 닮은 것은 그대로 저편에서 유유히 달아나고 있었다.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이 존재와 이렇게 눈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은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아니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이대로 먹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리적인 공포감마저 암암리에 나를 죄어 오고 있었다.
"설현씨! 어디 있어요?!"
옴짝달싹도 못 하고 그저 숨 막힐 듯 한 대치상황만을 이어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혜정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를 쏘아보던 검은 존재는 그대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더니 순식간에 벽 사이를 뛰어 넘어 사라졌다. 그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나는 긴장이 풀려서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가빠 올랐던 숨을 몰아쉬었다. 뭐였던 걸까? 탁기에 가득찬 붉은 눈의 야수.... 지금의 이 요기 가득한 마을의 영향 탓으로 생겨난 요괴인가도 싶었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석연치가 않다. 방금 전의 그 검을 휘두를 때 맞부딪혔던 느낌을 떠올려 보며 엉망이 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느낌 어딘지 낯설지 가 않은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는데...?"
"설현씨! 괜찮아요?"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돌아보니 뒤늦게 쫓아오신 혜정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놓쳐버렸어요. 그 괴상하게 울던 요괴...."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차마 그 뒷말을 잊지 못 한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검은 기운의 야수 같던 존재에 대해서는 어쩐지 말하기가 꺼려진다. 다행히도 내 감추기 힘든 어색한 태도를 눈치 채지 못 하신 것인지 혜정씨는 내 몸 상태를 살피는데 더 주의를 기울이시고 있었다. 나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여기저기 둘러보시는데, 그렇지만 걱정해 주시는 게 죄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치유력을 가진 내 몸은 이미 방금 전의 엉망의 되었던 손의 상처마저도 그새 멀쩡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계시면 오히려 이쪽이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 된다.
"다친 데는 크게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아무튼 무사하면 됐으니 그 녀석을 놓친 건 신경 쓰지 마세요. 뭐 어차피 앞으로 한 두 번은 더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까요."
"기회요...?"
거짓말을 했다는 심리적인 압박감과 수 초간 이리저리 관찰 당하고 있었던 데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게 달아 올리며 나는 어디로든 화제를 전환시켰으면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혜정씨는 그저 태연한 표정으로 얘기하신다.
"네. 혹시 재앙의 징조라는 것 들어보셨나요? 지역의 요기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해지면 그 요기를 타고 강대한 힘을 가진 대요괴가 지역에 태어나게 돼요. 그런 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에 세 번에 걸쳐 그 징조가 나타나게 되는데 방금 보았던 녀석도 바로 그런 종류일 거예요. 강한 요기에 이끌려 나타나는 마수 같은 것들인데 그것들이 대요괴를 부르는 울음을 세 번 울부짖으면 대요괴가 그 울음소리를 듣고 이끌려 헌신하게 되는 거죠. 다만 다행히도 그 녀석들 중에 하나라도 퇴마를 시행하게 되면 대요괴가 탄생하는 걸 막을 수가 있는데, 뭐 이번에 하나는 놓쳤지만 아마도 다음번에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을 거예요."
에.....? 그 말은 방금 전 그게 그 대요괴의 탄생을 막을 수 있는 아주 귀중한 기회 중 하나 였다는 것 아닌가? 방금까지의 걱정을 확 달아나게 할 만큼 엄청난 소리에 그만 정신이 뜨악하고 혼미해진다.
"그럼 반드시 잡았어야 됐던 거잖아요! 다음이란 게 반드시 있을 거란 보장도...."
"뭐, 지금은 준비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으니까요. 좋게 좋게 생각하도록 하죠."
그리고는 왠지 바보 같다고 생각이 들만큼 순박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혜정씨의 얼굴에 그만 나는 기운이 쭈욱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고 말았다. 아아... 민아신도 그렇고 이분도 그렇고 어째서 몇 백 살 먹은 신력 높은 령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태평하실 수가 있는 거야.....
왠지 울고 싶어지는 마음에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을 탄식하고 있었다.
-
"실례합니다....."
두툼한 철제문을 열며 '가게'문을 열고 들어섰다. 유나신이 다르시는 지역의 가게. 초아씨의 그곳과는 달리 겉에서부터 전혀 다른 인상의 건물은 옛된 느낌과는 전혀 거리가 먼 현대식의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들어서는데 뒤에서 혜정씨가 벌컥 문을 열어젖힌다.
"지민씨 계신가요?"
깜짝이야. 힐끗 뒤돌아 혜정씨를 째려보는데 가게의 안쪽으로부터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작은 키에 붉은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귀여우면서도 강해보이는 얼굴의 여성분이시다. 상당히 강렬해 보이는 눈은 살짝 풀려있는 나른한 느낌이면서도 어째서인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 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가게라는 공간을 지배하는 주인의 기백답달 까. 초아씨와는 어딘지 온도의 차이가 있다. 아무튼 이분이 가게의 주인이라는 지민씨....
"무슨 일이지? 감찰사와 수호령이라니?"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여긴 상담소가 아니야. 귀찮은 일이라면 사양이니 그냥 나가줬으면 하는데?"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서서는 팔을 괴고 우리를 바라보는 지민씨의 표정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가게의 벽면을 가득 채우며 빼곡히 진열되어 있는 총기류들 가운데 작은 자동권총 하나를 집어 들고는 가볍게 손가락 사이로 위협적으로 흔들어 보이시는 것이 당장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방아쇠를 당길 기세이다.
"이 지역의 신령인 유나신이 사라지신 것에 대해 뭐 아는 것이 있으신가요?"
"그런 일이 있었나? 몰라. 그런 거. 애초에 가게란 독립된 공간이라고. 내가 일일이 신령들 안부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 건가?"
"아뇨. 당연히 그러실 필요야 없죠."
"뭐, 거래라면 언제나 환영이야. 찬미라는 수호령이 꽤 VIP 고객인지라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점은 좀 걱정되긴 한다만 그렇다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어. 아무튼 특별히 더 용건이 없으면 이만 나가줄래? 아님 나가게 해줄까? 난 이익이 되지 않는 이런 따분한 대화를 정말 싫어하는데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지민씨는 눈가를 씰룩이며 권총의 총구를 들이 미셨다. 이런 반응이라니.... 솔직히 너무 혼란스럽다. 이제껏 가게라고는 초아씨의 가게 밖에 알고 있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런 분위기는 적응하기 힘들다. 온통 새하얗게 광택이 나는 벽면 가득을 진열되어 있는 각종 총기류와 화기류들. 따스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공간에 손님을 그저 거래의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는 것 같은 가게 주인의 태도는 낯설다. 어째서인지 슬쩍 치기어린 반항심 같은 것 마저 울컥 치솟아 올라 뭐라 따져 말하고 싶었는데 그런 내 앞을 혜정씨가 은근슬쩍 가로막고 섰다.
"물론 거래도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이쪽의 이 어여쁘게 생긴 수호령에게 맞는 무기를 찾고 있는데요."
어여쁜 수호령이라니 그게 무슨.... 당황해 바라보는데 그저 찡긋 눈웃음을 흘리는 혜정씨의 모습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무기를 찾고 있다고? 그럼 또 얘기가 다르지."
방금까지의 적대심은 착각이었던 마냥 갑자기 지민씨의 표정이 느슨해진다. 그러고는 내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는데 그 나른한 눈꺼풀 너머 강렬한 눈동자에 어쩐지 무언가 남김없이 내 자신을 한올한올 다 드러내어 보이며 살피어 지는 느낌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어 버렸다.
"우리 가게는 일체의 화기류 밖에 취급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보아하니 그런 걸 다뤄 봤을 법한 몸은 아닌데 뭘 구하려는 거지? 게다가 그 검은 장식인가?"
내 허리춤을 쏘아보시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엉거주춤 검을 잡아 가리우며 불안한 시선으로 혜정씨를 쳐다보았다. 내 모습에 혜정씨는 낮게 한숨을 쉬며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이신다.
"뭐, 사정이 있어서요. 어쨌든 대가도 확실하게 준비해 왔습니다."
"호오. 그래? 그럼 어디 그것부터 한 번 볼까?"
"물론이죠. 자, 설현씨 어서 물건을...."
아, 그렇구나. 혜정씨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품안을 뒤져 민아신이 거래의 대가로 주었었던 방울을 꺼내어 들었다. 딱히 특별한 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작은 방울인데 정말로 이걸로 괜찮은 걸까? 약간의 의구심과 함께 그것을 조심히 지민씨의 앞에 내어놓고는 물러섰다. 그러자 지민씨가 그것을 잡아들고는 잠시 바라보더니 혜정씨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뭐야...? 방울?"
"네. 민아신이 여기 설현씨에게 직접 건네준 방울이에요."
"민아신? 잠깐! ...설마, 이거 초아씨의 방울인 거야?!"
"네. 민아신이 가지고 있었으니 진품이 확실하죠."
"이.... 이럴 수가, 이걸 민아신이 갖고 있었다고?"
대답대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혜정씨의 모습에 지민씨의 표정이 절망적으로 일그러진다. 무슨 소리들을 하고 계신 것이지? 아무튼 저게 초아씨의 방울이라니.... 어딘지 새삼스레 방울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저 고양이 목에나 달아주면 어울릴 법한 앙증맞은 방울이라고 생각했는데 초아씨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어째서인지 그것이 따스하게 보인다.
"으음.... 아무튼 좋아. 이 정도 대가라면 무엇이든 다 가져가도 돼. 거기 얼빵한 수호령! 멍 때리지 말고 이리 와 봐."
"네? 저요?"
카운터를 떠나 가게의 안쪽으로 걸어가며 지민씨가 소리친 말에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더니 대답대신 총알이 날아와 드는 통에 나는 얼른 지민씨의 뒤를 따라 바삐 달려갔다. 가게의 안쪽은 정말로 각종 화기류가 무서 우리만치 잔뜩 위용을 자랑하며 늘어서 있다. 그 가운데에서 거의 지민씨의 키만 한 물건 하나를 꺼내어 드시더니 내게 던지신다.
"게틀링건이야. 너처럼 사격기술이라고는 쥐뿔도 없고 남는 게 힘 밖에 없어 보이는 타입은 이런 걸로 허공이든 어디든 탄이라도 많이 쏟아부어야 그나마 뭐라도 맞출 수 있겠지."
"이건....."
보기만으로도 둔중해 보이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바디에 여섯 개의 기다란 총신이 회전할 수 있도록 둥글게 붙어 있는 모습은 실로 우악스럽다. 한 번 손에 쥐어보자 상상을 초월하는 몸의 괴력 탓인지 외견에 비해 총은 그닥 무거움 없이 한 손에도 가볍게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걸 나보고 쓰라는 건가?
"여기 있는 총들은 대부분 사용자의 영기를 탄으로 만들어 내어 쏘아내는 물건들이니까 그거 조심히 사용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건 분당 몇 천발을 우습게 쏟아부을 수 있는 물건이니까 쏘다가 말라비틀어지지 않으려면 주의하라고. 뭐, 체질을 보니 딱히 걱정할 타입은 아닌 것 같다만...."
내 모습을 한 번 쓰윽 훑으며 입맛을 쩝 다신 지민씨는 쓴웃음과 함께 그대로 돌아서 혜정씨가 서 계신 카운터로 돌아가셨다. 엉거주춤하니 총을 손에 쥐고 따라가자 혜정씨가 그런 내 모습을 보시고는 해죽 웃으신다. 그 웃음이 마치 어른애를 흐뭇하니 지켜보는 느낌이라 괜스레 머쓱해지고 부끄러워져서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 없이 그 곁에 다가가 섰다.
"그럼 용건은 끝난 거지? 이제 나가."
"네. 고마웠습니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할게요."
"또 귀찮게 굴었다가는 미간에 바람구멍이 날 거다. 명심하라고."
그러고는 권총을 살랑살랑 흔드시는 통에 우리는 얼른 지민씨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쫓겨 가게 문을 열고 벗어났다. 왠지 위험한 곳이었다는 기분이다. 자연스레 새어나오는 한숨을 나즉이 내뱉고는 나는 지민씨의 가게를 돌아보았다. 초아씨의 가게처럼 어느새 사라져 흔적조차 남지 않은 빈 공간... 역시 아직까지 내가 모르는 곳이나 존재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온다.
"원래 저런 분이신가요?"
"저런 분이 시라뇨?"
내 질문에 빙그레 웃으며 혜정씨가 반문한다.
"아니... 음.. 뭐랄까. 초아씨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라...."
그러자 어째서인지 내 말을 듣고는 혜정씨는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괜한 질문이었나.... 민망함에 손에 들린 거추장한 게틀링건만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왠지 무언가에 실망한 듯 한 마음이라 어딘가 편치가 않다. 가게란 언제나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괴팍하긴 하지만 설현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분은 아니에요."
"네?"
"글쎄 뭐랄까.... 지금은 무언가 유나신에 대해 숨기고 계신 게 있는 거예요. 말 못할 사정이라 아마도 저에게 숨기시는 듯 한데 원래 뭘 그렇게 숨기고 감추고 하시는 성격이 아니시다 보니 유독 날카로워져서 저러시는 것 뿐이에요. 하여간 연기가 서투시다니까."
"그게 무슨....?"
그럼 지민씨가 유나신의 일에 대해 무언가 알고 계신 것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에게 아무 말도.....
"이곳에 감찰 와서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어째서인지 하나 같이 유나신의 주변 분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얘기를 해주시질 않네요. 민아신도 그렇고, 지민씨도 그렇고....."
그러면서 웃으며 슬쩍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그만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 고는 움찔 고개를 숙여 버리고야 말았다. 오후에 있었던 그 맹수 같던 존재와의 조우에 대해 퍼뜩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가.... 확실히 무언가 있었던 거구나. 다들....
"뭐, 그렇다고 그런 것에 대해 일일이 캐묻고 다닐 생각은 없어요. 어차피 저도 귀찮은 일은 사양이니까요. 최대한 예쁘게 포장해줘서 대충 납득할 정도로만 제시해 준다면 저는 언제든 물러날 생각이에요. 상황을 보니 누가 그렇게 해줄는지가 문제지만...."
"그걸로...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말이 감찰사지 사실 다들 감찰 나온다고 하고 휴가 기분 내면서 오는 거란 말이에요. 요즘 같은 시대에 그렇게 사명감에 불타는 감찰이 있을 리가 없죠. 그저 다들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인데..."
그렇게 말하며 혜정씨는 길게 기지개를 늘어트리며 이미 해가 진 밤의 길거리를 걸어 나가셨다. 네온등 사이로 유유히 흘러가는 혜정씨의 모습은 어딘지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만든다. 잊혀진 존재들. 자연의 순환 고리가 된 신령들. 예전에 민아신이 해줬었던 말이 기억 속에서 들려온다. 자연의 하수구 처리장 같은 것이 된 거라고 하셨던 그 씁쓸한 말...
"아무튼 초아씨의 가게로 돌려보내 드릴 테니 내일 오전 중에는 다시 와주세요."
"혜정씨는 어디에 계실 건가요?"
"이곳에 남아 있을 거예요. 어쨌든 최대한 완만하고 조용히 마무리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자꾸만 상황이 그렇게 도와주질 않고 있으니까요. 설렁설렁이라도 감찰 본연의 의무를 조금은 해야겠죠. 따로 조사를 하고 있을게요."
"네...."
고개를 끄덕이니 혜정씨는 나를 가리키며 술법의 인을 맺으셨다. 그 손짓에 따라 내 발 밑으로부터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와 나를 감싼다. 그 빛무리에 휩싸여 가는 와중에 잠시 혜정씨의 손길이 다가와 마치 위로하듯 내 어깨를 토닥이시고는 떠나셨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상황에 위로 받는 것이 나라니....
도착한 초아씨의 가게에서 초아씨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에 서둘러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부엌의 식탁에서 민아신은 머리 위로 검은 오라를 풀풀 풍겨대며 엎드려 계셨다. 거추장 스러운 게틀링 건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는데 역시 어딜 봐도 평범한 가정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외관이다. 작게 고개를 도리질 하며 한숨을 내쉬고는 민아신에게 다가갔더니 고개를 빼꼼히 드시고는 잔뜩 찡그려진 눈썹으로 거의 울먹이듯 소리치신다.
"이제서야 오는 거야? 늦어! 배고프다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저녁 해드릴게요."
서둘러 외투를 벗어 의자 위로 걸어놓고는 허리춤의 검집도 빼어 드는데 문득 민아신의 당부를 어기고 검을 사용했었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검을 시야 밖의 의자 밑으로 치워두고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되어 눈치를 살피었다. 그러나저러나 민아신은 그닥 나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고 있으시다. 배가 고파서 살짝 패닉상태에 빠지신 걸지도.... 얼른 저녁을 준비해 상을 차려 드리자 그제야 민아신의 표정이 한결 온화해진다. 우걱우걱 거리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입. 그 작은 몸집으로 참 잘도 드시는 민아신을 언제나처럼 살짝 신기한 기분으로 가만히 그 옆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이었을 때도 내가 요리를 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렇게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유나신의 마을이 지금 악귀에 둘러 싸여 있어요."
"그렇겠지. 혜정이가 유나신이 실종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고 짐작했어."
"알고 계신 것이 있으신가요...?"
어느새 식사를 거의 끝내가는 민아신에게 나는 조용히 말을 건네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으시다는 민아신. 혜정씨의 말을 곱씹어 보며 나는 민아신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에 민아신은 그저 숟가락을 탁하니 식탁위로 내려놓으시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말해봐. 너는 누구 수호령이지?"
"네? 갑자기 무슨? 그야 당연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걸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바라보니 민아신의 눈썹이 꿈틀하고 인상을 쓴다.
"너는 내 수호령이야. 네 그 눈이며 코며 입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내 신력으로 내가 만들었어. 그러니 내가 허락하지 않은 말은 질문 하지 마. 네가 봉사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명심해."
".........."
"다시는 그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지 말라고. 저녁 잘 먹었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뚜벅뚜벅 내 곁을 지나 위층의 계단으로 올라서는 민아신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 작은 그림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야 나는 의자 위로 털썩 몸을 늘어트렸다. 나 실수한 걸까? 얼빠진 기분에 천장만 의미 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쨌든 확실히 민아신은 무언가 숨기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고심하다 의자 밑으로 치워 두었던 귀검에 시선이 가 그 묵빛 나는 어두운 검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오늘 마주쳤던 그 어두운 그림자의 맹수 같던 존재.... 강한 발톱 같은 걸로 검을 맞대었던 느낌이 떠오른다. 확실히 딱 한 번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찬미씨....."
예전에 합을 겨뤄봤던 적이 있었다. 민아신의 도발에 발톱을 드러내고는 휘두르신 통에 그 앞을 막아섰던 기억. 하지만 그 때의 찬미씨는 그저 이빨이 돋아나고 털이 자라난 수인족의 모습일 뿐이었다. 오늘 본 그런 마수 같은 느낌의 존재는 절대로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내가 알고 있는 유나신과 찬미씨는 좋은 분들이시다. 찬미씨는 비록 냉철하고 날카로운 분이지만 유나신을 끔찍이도 따르고 그 뜻에 순종하는 수호령이었다. 그런 찬미씨가 지역이 이토록 악귀에 휩쓸리는데 관여했다고는 상상하기 싫었다.
그저 한숨이 또 새어 나온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찬미씨에 대해서도 유나신에 대해서도 그닥 많은 것을 알지 못 한다. 모든 것은 그저 내 얄팍한 앎에서 비롯된 것 들일 뿐.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 언제나 아는 것도 없고, 도움 되는 것이 없이 그저 방황하며 곁에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나라는 아이가 밉고 원망스러울 뿐이다.
손으로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의자에 고개를 기대어서는 나는 그대로 피곤 할대로 피곤해져 지쳐버린 몸을 뉘이었다.
-
"설현씨 그 쪽이요!"
"네!"
육중한 게틀링 건을 들어 올려 방아쇠를 당기자 순식간에 눈앞을 붉게 물들이며 수천발의 탄알이 쏘아져 나갔다. 다행인지 불행인 것인지 재앙의 징조는 바로 다시 나타났다. 혜정씨를 따라 다닌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아 오늘은 오전부터 도시의 기운이 심상치 않더니 결국 이렇게 오후부터는 녀석의 뒤를 쫓고 있게 되어 버렸다. 이번의 것은 마치 고양이 같은 우스꽝 스러운 탈을 쓰고 있는 검은 사람의 형체이다. 아니 형체들인가? 건물 사이를 자유롭게 넘어 다니며 약 올리듯 도망쳐 다니는 수십의 녀석들에게 이를 악물고 총구를 겨누었다.
"저 쪽 벽 사이!"
칫...! 벌써 꽤나 많은 수를 잡아내었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끝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 번 총신이 불을 뿜자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형체들. 하지만 줄어든 수만큼 어디선가 또 그만한 수가 튀어 나오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바닥에 쌓여가는 탄피들의 양이 심상치가 않은 것이 이러다가는 확실히 내 쪽이 먼저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혜정씨! 계속 이래서는...."
"기다려 봐요."
길게 찰랑이던 머릿결을 질끈 머리 위로 묶어 올리며 혜정씨가 입술을 깨문다. 그리고는 검은 형체들을 향해 손을 쫙 펴 내밀었다. 그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 사이사이로 공기의 흐름이 일렁인다.
"원래 감찰사가 감찰일 외에 이렇게 힘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건 안 되는 일이지만, 이번은 예외인 것으로 하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혜정씨의 손이 마치 무언가를 잡아당기듯 꽉 오므리자 검은 형체들의 한가운데로 급작스레 공간이 뒤틀리며 순식간에 수십도 더 되는 녀석들이 전부 그 중심을 향해 빨려 들어가 옴짝달싹도 못 한 채 들러붙어 버리기 시작하였다. 어안이 벙벙해 혜정씨를 돌아보자 나를 보고는 가볍게 손가락을 팅기며 경례의 제스처를 취해보이고는 웃는다.
"중력제어가 제 전문이거든요. 그럼 어서 마무리를..."
못 말리는 분이다. 한숨과 함께 게틀링 건을 들어올렸다. 딸깍 하며 손을 걸어 당기자마자 강렬한 전기톱의 굉음과 함께 크랭크가 회전하며 불꽃을 뿜는다. 보통의 인간으로는 상상도 못 할 반동이지만 이 몸은 태연히도 그런 괴물딱지 같은 총을 들고도 핸드건 마냥 난사해댄다. 확실히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존재라는 것이 실감되어져 온다.
도심의 건물 옥상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불꽃의 향연이 몰아쳤다. 붉고 붉고 붉게 수천 개의 가닥으로 쏘아져 꽃을 피워내는 붉은 줄기들... 화끈한 열기 속에서 순식간에 검은 형체들을 한 줌의 재로 남김없이 흩날려 버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 구석으로부터 무언가 꿈틀꿈틀 거리더니 줄어가던 수만큼이나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늘어나며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에 인상을 쓰는데 온통 꾸물대며 둥그렇게 모여 있던 것들이 거대한 까만 공마냥 부피를 늘려가더니, 급기야는 점점 비대해져서 구의 바깥쪽 녀석들부터 점차 중심의 중력에서 영향이 약해져 자유로워진 손발을 허공에 휘저어 댔다.
"혜정씨! 이대로라면 떨어져 나오겠어요!"
"어쩔 수 없어요. 유감스럽지만 상부에 걸리지 않으려면 이 이상 힘을 쓰기 곤란해서요. 신령이나 수호령의 처벌이 아니라 그 지역에 직접적으로 행하여지는 모든 술법은 고유지역권 침해로 문책감이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안간힘을 쓰고 탄약을 퍼부어대도 잠시 그 꿈틀 거리는 거대한 구체의 한 구석에 조그만 구멍을 낼 뿐 삽식 간에 다시 그 구멍이 검은 형체들로 메워지기를 반복한다. 더 이상 무리라고 생각한 순간 구체로부터 펑 하고 봇물이 터져 나오듯 검은 형체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저건 좀 위험한데...."
방금까지 도망만 치던 녀석들이 이제는 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탓인지 제각각 발톱을 뽑아 들고는 마치 검은 파도처럼 물밀듯 우리를 향해 달려 들어오는 것을 보며 혜정씨는 아차 싶은지 혀를 차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더 이상 혜정씨의 백업을 기대하기도 힘들 듯 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나는 혜정씨 앞을 가로막으며 게틀링 건을 들어올렸다. 올 테면 와보라지. 어차피 이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제 저 녀석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것도 질릴 대로 질려 버렸으니까.
기다릴 것도 없이 단숨에 달려 나가 무리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방에서 에워싸며 파고들어 오는 발톱들을 스치듯 피해가며 바로 앞에 있던 녀석의 머리를 밟고 올라 총알을 퍼부어주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날며 그대로 게틀링건의 몸체를 부여잡고는 기운을 실어 해머마냥 발아래의 꾸물거리는 검은 물결을 향해 내다 꽂아 주었다. 쾅 하는 귀청을 짓이기는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검은 형체들이 휘날리며 재로 변해 사그라든다. 순식간에 공터마냥 뻥 뚫려버린 원 가운데에서 검은 형체들에 둘러싸인 채로 나는 가볍게 몸을 털며 일어섰다. 확실히 이제야 좀 적성에 맞는 것 같네.
아무튼 언제까지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징조를 퇴마하기 위해서는 본체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다시 밀려들기 시작한 검은 형체들을 닥치는 대로 쏘고 때려서 날려 버리며 나는 분열의 중심을 찾아내려고 집중 하였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막아내야만 한다. 아니 최소한 이 징조를 상대로 퇴치 직전의 상황까지는 몰고 가야만 한다. 그럼 분명 그 검은 맹수도 다시 나타나 주겠지.... 모두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이 상황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정말로 찬미씨인지 아닌지는 내 손으로 알아내고야 말겠어.
옆구리를 노리고 파고들어오는 한 형체의 발톱을 허리를 비틀어 피하며 나는 주위의 건물 옥상들을 스치듯 바라보았다. 혹시 지금도 이 주위에서 나와 이 징조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방금 전 발톱을 찔러온 녀석에게 게틀링 건의 탄약을 퍼부어 주며 일어서고는 나는 다시금 앞으로 돌진해가며 전투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지민씨가 분명 게틀링건은 자신의 영기를 이용해 탄약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한 말이 기억나 정신을 집중해 기를 불어넣자 내 뜻을 알아차린 건지 발사되는 탄알들에 하얗게 영기가 모여들어 발사되기 시작했다. 마치 유탄을 쏘아대는 것처럼 탄마다 폭발하며 주위 반경을 휩쓸어 버리는 위력에 스스로도 놀라며 나는 그대로 게틀링건을 부여잡고 검은 형체들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가 무리할 정도로 회전 하였다. 마치 검으로 기운을 불어넣어 타격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충격을 내뱉는 수천발의 탄알이 단숨에 내 주위를 따라 휘몰아치며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 아찔할 정도의 파괴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검은 형체들의 무리에 드러난 작은 움직임을 나는 놓치지 않고 달려 들었다.
아무리 수없이 많은 분신들이라지만 이정도로 사방에서 공격받는 다면 분신들은 본체를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 미세한 흐름을 따라 본체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있는 대로 게틀링건의 탄알을 쏟아 부으며 뛰어들자 예상이 맞았던 건지 쏘아지는 탄약을 가로막으며 수많은 분신들이 계속해 분열해가며 생겨났다. 검은 벽처럼 모여들어 재처럼 흩날리기를 반복하는 녀석들을 향해 나는 달려들던 그대로 게틀링 건을 마치 검처럼 뒤로 길게 빼들었다가 발사 스위치를 누른 채로 찔러 넣으며 몸을 날렸다. 검으로 쓰던 찌르기 그대로 온 몸에 강맹한 기운을 두르고 덤으로 탄알을 퍼부으면서 그대로 벽을 향해 파고들어 가자 마치 안개를 걷어내듯 단숨에 빽빽이 모여 들었던 검은 형체들이 꿰뚫어 지며 눈앞에 드디어 두 번째 재앙의 징조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또 분열할 것처럼 몸 곳곳에서 꿈틀 거리며 분신들을 만들어 내고 있던 본체를 향해 나는 총구를 들이밀었다. 이걸로 끝이다 라고 생각한 찰나에 어디서부턴가 날아든 매서운 기운에 나는 황급히 몸을 틀며 물러섰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빨라진다. 징조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존재. 검은 탁기에 휩쓰인 맹수는 지독한 위압감을 내뿜으며 낮게 으르렁 거리며 다가왔다. 결국 나타났구나....
그 붉은 눈동자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이번에도 저번처럼 당하지는 않는다! 저번에 징조를 놓쳤던 것을 교훈 삼아 잽싸게 게틀링 건을 들어 올려 징조를 겨누는데 어느새 접근한 것인지 검은 존재가 다가와 힘껏 게틀링 건을 발로 차올렸다. 뭐야! 이 속도는? 허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몸에 순간 당황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균형을 회복하고는 공중에서 검은 존재의 머리를 노리고 킥을 차 냈다.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멋진 대응이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한 충격음이 울려 퍼진 것에 비해 바라보자 맹수는 그저 가볍게 가드를 들어 올려 막아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당황할 새도 없이 연속적으로 가드를 풀어내며 발톱을 휘두르는 통에 나는 기겁하며 허공을 박차고는 뒤로 돌며 피해냈다. 땅에 내려앉는데 등줄기로 부터 식은땀이 내려앉는다. 역시 위험한 상대.... 고개를 들어 노려보는데 무엇을 하려는 건지 검은 존재의 손에는 그 사이에 재앙의 징조가 붙들려 있었다.
강인한 손아귀에 목덜미가 붙들린 채 들어 올려져 있는 재앙의 징조의 입에서는 끼긱 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가 새어 나온다.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봐도 징조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려는 거야... 선뜻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 나는 그저 검은 존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봐도 도저히 찬미씨일 거라고는 생각되어 지지 않는다.
그 때 그동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혜정씨가 조용히 다가와 내 옆에 섰다. 갑작스런 상황이지만 이 분의 얼굴은 여전히 조금 찌푸려졌을 뿐 태평하시다. 저것을 보고도 딱히 동요하지 않으시다니... 역시 찬미씨는 아니었던 건가? 혜정씨가 유나신과 찬미씨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계실지가 의문이다.
"갈수록 상황이 나빠지네요. 재앙의 징조에 이어 저런 것 까지 나타나다니... 아무튼 저 녀석은 지금의 설현씨로는 감당하기 힘들겠어요. 이쯤에서 오늘은 물러나도록 하죠."
"네? 말도 안 돼요! 무슨...?!"
내 항변에도 혜정씨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시고는 정말로 가시려는 듯 뒤돌아서신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가버리는 건... 혜정씨를 붙잡으려는데 갑자기 등 뒤로부터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검은 존재의 손에 의해 한껏 들어 올려져 버둥거리고 있는 재앙의 징조가 괴로운 듯 마구 비명처럼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재앙의 징조로부터 검은 기운들이 굵은 줄기처럼 뽑혀져 나와 맹수 같은 존재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설마... 흡수하려는 건가?
울음소리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신 혜정씨의 표정이 조금 어둡다. "이로써 징조의 울음소리가 두 번째...."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혜정씨의 낮은 중얼거림에 방금 그것이 대요괴를 부르는 두 번째 울음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한 번.... 그럼 저 검은 맹수의 정체를 밝혀낼 기회도 앞으로 한 번 뿐이라는 소리다. 그 전에 어떻게든 결판을 짓지 않으면...
어느새 두 번째 징조가 비참한 울음소리만을 메아리로 남긴 채 모조리 흡수되어 검은 잿가루만을 날리고 있는 풍경 속에서 서늘한 바람을 뚫고 검은 맹수는 만족한 듯 번뜩이는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못 하는 나를 비웃어 주려고 하는 것 마냥 놈의 아가리가 벌어지며 불처럼 새빨간 입안이 드러났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급작스레 그 존재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고 길게 포효하기 시작했다.
"어? 설마.... 당했다!"
무엇이? 아차 싶은 소리로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른 혜정씨에 의아해 하는데 검은 존재의 울부짖음에 부름 하듯이 하늘이 어둡게 물들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였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어두운 기운이 사방에서 짙게 모여든다. 휘몰아치는 먹구름의 중심에서 강렬한 존재감이 꿈틀대고 있었다. 저건...!
구름을 박차며 거대한 발이 튀어 나왔다. 족히 어지간한 운동장보다도 더 커 보이는 발이 땅 위로 내려앉자 건물들이 무너지며 흙먼지와 잔해들이 솟구치며 피어올라왔다. 저게 대요괴.... 믿을 수 없게도 강림해 버린 대요괴의 모습을 바라보며 검은 맹수는 명백하게 웃고 있는 것이 분명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길게 포효했다. 그리고는 그때까지 넋을 놓고 있던 나를 대신해 혜정씨가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을 겨냥하자 그대로 건물 사이를 뛰어 넘으며 사라져 버렸다.
"쳇! 잽싸네. 그 녀석... 뭔가 재앙의 징조라기엔 이질감이 있어서 방심하고 있었더니 스스로 재앙의 징조의 기운을 흡수해 거짓 울음으로 마지막 세 번째 징조를 완성시켜 버릴 줄은 몰랐네요. 그저 힘을 탐내서 흡수하는 거라 생각했더니... 이건 완벽히 제 실책이에요."
머리를 부여잡고는 혜정씨는 짜증난다는 듯 서서히 땅위로 걸음을 옮기려 하는 거대한 요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맥이 빠져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결국 대요괴의 강림도 막지 못 하고, 맹수의 정체도 확인하지 못 하였다. 어째서 나란 아이는 이리도....
"......이제 어찌해야 하죠?"
"좀 일이 까다로워지긴 했지만 저 덩치 커다란 녀석을 퇴마하는 수밖에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비칠거리며 일어나서는 건물의 옥상 난간을 움켜쥐고 뛰어 나가려고 하자 혜정씨가 내 어깨를 붙든다. 힘없이 돌아보자 혜정씨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은다.
"설현씨 혼자서는 안 돼요."
"놔 주세요. 저도 해낼 수 있어요."
그래. 이렇게 계속 무기력하게 언제까지고 주변에 휩쓸려 떠도는 건 사양하고 싶다. 내 손으로 무언가를 쥐어 잡을 수는 없는 걸까?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내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다.
"아니. 너에게는 무리야."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무도 뜻밖의 목소리에 돌아보자 놀랍게도 혜정씨의 어깨너머 찬미씨가 예의 그 검은 슈트 차림으로 길게 내려앉은 흑발을 잔잔히 찰랑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건 환상일까? 혜정씨도 조금 놀란 눈치로 찬미씨를 바라보았다.
"타이밍이 신기하네요. 얘기는 들었어요. 유나신의 수호령인 찬미씨죠?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건가요?"
"유나신은 지금 안전한 곳에서 요양 중이시다. 이번 재앙의 징조와 관련된 급작스런 요기의 증가로 유나신과 나는 퇴마과정에서 크게 부상을 입고 그동안 숨어서 신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대요괴의 강림을 알아차리고 먼저 회복해 있었던 내가 막기 위해 나선 것뿐이야."
"과연, 그렇군요. 뭔가 석연찮지만 앞뒤가 맞는 설명이네요. 그 정도면 됐습니다."
"아무튼 비켜라. 저 대요괴는 내가 퇴치할 테니까. 너희들은 여기서 똑똑히 지켜보고 있어. 그리고 상부에 제대로 보고해라. 저것의 퇴마에 맞는 합당한 성과급을 준비해 놓으라고."
"예. 뭐 그럼 구경하고 있도록 하죠. 확실히 저정도 요괴면 이번 성과급은 꽤 두둑하겠네요."
빈정거리는 말투의 혜정씨에게 낮게 으르렁 거리시고는 내 앞까지 걸어오신 찬미씨는 방해된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 찬미씨라니... 그럼 역시 그 검은 존재는 찬미씨가 아니었던 걸까? 안도감과 의아함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그저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그런 나를 무시하며 찬미씨는 내 옆을 지나쳐 난간가로 다가와서는 단숨에 건물 사이를 뛰어 넘으려 발을 구르려 하셨다. 그제야 나도 퍼뜩 정신을 차려 찬미씨를 붙들었다.
"잠깐만요! 저도 갈게요!"
"방해하지 마! 저 요괴는 내꺼야. 끼어드는 건 용납하지 않겠어."
살기 가득한 눈에 주춤 물러서자 그대로 찬미씨는 나를 버려두고는 대요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째서 혼자 가시려는 거야.... 그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혜정씨가 혀를 차며 다가온다.
"예상보다 훨씬 쌀쌀맞은 수호령이네요."
"정말 괜찮은 건가요? 저렇게 찬미씨 혼자 보내도?"
"저래 봬도 대요괴에요. 일개 수호령이 혼자서 퇴마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죠. 민아신 정도라면 충분하겠지만."
"민아신이요...?"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자 혜정씨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라..? 설현씨 몰랐나요? 민아신은 과거에 천계를 수호하는 대장군의 령이었어요. 온갖 악귀를 토벌하며 사람들로부터 받들어지는 퇴마신이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그 신격이 조금 떨어졌다고는 하나 저런 대요괴 하나 정도를 상대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리가 없죠."
"민아신이 대장군..? 아무튼 그러면 수호령 혼자서는 무리라는 거잖아요. 그럼 찬미씨를 도와야....!"
"뭐 일단은 지켜보기로 하죠. 찬미라는 저 수호령은 일반적인 수호령은 아니니까요."
일반적인 수호령이 아니라니... 찬미씨가 수인족인 것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차이가? 그 때 굉음과 함께 번쩍하며 섬광이 터져 나왔다. 바라보자 저만치 거대한 대요괴의 앞에서 작은 점에 불가한 찬미씨가 허공을 날며 싸우고 계셨다. 분전하고 계시지만 언뜻 보기에도 역부족인 것이 보인다. 무엇보다 저 체급의 차이는....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무언가 검은 번개 같은 것이 몰아친 순간 오히려 대요괴의 팔 하나가 부수어지며 떨어져 내렸다. 말도 안 돼. 그럴 수가...
"저건.....!"
"결국 이렇게 되는 군요...."
연달아 검은 번개들이 몰아치며 번뜩일 때마다 대요괴의 몸이 거대한 석고상마냥 조금씩 부수어져 나간다. 이럴 리가 없다. 저 검은 기운은 분명....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외면하려 하자 혜정씨가 내 손을 잡아 이끈다.
"대요괴가 저리도 빨리 패하다니...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네요. 아무튼 슬슬 마무리 되어 가는 모양이니 이쪽에서 마중을 나가 주어야 갰어요."
그리고는 혜정씨는 내 손을 붙든 채로 둥실 떠올라 격전의 현장으로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공기를 흔들며 전해지는 충격과 장엄할 정도로 거대한 신화적 크기의 대요괴가 산산이 부수어지며 허물어지고 있는 광경이 시야를 압도해 왔다. 근접한 건물의 옥상까지 다가가 내려앉자 때마침 대요괴의 얼굴로부터 굉장한 소리와 함께 섬광이 터져 나오며 폭발하였다. 고개를 가리우고는 파편들을 막아내고 있자 들어 올린 팔 사이로 찬미씨가 서서히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온 몸 가득 어두운 기운들을 뿜어내며 검은 맹수의 형상을 일부분 간직하고 있는 모습..... 이제와 숨길 것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찬미씨는 허공중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된 거 다시 한 번 설명을 들어 볼까요?"
혜정씨가 나서며 특유의 그 시원한 웃음기를 입에 머금은 채로 묻자 찬미씨는 그저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온통 검게 털이 자라난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려 그 날카롭게 번뜩이는 발톱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일이 귀찮게 되었군. 아무래도 대요괴를 상대하려면 이 형상을 꺼내어 들지 않고는 무리였나 봐...."
"성과급이 목표였습니까?"
"그래. 잠들어 버린 유나신을 치유하려면 막대한 양의 신력이 내겐 필요해. 보시다시피 대요괴는 처리했다. 성과급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안 되었지만 감찰사인 제가 목격한 이상 지역의 혼란을 조장한 당신과 이를 방조한 유나신은 제 손으로 처벌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방금 전의 건도 무효 처리 되고요."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네게 새로운 설명을 하나 만들어 주지."
들여다보던 발톱 끝에서 시선을 돌린 찬미씨가 붉게 빛나고 있는 눈동자로 혜정씨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걷잡을 수 없는 탁기와 살기가 피어오른다.
"오늘 대요괴의 출현과 동시에 요괴의 퇴마 과정에서 이를 지원하던 감찰사와 수호령은 모두 사망. 유일하게 살아남은 지역의 수호령은 간신히 대요괴를 처리하고 그에 따른 성과급을 보상받는 다는 걸로 말이야!!"
찬미씨의 신형이 번개처럼 쏘아지며 혜정씨를 노리고 달려들어 왔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나는 이를 악물고 그 앞을 막아섰다. 들어 올린 게틀링 건이 찬미씨의 발톱에 너무도 손쉽게 날카로운 스파크와 함께 조각조작으로 잘라져 나간다. 자신의 공격이 가로막아진 것에 대해 분노하며 찬미씨가 일갈했다.
"설현? 또 너냐? 나서지마! 어차피 너도 이 감찰사를 처리한 뒤에 소멸시켜 줄 테니까!"
"그만 둬요 찬미씨!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유나신이 잠들었다는 건 또 뭐고... 어째서 이래야만 하는 건데요!"
잘려버린 게틀링 건을 던져 버리고는 검을 뽑아 들자 귀검이 소름끼치게 울어댄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 것인지 누가 나에게도 좀 알려줄 수는 없는 거야?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바로잡는다. 어찌되었든 이런 건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서고야 말겠어.
"물러서요. 설현씨. 이제부터는 제 담당이니까. 한가로운 휴가가 되지 못 한 건 아쉽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감찰사로써 저도 직무를 다해야 해요. 처벌의 의무에는 힘을 조절할 이유가 없으니 진심으로 대해주도록 하죠."
뒤에 선 혜정씨의 손에서 파괴적인 중력의 기운이 휘몰아치며 모여든다. 지금껏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기운만 봐서도 혜정씨는 신격이 매우 높은 분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더더욱 비켜설 수 없다. 대요괴를 단숨에 퇴치했던 찬미씨와 그에 버금가거나 더 높을 것이 분명한 혜정씨가 진심으로 서로의 승부를 겨룬다면 둘 중 하나는 절대 무사하지 못 할 것이다.
"안 돼요! 제발 두 분 다 진정할 수는 없나요? 뭔가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요. 제발 잠시만 대화로...."
"그러기엔 늦었어요."
나를 밀치며 앞으로 나선 혜정씨가 손 안 가득 둥글게 모여든 기운을 움켜쥐고 찬미씨에게 달려든다. 그에 동조하듯 찬미씨도 입가 가득 미소를 띤 채 검은 전격을 뿜어내며 달려들어 왔다. 그 팽팽한 기운의 격돌을 바라보며 나는 있는 힘껏 발을 굴렸다. 저 남의 말이라고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바보 같은 령들을 위해서라도 가만있을 수야 없다. 제발 내 기운과 몸이 저 둘의 기운들을 견뎌내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며 나는 무사하지 못 할 것을 알면서도 최대한의 기운을 끌어 모으며 둘 사이에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어쨌든 말려야만 한다.
두 기운이 충돌하며 눈앞으로 번쩍이고 새하얀 빛 무리가 터져 나와 온통 시야를 뒤덮었다. 덮쳐올 고통을 대비해 질끈 눈을 감고 기다리는데 어째서인지 한참을 있어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평온해진 기분 속에서 나는 꿈꾸듯 내려앉고 있었다. 그 현실적이지 못 한 감각에 눈을 깜빡이며 떠보자 좁은 시야 앞에 우습게도 어째서인지 작은 키에 올망졸망한 얼굴을 불만스럽게 찌푸리고 있는 민아신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어쩐지 이 상황이 바보스럽게 느껴져 살풋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오늘 저녁은 조금 일찍 먹기로 했는데... 아직 더 시끄럽게 해야만 할 일이 남은 거야?"
갑작스런 민아신의 등장에 혜정씨와 찬미씨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낮게 신음하며 물러섰다. 단박에 두 사람을 갈라놓은 민아신은 내게로 똑바로 걸어오셨다. 그리고 대뜸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든다.
"말썽부리지 말랬지. 이 답답한 수호령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민아신이 초췌한 내 몰골을 찬찬히 살피시더니 대치중인 혜정씨와 찬미씨에게로 돌아섰다.
"좋아! 이제부터 그럼 어쩔 거지?"
"뭘 어쩌긴 어째! 내가 네 놈들을 모조리 죽여 입을 막아야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는 찬미씨를 향해 민아신은 그저 가볍게 콧방귀를 끼는 걸로 무시하였다.
"농담하지 마.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하물며 거기 있는 혜정이도 네가 어찌할 수 있는 있는 신격이 아니야."
"그런 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야."
"멍청한 티 내지마. 이 어리석은 것아!"
민아신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확실히 찬미씨 혼자서 여기 있는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내가 알고 있는 찬미씨는 냉철하고 현실적인 분이셨다. 결코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하실 리가 없다. 그만큼 막다른 곳에 몰리셨다는 걸까?
"명심해. 네가 무엇을 하든 내 알바는 아니야. 하지만 나나 내 수호령을 건드린다면 그만한 대가를 각오해야 할 거야. 그러게 왜 진작 유나신을 막지 않았지?"
"뭐가 어째?"
"난 분명히 일전에 너와 유나신에게 경고했어.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라고. 멍청하게 자꾸만 인간들을 돕느라 유나신의 몸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네가 그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신력을 긁어모으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단 말이야. 너 스스로 악귀를 키워서 균형을 깨트린 후 그것을 퇴마하는 방식으로 성과급을 조작해 불려나가려 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주의를 줬어."
민아신이 찬미씨를 맹렬히 힐난하는 가운데 잠잠코 듣고 있던 혜정씨가 흥미롭다는 듯 둘 사이를 가르며 나섰다.
"민아신. 방금 그 얘기 좀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 이제서야 내가 관심가질 만한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 말이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이왕이면 주변인물로부터 정확하게 들어두는 것이 좋겠지."
혜정씨의 무신경한 말에 민아신은 짜증난다는 듯이 노려보았지만 혜정씨는 그저 가볍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라면 사실은 내가 더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더 이상 이렇게 무엇인지 알지도 못 하는 일에 끌려 다니고 괴로워하는 건 싫어.
"신령님. 들려주세요. 그 얘기...."
"설현이? 너는 또 왜! 너는 내 수호령이야! ....묻지 말라고 했잖아!"
"이제 와서 더 숨길 것이 있으세요?"
민아신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지지 않고 마주보고 있자 씩씩 거리던 민아신은 결국 어쩔 수 없겠다는 듯 입술을 악물 고는 씹어뱉듯 말하셨다.
"신령들의 임무가 더 이상 인간을 보살피는데 있지 않다는 건 너도 이제는 알고 있겠지? 인간으로 부터 잊혀진 신령들이 인간계에 관섭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말야. 하지만 너도 알다싶이 유나신은 그렇다고 해서 바로 옆에서 괴로워하는 인간들을 외면할 수 있을 만한 령이 되지 못 해. 그런 모질지 못 한 신이니만큼 유나신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숱한 인간들의 소원과 고민을 들어주며 지내왔어. 언제나 자신의 신력을 아낌없이 쥐어짜내면서 말이야. 그러니 아무리 천여 년을 넘게 자연의 신으로써 존재하며 신력을 쌓아왔던 유나신이라도 버텨낼 리가 없잖아. 저번에 그 유나신의 팔에 감겨 있던 붕대 기억나?"
"네. 기억해요...."
"현대의 신령들은 자신의 신력을 보충할 길이 한정적이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상부에서 주기적으로 지급되는 성과급 정도가 유일한 보충 수단이지.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펑펑 써대기만한 유나신이 어떻게 되겠어? 결국 신력은 고갈날 뿐이고 신력이 바닥난다는 건 신령들에겐 존재의 소멸을 의미해. 저번에 그 팔... 그건 결국 유나신이 몸이 버티지 못 하고 붕괴해 썩어가고 있던 거야."
그럴 리가... 민아신이 말했던 신령님들의 존재 의미가 바뀌었다는 건 그 정도의 무게를 갖고 있는 말이었던 걸까? 인간을 돕는 것만이 신령님들의 진실 된 의무라고 생각하던 내게 그건 너무 잔인한 말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유나신이 그런 일을 당해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해요 그런 건...."
"그렇지 않아. 살아있는 이상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갈 수는 없는 거야. 때로는 버리고 비울지도 알아야 해. 유나신은 너무 욕심이 많았어."
"그 더러운 입 닥쳐!!"
갑자기 찬미씨로부터 날카로운 예기가 민아신을 향해 날아 들어왔다.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그것을 쳐내어 버린 민아신이 비난하는 것이 명백한 눈으로 찬미씨를 바라다보았다.
"신령이 잘못 된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으면 막아서야 되는 것도 수호령의 임무야. 넌 그런데도 그것의 끝이 어떻게 될지를 뻔히 알면서도 방관하고 있었어."
"뭐라고?"
"아니, 방관한 것은 아니었나? 오히려 동조했지. 유나신의 신력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성과급을 조작할 생각까지 했으니까."
"지금 내 앞에서 유나신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건가? 너 따위 되다만 신령이?"
"내가 일전에 그 공원에서 네가 만들어낸 악귀를 빼돌린 건 유나신에게 경고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네게 경고하는 바도 컸어. 이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고. 그래서 그 경고를 무시한 꼴이 결국 지금 어떻지?"
잠깐? 지역의 경계에서 벌어진 일이란 건 지난번 그 폐교에서 퇴마했던 목걸이의 악귀를 말하시는 것 일까? 설마 그럼 그 악귀도 찬미씨가 만들어낸 악귀란 말이야...? 그럼 그 모든 것을 알고 그 때 민아신이.....
"아무것도 모르면 닥쳐! 유나신은 네 녀석과의 만남 후에 곧바로 내게 사실여부를 묻고는 스스로 악귀를 만들어 내어 퇴치하는 내 짓거리를 그만두도록 하셨어. 자신으로 인해 내가 죄를 짓기를 원하지 않으셨다고! 이번의 일이라면 모두 내 독단의 일이다. 그 분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되도록 만든 건 결국 유나신이 인간을 돕는 그 나쁜 버릇을 끝내 고치지 못 했기 때문 아니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유나신은 이미 한계였어. 그런데도 아마 유나신은 그 이후에 인간을 외면하지 못 하고 결국에 또 돕고야 말았겠지. 그래서 결국 소멸에 가까울 정도로 위험한 상태에 빠진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성적인 네가 이렇게까지 일을 키워가면서 크게 판을 벌였을 리가 없지 않아? 너는 과거에 호전적인 수인족들 사이에서도 태어나면서부터 마수로 저주받아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라난 녀석이야. 수인족 전체가 너를 잡겠다고 벌였던 토벌 과정에서 유나신에게 목숨을 구원받아 구해진 이후로 지금껏 유나신을 따르며 그 저주받은 힘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지만 그 강대한 마수의 피는 아직 그 깊은 곳에 꿈틀 거리고 있어. 너에게 하급한 악귀 따위를 키워내는 일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라는 것은 유나신도 알고 있잖아.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네가 반드시 네 그 숨겨놨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것도 누구보다 유나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야. 유나신은 그런데도 자신이 자꾸 고집을 부리면 언젠가 상황이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도 결국 자기 고집대로 했어. 유나신의 잘못은 변명하기 힘든 거야."
"그래서 뭐 어쨌다고! 나는 그런 유나신의 상냥한 마음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남아 있는 거야. 너희들은 유나신에게 손 댈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웃기지 말라 그랬지? 난 유나신과 달라. 모든 것을 끌어안는 바보 같은 짓은 이미 예전에 포기했어. 하지만 내 것에는 누구도 손대지 못 하게 할 거야."
민아신의 말에 분노한 찬미씨는 그대로 돌격해 들어왔다. 민아신은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오만한 눈길로 신경질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그 앞을 막아서고는 기운을 펼쳐내었다. 뭐 하는 거야 민아신... 결국 이제는 민아신까지 합류해 싸움을 벌이게 되는 거야? 왜 다들 이렇게 서로 싸우지 못 해 안달이지? 소멸시키겠다느니, 처벌하겠다느니 정말 진심인 걸까?
"그만들 좀 하세요! 제발!"
귀검으로부터 날카로운 귀곡성이 비명을 내지른다. 거대한 검신 가득 기운을 있는 데로 끌어 모은 나는 민아신과 찬미씨 사이의 공간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단숨에 사방으로 충격파가 새하얗게 몰아치며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민아신과 찬미씨는 나를 바라보았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찬미씨의 시선을 마주보며 나는 검을 들어 올려 가리켰다.
"정 그렇게 싸우시고 싶으시다면 제가 싸워드리겠어요."
"뭐?"
"대신에 제가 만약 찬미씨와의 싸움에서 이긴다면 이제 제발 이 멍청한 싸움을 멈춰 주세요. 그릇된 일로 이렇게 서로 싸우는 걸 그만해주시라고요!"
"웃기지마. 그릇된 일이라니. 그럼 유나신은 이렇게 소멸해도 좋다는 말이냐? 게다가 저기 저 녀석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 무슨 생각인 거야. 넌!"
"저와의 대결로 모든 걸 결정지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저분들이 찬미씨나 유나신을 건드리지 못 하게 도울 것을 약속드릴게요."
"너 지금 자기가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건지는 알고....?"
내 말이 진심인지를 가늠하기 위해 미간을 좁히시며 고개를 갸웃하시는 찬미씨를 앞에 두고 혜정씨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현씨. 이건 명백한 공무방해에요. 제가 어째서 저 수호령을 못 본 척 넘어가야 한다는 거죠?"
"왜냐면 제가 막을 테니까요."
"네? 그런..... 그건 반칙인데."
"부탁이에요. 제발요. 혜정씨. 부디 이 일을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해주세요."
간청하는 나를 상대로 혜정씨는 차마 어쩌지 못 하고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그 침묵하는 모습에서 결국 혜정씨가 내 뜻을 이기지 못 하리란 것을 눈치 챈 찬미씨는 발현되어 있던 수인족의 형상을 푸시고는 벨트 옆으로 매달려 있던 두툼한 군용 나이프를 뽑아 드시고는 나를 가리키셨다. 혜정씨가 그런 찬미씨를 무섭게 노려본다.
"좋아. 그럼 내가 이기게 되면 얻게 되는 것은 뭐지?"
"주제를 모르는 똥개는 그 입 좀 다무는 게 좋을 거야. 설현씨의 제안이 아니라면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수를 쓰든 처벌 받아 소멸되어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난 너에게 물은 게 아니야. 감찰사 나으리. 자 설현. 어서 말해봐. 대결에 패배의 조건만 있으면 안 되지. 내가 승리하였을 때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똑바로 향하고 있는 날카로운 칼날의 끝을 물러서지 않고 바라보았다.
"찬미씨가 저에게 이긴다면 여기 있는 혜정씨가 상부에서 유나신에게로 이번 대요괴 토벌의 성과급이 제대로 지급될 수 있도록 보고해 주실 거예요."
"설현씨!!!"
비명처럼 내지르는 혜정씨의 외침을 무시하며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심호흡을 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서 검을 들어올렸다. 잠잠코 신음하던 민아신이 그런 내게 나즉이 물어왔다.
"설현이..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이야?"
".........."
"그렀다면야... 그럼 네 마음대로 해. 난 이제 상관 안 할 거야. 하지만 명심해둬. 절대 그 누구도 모든 것을 다 끌어안을 수는 없는 거야.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는 것을 너도 알게 될 갰지."
내게서 눈을 돌리시더니 뒤돌아서서는, 아직까지 벙긋하니 벌어진 입을 뻐금거리며 뭐라 더 할 말이 있는지 악을 써내려는 혜정씨를 질질 끌고 민아신은 물러나 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찬미씨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몸을 풀며 천천히 내 앞에 마주와 섰다.
"약속은 책임지는 거겠지?"
"네. 찬미씨도 이제 대결에 응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셨을 거예요. 그러니 여기서 저와 승부를 보도록 하죠.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지금이라도 제발 예전으로 돌아와 주세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찬미씨."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어. ....네가 정말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비웃듯 말하는 찬미씨의 말에 그저 말없이 자세를 바로잡자 찬미씨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벨트에서 나머지 나이프도 빼내어 양손에 역수로 잡아들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후회하지나 마."
"시작하도록 하죠."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찬미씨의 오른 손에 들려 있던 나이프가 무서 우리 만치 회전하며 전광석화처럼 휘둘러져 왔다. 검을 치켜세워 막아내자 스파크가 붉게 일며 일그러진 찬미씨의 얼굴을 비추고는 사그라 들었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반대편 밑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왼 손의 나이프에, 있는 힘껏 막아 세우고 있던 나이프를 밀어내고는 뒤로 물러나 섰다. 검신의 길이가 긴 귀검과 리치가 짧고 속도감 있는 듀얼나이프의 대결. 어쨌든 이런 초근접거리의 인파이팅이라면 찬미씨쪽이 볼 것도 없이 우세하다. 기형적으로 긴 귀검의 사정거리에 따른 우위를 살리려고 거리를 벌리며 간극을 살피자 번뜩이며 무언가 날아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반사적으로 검을 이용해 막아내자 회전하며 날아오던 총알이 검 날 사이로 이등분 되어 빗겨나가는 것이 보인다. 총? 어느새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나이프 아래로 권총을 잡아든 찬미씨가 당황한 내게 싸늘하게 웃어 보이셨다. 그렇구나! 사실 인간 모습의 찬미씨라면 근접전 보다는 총을 선호하신다는 것을 들었었다. 지역에 위치한 가게의 특성도 반영된 것이겠지만 어쨌든 이러면 거리를 벌릴수록 내가 불리해진다.
다급히 달려들려 하자 찬미씨는 뒤로 연속 덤블링을 시전하며 내게 총알을 쏟아 부우셨다. 일일이 다 받아낼 자신도 없거니와 나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는 있는 힘껏 기운을 뿜어내 발도를 펼치며 전방으로 검풍을 날려 보냈다. 위압적인 기운의 파도에 날아오던 총알들이 휩쓸려 나가는 것을 보며 그 뒤로 따라 가려 하는데 어느 틈엔지 바람 사이를 가르며 찬미씨의 검은 인영이 번뜩이며 내게 쏘아져 들어왔다. 또 다시 거리를 내주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공격이 들어온다.
삽식 간에 수십 합이 연달아 이어지며 찬미씨의 듀얼 나이프가 불꽃을 튀어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들이 수도 없이 생겨난다. 한 칼, 한 칼이 묵직하고 힘이 있는 나에 비해 찬미씨의 공격은 끝도 없이 자유롭고 변화무쌍하다. 도저히 속도 면에서 따라잡을 수도 없거니와 어떤 것이 허이고 실인지 조차 파악하기 힘들 지경이다.
잠시라도 숨을 돌릴 겸 찬미씨의 중단을 노리고 피하기 힘든 각도로 강하게 쳐내자 사뿐하게 뒤로 뛴 찬미씨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러나서는 내 엉망징찬인 모습을 구경하며, 흘러내린 긴 흑발의 머릿결을 어깨 뒤로 쓸어 넘기며 미소 지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간 내게 승산은 없다. 싸움의 기본인 거리재기 조차 한 번도 우위를 점하지 못 하고 있다면 결과야 불 보듯 뻔 할 것이다. 아직 수인족의 형태로 본래의 힘을 끌어내지도 않은 찬미씨를 상대로 이렇게 벅찰 지경이라니..... 나란 아이의 한심함에 몸서리치며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하려 애썼다. 어쨌든 내가 시작한 일이다. 내가 다 되돌려 놓고야 말겠어.
검을 고쳐 쥐자 그것이 신호라도 된 냥 찬미씨는 가볍게 발을 굴리며 달려 들어왔다. 찬미씨의 가녀리고 날렵한 몸이 허공중에서 회전하는 가 싶더니 곧장 내 머리 높이에서 나이프가 휘둘러져 온다. 단단히 버티고는 악을 쓰고는 막아내는데 무언가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분이 오싹하니 엄습한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막아 세워 가려졌던 나이프의 시야 너머로 또 다른 나이프가 회전력을 실은 채 무서운 속도로 날아 들어오고 있었다. 첫 번째는 단지 주의를 돌리려는 것이었나?! 아차 싶은 순간 나이프는 정확히 내 옆구리의 심장 가를 노렸다. 이미 몸을 피하기는 늦었다는 것을 직감한 나는 그대로 팔을 끌어내려 막아섰다.
"아아악!!!"
불로 지지는 듯 한 엄청난 통증과 함께 팔 근육을 꿰뚫고 서늘한 칼날이 박혀 들어왔다. 순간 번뜩하며 머릿속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내며 나는 순간 악에 받힌 채 어느새 부옇게 번져 버린 시야너머로 검으로 막아 세우고 있던 찬미씨의 다른 쪽 나이프를 손으로 잡아채고는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찬미씨를 노려보며 그것을 내 어깨 가에 박아 넣어 버렸다. 나이프가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칼날 전체가 다 파묻혀질 만큼 깊게 파고들어와 뼈와 근육 사이로 박혀든다. 내 뜻밖의 행동에 당황해 버린 찬미씨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그대로 찬미씨의 얼굴에 머리를 들이 박아 버렸다.
저만치 코를 부여잡고는 주춤거리며 찬미씨가 물러나는 동안 가빠 오른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 고는 양 손으로 팔과 어깨에 박혀든 나이프를 뽑아내었다. 나이프의 등을 따라 비죽거리며 파여 있던 악랄한 홈을 따라 살점들이 후두둑 뽑혀져 나오며 피를 쏟아 낸다. 까무러칠 것 같은 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신음하며 서 있자 다행히도 어느새 서서히 상처들이 아물며 몸이 회복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손으로 들고 있던 나이프를 힘껏 동강내 부러뜨리고는 구석에 던져 버린 채 헉헉 거리며 눈앞의 찬미씨를 노려보자 잔뜩 인상이 구겨진 찬미씨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정말 더럽게 터프하게 싸우는구나."
"좋아요. 이제 나이프는 부러졌어요. 어쩌실 거죠?"
"나에겐 아직 이게 남았거든..."
찬미씨가 손을 들어 올리자 숨겨져 있던 발톱들이 솟아오르며 순식간에 찬미씨의 몸을 따라 검은 기운이 휘감겨 들어와 맹수의 모습을 갖춰 갔다. 번뜩이며 번개가 쳤다고 생각한 순간 찬미씨의 검은 발톱이 내 눈앞에서 휘둘러졌다. 대응할 틈도 없이 그것은 나를 찢어발기며 그대로 날려 버렸다.
바닥을 부수며 한참을 떠밀려 가다 멈춰 서고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는데 몸이 일어나 지질 않는다. 대요괴 마저도 단숨에 갈가리 찢어놨던 일격. 어쩌면 멀쩡한 게 이상한 걸지도 모르겠다. 비칠거리고 있는 동안 내 머리맡까지 걸어오신 맹수의 형상을 한 찬미씨는 나를 내려다보고는 으르렁 거렸다.
"이것으로 승부는 끝이야."
들어 올렸던 발이 강하게 내려 밟는 충격에 그대로 숨이 턱하니 막혀 온다. 꼼짝도 못 하고 그대로 처박혀 버린 나를 보고는 찬미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발을 떼고 돌아섰다. 멀찍이서 대결을 지켜보던 혜정씨와 민아신에게로 다가가며 찬미씨는 맹수의 형상으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흘렸다.
"자 이제 돌아가서 이곳에서 있던 일을 잘 말해 드리도록 해. 용감한 수호령과 인자한 신령님이 대요괴를 처치하는 일을 해냈으니 이번 성과급을 두둑이 줘야 마땅하다고 말이야. 그리고 다시는 이 지역에 찾아와 유나신과 내 일에 끼어들지 마.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고 꺼져 버리라고!"
일이 이렇게 되다니.... 찬미씨를 상대로 내가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막아서고 싶다고, 싸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유나신을 낫게 하고 싶고, 찬미씨가 더 이상 유나신을 위해 악행을 저지르며 잊으려 했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 하고 죄를 짓고 계시는 것도 그만둘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었다. 혜정씨가 그저 평소처럼 조금 멍청하고 푼수 같은 얼굴로 푸근하게 웃고 계신 것을 보고 싶고, 민아신이 맹한 모습으로 초아씨의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저 달큰한 음료를 홀짝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부당한 일로 얻어낸 결과물을 가지고 찬미씨가 유나신을 치료하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야 만다. 절대로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게 될 거야.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자존심 강한 찬미씨에게 조금이라도 내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녀를 넘어서야만 한다. 과거를 잊은 나에겐 지금 이곳만이 유일한 나의 보금자리이다. 그것을 위한 이 간절한 마음만으로는 나는 강해질 수 없는 걸까?
더듬거리는 손끝에 귀검의 서늘한 칼날이 매만져져 왔다. 그래. 민아신의 말이 맞아.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는 거야. 그 간절함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언가를 잃어야만 하겠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내 말에 놀란 찬미씨가 뒤돌아보았다. 나는 귀검을 붙잡고 서서히 일어나 섰다. 온 몸을 휘감고 돌며 흐릿한 검은 기운들이 소용돌이치며 귀검으로 빨려 들어간다.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는 귀검은 소름끼칠 정도로 음산하게 귀곡성을 울어댔다. 내 생명을 담보로 하여 눈을 뜬 저주받은 귀검이 찬미씨를 노려보았다.
"아직 이에요. 제가 찬미씨를 막을 겁니다."
"웃기지 소리 하지 마!!"
번뜩이는 검은 번개가 몰아쳤다. 강대한 힘이 꿰뚫고 지나며 대기를 쪼개고 간 자리에 하지만 나는 귀검을 든 채로 버티고 서 있었다.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는 것을 알아차린 찬미씨가 분노에 차 길게 포효했다. 찬미씨의 몸을 따라 꿈틀꿈틀 거리며 검은 기운이 위험하게 모여든다. 그것이 열 줄기 검은 번개의 창처럼 찬미씨의 발톱에 서려 갔다.
"이번엔 무사하지 못 할 거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있는 기운들을 양 손 가득 빼들고는 거듭해 포효하는 찬미씨를 향해 검을 부여잡고는 찌르기의 자세를 취하였다. 금방이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내 생명력을 걸신들린 듯 빨아 먹으며 붉게 타오르고 있는 귀검이 흥분의 비명을 내질러 댄다. 이미 온 몸의 치유기능은 생명력 그 자체로 귀검에 빨려 들어가 이미 치유되었던 상처들이 벌어지며 터지기 시작하였다. 흘러나오는 핏방울들은 떨어져 내리다가 허공중에서 붉은 선을 그리며 귀검에게로 이어진다. 혈관들이 모두 괴사하며 터진 채 흡수되고 있어 검은 실핏줄들이 온 몸에 돋아난 채로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버텨낸 채 눈 뜨기 힘들 정도로 광기에 넘쳐 넘칠 거리는 힘을 검 끝에 집중해 찬미씨를 겨누었다.
"더 이상의 죄를 만들지 마세요. 유나신도 그것을 원치 않을 거예요."
"시끄러워!!"
찬미씨가 발톱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나는 검을 찔러 갔다. 눈앞을 덮치며 번뜩이는 섬광과 충격이 온 몸을 강타한다. 오감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것 같은 그 파괴적인 힘의 충돌 속에서 한 순간이나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상태에 빠져 버렸다. 온통 새하얀 공간. 그 사무칠 정도로 적막한 공간에서 어디선가 이명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급기야 귀를 멀어버리게 할 만큼 커져가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며 바라보자 저만치 날아가 처박힌 채 꿈틀 거리고 있는 찬미씨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내 꼴도 그닥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까닥하기도 힘든 몸이 간신히 손을 들어 올려 보자 마치 부수어질 듯 곳곳에 금이 간 채 바람결에 흩날려 가고 있다.
"으으으..."
찬미씨는 발악하듯 몸을 휘청 이며 일어나 서려 하고 있었다. 나는 주섬이며 다시 귀검을 손에 붙들었다. 이대로 온 몸이 부서져 버리더라도 찬미씨가 일어선다면 나도 일어서야만 한다. 귀검을 손에 붙들 자 마자 온몸에 통증과 함께 당장이라도 소멸될 것 같은 몸과는 다르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일어나 서진다. 생명이 모두 빨려 들어가 완전히 메마른 한 줌의 가루로 흩어져 사라질 때까지 귀검에 조종당해 싸우게 되는 검의 저주. 바라보는 시야가 붉다. 나는 지금 잘 해나가고 있는 것 일까?
"이 바보가....!"
불현듯 날아든 손에 의해 뺨을 맞고는 나는 귀검을 놓치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화끈거리는 뺨을 매만지며 올려다보니 민아신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커다란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일렁이고 있다.
"그래! 네가 이겼어! 이 망할 수호령아! 네 그 고집에 내가졌다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걸까....? 민아신은 나를 원망스레 노려보다가 그대로 혜정씨에게 뒤돌아 따지듯 물었다.
"말해봐. 이번 유나신과 찬미를 사면하려면 어느 정도의 대가가 필요하지?"
민아신의 말에 혜정씨는 그저 작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글쎄... 도시 하나를 상대로 균형을 깨트린 데다가 대요괴 강림을 도왔고, 감찰사 살해시도 죄에 성과급 불법 조작 죄라.... 어지간해서는 힘들 걸? 내가 가진 신력 거의 전부를 몽땅 바쳐내야 할 거야."
"그래? 가져가. 그럼."
주저 없이 자신의 가슴 앞으로 민아신이 손을 모으자 그 두 손 가득 눈부신 빛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뭐 하시는 거야! 당장이라도 일어나 붙잡으려 하지만 부수어져 가는 몸이 움직여 주질 않는다. 그저 애가 타는 마음만이 벌어진 입 사이로 소리가 되지 못 한 채 흩어져 공기 중에 사라진다.
어느새 민아신의 손 안으로 작은 유리병에 찰랑이는 맑은 액체로 모여든 신력을 민아신은 혜정씨에게 던졌다. 가볍게 받아든 혜정씨가 그것을 눈앞에 들어 올려 흔들어 본다.
"이게 민아신의 전부를 담아낸 신력이란 말이지...? 이거 대단한데. 좋아. 이걸로 이번 사건의 모든 대가는 지불 되었어. 이제 남은 건 사후 처리 정도뿐인가....."
입맛을 다신 혜정씨가 쓰러져 있던 찬미씨에게로 다가가 내키지 않는 다는 듯 손 안의 유리병을 찬미씨의 앞으로 던져 떨어트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 상황들을 지켜보던 찬미씨가 의심의 눈초리로 혜정씨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지...?"
"방금 너와 유나신의 죄는 사라졌어. 저기 저 되다만 신령에게 고마워하라고. 그나저나 골치 아프게도 감찰사라는 게 그 지역의 차후 상태에 대해서도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해야 되는 책임도 있어서 말이야. 그건 유나신에게 주도록 해. 신령이 없는 지역은 균형을 유지해낼 수 없으니까. 거기 담긴 신력.... 성과급 같은 거랑은 비교도 안 될 테니까 현명히 사용하도록 하라고."
말을 마친 혜정씨는 민아신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자, 이걸로 됐지? 지역도 구하고, 유나신도 구하고, 찬미씨도 구하고, 너와 설현씨도 원하는 바대로 된 거 같은데?"
혜정씨의 웃음에 민아신은 그저 짜증난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고는 터덜거리고 벽으로 걸어가 기대어 주저앉았다. 원채 새하얗던 피부가 이제는 핏기도 없이 창백하게 굳어있다. 조그맣고 가녀린, 추위에 떠는 새처럼 웅크린 모습으로 민아신은 무릎 위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즉이 한숨을 내쉰 혜정씨가 손을 털며 다가가서는 민아신의 주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건물의 잔해 위로 걸터앉았다.
"그러고 보면 말이지 역시 자기가 저지른 일의 책임에서는 영원히 도망치는 건 불가능 한 거 같다고 생각되지 않아? 몇 달 전에 너는 교묘하게 내 눈을 피해갔었던 것 같은데 말야, 그게 결국은 이런 방식으로 그 값을 치르고야 마네."
"닥쳐."
"뭘 새삼스러워 하지? 천리안의 예지력을 가진 너니 이 상황도 짐작한바 아니야? 설현씨로 인해 지은 죄를 설현씨로 인해 그 값을 치르게 되다니... 세상은 참 불공평 한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또 생각 외로 이렇게 공평해서 신통하단 말이지."
무슨 소리야.. 나로 인해 지은 죄? 의미를 알 수 없는 혜정씨의 말에 바라보자 혜정씨가 내 쪽을 보고는 빙글 웃는다.
"설현씨. 알고 있었어요? 민아신은 인간이었던 설현씨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살려내기 위하여 설현씨를 수호령으로 만들었던 거예요. 현세의 신령으로써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신혜정!!"
"어쩌다가 그 철벽같던 민아신이 인간 소녀를 아끼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현씨가 불의의 사고로 절벽 가에 떨어져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는 민아신은 주저 없이 자신의 신력을 쏟아 부어 당신을 살려내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리고는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영리하게도 수호령으로 삼기 위해서였다는 명분을 들이 밀었죠. 뭐, 표면상으로는 문제없었기 때문에 아시다시피 딱히 감찰 일에 열심이 아닌 저는 그대로 눈 감고 넘어갔습니다만 이렇게 지금 대가를 받게 되는 걸 보니 묘하네요. 이래서 제가 점점 더 감찰 일에 소홀해 지게 되는 건 가 봐요."
초점을 잃고 방황하는 눈을 깜박여 본다. 그동안 계속해 민아신을 원망하며 알고 싶었했던 내가 수호령이 되게 된 계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모르는 편이 나았어. 과거의 기억이 모두 잊혀진 채 존재함의 의미에 대해 괴로워했던 지난 몇 달간. 그로 인해 그렇게나 민아신을 미워했었는데.... 민아신에게 인간을 돕는 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의미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민아신이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고 지금도 그러하고 있다는 것만은 이제 조금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바보 같은 신령님. 어째서 나 같은 아이를 위해서...
"그럼 이제 이걸로 내 일은 모두 마무리 된 것 같으니 이만 가보도록 할게. 다음에 또 볼 수 있게 되면 만나자고. 그리고 너도 이제는 슬슬 정리를 해야지?"
한껏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신 혜정씨가 민아신에게 다가가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시며 웃어주신다. 그 얼굴을 무기력하게 울상으로 올려다보던 민아신이 내 쪽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내었다.
"그래. 때가 되었나 보다. 이제 지긋지긋해. 설현이 넌 오늘부로 해고야."
하얀 석고상처럼 굳어 있던 민아신의 손이 나를 향해 손바닥을 향한 채 내밀어졌다.
"말했지?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는 것은 불가능해.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야지. 이게 잃는 거야. 잘 가. 이 말썽쟁이 수호령아."
누가 더 말썽쟁이인데 끝까지 그런 소리를... 온 몸이 하얗게 빛에 감싸여 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갑작스럽지만 이것이 나와 민아신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 고집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최소한 마지막의 순간만큼은 웃으며 작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지만 이제는 불가능 한 거겠지.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아내며 나는 입 꼬리를 들어 올려 보였다. 미안해요. 잘 있어요. 신령님....
그렇게 모든 것이 빛에 휩싸였다.
-
"설현아. 듣고 있어?"
옆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돌아보니 친구들이 나를 보며 웃고 있다. 평범한 방과 후의 하굣길... 내려 보니 깔끔한 교복을 정갈히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내가 왜 이러지? 요즘 들어 자꾸 왜 이렇게 멍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꼭 무언가 잊은 것처럼....
"미안. 잠깐 딴 생각하느라...."
"그럼 우리들은 놀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어? 그게...."
문득 친구의 뒤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작게 지저귀며 맴돌던 새는 나뭇가지 위에 앉는가 싶더니 이내 내 쪽을 바라다본다. 단지 기분 탓일 거라고도 생각했지만 어쩐지 저 시선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이 마치 계시라도 된 마냥 나는 친구를 향해 작게 고개를 도리질 했다.
"난 가볼 데가 있어서... 다음에 놀자."
손을 흔들어 친구들을 배웅해 주고는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새는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서자 훌쩍 날아오른 새가 달아나는 듯싶더니 저만치 가서 다시 내려 앉아 나를 바라본다. 따라오라는 걸까? 천천히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새는 점점 인근 공원의 안쪽으로 날아들어 갔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과 잔잔한 바람에 기분 좋은 풀내음이 흘러온다. 어느새 공원의 산책로를 벗어나 걷고 있었다. 풀 숲 너머로 사라지는 새를 쫓아 나무 사이를 헤치고 들어서자 커다란 나무를 축으로 수풀과 나무들이 빙 둘러선 채 작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오래된 나무 아래로 한 여성이 무릎 맡에 검은 빛깔의 날렵하고 거대한 늑대 한 마리를 뉘인 채 앉아 있었다. 온갖 새들과 숲의 작은 동물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어 두런거리고 있다. 그 무리 속으로 나를 이끌었던 작은 새가 날아가 앉았다.
"오셨군요."
새가 날아와 앉은 것을 보고 여성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다본다. 나른한 눈 아래로 깊게 파여 들어간 보조개가 웃고 있다. 나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차마 어쩌지도 못 하고 엉거주춤하니 굳어 버렸다.
"저를 아시나요....?"
"이리 가까이 오세요."
가볍게 손짓하는 손길에 이끌려 쭈뼛거리며 다가서자 새들이 작게 날아올랐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아내려 앉는다. 몇 마리인가가 내 어깨 위와 머리에도 내려앉는 통에 움찔 거리고 놀라하다가 가만히 손을 뻗어 쓰다듬어 보자 신기하게도 겁도 내지 않고 조용히 내 손길을 받아내며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고 몸을 맡겨 온다.
"최근에 사당에 가보신 적은 있으신가요?"
"네....?"
갑작스런 여자의 말에 놀라 바라보다가 시선이 어쩐지 여자의 아래에 누워있는 검은 늑대에게로 자연스레 향해 버렸다. 잠들어 있는 것인지 고르게 내쉬는 숨마다 윤기 나는 고운 털이 반짝인다. 얼마간인가 더 그것에 시선을 뺏겨 있다가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사당이라니 어떤 사당을 말하시는 거죠? 이 근처에 그런 게 있었나요?"
"이 지역에는 마을의 어귀에 있는 샛길을 따라 올라서면 작은 사당이 하나 나오죠. 예전에는 설현씨가 자주 가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뭐지? 내 이름도 알고 있어? 도저히 현실감이 있는 상황이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어쩐지 내 이름까지 자연스레 여자의 입에서 태어나오자 기분이 묘하다. 그나저나 사당이라니.... 그런 것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는데?
"아무튼 설현씨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감사요? 저... 죄송하지만 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죠. 하지만 베푼 것이 있으면 받는 것도 있는 법이에요. 이걸 받으세요."
여자가 희고 고운 손끝에 맑은 액체가 찰랑이는 작은 유리병 하나가 들려져 건네어 졌다. 엉겁결에 받아내 손에 쥐자 어느새 여자의 손길이 다가와 내 고개를 자신의 얼굴 앞으로 끌어와 당긴다.
"외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어서 가보세요."
작게 속삭이던 여자의 입술이 잔잔히 내 이마 위로 입을 맞추고는 멀어진다. 몽롱한 정신 중에 착각인지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늑대의 낮은 으르렁거림을 들었던 것 같다. 서서히 눈이 감긴다. 숲의 따스한 햇살과 새의 지저귐 소리. 달큰하고 싱그러운 꽃과 풀의 내음들...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섞여들며 모여들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처음 새를 쫓아가기 전의 공원의 입구에 서 있었다.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서 있다가 손 안에 들려있는 유리병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차가운 감촉이 둥글게 손에서 구르며 빛을 반짝인다.
"민아신.... 신령님....."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이름에 순간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가 불안히도 흔들린다. 어떻게 이럴 수가.... 그 모든 것을 어떻게 다 잊고 있을 수가 있었던 거지? 공허히 비어있던 지난 몇 달간의 추억들이 물밀듯이 몰려 들어온다. 그 강렬하고 선명했던 기억들이... 슬프고 괴롭기도 했지만 따뜻하고 화사했던 나날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급기야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한 얼굴로 가득 들어찬다. 민아신을 만나고 싶다. 그 조그맣고 하얀 얼굴. 살짝 처진 채 찌푸리고 있는 굵은 눈썹과 온갖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맑고 큰 눈망울을 어서 다시 내 눈에 담아내고 싶다.
이제 다 기억났어. 어째서 민아신이 나를 수호령으로 만들었던 건지.... 처음엔 정말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학교의 과제로 지역 유적조사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도 발견한 한 허름한 사당. 길도 제대로 이어져 있지 않은 산의 샛길 안쪽으로 다 허물어져 가는 조그만 사당을 발견하고는 왠지 딱한 마음에 낡은 먼지들을 털며 한 쪽이 무너진 문 안 쪽을 들여다보자 안에 쓰러져 있는 신상(神像) 하나가 눈에 띄었었다. 색이 바래져 있는 신상은 어딘지 험악하면서도 싫어할 수 없는 인상이라 나는 그것을 바로 세워두고는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때때로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은 나에게 마음의 안식처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장소에 도심의 인의적인 소리가 침범하지 못 하는 숲의 고요한 장소. 가만히 앉아 마주하고는 어떤 속마음을 털어나도 그저 말없이 듣고만 있어주는 신상이 좋았다. 잊혀진 오래된 신의 상이지만 어느새 친근하고 의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마치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그곳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구름이 모여들어 회빛의 하늘이 우중충한 날이었다. 잠시만 보고 갈 마음에 사당에 들러서 앉아 있다가 서둘러 산길을 내려가는데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던 그 길에서 갑자기 발을 헛디뎌 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구르다가 몸이 붕 떠올랐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끔직한 순간 끝에 정신을 차리고는 온 몸이 바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려가며 나는 무언가가 자꾸만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 싸늘하고 절대적인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하며 나는 피가 꿀럭이며 역류하는 입을 벌리고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말을 외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이라고.....
그 앞에 작은 여인이 나타났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여자는 그 큰 눈을 일렁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인간이었던 나로써의 마지막 기억이었던 것 같다.
이 바보 같은 신령님.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상관없다는 척 굴어왔으면서 실은 그렇게나 외로웠던 걸까? 단지 한 여고생의 일탈과도 같던 그 방문과 의미 없는 대화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소중할 정도로...? 자신의 다짐도 힘도 버리며 소멸의 위험까지 감내해가며 정성을 쏟을 만큼 내 행동은 값어치가 있는 것 이었을지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비겁해. 민아신....
숲의 샛길을 따라 오래된 기억 속에 감춰져 있던 수풀을 헤치고 들어서자 낡은 사당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칠어진 호흡을 헉헉 이며 서있자 저기 사당 앞으로 앉아 있던 작은 인영이 일어나 서서히 돌아선다. 왠지 더 왜소해지고 푸석해진 안쓰러운 모습으로 지금 이 순간 너무도 보고 싶던 그녀가. 그 큰 눈이 당혹감과 의문을 가득 품은 채 흔들린다.
"설현이? 네가 어떻게....?"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가 끌어안았다. 어깨 가에 와 닿는 민아신의 머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나는 속삭였다.
"아직... 전 신령님에게 갚지 못 한 것이 많아요."
".........."
"다녀왔어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옛것 냄새나는 오래된 사당의 앞에서 나는 민아신을 끌어안은 채로 그 얼굴을 향해 한참을 그렇게 밝게 웃으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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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령님 프로젝트 #2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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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글을 결국 마감까지 완성했습니다... (프리덤!) 틈틈이 쓴다고 썼는데 기간 맞추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14년도 중반부터 시작된 한 달에 한 편씩이라는 암묵적인 다짐은 이걸로 지켜냈습니다. 이제 실컷 자유롭게 '왕좌의 게임' 볼 거예요!!
아무튼 이번에는 전작처럼 무언가 고심하고 있던 주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글이 아니라 못 다한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한 글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사색에 잠긴다거나 하는 것도 없이 쭉쭉 이야기만 써내려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액션물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아차 싶기도 하지만 뭐 애초에 처음 이 글을 쓸 때부터 어느 정도 퇴마물 다운 액션들을 염두해 두고 썼었기 때문에 상관없겠지 하고 홀로 정신적 도피를 하고 있습니다. 무식하고 터프하게 싸우는 설현이가 보고 싶었....
한우처럼 순하고 고집스럽고 앞밖에 못보고 달려가는 설현이와 맹하고 꽁하고 승질머리에 무관심한 태도를 일관하는 맹이의 신령님 이야기는 일단 이걸로 끝낼 생각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음 이야기들을 더 써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빨리 마감으로부터 탈출한 기쁨을 누리고 싶네요. 그럼 다들 14년도 잘 마무리 하시고 다가오는 15년에 행복하시기를 바랄게요. 맴도 내년에 더 대박나기를~! 긴 글 읽어 주신 분들은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