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깃꼬깃 손아귀에 쥐고 있던 종이짝을 다시 쳐다보았다.
'급구! 사파리월드에서 아르바이트생을 구합니다!' 라는 대문짝만한 타이틀 아래로 적힌 꽤나 큰 액수의 시급. 이정도 페이의 알바자리는 정말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조건도 없단다. 맹수를 상대해야 한다는 게 조금 겁이 나기도 하지만 그 정도 안전문제야 미리 대비되어 있지 않을 리가 없다. 이건 누가 먼저 달려가서 신청하느냐가 문제일 뿐인 신이 주신 기회다!
....라고 돈이 급했던 나는 쉽게 생각하고 말았다. 인생의 실수다.
지금이라도 당장 손에 잡혀 있는 전단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없었던 일 마냥 돌아서고 싶은 충동이 굴뚝같이 들어섰다. 하지만 눈앞의 금발 머리를 한 여자는 보고 있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히 웃으며 내게 두 팔을 벌려 환영한다는 듯 한 포즈를 짓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흥분해 소리치면서 열렬히 잘 왔다고 기뻐하고 있는데 여기서 돌아섰다가는 하늘에서 저주라도 내릴 기세였다.
그러지 마. 권민아. 어차피 처음 본 사람이야. 잘못 왔다고 말하고 가볍게 돌아서기만 하면 돼. 네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살기나 했어? 그냥 한 발 뒤로 내딛기만 해. 그럼 그 다음은 쉬울 거야. 자신을 계속해 다독였지만 어떻게 해도 그게 쉽지가 않다. 그만큼 여자는 살면서 내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순수하고 티 없는 환영을 해주고 있었다. 대학 졸업하고 일 년여 동안 개백수짓을 하며 집안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도 안 하던 사회부적응자인 내게 그것은 거부하기 힘든 따뜻함이었다.
결국 나는 사파리월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안전망도 보호구도 없는 사파리의 한복판에서 사자와 호랑이에 둘러 싸여 웃고 있는 정신 나간 여자에게 홀려 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 사실은 그녀의 옆에서 가만히 앉은 채 나를 노려보는 집채만 한 백색의 라이거에게 오금이 저려 발 하나 떼지 못 하고 꼼짝 못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이시여!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냐고!!!!
사파리 월드의 사육사는 호미를 들고 있다.
written by. 녀놘
"죽을지도 모른다."
뭐...?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청테이프를 손에서 힘없이 툭 떨어트리고는 혜정이를 바라보았다. 내 앞에 마주 앉아 열심히 낑낑 거리며 박스 위로 테이프를 돌돌 말고 있던 혜정이는 남의 일이라고 완전히 태연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저번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맹수들은 괜찮은 것 같다가도 느닷없이 달려들기도 한다더라고."
"야, 야! 자기 일 아니라고 그게 당사자한테 할 소리야!!"
이 놈의 못 된 계집애! 아주 매를 벌어라!! 응징의 발길질을 퍽퍽 해대자니 혜정이가 농담이라고 엄살을 부려대며 손으로 훠이훠이 내 발을 쫓아낸다. 실실 웃으며 혜정이는 물러났지만 어느새 공포로 완전히 굳어 버린 나는 씩씩거리며 혜정이를 노려보았다. 다시금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역시 그런 아르바이트 따위 한다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눈앞으로 집채만 한 맹수가 달려와 아가리를 벌리는 상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쭈뼛 돋는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나온 핑크레이디 앨범은 들어봤어?"
내가 진저리를 치고 있든 말든 딱히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투로 혜정이는 금세도 화제를 바꾸며 웃어 보였다. 저걸 진짜 머리채를 붙들고 한 판 벌여야 되나? 마음 같아서는 확 달려들고 싶다만 어른스러운 내가 한 번 더 참을 수밖에...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내젓고는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단념해 버리기로 했다. 하기야 개백수 은둔형 외톨이인 나에게 저 녀석은 유일한 말벗이 되어주고 있는 괴짜다. 이 어이없는 아르바이트 얘기에도 별 말도 묻지 않고 한 달음에 달려와 주었다. 그 뿐이랴. 지저분한 내 자취방 한 가운데 같이 널브러져 앉아 주워 온 박스를 이어 붙여 가며 간이보호구를 만들어 주고 있는 아이이니 오늘은 고마워서라도 눈감아 주도록 해야겠다.
"그걸 말이라고 해? 완전 죽음이야!"
게다가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위해 만나는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데쓰메탈 락밴드인 핑크레이디의 국내에 몇 명 되지 않는 초마이너 극성팬! 우연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만나게 된 이후로 혜정이는 완전히 죽마고우가 되어 있었다. 하기사 온통 가사가 살인이니 강간이니 선정적인 것으로 도배된 핑크레이디의 노래니 어지간해서는 취향 맞는 친구를 찾기가 어렵다. 혜정이와 내가 만나게 된 건 그야말로 핑크레이디의 보컬, 지옥의 여왕이신 핑크레이디님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겉으로만 봐선 허우대 멀쩡하니 훤칠하고 잘생쁨하게 생긴 이런 애가 핑크레이디의 극성팬이라니 누가 알았겠어? 그런 의미로 잠시 여왕님께 마음속 감사의 기도를...
"이번 8월에 오는 내한은 우리에게 다시는 없을 여왕님을 영접할 기회야. 반드시 가야해."
혜정이의 말에 방금까지도 여왕님 생각에 눈을 반짝이며 망상에 빠져 있던 나는 급격히 시무룩해져 버렸다. 아아... 다시 현실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그래. 이게 다 그 내한 콘서트 때문이었다. 어떤 마왕의 가호가 있던 것인지 국내에 핑크레이디의 내한 콘서트 일정이 잡히게 되면서 그 소식을 듣고는 그 날부터 나와 혜정이는 온통 그 콘서트에 찾아갈 생각만 가득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콘서트표가 돈이 한두 푼으로 해결될 가격이 아니라는 거다. 국내에서는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광란의 퍼포먼스와 노래가 벌어질 테니 적은 관객 수와 장소선정의 어려움으로 자연히 공연 가격이 올라간 데다 거기에 숨어있던 국내의 마이너 팬들이 눈에 불을 키고 티켓 전쟁에 들어가면서 지금 핑크레이디 내한 콘서트의 티켓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반드시 가야만 한다. 내 살아생전 두 눈으로 여왕님을 영접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놓칠 수 없어!
"그래! 꼭 가고야 말겠어! 맹수든 뭐든 상관하지 않겠다!"
마음속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8월 전까지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 개백수 은둔형 외톨이에 생활고까지 찌들 리는 형편이지만 콘서트 티켓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불살라서라도 기필코 돈을 마련하고야 말겠어! 그러려면 그 정신 나간 사파리의 알바 일을 해내는 수밖에 없다. 결심을 굳히고는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는 나를 보며 혜정이는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주먹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쥐고는 말했다.
"그래! 꼭 같이 가자! 세상은 뭐다?"
"살인! 강간! 지옥!"
두 손을 얼싸 잡고는 흔들며 소리친 우리는 한동안을 또 목이 쉬어라 'Go to Pink Lady! Go to Pink Lady!' 따위를 외쳐대며 미친년들 마냥 광란의 시간을 보내다가 결의에 차서 각자의 앞에 놓인 박스에 초록 테이프를 칭칭 감으며 간이 보호구 제작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좋아! 까짓것 호랑이든 사자든 다 덤비라고 해! 지옥의 테러리스트 핑크레이디님을 만나기 위한 내 열정을 막을 수는 없다! 그 누가 여왕님을 만나러 가는 나의 길을 방해할 것이냐아!!!!!!!!!!
그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집중하느라 귀욤터지는 입모양으로 살짝 입을 헤 벌리고는 테이프 감기에 열중인 혜정이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낙관하고 있었다. 여왕님을 만나러 가는 지옥 길에 맹수가 별 거냐고!
-
"자, 이걸로 이제부터 똥을 퍼 담아 오세요."
"........"
똥이었다. 맹수가 아니고 똥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맹수의 똥이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척척 하면 돼요."
허리를 굽혀 똥을 퍼 담는 시범을 보이는 금발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가 내게 쥐어준 호미를 내려다보았다. 최악이다. 나는 지금껏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살아왔었는지도 모른다. 기껏 맹수의 공포로부터 극복했다고 여겼것만 맹수 보다 더 한 것도 존재한다는 걸 나는 알아차렸어야 했다.
자신을 초아라고 소개한 금발의 사육사는 호미를 손에 쥐고는 능숙한 동작으로 바닥의 똥을 호미로 찍어 잡아 옆에 있는 수레에 집어넣는 과정을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보여주고 있었다. 두 눈이 거의 감기듯 둥글게 휘며 보조개가 깊숙이 패이는 그녀의 웃음은, 보고 있자면 흡사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일조하는 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들만큼 화사한 면이 있었다. 저 웃는 낯에 이미 한 번 홀린 전과가 있던 나는 급히 도리질을 하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양손바닥으로 볼을 짝짝 힘껏 치고는 불쑥 한 손을 들어올렸다.
"저... 질문이 있는데요."
"네?"
여자가 돌아보자 나는 사파리에 들어서면서 부터 그녀의 옆에 어슬렁거리며 착 달라붙어 있던 백색의 라이거에 조심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똥을 모아다가 여기에 묻는 거죠?"
그렇다! 뭐, 다 좋다 이거야. 사육사니 맹수들이 싸질러 놓은 배설물들을 위생과 미관을 위해 청소한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모아다가 따로 처리하는 곳이 있을 거 아니야. 그걸 저 여자는 차곡차곡 수레에 한 가득씩을 모아다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곳에다가 착실하게 호미로 땅을 파서는 묻고 있었다. 원래 여기가 똥통으로 쓰이는 뭐 그런 곳인 겁니까? 버젓이 사파리 한복판에 치부를 드러내놓고 있는 그런 구조? 관광객들에게 그렇고 그런 향기까지 다 보여줄 수 있다는 뭐 그런 자연친화적 마인드인 겁니까아?!!
"여기는 '밤바'의 땅이에요."
내 질문에 초아씨는 자신의 곁에 우둑 커니 서 있는 새하얀 라이거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올려다보았다. 저 라이거의 이름이 밤바인가 보다. 크기로 따지자면 서 있는 초아씨보다도 오히려 더 커다란 말도 안 되는 덩치의 거대한 녀석이다. 온 몸이 윤기 나는 새하얀 털로 덮여 있는데 은은히 호랑이 특유의 검은 무늬들이 보이고 우아한 하얀 갈기가 흩날리고 있는, 어찌 보면 영물에 가까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곳은 밤바의 땅이기 때문에 함부로 호랑이들도 사자들도 넘보지 못 해요. 그래서 이곳에 묻는 거예요."
"에에....?"
뭔 소리야 그게? 나는 당최 뜻을 알 수 없는 초아씨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애꿎은 땅을 쏘아 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동안 퍼다 날랐는지 온통 검은 빛깔로 푹푹 썩은 내를 내는 땅의 표면은 이제는 흙인지 똥인지조차 구분이 안 갈 정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냄새도 심하고...
"저기... 그럼 밤바는 괜찮은 거예요? 자기 집이 똥으로 뒤덮이는데?"
"괜찮아요. 밤바는 제 친구니까 이해해줄 거예요."
밝게 웃으며 초아씨는 보란 듯이 옆에 있던 수레를 확 기울여 똥을 우르르 땅 위로 쏟아 내었다. 어라...? 초아씨. 밤바는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눈썹을 꿈틀대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밤바가 쏟아진 땅 위로 열심히 호미질을 해대는 초아씨의 먹음직스러운 황금빛 둥글둥글한 머리통을 거대한 아가리 사이에 콱 물고는 매달리는 것을 보니 역시 밤바도 싫은 게 분명하다. 뭐야 이거... 역시 저 여자 이상한 사람이었어. 어느새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밤바를 매달고 호미질을 하며 실실 웃고 있는 초아씨를 바라보고 있자니 오싹 소름이 돋는다. 철면피다! 악의가 없어서 더 무서운 완전 철면피야!!
"그럼 민아씨는 사자네 쪽으로 가서 똥을 모아 오세요. 전 호랑이네 쪽으로 갈게요."
초아씨는 밤바의 집에서 왼편을 손으로 가리켜 주었다. 잠시 초아씨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따라 사자의 무리 쪽을 지켜보다가 나는 반사적으로 초아씨를 다시 바라보고는 긴장으로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초아씨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죠? 그냥 이렇게 가서 쟤들 사이에서 똥을 치워 와도...?"
"걱정마세요. 저는 밤바가 같이 가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니, 당신 말고 나 말이야!! 내 마음속 절규가 들리지 않는 건지 초아씨는 방글방글 웃으며 이따가 보자는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밤바와 함께 저 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뭐야, 저 여자?! 저건 천사의 탈을 쓴 악마다! 악마가 틀림없어!! 악의 없는 철면피 정말 최고다! 저 정도면 핑크레이디님과도 맞먹겠어. 아니, 아니지. 그건 아닌가? 그래. 아무리 그래도 핑크레이디님은 지옥의 여왕이시니까.
정신적 패닉 속에서 횡설수설하던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여자와 밤바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뻣뻣하게 굳은 몸을 돌려 사자의 영토 쪽을 향했다. 그래. 어쨌든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돈이 필요해. 꿀꺽 마른 침을 한 모금 삼키고는 주섬주섬 몸에 둘둘 붙여놓은 상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혜정이와 밤이 새도록 완성시킨 'BoxBox 1호'다. 거의 상자인간이라고 해도 될 만큼 완전히 무장하고 있던 나는 조심조심 호미를 챙기고는 수레를 질질 끌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뭐... 초아씨가 말은 저렇게 했어도 분명 이렇게 사파리 한복판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고 그 흔한 우리조차 없는 무책임한 상태에서 나 같은 초심자 알바생을 집어넣은 것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 일 거다. 의외로 맹수들이 길이 정말 잘 들여져 있다거나...
온통 긴장한 통에 눈앞이 깜깜해져서 어떻게 걷는지도 모르는 중에 신기하게도 눈앞에 똥 하나가 들어왔다. 허... 그래도 일이라고 저게 눈에 들어오긴 하네. 나도 참 대단하다... 입맛을 쩝 다시고는 조심조심 다가가서는 나는 휙휙 매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사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 틈에 잽싸게 처리를....
가까이서 본 똥은 영역표시의 용도인지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주변에 여기저기 발톱자국이며 털도 붙어 있고 아무튼 불쾌하다. 코를 움켜쥐며 살며시 호미를 뻗어서는 초아씨가 보여준 대로 똥을 푹 찍어서 간신히 털어버리듯 수레에 휙 던져 넣고는 나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돈 벌기 힘들다. 무서운 걸 떠나서 생리적 혐오감에 진저리가 난다.
그 때 불현듯 등 뒤에서 느껴지는 어떤 오싹한 기운에 나는 질겁하며 황망히 돌아다보았다. 도대체 어느 틈에 나타난 건지 웬 거대한 수사자 한 마리가 조용히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노려다 보고 있었다. 기척을 감추고 있던 걸까? 누.. 누가 맹수 아니랄까봐.... 녀석은 내가 방금 똥을 치워 버렸던 장소와 내 수레를 번갈아 돌아보더니 낮게 으르렁 거렸다.
"어... 안녕? 설마 이거 네 똥이니?"
뭐지... 뭔가 단단히 뿔난 거 같이 보이는데. 어슬렁어슬렁 내게 다가오는 수사자의 모습에 당황해서는 나는 얼른 수레에 던져 넣은 똥을 다시 호미로 찍어다가 아까 놓여져 있던 자리에 다시 주섬주섬 옮겨 놓으려 했다. 그러자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이제는 완전히 살벌한 기세로 아가리를 쩍 벌리고는 내게 뛰어 오기 시작한다. 오... 오지마! 다시 돌려 놓아주면 될 거 아냐!
-크아아앙!
덮쳐 오는 사자의 흉맹한 기세에 나는 질겁하고 눈을 질끈 감고는 엎드렸다. 죽는다. 나는 여기서 죽는다!! 이게 뭐야! 저주할 거야! 귀신이 될 거라고오!!!
그 때 갑자기 사자에게서 비명과도 같은 당혹스러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현듯 들려오는 사자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막 나를 덮칠 기세였던 사자는 어디선가 날아온 무언가에 얼굴을 맞고는 당황해 그대로 달아나고 있었다. 뭐... 뭐야...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버려서는 나는 멍한 정신에 얼이 빠져서는 공포심이나 두려움에 울거나 할 생각도 못 하고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뭐였던 거지? 느릿한 시선에 내려다보니 방금 전 사자를 맞추고 깨진 것이 풀 위로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유리병...? 아니, 시약병인가?
"괜찮아요?"
"네?"
옆에 서서 들려오는 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웬 여자 하나가 나를 허리를 숙여서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저히 사파리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연구복 코트에 그 안으로 하얀 블라우스 정장에 눈에 띄는 새빨간 미니스커트 차림이 눈에 띈다. 전혀 노출이 없음에도 은은히 드러나는 볼륨 있는 몸매가 쓸데없이 야하다는 느낌이어서 괜스레 보고 있다가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민망함에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여자를 보고 웃어주자 다행이라는 듯 여자도 따라 웃었다. 살짝 감긴 듯 한 나른한 눈에 또렷하면서도 아련한 얼굴이었다.
"큰일 날 뻔 했네요. 요즘은 사자들도 호랑이들도 한참 영토 다툼에 점점 더 치열해 지고 있어서 다들 예민하거든요. 조심하지 않으면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할 수도 있다고요. 게다가 그건 호랑이가 시비조의 의도로 사자의 영토에 싸놓은 똥인데 조심히 다루셔야 돼요."
"아...."
망할! 망할! 역시 그 여자, 악마였어!! 뭐가 하나도 안 위험하다는 거야!! 방글방글 웃던 금발의 초아씨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이따가 봐요~' 라고 상큼하게 말하던 것이 오버랩 되어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거 설마 뭐, 마지막 인사? 마지막 인사였냐! 이 여자가아아아!!!
갑자기 내가 씩씩 거리고 있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던 여자는 연구복의 품안을 뒤지더니 내게 작은 병 하나를 건네어 주었다. 받아 들자 향수처럼 분무기가 달린 것이 보인다.
"뭐에요?"
"방금 그 사자한테 던졌던 향수에요. 앞으로 여기를 돌아다니시려면 꼭 뿌리고 다니셔야 할 거예요. 맹수들이 질겁할 만한 향이니 도움이 될 거예요. 분명 초아씨가 주었을 텐데... 혹시 초아씨가 깜빡 했나요? 그 사람 자주 그러는 편이긴 하던데..."
뭐? 그런 목숨과 직결되는 사항을 까먹었다고? 나는 뭐라 울컥 속에서 솟구쳐 오르려던 것을 폭발시키려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딱 그럴 것 같이 생긴 사람이다. 고의가 아니란 것을 아니 알고 있으니 뭐라 하기도 애매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사람 죽일 여자일세....?! 그래도 어쩐지 그 웃는 낯을 떠올리면 꼭 미워할 수만은 없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아무튼 조심해서 다니세요. 방금은 너무 급해서 병째 던지는 바람에 지금은 사방에 그 향이 퍼져 나갔으니 괜찮겠지만 앞으로는 꼭 그 향수 뿌리고 돌아다니시고요."
"아, 감사해요. 저... 그런데 어떤 일 하는 분이세요?"
내가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툭툭 내 옷을 털어주고는 휙 하니 돌아서 가버리려는 여자를 다급히 붙잡았다. 초아씨보다는 조금 더 짙고 긴 금발을 우아하게 찰랑이며 돌아본 여자는 잊고 있었다는 듯 부끄럽게 웃더니 내게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서 읽어 보니 심플하게 생긴 하얀 명함 위에 검은 글자로 'oo대학 연구원 서유나' 라고 또박또박 적혀 있다. 역시 연구원인가? 근데 이런 곳은 왜...?
"초아씨가 부탁해서 한동안 여기에 고용되어 있는 처지에요. 서유나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기로 하신 분 맞죠? 대단하시네요. 어지간한 사람은 여기 오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도망가 버리던데."
"아... 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나도 도망가고 싶거든요? 그놈의 돈이 뭐기에...
"연구원이시면 여기서 무슨 연구라도 하시는 거예요?"
"네. 초아씨가 꽤 재밌는 일을 벌이시는 것 같아서요. 낭만적이기도 하고... 어쨌든 전 제 연구만 할 수 있으면 장소는 별 상관없어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슬쩍 미소를 지은 여자는 고생하라고 한 마디를 더 던지고는 그대로 돌아서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가 이놈의 사파라는 정체가 뭘까? 똥을 주워 다가 땅에다가 파묻는 것도 이상한데 이제는 웬 매력적인 연구원 하나까지 나타났다. 여기 정말 정상적인 곳 맞아? 그러고 보니 딱히 손님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알바비는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거겠지?
한참을 서성이며 방황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떨어트린 호미를 주섬주섬 주워 들었다. 뭐, 어쩌겠어. 어떻게든 되겠지... 다시 아까 전에 돌려놨던 똥을 쿡 찍어다가 수레에 던져 넣고는 터덜터덜 수레를 끌며 걸어갔다. 아~ 돈 버는 게 이렇게 힘들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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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향수 덕분인지 그 이후로는 그다지 일을 하면서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살짝 아슬아슬할 뻔 한 적이 몇 번인가 있긴 하였지만 이제는 제법 이 일에도 익숙해진 탓에 용케도 잘 벗어나고 있었다. 대견하다. 나도 내 자신이 이렇게까지 해낼 줄은 몰랐다. 역시 사람은 대단해!! 적응력 짱이다!! 물론 그것에는 지금껏 수없이 개조된 'BoxBox'의 도움도 한 몫 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혜정아 고마워!
아무튼 요 근래 거의 한 달간 일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 사파리 월드는 사실상 망한 곳이나 다름없다는 것으로 종일 일하면서도 손님이라고는 코빼기도 못 봤다는 것이다. 그에 반하여 시설의 상태는 언제나 준수하고 맹수들의 건강도 무척이나 좋다는 것은 역시나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한 게 이곳의 맹수들은 호랑이와 사자들 간의 서로의 영토 다툼으로 언제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세워져 있어서 도저히 관람객을 받을 만큼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하다 못 해 지나치게 혈기가 왕성하달까... 아무튼 포악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곳에서 내가 계속 목숨을 담보로 아르바이트를 버텨내고 있다는 것도 다시 한 번 대단하다.
그런, 수익이라고는 제로에 가까운 상황에서 이 넓은 사파리 월드를 운영해 나가고 있는 저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따스한 낮 기운의 햇살 아래 얌전히 엎드려 있는 밤바의 곁에 기대어 앉아 있는 초아씨를 바라보았다. 초아씨는 새하얗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빛나는 금빛의 머릿결을 바람에 잔잔히 흩날리며 살짝 감은 눈을 하고는 있었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뭔가 저 주위에만 보슬보슬 거리며 부드러운 털들이 아늑하게 숨 쉬고 있는 기분이다. 아무튼 근 한 달을 보아왔지만 알 수 없는 여자다.
"오늘은 똥 모으러 안 가시나요?"
오늘따라 웬일로 일하러 가지도 않고 밤바 곁에만 앉아 있는 것이 이상하다. 평소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인데.... 내 물음이 들린 건지 초아씨는 살짝 눈을 뜨고는 나를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사람의 웃음에도 색채가 있다면 아마 파스텔 톤의 무진장 아늑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그런 색을 초아씨는 띄고 있을 것 이다. 하여간 왠지 밉상이다가도 저 웃음만 보면 얄밉게도 용서가 되고야 말 것 같다.
"밤바가 지금 좀 아파요. 평소보다 열도 좀 있고... 감기인가 봐요."
밤바의 하얀 갈기털을 초아씨는 걱정스레 쓰다듬었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평소에는 졸졸 초아씨의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다니다가 버릇처럼 초아씨의 머리통을 깨물고는 장난을 치던 녀석이 오늘은 웬일로 얌전하게 누워만 있는 가 했다. 확실히 기운이 좀 없어 보이는 것도 같고.... 요 한 달간 계속해 보아왔던 탓인지 아직 친하다고 할 사이는 아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정도 들어서 나도 괜스레 걱정스러운 눈으로 밤바를 바라보았다.
"심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왜 갑자기 그럴까요? 지금껏 어릴 때부터 아파 본 적도 별로 없던 아이인데."
"그러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나는 알 것도 같았다. 형식적으로야 대답했지만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밤바는 감기 따위가 아니다. 악의 없이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 초아씨야 모르겠지만 밤바의 병명은 명확하다. 지난 몇 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는 이제나 저제나 혹시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 저렇게 이유 없이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니... 밤바는 필시 똥독이 걸린 게 틀림없다!
똥독? 그래! 똥독! 생각을 해보라. 집이라고 할 만한 자신의 땅이란 땅은 온통 양 옆에서 줄기차게 싸대는 맹수들의 똥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 사실 초아씨에게 제대로 말은 안 했지만 냄새도 고약하고 역겨워서 살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살아야 되는 밤바의 심정이란 어떨까. 맹수여서 안 그래도 후각도 사람보다 발달했을 텐데. 저 불쌍한 녀석... 똥독이 안 걸리고 버틴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거다.
"밤바가 아픈 거 같은데 잠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어때요? 사자 쪽이든. 호랑이 쪽이든."
은근슬쩍 이 똥통에 밤바를 계속 두는 건 안 좋겠다는 뜻을 돌려 말하자 잠시 고민하던 초아씨는 이내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될 것 같아요. 아무리 밤바라도 다른 아이들의 영역으로 가 있는 건 위험하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아플 때는 더더욱..."
"그래요?"
의외다. 지금껏 내가 본 밤바는 무소불위의 독재자처럼 초아씨 옆에 붙어 다니고 있으면 감히 어떤 맹수들도 함부로 덤비지 못 하는 가히 맹수의 왕이라고 할 만한 느낌의 라이거였다. 그런 아이라도 역시 약해졌을 때는 조심해야 된다는 것일까? 역시 맹수들이란 온순함과는 거리가 먼 생명체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밤바는 지금껏 호랑이나 사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맨날 초아씨 곁에만 붙어 다니고....
"밤바는 사자나 호랑이들과 같이 어울리질 못 하는 건가요? 음... 라이거라서?"
"그런 건 아니에요."
초아씨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도리질 하더니 나즉이 한숨을 내쉬며 사파리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그 아득한 눈매가 지금 무언가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요...."
"네?"
"아, 말해드린 적 없죠? 저희 부모님 지금은 안 계시니까요."
"아...."
뭐 저런 얘기를 저렇게 담담히 얘기하는 거야! 깜짝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나에 반해 초아씨는 차분하게도 다음 말을 고르고 있었다. 이제 그때의 슬픔 따위는 모두 마음의 정리가 되었을 정도로 시간이 흐른 것일까? 아무튼 악의 없이 사람 놀래키고 두근거리게 만드는 데는 소질 있다.
"부모님이 사파리를 운영하실 때는 이곳의 사자와 호랑이들도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요. 서로의 영토도 인정해주고 가끔 어울리기도 했었죠. 그때는 그만큼 관람객들도 많이 찾아왔어요. 제게도 무척 행복했던 시기였죠."
"헤에...?"
사자와 호랑이들이 서로 사이가 좋은데다 관람객들이 많았다고? 지금 상황을 생각했을 때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지금은 정말 사자와 호랑이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하루에도 수십 번 영토를 침범해서 시비를 걸기 일쑤다. 그래서 나와 초아씨가 조금이라도 더 싸움을 막고자 영토 표시 행위인 배설물들을 부지런히 치워주고 있게 된 거고, 관람객이야 뭐 말 할 것도 없다. 실상 망했다고 봐야 좋을 지경이니까.
"그 당시 사자의 우두머리와 호랑이 사이에서 태어났던 아이가 밤바에요. 평화로웠던 사파리를 대변하는 상징이랄까... 하지만 부모님이 급작스레 사고로 돌아가시고 제가 어린 나이에 사파리 월드를 책임지게 되면서 모든 게 달라졌어요. 사파리 월드의 맹수들에도 평화로웠던 부모세대의 시대가 끝나고 그 자식들의 세대에 와서는 이상할 정도로 서로 사이가 틀어져 싸움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되었어요. 정말 불행이 불행을 몰고 꼬리를 이어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실감할 수 있던 시기였죠."
그렇게 말하며 초아씨는 말하는 내용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그저 씩씩하게 나에게 웃어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 내 옆에서 밤바만큼은 힘이 되어 주었어요. 지금껏 밤바가 있었기에 사자도 호랑이들도 함부로 서로 싸우지 못 하고 제게도 덤벼들지 못하는 거예요. 밤바가 이렇게 사파리의 정 가운데 사자와 호랑이의 영토를 양 옆에 두고 자리를 잡은 건 모두 저를 위해서 사자와 호랑이가 전면전으로 싸우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였어요. 밤바가 사자와도 호랑이 랑도 친하게 지낼 수 없는 건 모두 제 탓이에요."
갑자기 이 무슨 진지한 이야기야...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는 건가?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짜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알게 된 초아씨의 이야기들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초아씨에게 이 사파리 월드가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나마 조금은 느껴져 온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주신 마지막 유산. 부모님들과의 행복했던 추억들이 방울방울 깃든 장소. 그녀가 가장 빛났던 시간들. 그리고 그녀의 친구 밤바와 보낸 모든 날들.... 그 모든 단어들이 바로 이곳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왜 아직까지도 이 망해버린 사파리 월드를 그리도 애지중지하며 놓지 않고 운영해 오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새삼 고집스럽지만 대단한 여자라고 감탄했다. 이제껏 그저 방구석에나 처박혀 있는 것만 알았던 나와 문득 비교되어져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그러고 보니 처음 나와 만났을 때 왜 그리도 기뻐하며 환영했었는지 알 것도 같다. 진심이었나 보다. 그만큼 외롭고 치열하게 버티며 싸워오고 있었구나. 초아씨는....
아마도 복잡한 심경 탓에 초아씨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내 표정은 썩 좋지 못 하게 굳어 있었던 거 같다. 초아씨는 말을 마치고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그 특유의 미소를 내게 지어주었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밤바의 옆에 있던 바구니 안을 뒤져 보온병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이에요. 지금은 저도 밤바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곧 좋아질 거예요. 민아씨도 도와주시고 있고요. 여기 차라도 한 잔 드실래요?"
"아... 아니요. 전 괜찮아요."
초아씨가 건네는 보온병 안의 뜨거운 찻물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분위기상, 예의상 받아 마시는 것이 좋을 것도 같았지만 역시 냄새 푹푹 나는 똥통 위에서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인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어쩐지 지금은 뭐라도 먹었다간 얹힐 것 같다. 내가 정중히 거절하자 초아씨도 거기에는 딱히 마음을 쓰지 않은 듯 대수롭지 않게 보온병을 따라 천천히 차 한 잔을 비우더니 바구니 안에 집어넣고는 으쌰 하며 기합 소리와 함께 일어나 섰다.
"그럼 이제 힘내서 일하러 가죠. 아무래도 밤바는 쉬어야 할 것 같으니 저도 오늘은 혼자 가야겠어요. 제가 사자 아이들 쪽으로 가고 민아씨가 호랑이네 쪽으로 가주실래요?"
"전 별로 상관없어요."
아르바이트도 한 달을 넘어서니 이제는 사자들도 호랑이들도 어느 쪽을 가든 익숙해져서 거기나 저기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그저 똥을 주어다 담고 와야 된다는 생리적 혐오감만이 여전히 괴로울 뿐이다.
"그럼 다녀올게요. 이따가 다시 만나요."
초아씨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 고는 사자들의 영토 쪽으로 사뿐거리며 멀어져 갔다. 밤바가 잠시 낑낑거리며 우는 듯도 했지만 아프긴 한가 본지 차마 따라나서지는 못 하는 눈치였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초아씨의 뒷모습이 어쩐지 오늘따라 가녀리고 위태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 사연을 들으며 주제넘게도 내가 초아씨를 딱하게 여기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추억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 이제는 추억 밖에 남지 않게 된 건지도 모르는 사람... 나는 한참을 울상을 하고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 치고는 돌아섰다. 뭐 나 같은 게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한숨을 내쉬며 주섬주섬 호미와 수레를 챙기는 와중에도 나는 자꾸만 초아씨가 사라진 방향 쪽을 돌아다보았다. 자꾸만 무언가 마음속에 무거운 돌 하나가 쿵 내려앉은 듯 불안한 이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일하러 가는 길에 사파리의 안쪽에 설치된 유나씨의 개인 공간에 들러봐야 갰다고 생각했다. 초아씨가 지어준 간이 건물로 숲 속과 어울리게 꽤나 아름답게 꾸며진 그곳에는 유나씨만을 위한 작은 연구공간과 함께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아늑한 정원과 테이블이 있었다. 거기에서 유나씨가 내려주는 향긋한 커피와 함께 담소라도 나누고 있다 보면 조금 마음이 풀리지는 않을까 나는 소망했다.
그러고 보니 혜정이가 몰래 조사해서 귀띔해준 바로는 유나씨는 어느 유명 대학에서 연구하던 연구원이었는데 워낙 괴짜 같은 특이한 연구에만 몰두하는 통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난 사람이라고 한다. 겉보기에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인데... 뭔가 이성적이고 냉철해 보이면서도 초아씨같은 바보를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또 감성에 젖어 있다는 게 유나씨만의 매력이긴 하다. 아무튼 이 사파리 월드에는 정상인은 없는 거였어.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 채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어영부영 똥을 찾아다가 수레에 담아 넣고 있는데 불현듯 어디선가 맹수의 포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주춤 몸을 멈추고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자니 멀리선가 어렴풋이 확실히 포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그것은 끔찍이고 위협적이고 잔인성을 포함한 울부짖음이라서 나는 그만 오싹 소름이 돋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부리나케 내달리기 시작했다.
시야 밖으로 사파리의 숲이 휙휙 지나쳐 간다. 이 날 평생 운동이라고는 담 쌓고 지내던 몸이 벌써 턱까지 숨이 막혀 들어와 거친 숨을 헉헉 토해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멈춰서고 싶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 고는 초아씨가 사라졌던 사자의 영토 쪽으로 달음박질을 재촉했다. 이 바보가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초아씨를 그냥 보내면 안 된다는 걸 미리 알아차렸어야 했다.
간신히 도착해 바라보았을 때는 어느 샌가 밤바가 비호같이 달려와 쓰러진 초아씨를 등지고는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그 앞에는 얼핏 보기에도 십여 마리가 넘어 보이는 사자 떼가 그 둘을 포위하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질러댔다. 초아씨는 멀리서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로 한 쪽 팔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속이 매스꺼워 지는 것을 참아내며 나는 달려가서는 초아씨의 곁에 주저앉아 내 무릎 맡에 초아씨의 머리를 얹히고는 팔의 상태를 살피었다. 초아씨는 사자에게 물렸을 때의 충격으로 혼절해 버린 건지 축 늘어져 기절해 있었다. 이리저리 살폈지만 그나마 다행으로 어떻게 사자가 덮칠 때 팔을 들어 올려 막았던 건지 한 쪽 팔만이 크게 이빨 자국이 박혀 있고 다른 곳에는 다친 곳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하얗고 가녀린 팔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어서 덜컥 겁이 났다. 급한 김에 입고 있던 'BoxBox'를 내던지고는 신경질적으로 옷을 찢어서 궁여지책으로 어설프게나마 상처 위에 감아서 묶자, 묶기가 무섭게 천 사이로 피가 몽글거리며 스며 나온다.
역시 어떻게든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야만 한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기를 쓰고 초아씨를 등에 들쳐 업고 일어나자, 그런 나를 밤바가 한 번 슬쩍 돌아보더니 말없이 한 발 더 앞으로 걸음을 내딛어 나와 초아씨를 가리더니 사자의 무리를 향해 우렁차게 포효를 질러댔다. 어떻게든 나와 초아씨를 여기서 빠져 나가게 할 속셈이다. 하지만 사자들도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안 올 거라는 것을 아는지 필사적이었다. 평소라면 밤바가 한 번 포효를 질러대기만 해도 질려서 물러서던 녀석들이 오늘만큼은 지지 않고 이를 드러내며 오히려 점점 더 우리들을 향해 포위망을 조여 온다.
사자들과 호랑이들에게 있어 초아씨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자신들의 영토싸움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인물. 영토의 가운데 터를 잡고 두 맹수들의 영토 전쟁을 지금껏 억제해오던 초아씨라는 존재는 언제나 맹수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랬던 것이 그동안은 밤바라는 듬직한 수호자 덕분에 그럭저럭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초아씨가 홀로 맹수들의 영지에 제 발로 들어왔던 것이다. 사자들은 오늘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초아씨를 그냥 돌려보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는데도 내가 초아씨가 느긋하니 홀로 사자의 영토로 걸어들어 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던 건 유나씨가 개발한 향수 덕분에 맹수들이 쉽게 초아씨에게 접근하기 어려울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향수를 뿌린다. 그건 이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나에게는 습관처럼 굳어진 행동 원칙이라 그것에 나는 너무 소홀히, 당연시 여기고 넘어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조금만 더 초아씨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던 날 초아씨가 내게 잊어버리고 향수를 챙겨주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유나씨는 그 때 위험에 처했었던 나를 구해주며 얘기 했었다. '혹시 초아씨가 깜빡 했나요? 그 사람 자주 그러는 편이긴 하던데...' 라고. 이제 생각해보니 초아씨는 그 때 내게 그것을 주는 것을 잊어 버렸다기 보다 한 번도 그 향수를 사용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향수라는 것 자체에 대해 망각하고 있었던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밤바가 곁에 있던 초아씨는 그 향수 자체가 필요가 없었던 거다. 게다가 맹수가 질겁하는 향이니 항시 밤바와 붙어 있는 초아씨에게는 고려대상이 아니었을 거다. 게다가 사파리 전체가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언제나 애정 어리게만 대하는 사람이니 사자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느니 호랑이가 노리고 있다느니 하는 사실 따위는 또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늘 같은 날에 향수를 뿌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무모하게 사자의 영토로 걸어 들어간 것이리라.
바로 전까지 밤바의 곁에 기대어 누워 서는 갈기를 쓰다듬던 사람이 사자의 영토로 걸어 들어갈 때 내가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 바보! 하지만 지금에 와 아무리 후회해본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조여 오는 사자들의 포위망을 피해 뒤로 조금씩 물러섰다. 밤바는 짐짓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내 보이며 소리를 질렀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역시 정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한 모습은 간신히 초아씨를 지키기 위해 부들거리며 버티고 서 있었다. 몸이 성치 않은 밤바와 아무런 힘이 안 되는 조그만 여자애 한 명. 누가 봐도 여기서 우리가 사자들의 무리를 뚫고 도망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에이! 덤벼!!"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기를 쓰고는 품에 넣어 가지고 있던 맹수 퇴치용 향수를 집어 들어서는 마구잡이로 허공중에 뿌려대며 사자들의 무리 앞에 나섰다. 여기서 더 기세에 눌렸다가는 그대로 그것을 알아차린 사자들이 대번에 달려들어 산산조각으로 우리를 갈가리 찢어발길 것만 같자 필사적이 되었나 보다. 나는 지지 않으려고 사자들의 눈을 뚫어져라 마주 응시해가며 바락바락 악을 질러댔다. 꺼져! 꺼져버린 란 말야!! 초아씨와 밤바를 그냥 좀 내버려둬!!
"민아씨! 숨 참아요!"
뭐? 불현듯 들려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손으로 코와 입가를 가리고는 물러서는데 어디선가 무언가 커다란 게 날아와 사자들의 발밑에 박혀 터지더니 매캐한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연기구름을 만들며 풍겨 나왔다. 단숨에 사방으로 퍼지며 숨을 쉬기 곤란할 정도로 역하게 퍼지는 향기에 나는 돌아서서는 부리나케 밤바에게 달려가 초아씨를 업은 채로 밤바의 등에 올라탔다. 이미 달릴 준비를 하고 있던 밤바는 내 뜻을 알아차린 건지 내가 올라탐과 동시에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필사적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풍경에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서 하얀 연기구름 너머 고통스러운 사자들의 포효소리가 어스름하게 들려왔다. 나... 살아 있는 거 맞지?
"민아씨...."
"초아씨! 괜찮아요?"
꺼질 듯 희미하게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는 다급히 초아씨를 돌아보았다. 차마 눈도 제대로 뜨지 못 하고 축 늘어져 내 등에 기대어 있는 초아씨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더니 작게 미소 비슷한 걸 지어 보였다.
"제정신이에요?! 바보 같은 사람이 왜 조심을 안 해요!!"
"민아씨에게 부탁이 있어요...."
"네?"
부탁이라니 뭔 부탁을 하겠다는 거야! 하지 마! 그런 건 사망플래그 라고! 금방이라도 초아씨가 또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해하며 나는 초아씨를 더 꽈악 붙들어 잡았다.
"저 없는 동안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민아씨가 여길 맡아 주세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무슨 소리에요? 뭐가 얼마 안 남아요?!"
"부탁해요...."
"도대체 뭐가....!"
거기까지 말한 초아씨는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처럼 놀라서는 나는 황급히 초아씨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다행히도 아직 미약하게나마 숨결이 느껴진다. 이 여자 진짜 사람 놀래키지 말아!! 어디까지 악의 없이 사람 심장을 갖고 놀래!! 어느새 사파리의 정문까지 달려오자 마침 기다리고 있던 유나씨가 대기시켜 놓았던 자신의 새빨간 승용차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는 어서 타라는 듯이 가리켰다.
"구급차를 부르는 건 안돼요. 초아씨는 일단 급하니까 내 차에 태워요. 여기서 병원까지는 금방이에요."
역시나 아까 전 그 연기구름의 장본인은 유나씨였던 듯 유나씨의 발밑에는 이상한 발사장치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다. 다급한 와중에도 유나씨는 침착하게 초아씨를 자신의 차에 태우며 상태를 살피우고는 나에게 자신의 연구실 쪽으로 피해 있으라고 당부하고 급하게 악셀을 밟으며 멀어져 갔다.
유나씨가 떠나자마자 긴장이 풀린 건지 아픈 와중에도 무리했던 밤바가 그 커다란 거체 그대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가쁜 숨을 쌕쌕 거리고 있는 밤바를 돌아보자 나도 그제야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이 느껴져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는 안 그래도 맹수들이 포악하다하여 관람객을 받는 것이 금지된 사파리 월드니 이번에 초아씨의 일이 세어나가기라도 하면 정말로 이대로 끝장이 나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 놓고 구급차 하나도 부를 수가 없다. 뭐 이따 구야!
절로 욕지거리가 나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벌렁 드러누워 서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의 일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여름의 하늘은 평온하고 고요하다.
"뭘 부탁한다는 거야. 진짜...."
왜이리 가슴이 꽉꽉 막혀 오는 것 같은지 진저리를 치며 나는 자꾸만 뜨거워져 오려는 눈시울을 손으로 가리우고는 악을 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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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걸로 될까?"
불안한 표정으로 묻고 있는 혜정이를 돌아다보았다. 혜정이는 얼핏 보기에도 과격한 느낌의 옷을 쭈뼛쭈뼛 입고는 드럼의 스틱을 잡고 있었다. 오늘따라 화장도 진한 스모키로 분위기 있게 해놓고는 아까까지만 해도 신난다고 좋아하더니 막상 사파리에 들어서고 나서는 저자세다. 나는 피곤함에 쪄든 머릿결을 귀찮다는 듯이 쓸어 넘기며 말없이 걱정하는 혜정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될 거야. 아니, 해내고야 만다.
초아씨가 없게 된 후부터 사파리의 분위기는 급변하게 되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진 건지 그 망할 여자의 부탁을 또 거절하지 못 하고 나는 기어이 사파리를 초아씨가 돌아올 때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초아씨와 같은 마음으로는 아니었다. 초아씨를 거의 죽일 뻔 했던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화를 억누를 수가 없어 자연히 나도 맹수들을 향해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뿌리고 있는 내가 냄새에 질려버릴 만큼 듬뿍듬뿍 향수를 온 몸에 뿌리고 다니며 때로는 사자와 호랑이의 영토 곳곳에 향수병을 통째로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 먹이도 대충 던져주고는 관리하지 않았다. 완전히 심술이 난 것 이다. 저놈들이 뭐가 예뻐서 먹을 것을 주고 배설물을 치워주고 서로 싸우지 못 하게 말린단 말인가. 그것은 밤바도 마찬가지 였는지 그 날 이후부터 밤바는 자신의 영토를 벗어나서는 어슬렁거리며 마구 이곳저곳을 넘나들다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녀석들을 사정을 봐주지 않고 달려들어 공격하기가 일쑤였다.
줄어든 먹이. 최소한으로만 관리되는 시설들. 폭군이 된 밤바의 행패. 점점 더 격해져가는 두 맹수 무리들 간의 영역 다툼. 사파리는 단 며칠 만에 분위기가 최고조로 험악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양 쪽의 맹수들이 들고 일어나 서로 전면전을 벌이고 밤바에게까지 달려들지 모를 상황이 된 최악의 시점에, 그래도 유일하게 내가 그전과 다름없이 꼬박꼬박 하고 있던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르바이트 본연의 일이었던 똥을 모아다가 밤바의 땅에 묻어 두는 일이었다. 사파리 월드의 다른 모든 일들은 초아씨가 관리하고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원래부터 내가 쭈욱 해오고 있었던 일인 탓인지 나는 불평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럭저럭 그것만은 해나갈 수 있었다. 어쩐지 그러고 있으면 바보같이 사파리 월드의 한복판에서 호미를 든 체 똥을 묻고 있으면서도 눈이 부실만큼 환하게 내게 웃음을 지어주던 초아씨가 생각나서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유나씨는 초아씨가 입원하고부터는 병원과 연구실을 오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가끔씩 유나씨가 내게 초아씨를 만나보러 같이 가지 않겠냐고도 권했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핑계를 대며 거절해 버렸다. 어쩐지 도저히 지금의 모습으로는 만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유나씨는 때때로 밤바의 땅에 똥을 묻고 있는 나를 찾아와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가곤 했다. 그러면서 항상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도대체 뭐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까? 초아씨도 그렇고 유나씨도 그렇고 달려가 따져 묻고 싶지만 어쩐지 그럴 기운도 차마 나지 않아 나는 그저 입술만 꾸욱 깨물고는 신경질적으로 더 호미질만을 애꿎은 똥밭에 사정없이 찍어댔다.
그러던 나날 끝에 드디어 초아씨가 며칠 후에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말로 위험할 뻔 했지만 하늘의 도움인지 기적적으로 별 탈 없이 쾌유할 수 있게 되었단다. 유나씨의 말을 듣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 나는 또 한 번 더 급변하는 사파리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맹수라는 것은 인간보다도 더 뛰어난 육감이란 것이 있나 보다. 초아씨의 퇴원 소식을 내가 들은 그 날, 사자와 호랑이들은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평소와는 어딘지 하는 짓이 달라졌다. 최근에는 걸핏하면 서로 싸우기 일쑤고 밤바에게까지 달려들기도 하던 녀석들이 이상하게 서로서로 몸을 사리며 숨어서 피해 다니고 무언가를 살피듯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결코 좋지 못 한 어떤 중요한 것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듯 한 폭풍전야의 불안한 적막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은 그 초감각으로 초아씨가 얼마 후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조용히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녀석들이 서로 암묵적인 휴전 관계 속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미친 듯이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밤바의 땅 위에다가 작은 무대 하나를 설치하고 마치 밴드의 공연 시설처럼 화려한 조명과 악기들과 쩌렁쩌렁 울려대는 스피커들을 초아씨의 돈을 이용 해다가 설치했다. 내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나씨는 피식 웃으며 초아씨도 그렇고 여기는 바보들만 모여 있어서 좋다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를 하고 떠났지만 나는 무시하고는 더 열을 올려 그 무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초아씨가 오기로 한 날이다. 유나씨는 자신의 새빨간 승용차를 타고 초아씨를 데리러 가기 위해 떠난 후였다. 나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혜정이의 손을 잡아 끌며 내가 지난 며칠간 사람들을 불러다가 정성스레 마련해 놓은 무대 앞에 섰다. 한 눈에 보기에도 격해 보이는 온통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점칠 된 무대에는 화려하고 음침한 조명들과 함께 엄청나게 커다란 스피커들이 웅장하게 도열해 있었다.
"우와.... 짱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핑크레이디님의 악명에 어울리지."
순수하게 감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혜정이를 보고는 힘없이 웃으며 나는 무대 위로 올라섰다. 온통 하얀 분칠 위로 진하게 위협적으로 그려넣은 짙은 스모키의 화장 얼굴인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핑크색 긴 머리의 가발을 푹 눌러 썼다. 낮게 심호흡을 내쉬며 무대에 설치된 마이크를 부여잡고는 사파리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여기서 핑크레이디의 공연을 하려는 것이다.
나를 따라 무대에 올라선 혜정이는 드럼에 가서 앉고는 감격스레 드럼을 한 번 쓸어 보더니 그제야 웃음을 되찾고는 밝게 웃어 보였다. 우상이던 핑크레이디의 공연을 코스프래 하겠다니 두근두근 한가 보다. 그 해맑은 모습에 그제야 나도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져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됐다. 좋아. 해보자!
무언가 벌어질 거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어느새 사자와 호랑이의 무리들은 어슬렁거리며 빽빽이 밤바의 영토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질려버릴 만큼 위압적인 무리의 기세를 온 몸으로 느끼며 나는 바닥에 놓여져 있던 기타를 둘러메고는 조용히 줄을 튕겨 보았다. 지잉 거리며 울리는 진동에 몸을 떨며 나는 몰려오는 맹수들의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지지 않는다. 기세에 밀려서는 먹혀버릴 뿐이다. 너희가 하찮은 사파리의 짐승들뿐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마!
"Go to Pink Lady!"
내 악에 받힌 샤우팅과 함께 한순간 귀를 멀어버리게 할 만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핑크레이디의 노래가 대형스피커를 격렬히 진동시키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폭발적인 소리에 모여 들던 맹수들은 주춤하고는 털을 곤두 세웠다. 혜정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음악이 흘러나오자마자 무아지경으로 웃으며 스틱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었다. 덤벼봐! 이건 지옥의 테러리스트 핑크레이디님의 노래다!! 나도 혜정이도 음악이라고는 음악의 음자도 모르고 악기 한 번 만져본 적 없는 사람들이지만 귀청을 짓이기는 노랫소리에 묻혀 정신없이 되는대로 엉터리 악기를 연주하며 핑크레이디의 무대를 노래했다.
맹수들은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는 한껏 으르렁 거리며 반항했지만 차마 다가오지 못 하고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기세가 결정짓는 것이다. 아무리 무서운 맹수라도 기세로 찍어 눌러 버린다면 물러날 수밖에 없다. 노래해라! 연주해라! 목이 터지고 손이 찢어지도록 열광해라! 세상은 뭐다?! 살인! 강간! 지옥!! 내일은 없어! 모두 다 지옥행 급행열차다!! 우리는 지금 핑크 레이디다!!! 지옥에 가장 먼저 잡아 쳐 넣어 줄 놈은 누구냐아!!!!
정신이 아득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격하고 파괴적인 노래가 계속된다. 노래가 세 곡 째에 접어들면서 맹수들과 우리의 지리한 대치가 계속 되어감에 따라 어느새 나와 혜정이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악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눈치 챘는지 맹수들은 때를 기다리며 한껏 몸을 웅크리고는 쉽게 나서지는 못 하고 그저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노래가 멈춘다면 일제히 달려들 분위기다. 하지만 지지 않아! 그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밉상스런 기억 밖에 없는 금발 머리의 신기한 여자가 얘기해준 그녀의 소중한 꿈을 지켜주고 싶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 지독한 상황에 지기 싫은 것뿐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동안 웅크려 지냈던 지난 내 세월들에 대한 이유 없는 응어리의 울분 때문인지 갈피를 잡지 못 한 채 나는 그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크아아아앙!!!
그 때 음악소리를 뚫고 익숙한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땀이 흘러 내려 따가워 오던 눈을 들어 올려 바라보자 우리의 무대를 사이에 두고 양 쪽으로 갈라져 으르렁 거리고 있는 맹수들의 갈라진 틈으로 한 새하얗고 몸집이 집체만한 라이거 하나가 위풍당당하니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등에 동글동글한 금발의 여자 하나가 낯익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초아씨......"
나도 모르게 노래하던 것도 잊은 채 멈춰 서서는 멍하니 그 이름을 부르자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 라도 했다는 듯이 양 쪽의 맹수들이 일제히 초아씨를 돌아다보았다. 아차 싶었지만 늦었다. 음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세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미 몇 마리의 맹수가 밤바의 등에 탄 초아씨를 노리고 달려 들어갔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밤바가 아니다. 번개처럼 몸을 이리저리 틀며 달려드는 맹수들을 쳐내어 버린 밤바는 나와 혜정이가 있는 무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왔다.
"민아야!"
다급히 부르는 혜정이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나는 다시 쥐어짜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립싱크든 뭐든 좋다! 그저 저 맹수들이 초아씨와 밤바에게 덤벼들지 못 할 만큼 기세를 압도하기만 하면 된다. 잠시 멈췄다가 부르는 탓인지 어쩐지 더 급속도로 지치는 기분이다. 살짝 눈앞이 흐릿하니 핑 도는 것을 느낄 때쯤 어느새 무대의 바로 앞까지 다다른 밤바의 등 위에서 초아씨가 무대 위의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슬쩍 내려다보자 초아씨는 언제나 그래왔듯 밝고 화사히 웃어 주었다.
"고마워요. 민아씨."
지독한 음악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지만 초아씨의 입모양이 내게 고맙다고 한다. 그러더니 이내 밤바의 등에 내려선 초아씨는 자신을 노리고 양 옆으로 모여든 채 사납게 포효하고 있는 맹수의 무리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제 제가 할게요."
뭐? 거짓말처럼 초아씨의 중얼거리는 듯 한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와 박힌다. 무엇을 하겠다는....? 내가 의문을 갖기도 전에 초아씨는 무모하게도 한 걸음 한 걸음 양 옆으로 모여든 맹수 사이로 나 있는 밤바의 땅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난 몇 달간을 묵묵히 가꿔왔던 땅. 온갖 맹수의 똥으로 뒤범벅이 된 그 더러운 땅을 그녀는 사뿐사뿐 히도 걸어 나갔다.
뭐 하겠다는 거야!!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노래가 다시 한 번 더 멈추면 당장이라도 초아씨가 찢어 발겨 질 것만 같아서 나는 속만 바짝바짝 태우며 그 가녀린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초아씨의 손은 우아하게도 규칙적으로 무언가를 품에서 꺼내어 땅에 뿌리고 있었다. 작고 조그만 알알들이 그녀의 손길을 따라 밤바의 영역 안에 휘날려 흩뿌려진다. 누군가 보면 한가롭게 산책이라도 하는 듯 한 모습이다. 밤바라도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다면 안심하겠다만 어째서인지 밤바는 불안해하면서도 초아씨를 따라 나서지 않고 그저 무대의 앞에 앉은 채 초아씨의 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안 돼.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 이미 목도 있는 데로 쉬어 버리고 기타를 튕기는 손에서도 힘이 빠진다. 돌아보자 그건 혜정이도 마찬가지인지 당장이라도 탈진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느릿느릿하니 힘겹게 스틱을 부여잡고 드럼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느새 밤바의 땅 끝까지 걸어 나간 초아씨는 다시 돌아서 우리와 맹수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공평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싸움은 끝났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노래는 끊겼다. 그 순간, 그 적막이 신호라도 되듯 맹수들은 끔찍한 포효를 질러내며 초아씨를 덮쳐 갔다.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엄청난 맹수 무리의 포효소리가 사파리 월드에 울려 퍼졌다. 차마 바라보지 못 하고 내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을 때 어디선가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밤바의 땅 위로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말도 안 돼....."
".........."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푸른색, 보랏빛, 흰 빛, 검은색, 분홍, 자주.... 끝도 없이 갑자기 눈앞으로 아찔할 정도의 색감이 폭발하며 시야를 뒤덮는다. 마치 그대로 숨이 막혀 질식해 버릴 것처럼 밤바의 땅 전역을 뒤덮으며 온갖 종류의 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폭발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크기도 종류도 무시한 신비한 꽃들이 마구 뒤섞여 자라 오르고 흩날리며 시야를 가득 메워간다. 정말로 사람의 키보다도 더 크게 자라난 꽃들부터 손톱만한 꽃들까지 어디 하나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자라난 꽃들은 지독한 향기와 함께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황홀케 하는 색을 빛내며 계속해 자라 올랐다.
맹수들은 모두 마치 얼이 빠져 버린 것처럼 멍하니 그 꽃무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선뜻 움직이지 못 한다. 그저 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오르게 아름다운 광경의 여운과 경악에 휩싸여 멈춰서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천천히 초아씨가 만연한 꽃 한 가운데에서 꽃잎을 휘날리며 일어나 섰다. 꽃처럼 밝게 빛나고 있는 사람... 멈춰 선 사자와 호랑이들에게 천천히 다가가 서는 초아씨의 모습에 움찔하며 초아씨를 경계하던 맹수들은 그러나 그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는 초아씨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맹수들의 사이에서 초아씨는 밝게 웃었다.
"다들 어서 돌아와. 우리의 사파리에...."
저게 도대체..... 홀린 듯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헛웃음과 함께 털썩 주저앉았다.
"대단한 여자지?"
나긋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유나씨가 내 옆에 서서는 가만히 초아씨가 꽃밭위에서 맹수들에 둘러싸여 행복해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발밑에는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커다란 발사장치 같은 게 나뒹굴고 있다.
"뭐에요? 저거..?"
"똥이야."
"네?"
내 얼빠진 반문에 유나씨는 작게 웃더니 품에서 병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내가 이제껏 초아씨에게 부탁 받아 연구해 왔던 거야. 맹수의 똥이라는 에너지 넘치는 자원을 식물의 폭발적인 생장을 돕게 만드는 거름으로 재구성 시키는 화합물이지. 그동안 민아씨가 고생해준 덕분에 저만큼이나 기름진 땅이 되었어."
"에에....?"
뭐야 그게... 뭔가 사기 당한 기분이다. 그러니까 지금껏 똥을 모아다가 그렇게 파묻은 게 다 이것을 위한 것이였어?
"초아씨가 그러더라고. 가장 더러운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피워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보지 않아? 그래서 좋은 거지만."
웃고 있는 유나씨를 바라보다가 혜정이를 돌아보자 아직까지도 얼이 빠져 입을 살짝 헤 벌린 채 특유의 표정으로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귀여운 모습이 보인다. 엉기적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자 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린 혜정이가 눈을 끔벅이고 있더니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대뜸 말한다.
"민아야.... 세상은 뭐다?"
"뭐? 뭐긴 뭐야.... 뭔데?"
"행복! 평화! 사랑!"
".....그래. 네 말이 맞다. 세상은 Peace 인가 보다."
털썩 혜정이 곁에 앉아서는 같이 벽에 기대고는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피식거리고 미소 짓다가 이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유나씨가 '바보가 하나 더 늘었네' 라고 한숨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대었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어쩐지 우리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뭐지? 이 기분은? 모르겠다! 세상은 Peace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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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가볍게 머릿결을 흩날리며 지나친다. 한 쪽 팔에 턱을 괴고는 내 지저분한 자취방의 창문에 기대어 앉아서는 느긋한 오후의 시간에 젖은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혜정이와 나는 결국 핑크 레이디의 내한 공연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핑크레이디의 콘서트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광란의 무대였다. 살인! 강간! 지옥!! Go to Pink Lady!!를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수많은 인파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기대만큼 신나지를 못 하였다. 뭣 때문이었을까? 역시 아직까지 초아씨의 사파리에서 봤던 그 날의 그 벅차오르는 아름다운 광경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혜정이는 내 옆에서 죽어라 방방 뛰며 좋아라 했었다. 저 단순무식의 해맑음이라니... 으휴...
유나씨는 연구의 성과가 인정받아 특허 신청을 내고는 요새 매스컴에서도 종종 보도되어 나오는 잘 나가는 연구원이 되어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괴짜라고 쫓아낼 때는 언제고 유명세를 타니 여기저기 대학에서 러브콜을 보내는 것 같던데 그러든 말든 유나씨는 여전히 초아씨가 마련해줬던 그 사파리의 작은 연구실이 맘에 드는 눈치이다.
밤바는 이제 똥 밭이 아니라 꽃밭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제 똥독으로 고생할 일도 없겠지... 웃기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사파리 월드가 저번 달에 정식으로 다시 개장했다. 믿을 수 없는 신비한 꽃들이 가득 사파리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피어 있는 낭만적인 곳이다. 신기할 정도로 온순한 사자와 호랑이들이 서로 어우러져 지내고 있는 곳이라 사람들은 호기심과 신기함에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차량 탑승이 아니고도 사파리 안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세상천지에 초아씨의 사파리 월드가 유일할 것이다.
그리고... 초아씨. 초아씨는 그녀의 아름다웠던 추억 속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의 사파리 월드에서 오늘도 화사히 웃으며 지내고 있다. 부모님과의, 친구와의, 그리고 그녀 자신의 유년시절이 전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살짝 그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질투에 가까운 심술이 삐쭉 솟아나기도 한다.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고는 없어 보인 달까....
상념에 잠겨 있는데 문득 부스럭 거리는 인기척에 돌아보니 혜정이가 뭔 생각을 그리 하냐는 것처럼 웃으며 서 있다. 쟤는 여기가 이제 완전 제집처럼 되어 버렸나 보다. 어젯밤에 늦게서야 와서는 밤을 새고 놀다가 이제서야 일어난 건지 자연스럽게 도 부스스한 머리를 매만지며 나를 보고 있다.
"오늘은 안 가?"
그 묻는 소리에 나는 그저 말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빛의 새하얗게 빛나는 맑은 하늘....
"가. 가야지... 사파리 월드에..."
.
.
.
..... 사파리 월드의 사육사는 호미를 들고 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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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글을 썼습니다!! 기적이다! 미라클이다! 세상은 Peace다!!! (으응?)
아무튼 절대 못 쓸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3월의 막바지가 되어 이틀 만에 주말을 소비해가며 (물론 딴 짓을 더 많이 했지만) 글을 완성시켰습니다. 물론 쓰기만 썼지 전혀 제대로 다듬지 못 했기 때문에 똥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제 자체가 똥이니 이글은 똥글인 것이 맞고 그러니 제대로 잘 쓴 거라고 똥똥 하게 위안을 삼기로 하였습니다. (뭐라는 거니?) 아무튼 글을 쓸 때 보통 십 수 번에서 적어도 글을 쓰는 와중에 고치는 것 까지 포함하면 수십 번을 읽어 가며 퇴고하고 나서야 그나마 살짝 읽을 만한 글이 되는 저 같은 못난 글쓴이가 이런 식으로 글을 썼으니 똥 맞아도 할 말이 없겠네요.
주제는 사실 3월 초부터 정했었습니다. 아는 지인 분께 '소재 하나만 주세요.' 그랬더니 '사파리 월드의 경비병이 호미를 들고 있다.'라는 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주제를 주는 바람에 '오냐! 좋다!' 이러면서 즐겁게 쓰기로 했습니다. 그래놓고 한 달이 넘게 글은 안 쓰고 딴 짓만 하다가 이 모양으로 써버렸네요. 하지만 좋다고 생각합니다. 엄청 유치한 것 같아서 좋습니다. 유치한 거라면 안달복달하는 취향이라 좋습니다아!!!
다만 커플링이라던가, 애정라인이라던가... 그런 것은 어디로 날려 버린 건지. 게다가 도대체 캐릭터성이란 건 도대체 어드메로... 전 매력적인 아이들을 쓰는 데는 역시 무리인가 봅ㄴ... (흑흑흑)
아무튼 너무 정신없이 써서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아!! 다만 쓰다 보니 힘에 힘으로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힘에 유연함과 자상함으로 감싸 안을 수는 없는 건가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즘처럼 영웅일 하면 손해만 보고 평생 피해자로 살던가 도움 준 사람한테 오히려 돌 맞을까 걱정해야 되는 세상에는 좀 무리인 것도 같습니다만 아직도 세상이 핑크빛이면 좋겠다고 혼자 망상했습니다.
그럼 다음 달에 혹시라도 볼 수 있게 되면 뵙도록 하죠!! 이런 망글 말고 조속히 제대로 된 맴 팬픽 글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알던 작가 분들은 다 잠수 타셔서 어디 가서 글을 볼 곳이 없네요. 글 써라! 일 해라! 작가님들!! 흑흑흑. 그럼 즐거운 맴덕질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