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소리가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조금 확장되어 버린 둥그런 눈동자만이 느릿하게 시선을 움직여 간다. 거짓말처럼 저 멀리 분주히 오가는 학생들 사이로 그 아이가 보였다. 거짓말. 그럴 리가!
"뭐 하는 거야?"
대학의 캠퍼스 한 곳의 벤치에 동기에 둘러싸여 앉아 있던 나는 옆구리를 찔러오는 과친구의 손길에 그제야 정신이 깨어났다. 조그맣게 머리를 내저은 나는 옆자리를 돌아보며 웃어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하여간 가끔 맹한 건 알아줘야 된 다니까."
깔깔깔 웃으며 신나하는 친구들 사이로 마주 웃으며 조심스레 다시 그 아이가 지나가던 곳을 바라다본다. 어느새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조그만 머리통.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휴... 남모를 한숨만이 마음 한 점에 나부낀다.
투아에 놀러오세요~
by. 녀놘
어느 날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가 지나가던 발부리에 걸렸다고 치자. 사방팔방 여길 가나 저길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존재감 없는 돌멩이였지만 그 순간 무언가의 충동에 그 돌멩이에게 이름을 지어줬다면 그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그 날 이후로 그 길을 지날 때마다 그 돌멩이를 찾게 될 것 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있는지 조차 몰랐던 것이 어느 순간 너무도 소중해 진다. 감정이나 사고란 그토록 불안정하고 무규칙 적인 것. 그런 것에 평생을 휘둘리며 살아가야 되는 사람이란 동물은 또 얼마나 무지하고 애처로운 존재란 말인가.
....해서 나는 지금 매우 애처로운 상태이다.
"끄흥..."
절로 깊은 탄식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벌써 1시간째이다. 두꺼운 전공 책을 세워 펼쳐 놓은 채로 도서관의 책상에 앉아 나는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백 속의 휴대폰에는 지금 강의 시간의 동기들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가득 차 있다. 강의도 들어가지 않고 어울려 다니는 동기들도 따돌린 채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 일까?
원망스런 마음에 전공 책을 뚫어져라 보지만 글자들은 이미 볼일 끝났다는 듯 자기들끼리 빙글빙글 내 눈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원스텝. 투스텝. 스텝! 스텝! 스텝! 그 현란한 움직임에 아득한 멀미감마저 느껴진다. 결국 노려보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들자 여전히 저만치 떨어진 책장 사이로 그 아이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스토커라도 된 것 인가? 숨겨뒀던 성에라도 눈이 떴나?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소용돌이친다. 뭐가 잘못 된 거야.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나쁜 짓 하고 있는 건 아닐 거다. 그저 그 아이가 자주 사라져 버리는 도서관에 따라 들어가 층마다 조심스레 모습을 찾아다닌 것뿐이다. 그러다 결국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덥석 그 아이를 볼 수 있는 한적한 책상 앞에 덩그러니 앉아 있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1시간이 넘도록 뻣뻣하게 허리를 곧추 세운 불편한 자세로 굳어 있었던 게 전부다. 그래. 여기까지 나쁜 의도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잖아. 이런 게 문제 될 리가.... 아아!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그래. 처음부터는 아니었어!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처음 만남은 신입생 환영회 정도 였던 것 같다. 자기소개를 하는 신입생들을 엄마미소로 바라보던 중에 그 아이가 나왔었다.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말에 앞머리를 멋쩍게 쓸어내리며 어수룩하게 웃던 아이. 그래놓고는 약간은 어눌하지만 의외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말하는 모습에 귀엽다고 생각했다. 처음의 추억은 딱 그 정도. 그 이후로는 환영회 내내 스쳐지나가며 잠깐씩 마주쳐 웃어주었을 뿐이라 자세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한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몇 달이 지난 뒤였다. 우연히 동기들과 길을 지나던 중에 저 멀리서 낯익은 모습이 아이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을 더듬어 보다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자기를 권민아라 소개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쟤 우리 과 후배 아니었어?"
옆에 있던 동기들에게 묻자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인다. 이리저리 가끔 마주치기는 하지만 잘 모른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환영회 이후로 저 아이의 모습을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다른 후배들은 언제나 자기들끼리 신나게 뭉쳐 다니기도 하고 다른 선배나 나에게도 시시한 농이며 장난도 친근하게 걸고 있었다. 그렇담 저 아이만 지금껏 혼자 다니고 있던 걸까? 신입생 중에 가끔 한두 명씩 잘 적응하지 못 하고 따로 노는 아이들이 있기도 하고 그런 게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런걸 떠나서 왠지 걱정이 되었다.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았는데....
그 사소한 눈 뜨임이 모든 것의 원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고부터는 이상하리만치 그 아이가 자주 눈에 들어와 박히게 되었다. 수업을 가다가,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잠시 휴강시간에 앉아 있다가도 전혀 생각지도 못 한 일상의 뜻밖의 시간에 그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언제나 홀로 어딘가를 걸어가고 있다. 그런 주제에 언제나 침울해 있는 법도 없고 무슨 생각인지 모를 엉뚱한 모습의 웃는 상이다. 뭔가 통통 거리는 불량스러운 못된 통통볼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저 아이의 생각을 종잡을 수 없어 혼란스러워 졌다.
그런 미약한 걱정으로 시작되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집착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 아이의 모습이 한 번이라도 눈에 띄었던 장소를 지날 때는 습관적으로 혹시라도 주위를 지나치고 있진 않은지 살피게 된다. 언젠가 부터 매요일의 시간에 따라 민아의 출현장소에 대해 꽤나 정확한 스케줄표가 머릿속에 자리 잡혀 버렸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오늘 표정과 발걸음은 어떤지 다른 날과도 어렵지 않게 비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망했어."
정말 망했다고 생각한다.
깊은 한숨과 함께 전공 책을 탁 소리 나게 접고 일어나 섰다. 이제 하다하다 스토킹까지 해버렸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쾅 하고 정면으로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어.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요새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주변만 떠도는 건 옳지 못 하다고 생각한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이지만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한다면 조금씩 정리 될지도 몰라.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줄곧 책장에 기대 소설책 하나를 잡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웃고 있던 민아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다. 막 실소를 터트리다가도 주변을 재빨리 두리번거리며 자기 입을 몇 번 치더니 또 얼마를 못 버티고 웃음을 터트린다. 그 정도 둘러봤으면 좀 나를 발견해 주면 안 되나? 아니면 민아는 나를 기억하고 있지 못 할지도 모른다. 하긴 몇 달 전에 잠깐 스쳐갔을 뿐인 선배인데 기억하는 게 이상하려나...
지척까지 다가갈 동안 민아는 전혀 눈치 채지 못 하는 눈치이다. 여전히 책에만 푹 빠져 도통 나를 올려다 볼 생각을 않는다. 괜히 책을 찾아보는 척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알짱거려 보았지만 실패. 나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이대로라면 내가 먼저 뭐라도 말을 건네야 할 처지다.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저 지나치다 우연히 후배를 만난 선배처럼 행동해야 된다.
"저기, 혹시 민아니...?"
막상 말을 내뱉었더니 등골을 따라 소름이 쫙 돋는다. 뭐라니. 이 뻘쭘하고 어색한 느낌은! 목소리도 완전히 다 갈라지고 텁텁한 것 같다. 차라리 그냥 모르는 척 지나쳐 버릴까 싶은 충동이 몰아친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민아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못 들은 건 가?
"저... 민아야?"
결국 울상이 다 되어 민아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올려다보는 조그만 얼굴.
"네?"
"어... 안녕. 요새 잘 못 만났는데 이런데서 보네."
어거지로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당장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처럼 커다란 민아의 두 눈동자가 그런 내 얼굴을 뒹굴뒹굴 구르며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 여자 도대체 누구야?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역시 날 잊어버린 거겠지. 분명 지금쯤 날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라던가 정신병 걸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 초아 선배?"
심장이 덜컥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지금껏 살면서 수만 번은 불렸을 것 같은 내 이름에 이렇게 놀라보기는 처음이다. 살짝 억양이 미묘한 초아라는 발음이 마냥 생소하기만 하다. 민아가 날 기억하고 있네? 기억을 해? 기뻐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도 모른 채 나는 제정신이 아닌 채로 엉결에 불쑥 아무 말이나 내뱉고야 말았다.
"점심 먹으러 갈래?"
"네??"
아아... 아버지. 어머니야. 나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 당겼다. 평소에 후배들에게 말만 걸면 밥 사주기로 유명한 천사(지갑) 선배로 찍혀 있는 나라지만 이 뜬금없는 전개는 뭘까. 당장이라도 입을 쭈욱 잡아당겨 꿰매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내 말은 점심은 잘 먹었는지..."
"우와~ 사주시는 거예요?"
"어? 응... 그래."
..........이제 나도 몰라.
***
와버렸다. 결국 같이 점심을 먹으러 와버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초밥을 보면서 나는 게슈탈트 붕괴현상의 직전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옆을 돌아보니 민아는 우걱우걱 잘도 초밥을 식도 너머로 넘기고 있다.
하아... 지금까지 뭘 했던 걸까? 애초에 내 걱정과는 다르게 민아는 그리 걱정할 부분이 없었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 하는 것 같다가 조금 대화가 오고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팔짱에 달라붙어 애교 섞인 콧노래를 부르는 것부터 물어보는 말에 대답도 잘 하고 질문도 잘 하고 여느 아이들처럼 수다도 잘 떤다. 남들과 사교 관계에 문제가 있을 아이는 아니었다.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역시 모든 것은 내 쓸데없는 기우였던 것. 뭔가 허무한 기분에 그간의 긴장감이 풀리며 힘이 쪼옥 빠지는 기분이다. 뭐 그래도 이로써 귀여운 후배 한 명을 더 얻게 된 것 일 테지. 도통 손을 뻗지 못 하던 접시위로 손을 뻗어 하나를 가져왔다. 그래. 그럼 나도 기운차려서 먹자.
"언니야. 이것 봐요."
"켁. 푸억-"
갑자기 눈앞으로 들이밀어 지는 초밥에 입 안에 씹던 밥알 몇 알이 탈출해버렸다. 뭐야 갑자기. 그나저나 이 아이 선배에서 언니까지 가는 데 몇 마디만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친화력이 있는 아이었던 모양이다. 급히 입가를 쓸어 담으며 옆을 돌아보니 민아가 잔뜩 주름살을 잡은 얼굴로 입가를 툭 내밀고는 툴툴 거린다.
"이거 맛이 이상해요 언니."
"뭐, 뭐가?"
"달달하면서 짭조름하다가 맨들맨들맨드라미에서 쓰읍쓰읍 미끄러지듯 씁쓸하지 않고 담백하기만 해요 이거."
으...응? 방금 뭐라고... 그나저나 그건 원래 담백한 건데.... 차마 사실대로 입 밖으로 내지는 못 하고 민아의 요상한 표현법에 멍때리고 있자니 어쩐지 앞쪽에서 조리사분의 살벌한 시선이 느껴져 왔다.
"애가 뭐래. 이렇게 맛있는데."
에라 모르겠다. 냉큼 민아가 내밀었던 초밥을 입안으로 쏘옥 집어넣고는 조리사분을 돌아보며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아니에요. 아저씨, 맛있어요. 이거.
"그리고 이건요...."
"어? 아... 그것도 맛있지?!"
아는지 모르는지 또 툴툴거리려는 민아의 말에 선수 쳐서 민아가 툭 쳐버린 초밥을 또 입안으로 낼름 넣고는 조리사의 눈치를 살피었다. 저 실룩거리는 눈썹. 아... 화나셨다. 화나신 게 틀림없어. 그런데 민아는 아는지 모르는지 조리사를 바로 눈앞에 두고 혹평잔치를 열고 있다.
"이건 또..."
쏘옥-
"이건 모양이 좀..."
쏘옥-
"얘는 너무 구운 게..."
윽... 민아야 그만해. 더는 입안에 못 몰아넣겠어. 숨이 차도록 필사적으로 초밥을 몰아넣고는 민망한 마음에 조리사를 슬쩍 쳐다보고 민아를 봤더니 얘는 아직도 뭔가 더 쏟아낼 기미였다. 민아야 그런 말을 하려거든 옆에 있는 네가 먹은 그 쌓인 접시를 보고 말하란 말이야. 잠깐... 저거 다 내가 계산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왜 동기들이랑은 같이 안 다니니?"
아무래도 화제를 돌려야만 할 것 같아 사실 물어보고 싶기도 했던 질문을 던져보았다. 아직까지도 초밥에 대한 평가에 여념이 없던 민아도 그제야 나를 돌아보고는 또 멋쩍게 머리를 쓸어내리며 웃는다.
"딱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요새 제가 빠져 있는 게 있다 보니 거기에 바빠서 그렇게 되었어요."
사투리 억양이 섞인 약간은 어눌한 묘한 말투로 대답하는 민아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안심이 되었다. 역시 별 일 없었던 거네. 그렇구나 하며 나는 마주 웃어 주었다. 바라보고 있자니 저 웃을 때 한 쪽볼에 생기는 보조개가 못내 귀엽다.
"빠져 있는 일이라면 뭐야?"
"음... 그게요."
뭔가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민아가 팔짱을 끼고는 나름 골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뭔가 풍겨 나오는 맹한 분위기와 어긋나면서 그 모습이 또 나는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 가 없었다. 평소에도 동생들이나 귀여운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쯤 되면 이건 좀 심각한 게 아닌가 의심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아이에게 왜 이렇게 요 한동안 집중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너무도 서서히 그 강도를 더해가 어느새 내가 눈치 채지 못 할 만큼 불어나 있다. 정말로 조그만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도 뚫는 다더니 한 사람을 생각하는 작은 마음들이 쌓이면 이토록 커다란 감정이 되고야 마는 것일까? 하지만 그 감정의 방향을 가늠할 수 없기에 나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게 혹시 최근에 강남 근처에서 있었던 대형화제 사고 뉴스 아세요? 엄청 높은 고층 건물이 막 순식간에 다 타버렸던 거?"
민아의 질문에 그제서야 생각에서 깨어났다. 내가 약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민아는 내가 모른다고 오해했는지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거 봐요 언니.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막 사람들 다 돌아다니던 대낮에 한순간에 고층건물 하나가 완전히 불타 버렸던 일이 있었어요. 그 때 뉴스랑 인터넷에서도 막 나오고 그랬는데 못 봤어요?"
민아의 핸드폰을 받아들어 보자 최근에 보았던 익숙한 기사 화면이 나와 있었다. 며칠 되지도 않은 사건이므로 기억하고 말 것도 없다. 이곳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인근 서울 한복판에서 있었던 의문의 화재사건. 고층건물이 순식간에 타버릴 정도로 엄청난 불길이 발생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및 부상자도 없고 화재진압 따위는 필요도 없이 스스로 또 순식간에 불길이 사그라들었던 영화 같은 이야기. 물론 처음 이 뉴스를 봤을 때는 엄청 신기해하기도 하고 관심을 가졌었기도 하지만 지금 이런걸 왜 보여주는 걸까?
손끝을 움직여 화면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자 기사 스크랩의 위로 '지구방위군' 이라는 큼직한 사이트 명칭이 보인다. 지구... 방위군?? 이리저리 메뉴를 들어가 보자 이것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 사건의 자료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때요? 신기하죠 언니?"
"근데 이건 어떤 사이트야?"
"제가 운영하는 사이트에요! 지구방위군 인데요?"
"아... 그래?"
그 괴랄한 작명센스는 뭐지? 그나저나 민아가 운영하는 사이트라니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다. 조금 더 사이트를 둘러보고 있자니 민아가 다가와 설명해 준다.
"그 화재사건 말고도 요즘 들어 그런 신기한 일들이 여기저기 곳곳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여기는 그런 정보들을 사람들이 올리고 서로 얘기를 나누는 곳이에요. 막 다른 나라에서도 제법 들어와서 정보를 올려준다니까요."
"그럼 요새 빠져있다는 일이 이거야?"
"네. 이런 거 너무 재밌지 않아요? 요새는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가 않아서 완전 설레요!"
너무 들떠있는 게 티나서 어찌해줄지를 모를 정도로 민아는 신나 보였다. 그렇구나. 이런 쪽에 관심이 많은 아이인가 보다. 민아답다고 생각되어지기는 하지만 왠지 걱정되는 마음이다. 그래도 동기들이 랑도 어울리고 선배들도 찾아오고 학교생활에 잘 어울렸으면 좋겠는데 이런 건 전부 노파심인 걸 까.
"그럼 이제 일어날까?"
"잘 먹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까지 민아에게 어떠한 충고나 조언도 해주지 못 하였다. 왠지 쓸데없는 참견일까 봐. 민아가 안 좋게 생각하게 될까봐 한참을 망설이기만 하였다. 겨우 귀엽게 웃고 있는 민아에게 전화번호를 받아내는 것 정도로 만족하고 나는 민아를 보내주었다. 사실 문제일 것도 없었다. 조금 독특한 아이일 뿐 특별히 모난 부분도 없다. 굳이 선배라고 나서서 해 줄 말 같은 거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민아에게 뭔가를 말해주려 하고 싶어 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의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풀 수 없는 난제. 멀어져 가는 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되는데도 힘껏 머리를 헝클여 틀었다.
"그나저나 민아 엄청 먹네...."
훌쭉해진 지갑만큼이나 못내 내 마음도 허하다....
***
민아가 보이질 않는다. 한동안 급작스레 늘어난 과제들에 치어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지내다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민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기억하고 있던 민아의 스케줄을 따라 이동해 봤지만 어디에서도 그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내가 바빴던 동안 가는 곳들이 바뀐 건 아닌지 캠퍼스 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녀 봤지만 역시나 헛수고였다.
"어쩌지..."
손에 들려놓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뭐라고 전화를 걸지? 왜 요새 도통 안 보이냐고? 그러기엔 너무 우스운 일일 것 같다. 그저 한 번 밥 한 번 먹은 친하지도 않은 선배인데 그게 뭐라고 그런 전화까지.... 민아야 알 일이 없겠지만 사실은 나도 한 번 몰두하는 일이 생기면 주의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파고드는 성격이어서 그래서랄까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도 손에 꼽을 정도로 인간관계의 관리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남들 보기에 서툰 것이 사실이었다. 그냥 서로 그렇게까지 간섭하고 간섭당하고 하는 것이 별로랄까, 그저 서로 편하고 헐렁한 관계인 것이 마음이 놓인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잘 알지도 못 하는 후배에게 요새 왜 안 보이냐고 전화까지 건다는 건 뭔가 내 양심적으로 죄책감이 들어섰다. 애초에 이렇게 민아에게만 자꾸 비정상적으로 쏠리는 이 마음을 이해할 수 가 없다.
"역시 그만두는 게 좋겠어."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찌할 수 가 없었다. 왜 갑자기 학교에 안 보이는 걸까. 자연스레 잔뜩 찌푸린 채로 걷다보니 어느새 도서관의 컴퓨터 앞에 앉게 되었다. 예전에 봤던 민아가 운영한다던 사이트. 민아가 관리자라고 했으니 아마 그곳에 가면 혹시 뭐라도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영 친하지 못 해 평소에 거의 만질 일이 없던 컴퓨터를 가지고 조심조심 만지고 있자니 내가 정말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 찾았다!"
더듬더듬 키보드를 만지고 있자니 의외로 '지구방위군' 이라는 키워드만으로도 단번에 검색되어 나온 사이트에 들어가서는 나는 낯익은 사이트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혹시 민아가 써놓은 글이라던가 뭐 그런 건 없을까? 사이트는 생각보다도 꽤 규모가 커서 접속자수 표시는 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게다가 그만큼 올라오는 글들도 많다. 이곳에서 민아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사건들이나 그 밑에 사용자들의 댓글들을 읽어 보고 있자니 참 여러 가지 주변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에야 도통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 신경 쓰지 않고 살았지만 그런 나라도 흥미롭거나 오싹한 일들이 많다. 그러고 보니 유명 브랜드 티파니의 본점에서 마네킹이 사라졌던 사건은 나도 알고 있던 이야기다. 바로 이 근처에 있는 매장이었으니 모를 리가 없다. 이거... 작년 가을쯤에 있었던 일 아니었나? 그 때 우리 학교 선배 한 명이 거기 관련되었다고 뜬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었다. 결국 나중에야 흐지부지돼서 금방 잊혀지긴 했지만... 아마 그 때 마네킹이 살아서 움직였다고 괴담 같은 것이 유행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나저나 여긴 연령제한도 없나보네."
'그 마네킹 짱 예쁘던데 그 마네킹이랑 살고 있는 사람은 완전 햄벅할 듯 ㅋㅋㅋㅋ 부럽냐?' 라는 '잇몸미인' 이라는 닉네임의 댓글을 읽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의외로 사건 등의 자료는 꽤 수준 높게 정리된 자료들의 빈도가 높은 것으로 보아 올리는 쪽의 연령대는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자료를 보는 사람들은 천차만별인 것 같았다. 물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거나 생각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 도배된 댓글들이 많고 결국 이 사이트는 도시괴담 정도를 모아놓은 흥미성 사이트로 치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꽤 신빈성 있는 자료들도 제법 있는 것 같은데... 역시 자기일이 아니면 관심 없다 일 테지."
물론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니 딱히 뭐라 비판할 말은 없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조금 더 사이트를 구석구석 돌아보려 하는데 계중에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최근글 목록 중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저 닉네임. 잠깐만... '민아장군님'? 민아장군님이라면... 민아잖아?!
서둘러 게시글을 클릭하며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하던 나는 화면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튕겨지듯 뒤로 물러서고야 말았다. 화면을 채우며 계속해 로딩 되는 꺼림칙한 사진들. 정확히 알아볼 수 없는 뭉그러진 사진들에는 마치 까마귀의 깃털 같은 검은 깃털들이 수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니터를 따라 한기가 파고 들어와 스며드는 것 만 같다. 말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자꾸만 솟구쳐 나는 구역질이 밀고 올라오는 입가를 손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온 몸으로 거부하듯 기분 나쁜 그것들에 억지로 마우스를 잡아끌어 스크롤을 내리자 마지막에 민아가 쓴 듯 한 글이 있었다.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같이 첨부되어 있던 사진들입니다만 아무래도 이것은 어떤 저주 같은 것과 연관이 있는 듯 합니다. 극히 위험한 성격의 것이니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주변에서 이런 것과 관련된 현상을 목격하시게 된다면 제보해 달라고 부탁하시네요. 해서 저도 호기심이 들어 이 사진의 장소를 한 번 조사해 볼 생각이에요. 어떤 일이 생길지 기대됩니다. 그럼 이만~ 총총.'
급히 게시된 날짜를 보자 오늘부터 3일전이다. 그럼 대충 민아가 안 보이기 시작한 날짜와도 겹친다. 설마 민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 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던 나는 돌아서던 모습 그대로 우뚝 멈춰 서버리고야 말았다.
"민아야...."
"어? 언니. 여기서 또 보네요."
정말 거짓말 같은 아이이다. 가장 보고 싶을 때, 간절할 때 언제나와 같은 개구진 미소를 하고는 내 뒤에 나타나 있다. 얼떨떨하게 굳어있는 내 곁으로 너무도 자연스레 다가온 아이는 내가 켜놓은 모니터의 화면을 보고는 놀란 것처럼 안 그래도 그 큰 눈을 키우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와~ 이거 보고 계셨던 거예요?"
"어? 응."
그제야 정신이 깨어 말하고는 나는 가녀린 민아의 어깨를 움켜쥐고는 다짜고짜 요리조리 살피어댔다.
"어디 다친 데 없는 거야?"
"네?"
"너 저거 조사하러 간 거 아니었어? 다친 데는 없느냐구!"
"아... 저거요? 에이~ 재미 하나도 없었어요. 갔더니 아무것도 없고 완전 시시했는데요?"
"바보야!"
내 언성에 움찔한 민아가 움츠리고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아... 정말 조금만 더 가까운 사이였더라도 분명 때려줬을 거야.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했냐고. 왜 다른 사람 걱정되게 이러냐고.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어느새 몰린 주위의 시선에 나는 민아의 손을 잡고는 도서관 밖을 향하였다. 내 손에 끌려 나오면서도 민아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런 모습에 속이타면서도 조금 마음이 진정되고 나자 내가 미친년이었구나 생각이 든다. 대뜸 친하지도 않는 후배에게 우연히 만나자마자 다치지 않았냐고 다그치질 않나 뭐 하는 거냐며 끌고 나오질 않나... 정말 우습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잠깐 봤지만 저거 되게 불길한 일 같아 보여. 저런 것에 자꾸 개입하지 마. 응?"
"별 거 아닌데요 저거..."
"별 거 아니어도 하지 마. 괜히 해가 될 만한 거 하지 말란 말이야."
"왜요?"
대뜸 물어오는 민아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리고야 말았다. '왜냐니? 걱정되니까 그러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왔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조금은 뾰루퉁해진 얼굴로 나를 쏘아보고 있는 민아의 눈동자를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나는 민아에게 그저 지나치듯 스쳐간 짧은 인연의 대학선배일뿐. 그녀의 입장에서 나의 지금 행동이란 얼마나 개연성 없는 예의 없는 참견일까. 어째서 나는 이 아이에게 매순간 건네는 어떤 한 마디를 위해 이리도 수백 번의 방황과 고뇌를 견뎌내야만 하는 건지 정말 바보는 나인 것 같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하면 안 돼요? 저 좋아하는 거면 조금 위험해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
네 말이 맞아. 자기가 좋아하는 거라면 설사 그게 상처받거나 남들이 손가락질 할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나에겐 그런 용기는 없다. 민아가 저렇게 막힘없이 자기의 생각을 말할 때도 나는 여전히 수없이 많은 생각과 고민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답변하나 해내질 못 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나의 마음을 이 아이에게 표현하지 못 하였다.
얼마나 지났던 걸까? 민아는 계속해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던 내 얼굴을 이상하다는 듯 허리를 숙여 올려다보고는 이내 내 손에 붙잡혀져 있던 자신의 손목을 풀어냈다.
"더 할 얘기 없으시면 전 그만 가볼게요."
"미안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다. 주저 없이 돌아서는 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처참히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뭔가 커다란 구덩이 안으로 온갖 후회와 고통이 밀물처럼 빨려 들어오는 것 같다. 그것들에 당장이라도 에워싸여 이대로 숨 막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지막이라도 한 번만 더 민아를 불러내야만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 불현듯 솟구쳤다.
"민아야..!"
"네?"
뒤돌아 선 민아의 눈동자에 또다시 마음이 움츠러든다. 반사적으로 불러내었지만 어느새 온갖 핑계와 변명거리가 쏟아지며 내 입가를 막으려 한다. 더듬더듬 열리는 입가가 꼭 남의 것인 것 만 어색하다.
"민아야 하나만 답해줘. 어느 순간부턴가 자꾸만 한 사람이 떠오르고 걱정되고 보고 싶다면 그건 무슨 감정인 걸까?"
"뭐라구요?"
"그 사람 앞에만 가면 바보처럼 자꾸 아무 생각도 말도 할 수 없게 되는데 그건 도대체 무슨 감정인 거야?"
"그거... 좋아하는 거잖아요?"
"응. 맞아. 그러네."
짧게 심호흡을 들이신다.
"나......... 너 좋아하는 가봐."
정말정말 바보같이 결국 민아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내 감정이 인정 되었다. 이제서야 내가 민아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마음을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주변의 어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자기 말과 행동을 내뱉는 아이에게 나는 내 마음을 끝내는 확인 받은 것 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나는 도저히 혼자서는 나를 둘러싼 그 많은 것들에 맞설 용기가 생기질 않았나 보다. 그랬더니 그 말을 내뱉고는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꿍꿍 모아두었던 것처럼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와 버렸다. 마치 그동안 무언가로부터 억압 받았던 서러운 감정들이 일순간 솟구쳐 오르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되어 버렸어. 그러니까... 걱정시키는 일 하지 말란 말이야."
마치 아이처럼 3살이나 어린 후배를 앞에 두고 통곡하는 내 모습이 꼴불견 같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부여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민아는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그런 나를 두 눈만 껌뻑껌뻑 바라보고 있다.
"미안해. 갑자기 이런 소리 해서. 하지만...."
"잠깐만요. 언니."
어느새 다가온 민아가 내 고개를 낚아채고는 자기 얼굴가로 끌어 내린다. 채 그것에 반응하기도 전에 갑자기 입가로 말캉하고 달콤한 무언가가 부딪혀 왔다고 생각했다. 1초. 2초. 3초. 4초.... 완전히 패닉에 빠진 정신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 한 채 분주히 비명을 질러댔다.
"민아야 이게 무슨...!"
반사적으로 민아를 떼어 내 밀쳐놓고는 나는 아직도 느낌이 생생한 입술 끝을 매만졌다. 무슨 생각이야?!
"언니!"
"뭐... 뭐야."
"우리 그럼 사귀어요!"
"어...?"
방금 전의 그것은 나 혼자만 충격이었던 건지 민아는 달뜬 목소리로 신나서 방방이다.
"언니야가 나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럼 나도 대답해 주려면 내 마음을 확인해야만 하겠다 싶어서 언니 입술에 입을 대보고 기다려 봤더니 나도 조금 어딘가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저번에 티비에서 보니까 입을 대보고 기다리다 두근거리면 좋아하는 거라던데 그러면 우리 사귀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뭐? 안 돼!"
"네? 왜요~"
"너... 난 심장 내려앉는 줄 알았다고!!!"
아무리 당돌한 연하라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어! 내가 뭐라고 소리 지르건 민아는 '오늘부터 1일~' 이딴 콧노래나 부르며 내 팔짱을 끼어다가 나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한다. 뭐야 이건? 거짓말이지? 내가 얼마나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얼마나 남몰래 끙끙 앓았는데 이건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난 진심이란 말이야. 이건 너무 장난 같잖아.
"민아야 그래도 이건 좀 그렇지 않아?"
"뭐가요?"
"그래도 이렇게 막 갑자기 마음을 정하는 건...."
"언니. 내가 그랬죠. 요새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라고.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말이야. 민아야 난...!"
"괜찮아요. 언니 맘은 진심이잖아요. 그럼 그 마음에 자신감을 가져도 돼요."
"........."
올곧게 날 바라보는 민아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아찔하고 아득했던 정신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다. 그래. 네 말이 옳은 것 같아. 언제나 자기 생각을 꾸밈없이 그대로 얘기하는 너니까 그런 너의 말을 의심하면 안 될 거야. 내 마음이 진심이라고 내가 인정한 것처럼 내 마음만큼이나 너도 나에게 진심이 될 거라는 것을 나는 믿어야 하겠지. 조금은 더 나에게 자신감을 가져야만 해. 알겠어. 고마워. 민아야.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사귀기로 했으니까 언니가 밥 사주세요~ 히히."
"........"
.......나, 정말 자신감을 가져도 되는 걸까?
'그대 이름은 천사(지갑)~ 천사(지갑)~ 천사(지갑)~♪' 이게 무슨 BGM 이야! 당장 꺼지지 못 해!!
민아야, 앞으로는
햇볕이 따가울 때 너의 곁에 시원한 그늘막이 되길....
바람이 차가울 때는 따스한 담요가 되길....
언제나 네가 지치고 힘들 때 곁에서 너를 보듬어 줄 수 있기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너라는 아이를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그런 내가 될 수 있기를....
그렇게 기도할게.
....그러니 밥은 조금만 먹자?
.
.
.
투아에 놀러오세요~ ....fin
***
본격 '오늘부터 란파루루~★' 세계관의 다섯 번 째 글입니다!! 쓰고 싶어 몸살이 나던 투아를 결국 쓰게 되었네요. 4차원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총공 민아와 그런 민아에게 자꾸만 말려 들어가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총수 초아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만 쓰다 보니 처음부터 방향이 어긋나면서 완전히 다른 길로 새어 버린 것 같습니다. (쿨럭) 게다가 뒷쪽으로 갈수록 유치찬란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치부의 팬티바람 쇼가 펼쳐졌는데 투아니까 뭐 어떠랴 라며 무책임하게 넘어갔다고도 합니다. (민아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기로 합시다)
어쨌든 소원과 계약자의 세계관을 공유하긴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현실적인 내용의... 그러니까 단지 세계관에 거주하긴 하지만 전혀 일련의 사건들과는 관계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어느새 조금은 연결되어 버렸네요. 물론 민아가 그런 미스터리 사건들에 관심이 많은 아이이며 그런 류를 취급하는 가장 거대한 사이트의 운영자라는 설정뿐입니다만 이 사이트 설정에는 사실 숨은 재미요소들이 있었는데 이 사이트에 귤연이 각각 '햄볶는 귤', '귤까는 햄' 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 중이라는 것 과 본편에서도 나왔습니다만 효성이 '잇몸 미인' 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며 (하릴 없이 댓글쟁이로 하루에 반은 여기서 죽치고 있습니다...) 파루루도 이곳의 회원이라는 점 같은 것들이에요. 그 밖에도 상당수의 계약자들이 이곳에 가입되어 있으며 정보를 주고받으며 수집중입니다. 그런 사실들을 좀 더 재밌게 댓글 형식으로 싸우고 있다던가 하는 코믹한 요소로 집어넣어 보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초아가 그런 내용들을 줄줄이 읽으며 본편에 기술하고 있으면 너무 어색할 거 같아서 그냥 빼버렸습니다. 아무튼 그런 연결고리가 많기 때문이었는지 이 글에서는 '마네킹이어도 괜찮아', '불타는 롤리팝' 등의 사건들도 되짚어 나오게 되었네요.
설정에 대해 조금 더 애기를 꺼내보자면 민아는 부산에 있는 큰 횟집 딸이라는 것 정도? (초밥에 대해서 따지고 든 건 사실 횟집 딸이라서 였다기 보단 민아가 특이해서 이지만...) 그리고 민아에게 메일을 보낸 건 '의문의 여성(태연)' 을 쫓고 있는 규리 라는 것. 지금까지의 사건 순서를 되짚어 보자면 '불타는 롤리팝' -> '마네킹이어도 괜찮아' -> '불타는 롤리팝(p.s) -> '오늘부터 란파루루~★' -> '파루부터 란파루루~★' 순서 정도가 되고 이 글 '투아에 놀러오세요~' 는 '불타는 롤리팝(p.s) 과 비슷한 시간대의 일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이로써 앞으로 '귤연' '더블마츠이' 정도의 떡밥 정도만 해결되면 아마도 본격적인 커다란 사건으로 글이 진행될 것 같아요. (의문의 여성 '태연' 과 관련된 이 세계관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 입니다) 물론 그 때까지 가려면 앞으로 10년은 걸리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요즘처럼 초단편으로 짧게 짧게 쓴다면 금방도 가능하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아무튼 투아를 너무너무 써보고 싶어서 쓴 글인데 이렇게 또 발로 쓴 글이 탄생되어 가뜩이나 이제 한참 비상해야 될 맴팬픽에 해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되네요. (....라기 보다 애초에 맴팬픽은 어디 가야 볼 수 있는 거라죠?) 그럼 이로써 제가 투아를 독점해도 되↗는↘거↗죠? ㄲㄲㄲ (민초는 드릴게요-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