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8일 토요일

[맹설] 반짝반짝 빛나는...




















 삐걱대는 낡은 자전거의 바퀴를 굴리며 울퉁불퉁한 논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계절은 완연히 여름으로 물을 가득 채운 논 위로는 푸른 벼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선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느릿느릿한 페달 밟는 속도에 맞춰 얼굴가를 스치는 잔잔한 바람에 살풋 눈가를 찡그리며 나는 하굣길의 여유로움을 만끽하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농사의 고된 일에 시달려야 하는 나에게는 이 한적한 시간이 일상에서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혼자만의 짧은 단몽과 같은 시간이라 여기고 있었다.


 "야!"


 불현듯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듯 화들짝 급하게 자전거의 바퀴를 멈춰 세우고야 말았다. 놀라 바라보니 어쩐 일인지 저만치 앞에서 흰 원피스 차림의 작은 체구의 여자가 입 앞에 둥그렇게 손을 말아 쥐고는 명백하게 나를 부르는 태도로 소리치고 있다.


 "야! 김설현!!"


 저 언니가 어째서.... 평소에는 몸 까닥이는 것도 죽어라 싫어해서 집 밖으로는 잘 나오지도 않던 민아 언니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버젓이 논길 한 복판에 버티고 서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아아...익숙하지 않은 가벼운 두통에 머리를 내저으며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자전거를 굴려 언니를 향해 다가갔다.


 삐걱. 삐걱.







반짝반짝 빛나는...
                               written by. 녀놘



 "뭐 해요?"

 "마을 구경."

 "저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가 봐야만 하는데요. 오늘 부모님 도와서 밭에서 할 일도 많고...."


 자전거를 터덜터덜 끌고 민아 언니의 뒤를 따라 걸으며 작게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기분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한 민아 언니는 내 불편하다는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 한 건지 돌아서서는 괜찮다는 듯 손을 까닥거린다.


 "걱정하지 마. 작은아버지가 너 데리고 돌아다녀도 괜찮다고 하셨어."


 아니.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불만을 얼른 틀어쥐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 별 수 있겠나 싶었다. 일단은 나보다도 언니인 것은 사실이니 무턱대고 계속 싫은 티를 내비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아버지도 참, 그저 민아 언니 말이라면 끔뻑 죽어서 뭐든 좋으신 것 같다. 평소대로라면 이 바쁜 농번기에 그저 손 하나가 아쉬워서 절대 날 놀게 할리가 없 것만 그렇게도 이 언니가 좋으신 걸 까? 나한테는 평소에 말 한마디 잘 없으신 분이 대단하다. 대뜸 언니보고 자기를 작은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시지를 않나...


 민아 언니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외진 시골 마을에 찾아온 지는 이제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았다. 민아 언니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와는 막역한 사이로 형님 아우하며 예전에 힘들 때 의지하던 사이시라고 하시는데 서울에서 크게 사업을 하시며 남 부러울 것 없이 지내시다가 최근에 한순간 가세가 기울며 빚더미에 놓이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민아 언니의 부모님들은 지금 빚쟁이들에 쫓겨 피해 다니시면서 어떻게든 무너진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중이시고 올해 고3이 되는 민아 언니만 우리 아버지 집에 잠시 맡기게 되신 것 같다. 분명 안타깝고 걱정되는 상황인데 우리 아버지는 그 형님이 지금은 잠시 이래도 곧 다시 일어나실 분이라며 언제나 너털웃음으로 흘려버리신다. 게다가 얼마나 언니의 아버지를 존경하시는 건지 그분의 딸인 민아 언니 말에는 무조건 그러라며 고개부터 끄덕이고 계시다.


 오늘도 할 일이 많은데 정말 괜찮으신 걸까...? 밤마다 온몸이 쑤신다며 힘들어하시는 어머님 생각이 나 남몰래 걱정하고 있는데 앞서 걷던 민아 언니가 다가와 나를 올려다본다. 그 큰 눈이 뜻 모를 반짝임을 가득 담고서 일렁이고 있는 모습에 불안해져서는 움찔 놀라 물러서서 물었다.


 "왜... 왜 그래요?"

 "우리 맛있는 거 먹자."

 "네?"


 맛있는 거라니?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더니 민아 언니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쓴다.


 "치킨! 피자! 그런 거 있잖아! 여기 와서 며칠간 그런 건 입에도 못 대 봤단 말이야. 여기가 아무리 시골이어도 그런 건 있지?"

 "시내 나가야 하는데요..."


 시내까지 가려면 못해도 자전거로 부지런히 달려도 30분은 가야하는 거리다. 이 언니가 가겠다고 태워다 달라고 하면 또 못 태워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갑자기 또 무슨 소리람? 게다가 돈은 또 어딨어서....


 "돈 있어요?"

 "뭐?"


 조심스레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뿔싸 싶은 표정으로 눈이 동그래져서는 입을 쩍 벌리고 서서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다급하게 눈을 깜박여대며 나를 몰아세운다.


 "너! 너 돈 없어? 용돈이나 뭐 그런 거 있을 거 아니야! 일단 오늘은 네가 쏴. 내가 꼭 나중에 갚을 테니까."

 "저도 돈 없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꼬박꼬박 용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끔 필요할 때 마다 어머님이 조금씩 주시는 편인데 원채 주시지도 않지만 나도 쓰는 일이 없어 달라고 보채는 일도 없다.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달려와서 해질 때까지 부모님 도와 농사일 하다가 일찍 잠들어 버리는 게 보통인 일상인데 돈 쓸 일이 어딨어.


 "그러지 말고 집에 가요. 어제 따온 거 있으니까 내가 옥수수 쪄줄게."

 "싫어! 내가 지금 옥수수 먹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맨날 반찬도 첨보는 풀떼기들 밖에 없고 배고프단 말이야!"


 이 언니가 진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 심하다. 그렇지 않아도 귀한 손님 왔다고 어머님 딴에는 있는 반찬 없는 반찬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오랜만에 상위에 요 며칠간 푸짐하게 올리셨는데 반찬 투정이라니.... 선이 굵고 예쁘게 생긴 눈썹에 힘을 빡 주고는 찡얼찡얼 거리고 있는 민아 언니를 마주보고 있자니 나도 따라 은근슬쩍 짜증이 올라왔다. 


 사실 민아 언니가 처음 왔을 때는 엄청 설레고 기대했었다. 자식부자가 많은 이 시골 마을에서 나는 유일하게 외동인 집안의 딸인데다가 아버지는 무뚝뚝하기가 그지없어서 어려서부터 애교 한 번 제대로 못 부려보고, 농사일 돕는다고 끼리들끼리 어울려 놀기도 몇 번 못 해보고 자라온지라 서울에서 온 같이 살게 된 언니는 나에게 환상을 심어주기 충분하였다. 드디어 내게도 뭔가를 공유할 수 있는 가족이, 언니가 생긴다는 사실에 두근두근 하면서 부모님 따라 밤중에 내려온 민아 언니를 마중 나가는데 큰 짐가방에 기대어 서있는, 만지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하얗고 여린 첫인상에 서울사람은 역시 다르구나 하면서 몇 번이고 눈을 부비어 대었었다. 마치 병약하고 유약한 꿈결 속의 공주님 같았다.


 물론 그 환상은 다음날부터 와장창 깨어져 버렸다. 민아 언니는 결코 조신하거나 수줍은 성격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안하무인의 괴팍하고 드센 성격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게다가 게으름뱅이에 찡찡이다. 귀한 손님이라며 아버지도 어머니도 손 하나 까닥 하지 않게 배려해주시고 있는 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 언니는 남의 집에 들어앉아서도 속 편하게 대우받기를 원할 상이었다. 농번기라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쁜 탓에 집안에는 아무도 없고 가끔씩 어머님이 들러서 참 준비 등으로 부산스러웠는데 그 곁에서 일을 돕다가 내가 슬쩍 볼라치면 그저 마루위에 앉아서는 손 놓고 도울 생각을 안 하고 멀뚱히 보고만 있다. 하물며 조용히 있는 것도 아니고 연신 심심하다느니 먹을 게 없다느니 뚱해서는 불평을 중얼 거리고 있는데 의지할 수 있는 언니를 원했던 내 입장에서는 여간 실망이 아니었다. 


 그뿐이랴. 또 뭔 호기심은 그렇게 많은지 농사일 하러 우리 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에는 홀로 집에 남아서는 온 집안을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꺼내보고 들춰보고 조금이라도 먹을 것 같이 생겼으면 일단 입에부터 집어 넣어보고 마는 통에 배탈도 나고 해서 그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또 한동안 내가 고생을 했다. 도대체 언니가 생긴 건지 짐덩이가 하나 늘어난 건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우리 집 마당에 메어있는 누렁이가 더 착하고 영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야! 심심해. 그럼 나 재밌는 데라도 데려다 줘!"


 이건 또 무슨... 한동안 배고프다고 애꿎은 땅만 쿵쿵 밟아대던 민아 언니가 갑자기 나를 올려다보고는 하는 말에 살짝 머리 한 구석이 아려왔다. 그래. 물론 서울이라는, 고 말로만 듣던 화려한 곳에 있던 사람이 시골 촌구석에 쫓겨 오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심심하고 쓸쓸한 심정일지 내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이건 언니도 아니고 동생도 아니고, 도저히 한 집안에 같이 살게 된 식구라고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마치 문자 그대로 철저히 '객'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매우 서글퍼졌다. 나는 내가 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입술만 꾸욱 깨물고 있었다. 누구를, 무엇을 원망하는지도 모른 채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러다 문득 언니의 이마 사이로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계절은 한 여름으로 우리가 서 있는 마을의 골목 위로는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힐 듯 일렁이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하며 귓가를 어지럽히는 매미 소리까지 갑자기 모든 것이 의식되어져 온다. 그러고 보니 나도 흥건히 땀이 나있던 상태였다. 무의식중에 쓱쓱 손을 들어 올려 이마에 땀을 닦아내자니 말똥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민아 언니는 그런 대로 이 더위에서도 땀도 별로 안 흘리고 잘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통 새하얀 피부는 햇살아래에서 유난히 희게 빛나고 있다. 


 '그래도 더운 건 더운 거겠지.'


 나는 속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민아 언니의 손을 붙들 고는 골목어귀를 빠져나와 뒷산 너머로 향했다. 사실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 힘들고 외로운 상황일 텐데 내가 너무 언니와는 처음부터 관계도 없던 나만의 감정을 가지고 홀로 언니를 마음속에서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있는 건 아닌가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꿋꿋이 서있던 언니의 모습에 감추지 못 하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리던 것처럼 혹시 무리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이런저런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산길을 올라서고 있자니 한동안 영문도 모른 채 내 손에 이끌려 산길을 오르던 민아 언니로부터 죽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지금 어디 가는 거야! 힘들어 죽겠어. 천천히 가."

 "아, 미안해요."


 퍼뜩 손을 놓고는 돌아보니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는 쌕쌕 거리며 민아 언니가 나를 노려다 보고 있다.


 "어디 가는데!"

 "계곡이요."

 "계곡?"

 "더워 보여서...."


 내가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갸웃거리며 내 꼴을 보고 있던 민아 언니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아 쥐었다. 뜻밖의 행동에 놀라 민아 언니를 바라보자 뭘 보냐는 투로 날 흘낏 보더니 턱으로 슥 산길을 가리키고는 웃는다.


 "가자. 계곡. 안 그래도 더웠는데."


 그러더니 나보다도 앞서 걸음을 떼고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길을 올라선다. 멍해 있다가 어느새 역으로 이끌려 가는 형세가 되어서는 나는 민아 언니의 손을 따라 올라갔다. 내 손을 잡아 이끄는 작고 가녀린 뒷모습. 그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 순간 어째서인지 그제야 민아 언니가 나보다 언니라는 사실이 불현듯 실감이 되어 다가왔다. 언니... 그 짧은 두 글자의 단어는 어떤 아늑한 위로처럼 나를 감싸고 스쳐갔다. 


 물론 그것은 단 몇 초간의 일로 체 몇 걸음을 못 떼고 민아 언니는 도저히 더 이상은 못 걷겠다면서 벌렁 산길 위로 드러누워 버렸다. 뒤통수에 뭐라도 한 대 맞은 듯이 뻥쳐서는 나는 그런 민아 언니를 내려다보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착각이 심했다. 언니는 무슨.... 속없는 짐덩어리지. 어휴...


 가는 길은 꽤 멀었다. 다행히 뙤약 같은 햇볕은 녹음이 짙은 수림 사이로는 스며들어오지 못 하고 있었다. 그래도 열기는 어느 정도 전해져와 적당히 여름의 기분을 들게 해준다. 폭이 좁고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구름다리 하나가 나왔다. 그곳을 건너 잠깐 돌길을 따라 걷다보면 시원한 물줄기 소리와 함께 작은 계곡 가에 이르게 되었다. 계곡에 도착한 건 한참후의 일이었다. 중간에 계속 드러눕는 민아 언니 때문에 산길을 지지부진 걷다가 내가 거의 붙잡아 끌고 가 듯 이끌어 서야 우리는 깨끗한 계곡물을 마주볼 수 있게 됐다. 여기까지 민아 언니를 데려온 나에게 새삼 대견하다고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나는 시달림에 지쳐 있었다. 낮은 한숨과 함께 묵묵히 터덜거리며 계곡가로 다가가자 옆에서 신난 민아 언니의 외침이 들려온다.


 "와! 계곡이다!!!"


 방금까지 지쳐있었던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에 달려든 언니는 원피스가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첨벙거리고 물을 튀기며 계곡 가에 발을 담그고 즐거워했다. 그 옆의 바위 위에 다가가 털썩 주저앉자 미소가 얼굴 가득 걸린 민아 언니가 나를 돌아보고는 눈망울을 밝게 빛내었다.


 "설현아. 여기 물 엄청 차가워!"

 "옷 젖어요. 적당히 하고 나와요."


 저렇게도 좋을까. 안 데려왔으면 어쩔 뻔 했나 싶어서 물끄러미 민아 언니를 지켜보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마치 조그만 애들처럼 한껏 신이 나서는 물속에서 발을 이리저리 차올리며 놀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정겹다. 비산하는 물방울들의 위로 스며든 햇살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우와... 신기하다. 여름인데 어떻게 이렇게 물이 차지?"


 실컷 뛰어 다닌 건지 철퍽철퍽 거리며 내 있는 데까지 걸어와서는 털썩 아무 바위 위에나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웃는다. 정말 철부지 애 같다. 조심성 없게 바위사이로 꾸깃거리며 눌려있는 하얀 원피스를 보고 있자니 더 그런다. 남은 평생 입어보지도 구경해보지도 못 한 저런 예쁜 옷을 입고도 이 언니는 참 제멋대로다. 하얀 천 구석구석에 생긴 구겨지고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모습이 어딘지 묘하게 내 안의 환상을 깨는 듯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한 편으론 또 붙들어 놓고 있었다.


 나 같은 시골 사람이야 저런 옷을 입는다면 뭐라도 묻을까 벌벌 떨겠지만 이 언니한테는 역시 아무렇게나 입고 마는 옷인 건가 싶어서 대단도 하고 그러고 보면 서울 사람 맞구나 싶기도 하다가도 역시나 저 조신하지 못 한 행동거지들을 보고 있자면 도시 사람이 저럴 리가 없다고 생각돼서 갸우뚱 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부질없는 고민으로 어찌됐든 언니의 저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보고 있자면 그런 의문이나 의심은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그라들고 말아 버렸다. 여름의 뙤약볕에 언제나 곧이곧대로 그을리며 검게 그을려 있는 까무잡잡한 내 피부와 너무도 비견되는 저 하얀 피부는 어쩐지 자꾸만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반문하자 가만히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기분 좋게 앉아 있던 민아 언니가 나를 돌아보고는 웃어 보인다.


 "서울에 살 때는 말이야,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매일이 쫓겨 다니는 것 같은 일상이었거든. 여름이라고 해봤자 바쁘다고 제대로 가족끼리 여행도 한 번 못 가보고... 여기나 거기나 지루하고 따분하긴 마찬가지지만 어쩐지 여기 있으면 마음은 편한 것 같아."

 "그거야 언니가..."

 "응?"

 "아니에요...."


 그거야 언니가 집안일이라고는 요만큼도 안 하고 놀고 있으니 그런 것이고 바쁘기로는 시골이라고 도시보다 못 할 게 뭐 있으랴! 그런 마음으로 조그맣게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나는 내심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언니가 오고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은 언니의 깊은 곳을 나누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니는 여기서 얼마나 더 같이 지내게 되는 걸까? 급하게 처리될 일은 아니었으니 적어도 세 달? 아니 어쩌면 그보다 오래되어 올해 해를 넘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그 때까지 언니는 지금처럼 아무 일도 안 하고 그저 저렇게 속없이 웃으며 한가롭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무슨 연유인지 불현듯 들었다. 이상하기도 하다. 분명 여기 오기전까지만 해도 그것 때문에 불만이 가득했었는데 어쩐지 지금은 그 편이 낫겠다 싶다. 방금의 그 말 때문이었는지 민아 언니의 모습은 무언가 큰 짐을 덜어 버린 사람처럼 개운하고 쓸쓸한 맛이 있었다.


 고3이라 한창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였을 테고 고민도 많았을 텐데 지금의 언니는 도시에서의 그런 추억들인 양 모두 잊어버리고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느긋하게 즐기며 이곳에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은 내 입장에서는 조금은 밉상스러운 것이 사실이었지만 방해해서는 안 되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소중한 순간일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내려가면 어머니한테 부탁해서 닭 잡아 드릴게요."

 "뭐? 진짜?!"

 "네!"


 내가 웃어 보이자 뜻밖의 말에 눈이 평소의 배나 커진 민아 언니가 당장에 뽀뽀라도 해주려는 듯이 내게 달려와서는 덮치듯 나를 끌어안고 팔짝팔짝 뛰어 대었다. 그렇게 고기가 먹고 싶었나?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서는 진작에 민아 언니와 대화다운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 한 지난 며칠을 후회하였다. 이렇게 조금만 얘기를 나눴어도 그런 미워하는 마음 따위 갖지 않았을 건데... 


 "가요. 우리..."

 "응!"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민아 언니의 손을 가볍게 잡아 이끌며 나는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 올라올 때와는 다르게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숨을 한껏 들이쉬자 짙은 풀잎의 향기가 아찔할 정도로 폐부를 가득 채우며 들어왔다. 높이 뜬 해는 여전히 생동감 있는 금빛으로 반짝이며 나뭇잎 사이사이로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



 "야이, 이건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여긴 그런 거 안 된다니까요? 그만 하고 와서 이거나 먹어."


 한숨을 푹 내쉬며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찐 감자 바구니를 들어다가 대청 위에 내려놓았다. 와이파이를 찾겠다며 대청 위에 서서는 한참을 이리저리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던 민아 언니는 그제야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털썩 그 앞에 주저앉았다. 어머니를 졸라 닭을 잡아다 푸짐하게 저녁상을 차려 받은 뒤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녁상만을 차려주시고 마을 어른들과 만나기로 하셨다며 우리들끼리 먹으라고 집을 나서시고 안 계셨다. 오랜만에 언니 덕택에 같이 배부르게 먹고 지금은 해가 저문 시원한 대청 위에 둘이 앉아 하릴없이 태평히 밤하늘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혹시나 언니 입이 심심할까 싶어 집에 있던 감자나 조금 쪄 왔는데 그 사이를 못 참고 또 언니는 툴툴거리고 있다.


 "너네 집은 어떻게 컴퓨터도 하나 없냐?"

 "그런 거 워낙 안 써서...."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도 어머님도 간신히 국민학교나 나오신 분들인데다 평생 농사일에 매달려오신 분들이시니 그 밑에 자라난 나도 컴퓨터나 인터넷에는 거의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필요도 느끼지 못 했고... 다른 아이들 하나씩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도 딱히 욕심나지 않아서 그저 통화나 간신히 되는 폴더폰 하나가 내가 갖고 있는 전자기기의 전부였다.


 "자, 여기요."


 뜨거운 걸 잘 못 잡는 언니를 생각해 호호 불어가며 감자 껍질을 벗겨다가 내밀었더니 잔뜩 입이 나와 있던 민아 언니가 퉁명스레 받아 쥐고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져서 복스럽게도 먹는다. 하여간 싫다면 서도 군말 없이 먹는 건 잘 먹는다. 천성인 것인지 참 쉽게 도 화내고 웃고 즐기고, 자신에게 솔직한 모습이 보기 싫지 않다. 아니, 좋고 싫고를 떠나 그건 나에게 일종의 동경과도 같은 마음을 들게 했다. 어디에 있어도 얽매이지 않는, 얽매일 것 없는 자유로운 모습. 언니와 대화를 하고 나서부터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있던 그런 것들이 내게도 의미를 갖고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 작은 체구에 어디로 그렇게 다 들어가는 건지 맛있게도 먹는 민아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불현듯 담장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돌아보니 처음 보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이 서너 명 우르르 허락도 없이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을 보며 반사적으로 민아 언니를 가로막고 서서 노려보자 그 중에 조금 키가 작고 금니 하나가 보기 싫게 반짝이고 있는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는 걸쭉하니 침을 마당에 뱉어냈다.


 "드디어 찾았네. 너 찾는다고 아저씨들이 얼마나 개고생 했는 줄 아냐? 아빠 엄마는 어디 가셨을까?" 

 "저도 잘 몰라요."


 겁먹은 빛이 가득 묻어나는 언니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설마 했는데 언니네 부모님들을 찾아온 빚쟁이나 사채업자들인가 보다.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 온 건지.... 혹시나 어른들이 오시지 않을까 담장 너머를 살폈지만 다들 모임에 모여계신 건지 인기척이 없었다. 


 "딸이 돼 가지고 부모가 어딨는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너네 아빠가 무슨 못된 짓을 한 줄은 알지?"

 "우리 아빠는 못 된 짓 한 적 없어요!"


 언제 무서워했냐는 듯 단호히 말하는 민아 언니를 보며 남자는 실실 웃어댔다.


 "요즘 세상에는 돈 빌려 쓰고 야반도주하는 게 죄가 되지 않나 보지?"

 "그.. 그건 부모님이 꼭 갚으실 거예요."

 "아저씨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재미있다는 듯 민아 언니를 번들거리는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던 남자는 무슨 생각인지 뒤에 있던 남자들을 돌아보고는 몇 마디 수근 거려댔다. 남자의 말에 따라 뒤에 섰던 사람들이 낄낄 거리고 상스럽게 웃으며 민아 언니를 혐오스런 눈길로 쳐다보는데 쭈뼛 소름이 돋는다. 대화를 하던 남자는 다가와 내 뒤에 서있던 민아 언니의 손을 잡아 끌었다.


 "보아하니 효심이 깊은가 본데, 마침 아저씨가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알 거든. 어때? 같이 갈까?"

 "싫어요! 이거 놓으세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고. 딸이라면 부모님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안 가려고 버티는 민아 언니를 억지로 남자가 잡아 끌자 가녀린 언니의 몸이 조금씩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보다 못 한 내가 언니를 잡아끌고 있는 남자의 손을 끊어내고는 남자를 밀쳐 내었다.


 "뭣 들 하시는 거예요! 언니 그냥 놔두세요!"

 "뭐야, 이건 또!"


 밀쳐진 남자가 불쾌한 시선으로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다 뒤를 돌아보고 눈짓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 서 있던 남자 중 하나가 다가와서는 내 어깨를 잡아채고 마당 한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저항하려고 발 버둥쳐 보았지만 우악스런 남자의 힘에 그대로 마당에 나뒹굴자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온다. 


 "어린애가 어른들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법이 아니지."


 넘어진 나에게 다가오며 날 던져버린 남자는 자신의 두툼한 손을 깍지 껴 위협적인 소리를 내보였다. 어찌하지 못 하고 그 모습을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는데 생각지도 못 했던 소리가 들려왔다.


 "다 큰 어른들이 애한테 무슨 짓이에요! 제가 따라 갈 테니까 걔는 그냥 놔둬요."


 지금껏 들어보지 못 한 성난 목소리와 함께 나한테 다가오던 남자를 따라와 밀쳐내더니 금니의 남자를 돌아보며 민아 언니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 이상씩은 큰 남자들을 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고 섰다. 평소의 맹하고 실실거리던 표정은 어디가고 날카로운 얼굴로 언니가 노려보고 있자 그 모습에 금니의 남자는 몇 번인가 턱을 손으로 쓸어 담으며 언니의 눈동자를 관찰하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아저씨가 확실히 큰 돈 만질 수 있는 데로 소개해 주마."


 여기에 왔던 목적은 다 달성했다는 것인지 남자는 언니에게 손가락을 까닥이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주저 없이 발길을 돌렸다. 금니의 남자가 돌아서자 내게 다가오던 남자도 나를 한 번 쓰윽 내려다보고는 김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가고 있는 남자들을 쫓아 바삐 갔다. 주춤거리며 일어서며 보니 민아 언니는 어쩔 작정인지 그 뒤를 겁도 없이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가면서 힐끗 나를 바라보고는 가는데 앙 다문 입술하며 분명 두려운 게 뻔 한데도 태연한 표정으로 마주친 나에게 괜찮다는 듯이 잠깐 웃어보이고는 간다. 


 "거기, 멈춰요!"


 마당을 나서던 남자들은 내가 소리치자 무슨 일이냐는 듯 어슬렁거리며 돌아서다가 뜨끔 하고는 놀라서 움찔하였다. 나는 한껏 으르렁 거리고 있는 누렁이의 목줄을 잡아 쥐고는 남자들을 노려보고 섰다.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람에게 짖어본 적 없던 순한 누렁이는 나랑 언니가 위험하다는 걸 아는지 기특하게도 남자들을 향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사납게 짖어대었다.


 남자들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면서도 누렁이의 덩치를 보고는 쉽게 손을 쓰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 누렁이가 짖는 소리는 퍼져서 마을 여지저기서 동네 개들이 하나둘씩 같이 짖어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 소리에 웅성웅성 어른들 소리도 섞여 나오고 있었다. 남자들은 일이 그르쳐졌다는 걸 깨달았는지 나를 무섭게 쏘아보다가 민아 언니를 놓아주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아나 버렸다. 


 남자들의 뒤에 대고 계속 짖어대는 누렁이를 달래고 앉아 있자 민아 언니가 뚜벅이며 걸어와서는 나를 얼빠진 얼굴로 내려다본다. 그 얼굴에다가 대고 똑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마주봐주니 한동안 내 얼굴을 보던 민아 언니가 피식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애가 대담도 하다. 겁주다가 일이 더 나빠졌으면 어쩔 뻔 했어."

 "그러는 언니는 무슨 생각으로 그 남자들을 따라나서요. 그러다 정말 잘못 되면 어쩌려고."

 "그야, 같이 사는 동생이 위험해지려고 하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뭐 당연한 것을 새삼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태연히도 말하는 민아 언니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나는 민아 언니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결국 민아 언니는 처음부터 우리 가족을 진짜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지금까지 가족이니까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농땡이도 치고 땡강도 부리고 부려먹기도 하고 그런 거였던 걸까? 가족이니까. 뭘 하든 이해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처음부터 벽을 두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쩜, 그렇다면 언니는 처음부터 나를 정말 자기 동생처럼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언니가 당연하다는 듯이 위험하다고 내 앞을 막아서 줬을 리가 없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참 지낼수록 알기 힘든 언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처음엔 나이만 헛먹은 언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들어보면 그 속에 자신만의 생각도 뚜렷하고 고민 끝에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다. 또 매번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찡찡거리는 거 같으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내 앞에 서서 손을 내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자꾸만 빠지게 만든다. 


 나는 한동안 이것들을 고민하고 있다가 불현듯 그제야 나에게도 정말 언니가 생겼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토록 갈망했던 언니라는 존재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새삼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언니는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별 뜻 없이 마주보고 있다가 집 쪽으로 어른들 웅성거리고 오는 소리가 가까워져 오자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한껏 기지개를 켰다.


 "여기서 보는 밤하늘은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여기 오길 잘 했어."


 느긋하게 말하는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하얗게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언니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에 각인시키겠다는 듯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가 떠나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될 수 있다면 언제까지고 언니가 내 곁에 지금처럼 남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철없이 소망했다. 지금의 언니의 모습을 평생 마음속에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정말 바라던 게 이런 것이었을까? 언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자꾸만 혼란스러워 졌다. 마치 무언가가 뒤엉켜 주체할 수 없이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 연유 모를 때 아닌 감정에 점점 더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던 와중에도 나는 일어나 언니의 곁에 서서는 본능적으로 그 작고 하얀 손을 꽈악 붙잡아 손에 감싸 쥐었다. 마치 영원히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치기 섞인 몸부림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를 돌아보는 언니의 커다랗고 새까만 눈동자에 별이 가득 박혀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눈동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다.


 무심코 언니를 따라 올려다 본 밤하늘에는 언니의 눈동자를 닮은 무수히 많은 별들이 하얗게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새하얀 빛으로...


 반짝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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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짝반짝 빛나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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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의 글을 썼습니다- 언제부터 월간 녀놘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다보니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그냥 주기 상으로 이정도가 글 한편을 쉬엄쉬엄 취미삼아 쓰기에 좋은 걸까 싶습니다. 적당한 부담감과 적당한 여유로움. 적당한 덕심과 적당한 현실감이랄까 ;ㅅ;

 아는 분이 제가 모던파머 맹이 사진을 보고 앓아대면서 맹설로 시골에서 리얼리티 한 편만 찍어주세요 징징거리고 있으니 짧은 떡밥하나를 던져주셨는데 그거에 푹 빠져 한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그 분이 절대 써주실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럼 자급자족이라도 해보자 싶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가 썰고 싶은데 결과적으로는 편의점 전자렌지 햄버거의 패티를 썰고 있게 되어 버리는 최악의 상황이 오는 건 아닌가 예상은 했습니다만 어쩌겠어요. 목마른 사람이 양잿물이라도 마셔야...

 어쨌든 결국 나온 글은 요모냥이라서 막상 보고 싶던 시골에서의 알콩달콩한 에피소드 같은 것은 어디 갔는지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고 요상한 주제로 글이 흘러들어가 버렸습니다. 저에게 평온한 일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열하는 시골 짧글은 무리였었나 봅니다. ....랄까 원래 달달물은 못 써요. 아무튼 너무 글이 짧아서 여러 에피소드가 못 들어간 것이 아쉽습니다. 내가 보려던 건 이게 아닌데...ㅠㅠ

 맹설은 몸으로 하는 일련의 모든 행위 같은 거에는 설현이에게 맹이가 의존하는 관계이면서 (예를 들어 이거해 달라 저거해 달라 온갖 심부름을 시킨다거나, 나는 힘드니 네가 저거 해라는 갑질이라거나...) 반대로 내적인,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아직 방황하고 고민 많은 어리고 순수한 설현이가 맹이에게 의존하는 그런 관계가 좋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것들에 대해 조금 글로 풀어 써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여담이지만 최근 새로 읽고 있는 어느 존잘님 글에서는 유독 읽는 글마다 한 눈에 너는 내 운명이 되어 버리는 상황이 많아서 읽기가 약간 난처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런 식으로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잘 공감이 안 되는 바람에, 그런 부분들을 읽을 때는 자꾸만 집중력이 흐트러져 버렸어요. 게다가 그게 조금 분위기 있는 심각한 글일 때는 더더욱 심해져서 갑자기 첫 눈에 보자마자 마치 신을 영접한 듯 충격을 받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뭐야... 쟤 왜 저래?' 싶어서 최소한의 계기 정도라도 있으면 어떨까 아쉬워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존잘님 글이니 좋아라 보기는 했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까다로운 독자인 주제에 작가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본인도 똥글만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구제불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 와서는 거의 망글이 되어버린 것 같네요. 역시 글 쓰는 건 어려운 거라는 걸 새삼 느낍니다.

 나중에라도 정말 제대로 된 반짝반짝 빛나는 시골 맹설을 보고 싶다고 소원하면서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짧글에 뻘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해요. 3월에도 과연 글을 쓰게 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던지며... 그럼~ b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