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리고 있었다.
눈앞으로는 빛바랜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백사장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시야의 저 너머까지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탁 트인 공간에 나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자유롭게 내달리고 있다. 앞으로, 앞으로....
그러다 하얀 모래 결에 비추는 햇살이 별안간 너무 눈이 부셔 눈살을 찡그리다가 나는 문득 생각하고 말았다. 뛰어 넘을 것도, 걸려 넘어질 것도 없다는 건 그것 자체로 이미 장애물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은 아닐까? 기계적으로 내딛던 뜀박질이 서서히 느려진다. 천천히, 천천히... 완전히 멈춰서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색감도 형태도 없는 그저 하얀 빛깔의 광활한 평면의 공간. 전기에 감전된 듯 급작스레 두려움이 몰려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앉았다.
나는... 나는 어디로 달리고 있었던 것 일까?
무채색의, 무기질의 압도적인 공간이 나를 산산이 집어삼켜 간다. 그것은 나의 비명소리마저 까맣게 먹어치워 저만치 작은 메아리로 들려오게 만들고 있었다.
"헉.... 아야!"
놀라 일어나느라 황망 중에 뒤통수를 어딘가 박고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려오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바라보자 낡은 책상의 모습이 보인다. 낙서인지 필기인지 모를 정도로 끄적거리고 있던 노트 하나를 펼친 채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책상의 주변으로는 정리되지 않은 온갖 물건들이 켭켭이 층을 쌓으며 작은 덩굴 숲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잠에서 깨다 저기 어딘가에 머리를 박은 모양이지. 치우기로 마음만 먹고 벌써 몇 달째 점점 더 쌓여만 가는 물건들.... 지금이라도 치울까? 아직 잠에서 덜 깨 졸리운 눈을 부비 우며 나는 느적느적 일어나서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그 작고 악의 넘치는 잡동사니의 동산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옆에 있던 침대로 다시 털푸덕 쓰러져 내렸다. 아... 몰라. 치우는 건 나중에.
슬쩍 시계를 바라보니 아직 기상시간까지는 멀었다.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불평처럼 조용히 투덜거리며 까슬한 베갯맡에 얼굴을 부비우고 있자니 창밖으로는 따스한 햇살의 기분 좋은 온기와 함께 한 줄기 미풍이 스며 들어온다. 그 바람결에 기분 좋게 코를 벌름거리며 다시 잠을 청했다.
꺼지지 않는 태양. 멈춰버린 세계. 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된 세상에서 나는 잠이 든다.
이곳은 하늘에 떠 있는 우리의 도시. 천공의 바니타.
천공의 바니타
written by.녀놘
'지구'라는 곳이 있었다. 바다와 땅, 대기가 있던 푸른색의 아름다운 행성. 인류는 그곳에서 지금껏 어떤 지구의 생명체도 이뤄내지 못 한 비약적인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갔다. 땅을 점령하고, 바다를 점령하고, 하늘을 점령하고... 그리고 그 끝에 더 이상 지구상에 점령할 것이 없어진 인간들은 서로를 점령하기 위해 커다란 전쟁을 벌였다. 전 세계를 뒤덮은 시뻘건 불기둥...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온갖 바다와 땅과 대기를 불사르는 대전쟁이 지구를 파괴해 갔다. 더 이상 지구상에 인류가 생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지구에서 탈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남은 모든 자원과 기술을 끌어 모아 인공도시를 만들고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가는 거대한 워프게이트를 만들어 살아날 길을 모색했다. 자신들의 과오와 어리석음에게서 재빨리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남은 인류는 이곳에 오게 되었다.
누구도 이곳이 어딘지는 모른다. 아니. 최소한 내가 교육 받은 어떤 책에서도 이곳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끝도 없이 뻗은 연분홍빛의 하늘과 무심한 듯 떠 있는 거대한 태양, 그리고 내려다보이는 시야 전부를 가리우는 거대한 구름의 무리가 이곳의 전부다. 다행히 공기가 있고 때때로 설레이듯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이 있다는 것 빼고는 이곳은 어떤 날씨의 변화도 풍경의 변화도 없는 멈춰 있는 듯 한 세계이다.
그 곳에 우리의 도시 '바니타'가 있다. 초거대 부유도시인 인공도시 바니타는 다행히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토양과 식물과 가축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의 공기를 이용해 물을 정제해 낼 수 있는 기술도 있다. 물론 전 세대 인류가 자신들의 모든 하이테크놀러지를 쏟아 부은 결정체이니만큼 더 대단한 기술들도 있었겠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지금은 소실되었다든지 망가졌다든지 한다는 것 같다. 아무튼 초기 워프게이트의 통과 시점에서 대부분의 기술과 장비가 파괴되었다고 나는 교육 받았다.
지금에 와서 우리의 생활방식은 정신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수트라'의 가르침에 따라 과거 인류가 행했던 잘못을 답습하지 않도록 자연 그대로 검소하고 금욕적으로 살아가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바니타의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과 지위에 맞게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고 정해진 시간대로 활동하고 일하며 정해진 시간에 자도록 되어 있다. 지구에서의 습관대로 이곳에서도 아침이나, 낮, 밤등의 명칭은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다만 그것 모두가 철저히 시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풍경의 세계... 나 같은 일반 노동 층의 젊은 여성들은 정신의 수양을 위한 아침 교육 후 오후 늦게 까지 바니타의 주요 식량 자원 중 하나인 버섯 농장에서 일하는 게 하루의 일과였다. 그 말인즉 나는 오전 늦은 시간부터 지금껏 몇 시간째 버섯을 따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아함..."
"야, 류수정!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나도 모르게 아려오는 어깨를 매만지며 작게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옆에서 황급히 내 손을 끌어다 내리는 통에 돌아보았다. 하얗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볼을 잔뜩 부풀리고는 불평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던 지애 언니가 이내 걱정스레 물어온다.
"왜? 어제 잠 못 잤어?"
"그럴 일이 있었어요."
눈가에 남은 하품의 흔적들을 손으로 슥슥 닦아내고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휙휙 내저어 주었다. 확실히 별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개꿈 같은 악몽으로 잠을 설쳤던 것뿐이니까. 물론 꿈의 내용으로만 본다면야 당장 수트라 교육기관에 끌려가 집중교육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의문을 갖다니... 현재의 삶에 의문을 갖지 말고 그저 주어지고 정해진 대로 벗어나지 않고 생활하는 걸 강조하는 수트라의 가르침과 그것은 확실히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하얀 버섯들을 기계적으로 따서 바구니에 넣는 작업을 수 시간째 반복하고 있자니 설령 어젯밤 제대로 잠들었다고 해도 괜찮았었을 것 같지가 않다. 지루하고 따분하고 힘들고.... 절로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저만치 멀리 우리처럼 버섯을 따고 있는 수많은 또래의 여자아이들 사이로 우뚝 서있는 수트라의 교육관 모습이 보였다. 마치 잘 만든 기계인형처럼 완벽히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니 쭈뼛 소름이 돋는다. 아무튼 저 교육관이 감시하고 있는 이상 작업 중에는 일체의 잡담도 휴식도 있을 수가 없다.
"정말 짜증나 죽겠어..."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소리죽여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지애언니가 헛바람 삼키듯 작게 비명성을 내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니 무엇을 발견한 건지 크게 떠진 눈이 어딘가 한 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언니 그러다 턱 빠져요. 이번엔 또 왜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언니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나는 그만 언니를 따라 작게 비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미주 언니....?"
버섯 농장 외곽의 작은 수풀 너머로 장난처럼 불쑥 튀어 나와 있는 얼굴. 보기 좋은 긴 웨이브의 머리 아래로 하얀 얼굴이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으로 시원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저 언니가 도대체 여긴 어떻게....
"수정아. 빨리 가봐."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해 하면서도, 교육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봐 안절부절 주변을 돌아보며 지애 언니가 내 등을 떠밀어낸다. 그 등쌀에 머뭇머뭇 몇 발작을 떼다가 지애 언니를 돌아보니 멍해있는 내 얼굴을 향해 어서 가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준다. 누구도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 지애 언니의 고갯짓이 신호라도 된 듯 단박에 달음박질 쳐 수풀 사이로 뛰어 들어가자 그곳에는 정말로 거짓말처럼 미주 언니가 마주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오랜만이지?"
어안이 벙벙해 쉽게 입을 떼지 못 한 채 그저 바라만 보고 서 있었다. 정말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우리 또래의 여자아이들에게 일괄적으로 지급되는 하얗고 검소한 복장이 아니라 제멋대로 풀어헤쳐지고 다 낡아 빠진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다는 것만이 예전과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어쩐지 그 자유로운 복장이 언니에게는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퍽이나...."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것을 꾹 참으며 쏘아보고 있었더니 머쓱해졌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우리 같은 아이들 생활에 달라질 거나 뭐 있겠어? 그런 것 보다 본인 걱정이나 하란 말이야! 도대체 여긴 왜 찾아 온 거야? 그러다 교육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정말 제멋대로인 사람이다. 한숨을 푹 내쉬며 왠지 기운이 쪼옥 빠져서는 옆에 있던 나무 둥치에 다가가 앉았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다가와서는 내 곁에 털썩 앉는다.
"예전에는 자주 이렇게 함께 앉아 있었는데...."
".........."
....뭐라 불평도 못 하겠네. 오후의 햇살을 받아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금빛의 물결에 떠있는 다정한 얼굴. 나무에 머리를 기댄 채로 가만히 눈을 감고 중얼거리고 있는 미주 언니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만 화를 내어야 된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말 것 같다. 조용히 사색하듯 가라앉은 언니의 모습을 보니 나도 새삼 오래되지 않은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온다.
언니의 아버지는 과학자였다. 수트라의 가르침에서는 일반 시민들은 과학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언니의 아버지가 과학자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수트라 교육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민간의 숨은 과학자라는 것이 특별한 점일 것이다. 아마도 첫 워프게이트의 이동 때 탑승하고 있었던 언니의 할아버지로부터 언니의 아버지는 몰래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
끊임없이 왜? 라는 질문과 함께 미지를 탐구하고 지식을 갈구하는 직업. 완벽히 수트라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그런 일에 초창기 이주 시에는 많은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주어진 상황에 의문을 갖지 않고 그저 따르기를 바라는 수트라의 가르침과 자유의지와 발전을 주장하는 무리의 접전. 많은 과학자들과 시민들이 동참해 반발했던 그 사건은 결국 지금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 수트라 교육기관의 승리로 결론 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암암리에 숨어서 지식과 탐구의 자세에 대한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전수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언니는 그런 집안의 피를 물려받았다. 불손한 사상을 가진 사내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교육기관에 들어온 언니는 확실히 어렸을 때부터 줄곧 수트라의 가르침에 세뇌 당해왔던 우리들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가만히 입을 닫고만 있어도 되었을 상황에서 굳이 자신의 의견을 숨기지 않고 덜컥덜컥 말하기도 일쑤였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먼저 행동부터 하고 보는 점도 달랐다. 그 덕에 교육관들로부터 종종 눈초리를 받고 끌려가는 적도 비일비재 했던지라 교육기관 내에서 언니의 이미지는 같은 교육생들로부터도 금세 그리 좋지 못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언니의 모습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던 것은 왜 였을까....?
나도 언니도 생각해보면 참 모나지 않고 서로서로 둥글둥글한 성격이었나 보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서로의 사상이나 나이차이 같은 것을 상관하지 않고 줄곧 가깝게 붙어 있기를 즐겨하게 되었다. 서로 친구처럼 격식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함께 붙어 다니며 남들이 잘 오지 않는 도서관의 구석 가에서 같이 책을 보기도 하고 햇살이 잘 드는 들판을 찾아가 얘기도 나누면서 우리는 꿈같은 밀회의 시간을 보냈다. 언니가 몰래 집에서 가져온 책들을 함께 넘겨보며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옛 지구에 존재했던 광활한 대지와 바다. 보슬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봄비라던가 자욱한 향기를 아련히 피워내는 아름다운 꽃들... 분명 지구라는 곳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세계였을 것이라고 나는 언니가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책의 그림들을 보며 상상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 하는 다른 세계가 어딘가에는 분명 존재하고 있을 거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타고난 천성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미주 언니는 나름대로 교육기관에서의 생활을 잘 해내가고 있었다. 문제가 터진 건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터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발사고로 언니의 아버지는 수트라의 눈길로부터 숨겨놓았었던 집의 연구실과 함께 불타올라 돌아가시고 말았다. 잔인하게 날름거리던 화염은 시체도 연구 자료도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한줌 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 때를 기점으로 언니는 조금씩 심하게 엇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사망과 관련된 이유를 찾겠다며 아침 교육시간에도 출석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해졌고 물론 노동일에도 점점 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급기야 교육기관에서 언니를 제명시키겠다는 통보가 나오고 나서야 나는 사태가 정말로 심각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키기에 너무 늦어 버렸다. 언니와는 이미 몇 주 전부터 마주치지 못 하고 있었다. 교육기관에서 제명된다는 것은 시민권을 박탈당한다는 소리이고 그건 잠을 잘 곳도 먹을 것에 대한 배급도 더 이상 받지 못 한다는 소리이다. 게다가 이제부터는 사상의 불손자로 낙인찍혀 교육기관의 감시와 추적을 피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언니가 제발 무사히 도망쳐 수트라에 잡히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기를 벌써 두 달여를 지내왔다.
"이렇게 갑자기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어."
투덜거리듯 입술을 내밀자 그런 내 목소리에 미주 언니는 여전히 나무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은채로 조용히 웃어 보였다. 기다림의 시간이 거짓이었던 마냥 단숨에 예전의 둘 사이로 돌아가 버린 것만 같다. 세 살이라는 나이차가 무색할 만큼 편하게 대하는 나와 그런 나를 아니 꼽게 보지 않고 오히려 매번 져주기에 바빴던 미주 언니. 피곤했던 건지 눈가를 가볍게 꾹꾹 손가락으로 누르다가 눈을 뜬 언니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들었다. 길고 가녀린 손가락 사이로 은빛의 작은 상자 하나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뭐야...?"
"요즘 좀 많이 바빴어. 교육관들의 감시를 피해 도망도 다녀야 했고, 아버지의 연구가 무엇이었는지도 알아내야 했는데다가... 워프게이트 근처에도 가봐야 했으니까."
"워프게이트? 설마.. 거길 갔다고? 미쳤어. 진짜!"
워프게이트란 우리가 이 세계에 온 이방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이 풍경이라고는 끝없이 펼쳐진 구름이 전부인 세계에서 여전히 하늘 한 쪽을 이질적으로 장식하고 있는 그 거대한 차원의 구멍은 바니타의 하나뿐인 자원 줄이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 인류의 대이동이 있은 지 벌써 5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구멍으로는 과거 전쟁의 흔적들처럼 갖가지 잔해가 된 옛 문명의 유산들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대부분 식용식물의 재배나 가축의 사육에 투입될 때 남자아이들은 저마다 비행술을 익혀 워프게이트에 보내어 진다. 그곳에서 작업용 비행선을 타고 쓸 만한 자원들을 인양해 오는 것이 바니타 남자들의 주된 일이었다. 자원이라고는 태양과 공기 밖에 없는 세계에서 수트라 교육기관에게 그곳은 황금의 땅인 동시에 옛 문명을 배척하는 그들의 교리에 맞부딪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따라서 워프게이트 내에서의 작업은 언제나 모든 것이 비밀에 붙여진다. 그 말인즉슨 교육기관의 감시도 가장 심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 곳에 제 발로 가다니....
"그래도 덕분에 이걸 찾을 수 있었어."
내가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눈빛이었던 건지 움찔 해서는 옆으로 조금 물러나 앉으며 미주 언니는 황급히 손에 든 금속질감의 은빛 상자를 내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아무 특징도 없어 보이는 심플한 정육면체의 상자. 미주 언니가 상자를 열자 작은 상자 안에서 작은 돌기들이 돋아나있는 원기둥 하나가 돌아가며 낯 선 음악소리를 연주하였다. 적당히 크지도, 작지도 않게 들려오는 감상적인 음에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더니 미주 언니가 작게 속삭이듯 내 귓가에 대고 얘기해준다.
"오르골이라는 거야."
오르골...? 언니의 말을 몇 번인가 입 안에서 곱씹어 보았다. 음악을 연주해주는 상자라니 신기하기도 하다. 조심스레 언니의 손에서 받아들어 손 안에 감싸 쥐고 있으니 언니의 온기와 함께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전해져 왔다.
"워프게이트를 타고 흘러나온 작은 화물 상자에서 발견한 거야. 그것 말고도 안에 여러 가지가 있었어. 책이라던 지, 간단한 먹을 거리라던 지... 도저히 전쟁의 잔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깔끔한 화물 상자에서 말이야."
내가 오르골을 매만지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잠잠코 보고 있다가 미주 언니는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나무 기둥에 팔베개를 하고 기대앉더니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연구가 뭐 였는지도 알아냈어."
"그래? ......무슨 일이셨는데?"
"아버지는 아마도 워프게이트의 반대편에 관심이 있으셨던 거 같아."
"지구에...?"
내가 반문하자 미주 언니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뚫어져라 쏘아보고는 대답이 없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하늘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에는 하늘 밖에 없어. 공기와 그 속에 포함된 약간의 수분은 있지만 그 뿐이야. 어떤 동식물도, 발을 딛고 설 흙 한 줌 조차 없는 곳이야. 이런 곳에서 인류가 이 인공도시에 의존하여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어. 아버지는 그걸 걱정하고 있었어."
"하지만 지구는 이미....?"
의아한 얘기다. 이미 지구는 수십 년 전에 불타버린 지 오래였다. 수트라의 가르침에서 지구는 더 이상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작열하는 화염만이 넘실거리며 불타오르고 있다고 했다. 설사 인류가 그곳에 간다하여도 그 불길 속에서 생존의 희망은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거 말이야. 그게 뭘 의미하는 것 같아?"
"응? 이거?"
언니가 슬쩍 턱으로 가리키는 오르골을 내려다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깔끔하고 흠집 없는 표면들이 햇살에 빛나고 있다.
"잘 봐. 이미 50년도 더 지난 전쟁이었어. 하지만 그건 도저히 그 시대 물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물건이야. 그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 전부 그래. 책도 음식들도 비교적 최근의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어. 언제나 우주선의 잔해 같은 고철덩어리들이 흘러나오던 워프게이트에서 요즘은 그런 것들이 매일 주기적으로 인양되고 있다는 것 같아."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한 게 당연해. 수트라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 인양작업을 하는 남자들에게는 철저히 입막음이 행해지고 있지만 이미 내부에서는 뭔가 의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지금은 교육기관의 감시로 인해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얼마 안 있어서 사람들도 알게 될 거야."
한동안 더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던 언니는 이내 기운차게 나무기둥에서 일어나서는 몇 발자국인가 앞으로 걸어가다 빙글 몸을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씩씩하고 가릴 것 없는 모습이다.
"난 지구에 가볼 거야."
"응?"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의 모습에 흠뻑 취해버린 바람에 내가 잠시 헛것을 들었노라고... 나에게 몸을 돌릴 때 길게 웨이브 져 찰랑이는 갈 빛의 머리라든가 환한 입가의 미소라던가 하는 것이 조금 지나치게 눈이 부신 것 같다고 나는 투덜거렸다.
"저기 우리 세대의 누구도 넘어가보지 못 한 거대한 구멍이 나있잖아. 그렇다면 직접 가보고 싶은 게 당연하지! 분명...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었을 거야."
내 귀가 잘못 되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치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부러 더 미소를 진하게 띠고 있는 언니의 모습에 잠시 정신이 멍하다. 지구에 가겠다니....
"미친 짓이야. 자살 하러 가겠다는 거나 같은 소리로 들려."
설사 교육기관의 감시를 뚫고 워프게이트를 통과한다고 해도 그 반대편은 이미 폐허가 되어 생물이 살아갈 수 없는 죽어 있는 별이다. 그런 지구에 제 발로 홀로 가겠다는 건 무슨 정신일까? 그리고 만약 간다면... 그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소리와도 같다. 워프게이트를 통과하며 부유도시 바니타는 그것이 가진 대부분의 장비와 기술을 소실하였다고 했다. 반대편으로 넘어간다면... 다시 이쪽으로 올 여력은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야 돼.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난 봐야 될 의무가 있어."
"도대체 뭐 하러 굳이 나한테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해주는 거야?"
갑작스레 정신이 멍한 와중에도 순간 원망스런 마음이 들었다. 정말이다. 차라리 지금처럼 그냥 수트라의 감시를 피해 도망 다니며 어딘가에 무사히 숨어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던 쪽이 편했을 것 같다. 그럼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어딘가 에서는 언니도 나와 같은 하늘을 보며 가끔은 내 생각을 떠올리곤 하겠지 라는 잔잔한 희망이라도 지금까지처럼 갖고 살 수 있었을 텐데....
"글쎄... 준비는 이미 다 끝냈어. 오늘 취침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잠들면 그 때 떠날 거야."
".........."
"그냥 마지막으로 너랑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어."
애매하게 헛웃음 섞인 장난스런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미주 언니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왜 웃고 있는 미주 언니의 눈이 그리도 마음을 저리게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속에서 또르르 굴러 떨어져 흘러내릴 것만 같다. 어색한 기운을 떨쳐내기라도 하려는 듯 괜스레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몸을 돌린 언니는 새삼 주변을 돌아보며 그 모습 하나하나를 시선 속에 각인시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정성스레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 떠날 때 아무것도 기억할 게 없다면 슬프잖아. 돌아올 이정표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싫어."
"어?"
갑자기 내가 내뱉은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는 미주언니에게 나는 소리 질렀다.
"지구에 가든, 어디서 죽든 살든 맘대로 해! 누가 이정표 따위가 되겠대?"
"수정아...."
영문 모를 얼굴로 바라보는 언니의 눈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화가 난다. 이정표라느니 뭐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는 그냥 이렇게 훨훨 떠나버릴 테니 나는 남겨져서 자기나 평생 기다리고 있어라 뭐 그런 의미야? 사양하겠어! 누가 그딴 걸....!
"오랜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걱정해주던 사람 생각은 못 하고...."
"미안해. 그런 게 아니라.... 떠나기 전에 너에게 만이라도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 이기주의자!"
씩씩거리고 있는 나를 미주 언니는 곤란스레 지켜보았다. 그러지 말고 어떤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내 눈만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자신이 지금부터 해야 되는 어떤 말로도 내 기분을 풀어주기는 불가능 할 거라는 것을 직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볼만 어색하게 긁적이던 언니는 내가 지나온 수풀의 너머를 잠시 바라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없어. 이따가 아퀼라 공원에서 떠날 거야. 그곳에 간단한 연구시설과 내가 개조한 비행선이 있어. 지애 언니에게도 안부 전해줘."
".........."
"그럼..... 잘 있어. 수정아."
몇 번인가 발길을 떼지 못 하고 머뭇거리던 언니는 이내 돌아서서는 시야를 가리는 산림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 하고 우둑 커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언니가 사라진 나무 사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가 굳이 나를 찾아와 바랐던 장면은 이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대답과 반응을 기대하고 나를 찾아온 건 아니다. 그제야 무슨 말도 할 것 같지 않게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 맥없이 벌어졌다. 하지만 뒤늦게서야 벌어진 입에서는 어떤 말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이미 언니는 가버렸다. 정말로 마치 꿈이었던 냥 언니는 가버리고 없었다.
어딘가 호되게 당한 사람처럼 얼이 빠지고, 기운이 빠져서 덜덜 떨리는 몸을 이끌고 수풀 사이를 넘어 터덜거리며 돌아오자 그런 내 모습에 지애 언니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조바심에 차서는 나를 얼른 자기 옆으로 잡아다 끌어당겼다. 혹시나 누가 내 모습을 보기라도 했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언니는 내게 조심히 물어왔다.
"미주는? 갑자기 어쩐 일이래?"
"네..?"
"미주 말이야! 이런데 찾아오면 안 되는 거잖아. 무슨 할 말이 있었던 거 아냐?"
할 말...? 그래. 미주 언니는 내게 할 말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구에 가버리겠다던가 하는 그런 말 말고 정말로 나를 찾아와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은 영영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떠난다고 했어요."
"떠나? 어디로?"
"지구요.... 오늘 취침시간에 아퀼라 공원에서 출발 할 거래요."
내 말에 말도 안 된다면서 지애언니는 울상이 되어서는 뭐라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어딘가 몽롱하고 지애언니의 목소리가 저만치 뿌옇게 멀게 만 들려온다. 변하지 않는 분홍빛의 따스한 하늘이 시선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언니... 저 오늘은 그만 집으로 돌아갈게요."
"어? 하지만 아직 일과 시간인데...? 교육관에게 들키면..."
"혹시라도 걸리면 아프다고 해줘요."
"그렇지만..."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다가 작게 알겠다고 말하는 지애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미주 언니와 대화를 나누었던 수풀을 돌아다보았다.
혹시나 그곳에 언니가 서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그곳에 언니는 없다. 공허한, 텅 비어 버린 듯 한 모습. 어느새 뭉개져서 뿌옇게 번진 시야에 수풀이며 하늘이며 온갖 것들이 엉켜들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다. 한 번이라도 다시 언니를 보았으면 좋겠다. 내가 방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잘 가라고 고마웠다고 전해주어야만 할 것 같다. 그렇게 기다렸던 언니인데 이렇게 끝내다니.... 후회와 자책감과 서러움이 모여들어 어딘가 가슴 속을 꾹꾹 아프게도 눌러 댄다.
언니는 떠났다.... 그 사실만이 나를 죽을 듯 아프게 짓눌러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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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햇살, 온후한 기후, 깨끗하고 정돈된 도시. 바니타의 풍경은 지극히 평화롭고 아늑해 보인다. 다만 그 모습이 어제도 그제도 내일까지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만이 나를 때때로 조금 무료하고 울적하게 만들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천성을 조금 말썽꾸러기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에 무언가 일탈의 기미가 보이기를 바라곤 한다니...
시간은 이미 취침시간이 되어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큰일이겠지만 나는 대담하게도 창틀에 팔을 개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랑이며 머릿결을 움직여 간지럽히는 바람... 다행히 근면성실하고 규율에 엄격한 바니타의 시민들답게 창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길거리는 사람 한 명 없이 잠잠하다. 그 활기와 떠들썩함이 가라앉은 길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미주언니는 지금쯤 과연 출발했을까? 이곳에서는 건물들의 시야에 가려 보이지 않는 아퀼라 공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나는 혼자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보았다. 독수리라고 하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동물의 석상이 있는 공원.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 한 매서운 눈과 힘찬 날개를 가진 새의 머리위로 언니의 비행선이 날아올라 사라지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어쩐지 꼭 그 독수리와 언니가 닮은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을 탐구하는 빛나는 눈동자. 억압에서 자유로운 힘찬 날갯짓. 어디로든 떠나갈 수 있는, 떠나버리고 말 것 같은 그 거대한 날개.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역시 언니와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이제 와서는 어쩔 수가 없다. 사실은 언니에게 고마웠다. 마지막으로 이곳 바니타에서 찾아와준 것이 나라는 게, 잊고 싶은 추억들만 가득했던 언니에게 내가 좋은 추억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 모두 고마웠다.
언니에게 나란 아이는 이 답답하고 자기편이라고는 없는 세계에서 유일한 말벗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어딘지 자꾸 벗어나고만 싶던,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이유 모를 조바심에 안달하고만 있던 내게 언니는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생각들을 꿈꾸게 해준 사람이었다. 마치 깨기 싫은 달콤한 혼몽처럼 언니와 함께 보낸 지난 추억들은 내 안에 소중히 숨 쉬고 있다. 그러니 고마웠다고 말해줬어야 하는데....
하지만 어쩌면 이게 잘 된 건지도 모르겠다. 언니는 이제 지구에 가야 한다. 설사 언니의 예상대로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있다 해도 언니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여정에 무언가를 남기고 떠난다는 것은 떠나는 언니에게도 남겨진 나에게도 힘든 일이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미련 없이 떠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언니도 그런 것을 알기에 마지막에 굳이 나를 더 붙잡으려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금빛의 햇살이 너울거리는 분홍빛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걸로 괜찮은 걸까? 그럴 리가...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져 온다. 그래. 이런 게 진짜 괜찮을 리가 없다.
"에이씨! 그래서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애꿎은 창틀에 화풀이라도 하듯 손으로 세게 치고 났더니 그새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못나게도 류수정이 또 울고 있다. 아까도 실컷 울었던 거 같은데 거짓말처럼 이놈의 눈물은 또 흐른다. 차마 닦아내지도 못 하고 엉엉 울면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언니가 떠나고 남겨진 바니타는 나에게 온통 거짓뿐일 것이라는 것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억지로라도 침대에 몸을 던져 넣으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창 밑으로 저만치서부터 들려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에 억지로 눈물을 닦아내며 바라보니 웬 낯익은 인영 하나가 취침시간의 적막한 거리를 달려오고 있었다. 지애언니....? 수트라의 가르침이라면 철저히 따르는 언니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 시간에 저렇게 조심성 없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명백히 우리 집 쪽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어딘지 마음 한 켠을 무겁게 쿵 찍어 누르며 불안하게 만든다.
좋지 않은 예감에 단숨에 계단을 밟아 내려가 현관문을 열자 그사이 집 앞까지 달음박질쳐 다가온 지애 언니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숨을 헐떡이고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마주친 그 커다란 눈망울에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에요?"
"수정아, 미안해."
언니는 다짜고짜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미안하다고 부터 하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애처롭게 우는 지 결국에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모습에 얼른 달려가 어깨를 붙잡아 세웠더니 제대로 말도 못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만 연신이다.
"뭐.. 뭔데 그래요?"
"교육관이... 교육관이 다 알아 버렸어."
"네?"
"미주가 어디 숨어있는 지랑 언제 도망칠지 다 알아 버렸단 말이야."
어떻게......?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자 지애 언니는 잠시 입술만 오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 하다가 결국 터지듯 토해내었다.
"내가 다 말했어. 너 가고 나서 갑자기 교육관이 다가오더니 다 알고 있다면서 나를 잡아다가 이상한 곳에 끌고 가서는 다 말하라잖아. 말하면 우리 가족은 안 건드린다고... 아니면 다 제명시켜 버리겠다고 그랬어. 미안해. 미안해! 수정아."
"언니...."
그럴 수가... 내가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자 언니는 주저앉은 채로 더 서럽게 울어 대었다. 그 모습에 안쓰러워 손을 내뻗자 지애언니의 작은 몸이 움찔해서는 몸을 웅크린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괜찮다는 듯이 지애언니를 끌어다가 품에 꼭 끌어안았다. 새까만 언니의 머리 위로 고개를 파묻고는 나는 언니를 토닥였다.
"괜찮아요. 언니는 잘못 없어."
"수정아. 흐응...."
그새 또 울음소리가 더 커진 지애 언니를 위로하며 나는 표정을 구겼다. 모두 다 내 잘못이다. 조금 더 조심했어야 되는데.... 가족들의 생계와 안위를 위하여 언제나 수트라의 가르침에 철저히 헌신하는 게 언니였다. 교육기관에서는 남들보다 항상 좋지 못한 성적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아등바등 교육관들의 눈 밖에 벗어나지 않으려고 언니는 필사적이었다. 조금 안 좋은 일이어도 더럽고 치사한 일이어도 주저 없이 하곤 했다. 남들 눈에는 조금 얄밉고 저능해보였을지 몰라도 실은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렇게나 간절히도 언니는 노력했다. 그런 언니를 상대로 가족을 쥐고 협박하다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미주언니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이곳 바니타에서는 지애 언니뿐이었다. 모든 건 다 남을 생각하는 그 상냥한 마음씨 때문일 뿐이다. 언니를 원망할 마음 같은 거 애초에 가졌을 리가 없다.
"언니. 저 가봐야 겠어요. 가봐야 해."
"응....?"
지애 언니의 얼굴을 들어서는 조심조심 엉망이 된 머릿결을 쓸어넘겨주고 퉁퉁 부어오른 눈가를 훔쳐 주고는 나는 일어나 섰다. 미주 언니가 위험하다. 아퀼라 공원 쪽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교육기관이 미주언니의 계획과 은신처를 안 이상 오늘밤 당장 습격을 해올 것이다.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이 사실을 미주 언니에게 알려야만 한다.
"안 돼! 교육기관에서 수정이 너도 주시하고 있다고 했어. 지금 가버리면...."
"상관없어요."
언니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미주 언니가 교육기관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난 이후로 가장 먼저 심문을 받게 된 나는 그동안은 딱히 어떠한 금칙행위에 대한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어영부영 별다른 제제 없이 지내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지금 미주 언니를 만나러 가기라도 해서 교육관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나도 이대로 교육기관에서 제명당할게 뻔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이곳에 가만히 주저앉아 있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갈게요. 지애 언니."
".........."
차마 어떤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는 지애언니를 한 번 더 다독여 준 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밝게 미소 지어 주었다. 어쩐지 이게 지애언니와의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나도 따라 울컥 속에서 무언가 솟구쳐 오르려던 것을 그래서 더 꾹꾹 눌러 담으며 나는 웃고 있었다. 마지막이 찡그린 모습인 건 싫으니까. 그래. 이랬어야 하는데... 미주언니에게 정말 못 할 짓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지금처럼 웃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알았어. 다녀와. ...대신 꼭 돌아와야 돼? 알겠지?"
"응! 그럴게요."
그렇게 밝게 얘기했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어쩐지 지키지 못 할 약속을 괜히 하고 만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몰려와 나는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젓고는 힘껏 떨쳐내기라도 하려는 듯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달려가며 힐끗 돌아보았지만 언니는 여전히 우리 집 문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며 내게 작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안녕. 지애 언니. 별 일 없어야 할 텐데...
잘 닦여진 돌담길 위로 조심성 없는 달음박질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적하고 조용한 바니타의 햇살 가득한 화창한 밤거리를 빠른 속도로 내달리며 나는 연신 아퀼라 공원 쪽을 곁눈질 했다. 과연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자꾸만 조바심이 난다. 벌써 미주 언니에게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내딛는 걸음걸음이 점점 더 빨라진다.
그 때 무언가 눈앞으로 섬광이 터지는 가 싶더니 뒤이어 굉장한 폭발의 굉음이 고막을 파고 들어왔다. 몸을 가누기 힘든 진동에 잠시 휘청 이며 멈춰서 있었더니 저만치 건물 너머로 붉은 화염과 함께 건물 하나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너무 갑작스런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나는 불현듯 저 불길에 휩싸인 곳이 아퀼라 공원 방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미주 언니가?
비명처럼 무언가가 목구멍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데 갑자기 불길에 타오르는 건물 속에서 비행선 같은 물체 하나가 빠르게 솟구쳐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남자들이 사용하는 평범한 작업선과는 어딘가 다른 모습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제야 나는 한시름 걱정이 내려앉는 걸 느끼고는 나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 미주 언니 맞는 거지?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여긴 무슨 일이지? 잠시 따라와 줘야 겠다."
"...에?"
긴장이 쭉 빠져서는 그저 멍하니 분홍빛의 하늘 너머로 비행선이 궤적을 그리며 선회 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굵직한 저음과 함께 우악스레 내 어깨를 잡아다 끄는 손길에 나는 짧은 비명성과 함께 질질 끌려가고야 말았다. 돌아보니 언제부터 내 뒤에 있던 건지 검은 제복의 교육관이 나를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서 있다.
"지금은 통행이 금지 된 시간이야. 가르침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나?"
"..........."
"너, 류수정이지?"
역시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이곳에 온 이상 교육기관의 시선밖에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리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잡혀서는 안 된다. 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살폈다. 내가 잡혀 버리면 혹시 나를 인질 삼아서라도 수트라는 미주언니를 협박할지도 모른다. 미주 언니가 다행히 빠져나간 것을 눈으로 확인한 이상 이왕 잡힐 거라면 언니가 최소한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이후까지는 버텨야만 한다.
"에잇!"
"으악!"
이판사판이다! 내 어깨를 붙들고 있던 남자의 두꺼운 손을 잡아다 힘껏 깨 물자 교육관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이틈에 어서... 정신없이 골목 사이로 빠져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머리채가 붙들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잡아당겨진다. 어찌나 세게 끌려갔는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군 체로 나는 성난 교육관의 손에 대롱대롱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쥐새끼 같은 녀석. 얌전히 끌려오면 될 것을!"
"놔! 놔줘요...!"
언제나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교육관의 표정에 저렇게 분노어린 표정이 잔뜩 지어진 것을 처음 보았다. 푹 꺼진 눈 안쪽으로 가느다란 눈이 잔인하게 번뜩이는 것을 보며 순간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서야 바니타의 이중적인 모습을 직면한 기분이다.
남자는 인정사정없이 그대로 내 머리채를 질질 끌며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악을 쓰며 발버둥 쳐봐도 저 우악스런 손아귀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가 없다. 이리저리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어 봐도 바니타의 검소하고 깔끔한 거리에는 의지할 것 하나도 잡히질 않았다. 이대로 정말 교육기관에 잡혀가는 것 일까? 미주 언니가 워프게이트를 통과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그 손 놓지 못 해!"
낯익은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너무 아프고 당황하고 있어서 헛것을 들은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굉장한 광풍과 함께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쏘아져 오는가 싶더니 내 머리채를 붙들고 있던 교육관을 그대로 날려버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려오는 머리를 붙잡으며 바닥에서 일어나 앉았더니 믿을 수 없게도 눈앞에 미주 언니의 비행선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캐노피를 열어 젖힌 채로 괜찮냐고 물으며 나를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미주 언니의 모습을 보고 있었더니 대뜸 실없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만치 날아가 엎어져 있는 교육관의 모습이 보인다. 저 비행선을 그대로 끌고 와서 들이 받아 버렸던 건가? 참 언제 봐도 황당한 언니다.
"여긴 왜 온 거야...?"
"그냥... 보고 싶어서."
미주 언니가 묻는 말에 그저 고개를 내저으며 웃어 주었다. 지애 언니가 교육기관에 다 말해버렸다느니, 미안하고 걱정돼서 말해주러 달려왔다느니 하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래. 그거면 모든 게 설명 될 것만 같다.
"그래...?"
"............"
"자, 그럼 다시 마지막 인사네? 그동안 고마웠어."
서로 말없이 마주보고만 있다가 미주 언니가 먼저 불쑥 내게 조종석 밖으로 손을 내밀어 왔다. 그 하얗고 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웃으며 마주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래. 이게 우리사이에 가장 어울리는 이별인 것 같다. 괜히 서로 걱정해준다고 되도 않는 나쁜 년 행세를 하는 것도, 찡그리고 화난 얼굴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도 우리에겐 맞지가 않다. 겨우 그런 거에 꼬꾸라질 만큼 약하지 않으니까... 누가 어디에 어떻게 떨어져 있든 웃으며 기다려줄 수 있는 사이라고 믿으니까. 이런 게 우리에게 맞는 이별일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어...?!"
마주 잡았던 미주 언니의 손을 의지하며 단숨에 조종석 안으로 뛰어 올라서는 언니의 옆자리에 앉자 당황한 미주언니가 나를 동그랗게 떠진 눈으로 바라보고는 경악하며 외친다.
"뭐... 뭐 하는 거야?!"
"나답게 행동하려고 하는 거야."
"어?"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가를 가볍게 찡그리는 미주 언니를 향해 나는 소리쳤다.
"내가 정말로 돌아올 이정표가 되어달라느니 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부탁의 비련의 여주인공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언니가 간다면 나도 갈 거야! 돌아올 이정표? 그런 거 정말 됐거든! 이제부터 내가 언니가 헤메이지 않도록 옆에서 밝혀주는 나침반이 되어 줄게. 그러니 앞으로는 뭘 하든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지 마!"
한동안 내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미주 언니는 잔뜩 볼을 부풀린 채 노려보고 있는 나를 마주보고 있더니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분홍빛의 바니타의 하늘 너머 내려앉는 잔잔한 햇살이 그런 언니의 모습을 반짝여 준다. 진심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이별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웃으며 헤어지는 장면 따위 지금은 고이 접어 묻어두었으면 한다. 이대로, 이렇게 계속 함께인 편이 우리에겐 더 어울린다. 근데 왜 저렇게 웃는 거야. 사람 무안하게....
"뭔데? 왜 그래? 왜 자꾸 웃어!"
"아니... 너답게 행동한다면서 갑자기 안 어울리는 어휘들을 막 사용하기에. 아... 오글거려."
"근데 이 언니가 남의 기껏 생각해서 말해주니까...!"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퍽퍽 어깨를 때리고 있었더니 아프다고 키득거리고 웃던 언니가 나중에는 대놓고 한동안 조종석에 얼굴을 묻고 깔깔거리다가 한참만에야 조금 진정 되었는지 눈가에 묻은 눈물 자욱들을 닦아내며 앉아서는 헛기침과 함께 조종석의 핸들을 움켜쥐었다.
"그럼, 정말로 나와 가겠다는 거지?"
"응!"
"괜찮겠어...?"
"응."
"그래..."
내 얼굴을 잠시 지켜보던 언니는 결심이 섰는지 낮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이윽고 핸들을 당기자 비행선이 거칠게 쏘아져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력이 역전되는 것 같은 거친 느낌과 함께 단숨에 창공에 다가서자 한순간 눈이 부시도록 밝은 햇살이 시야를 가득 채워왔다. 끝없이 펼쳐진 분홍빛의 하늘. 그 아래 깔린 하얀 구름들. 그리고 이제는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우리들의 도시 천공의 바니타.
".....이게 바니타를 보는 마지막일 수도 있는 거겠지?"
"그럴지도 몰라."
짧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미주언니의 대답에 나는 다시 한 번 바니타의 모습을 기억에 담으려는 듯이 눈으로 살폈다. 내가 나고 자란 도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평온하지만 무기력했던, 그 이중적인 도시의 모습을 아스라이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
"간다."
"응."
힘껏 잡아당긴 조종석의 핸들과 함께 미주언니의 비행선은 빠르게 바니타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저만치 점점 작아져가는 바니타의 모습에 어쩐지 이유를 알 수 없게 울적해지는 기분이다. 별로 좋은 추억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조심해!"
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주언니의 외침에 돌아보는데 갑자기 강한 충격이 비행선의 기체 옆으로 전해져 왔다. 격렬한 흔들림에 놀라 비명을 지르고는 좌석을 움켜잡으니 연달아 계속해 충격과 폭음이 울려 퍼진다. 어느새 조종석의 밖으로 수없이 떠있는 교육기관의 비행선들이 보였다.
"뭐야? 저 사람들이 지금 공격하는 거야?"
"단숨에 파고들 거야. 꽉 잡아."
언니는 핸들을 꽉 움켜쥐고는 소리쳤다. 교육기관의 비행선들 뒤로 보이는 거대한 워프게이트의 구멍이 기분 나쁘게 꿈틀 거리고 있다. 아마도 언니는 이 포화 속을 뚫고 지나갈 생각인가 보다. 그나저나 미사일이라니.... 그런 거 교육시간에나 배웠던 전 세대 지구의 유물 아니야? 그런 건 이미 과거 대이동때 이미 다 기능을 정지했다고.....
"저 사람들 제정신 아니지? 여긴 버젓이 사람이 타고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저런 걸로 공격을...."
"여긴 워프게이트야.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사람들은 알지 못 해."
입술을 깨문 미주 언니가 수트라의 비행선 무리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 들어갔다. 조종석의 안에 있는데도 주변으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과 바람의 마찰음이 전신을 긴장되게 만든다. 날아드는 미주언니의 비행선을 향해 수트라의 비행선 무리에서는 다시 한 번 불꽃들이 피어올랐다.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의 미사일들이다.
"쳇. 정말 적당히 라는 걸 모르네."
가느다랗게 눈가를 찌푸리며 인상을 쓰던 언니는 순간 기가 막힐 정도의 움직임으로 비행선의 동체를 회전시키는가 싶더니 상승하며 뒷면으로 수없이 많은 작은 불꽃같은 것들을 뿌려대었다. 그 불꽃들에 막혀 몇 개인가 다가오던 미사일들이 폭파되었지만 이내 연기를 뚫고 더 많은 미사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우리가 탄 비행선이 수트라의 비행선 무리들을 향해 내리쏘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왕좌왕하던 수트라의 비행선 무리들 사이로 단숨에 미주언니의 비행선이 파고들어가자 그 뒤를 따라 날아오던 미사일들이 대규모로 폭파를 일으키며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하였다. 그 혼란 속에서 미주언니는 침착하게 워프게이트 쪽으로 기체를 몰고 갔다.
"이런 건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아버지한테...?"
"아니. 독학."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진짜. 짓궂게 웃고 있는 미주 언니를 향해 낼름 혀를 내밀어 주고 있는데 갑자기 언니의 얼굴이 딱딱하니 굳는 것이 보였다. ....뭐? 의문을 갖기도 전에 기체가 한순간 기우뚱 기울며 그 바람에 몸이 조종석 안에서 심하게 치우쳐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작은 불꽃들이 시야 앞을 유린하였다.
한 차례 귀청을 따갑게 만들던 소리가 멎고 정신을 차려보자 조종석의 캐노피가 여지저기 심하게 금이 간 채로 조그만 구멍들이 몇 개인가 뚫려 있었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당황스러워 하며 돌아보자 미주언니의 안색이 좋지가 않다. 게다가 이 냄새는.... 조종석의 안쪽으로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만큼 비릿하고 물기 가득한 향이 공기 중을 맴돌고 있다. 설마?
"뭐야! 괜찮아?"
다급히 몸을 기울여 살피자 식은땀이 범벅이 된 채로 미주언니는 나즉이 신음성을 흘렸다. 어떻게 된 건지 미주언니의 왼쪽 팔 주변으로 아니나 다를까 옷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피가 배어져 나오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가 않은 상처의 모습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주언니의 몸을 끌어다가 내 어깨에 기대이고는 방금 전 불꽃을 쏘아냈던 상대를 돌아보았다. 이제 코앞에 위치한 워프게이트의 앞으로 위압적으로 떠 있는 수트라의 비행선 한 대. 그 조종석의 콕피트 안으로 믿을 수 없게도 좀 전에 바니타를 떠나올 때 미주언니가 날려 버렸던 교육관의 모습이 보였다. 이마 위로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도 않은 채 무섭게 웃고 있는 교육관은 우리를 향해 다시 한 번 비행선의 총구를 조준하였다.
"위험해... 어서 피해야..."
상처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도 핸들을 붙잡으려는 미주언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핸들을 대신 잡아 쥐고는 이를 악물었다. 바보같이... 방금 전 눈앞에 나타난 비행선 한대가 갑자기 총을 난사하는 모습을 보고는 나를 지키겠다고 순간적으로 비행선을 기울였었나 보다.
"좋아! 될 대로 되라고 해!"
나는 악을 쓰고는 핸들을 있는 힘껏 밀었다. 내 움직임에 따라 비행선은 한차례 덜컹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교육관이 탄 비행선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가까운 거리였던 탓에 비행선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그대로라면 정면으로 부딪혀 버린다. 막 총구를 당기려던 교육관도 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는 당황했던 것인지 허둥대는 것이 보였다. 총을 쏠 생각도 못 한 채 굳어있는 교육관의 비행선을 마주보며 나는 기합성을 내질렀다.
"이야아아아!!!!"
부딪힌다! 바로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 혼신의 힘을 다해 핸들을 잡아당기자 기적처럼 우리가 탄 비행선이 교육관의 비행선 위를 스치고 지나쳤다. 격한 덜컹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전해지는 진동에 비명을 내지르며 나는 그대로 속도를 높이고 워프게이트를 향해 돌진했다. 뒤를 돌아보자 비행선의 윗부분이 완전히 엉망이 된 모습으로 교육관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휴우....."
"너...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뭐?"
팔에 총을 맞아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고 있는 와중에도 미주 언니가 내 어깨에 기댄 채로 황당하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 모습에 실없이 웃어 주고는 나는 다시 단단히 핸들을 움켜쥐었다.
"독학."
"어련하시겠어요."
기침이 섞인 채로 콜록콜록 웃더니 이내 잠잠해져서는 내 곁에 몸을 누이는 미주 언니의 모습에 잠시 걱정스레 내려다보다가 나는 눈앞에 꿈틀거리는 거대한 워프 게이트의 안으로 비행선을 밀어 넣었다. 이제 정말로 이곳과는 작별인지도 모른다. 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 한다. 정말로 지옥불로 불타는 잿더미의 세계가 펼쳐질지, 그게 아니라면 미주 언니의 말대로 정말로 누군가가 살아있는 지구의 모습일지...
비행선이 워프게이트 안으로 들어서자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공간감과 시야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 정신을 차리기 힘든 아찔한 상황 속에서 저 앞으로 어떤 밝은 빛 하나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빠르게 가까워져 오더니 한순간 번쩍이며 온 세상을 하얗게 수놓았다. 마치 어젯밤 꿈꾸었던 세상처럼 온통 적막하고 새하얀 세계가 주변을 감싼다.
"수정아. 수정아!"
....어? 나를 부르는 듯 한 미주언니의 목소리가 저만치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하게 귓가에 파고든다. 깜빡이며 눈을 떴더니 갑자기 다급하게 미주 언니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아찔할 만큼 기체가 회전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수정아! 지금 떨어지고 있어!"
"뭐?"
퍼뜩 고개를 들고 일어나자 미주언니의 말마따나 비행선은 하늘 위에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다급히 핸들을 붙잡고 잡아당기자 그제야 자세를 바로 잡은 기체가 조금씩 속도를 줄여 나간다. 비행선의 밖으로는 새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잠깐.... 여긴?
어느새 안정적으로 속도를 줄인 비행선이 잔잔히 낮게 깔린 대지 위로 비행하고 있었다. 나는 조종석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그만 할 말을 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을 확 트이게 만드는 푸르게 뻗은 끝없는 풀밭 가운데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게 피어난 하얗고 붉은 꽃들이 시야를 온통 가득 메우며 피어난 채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다. 벚꽃? 그래. 미주언니와 지구의 책을 보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 벚꽃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순결. 청렴. 정신의 아름다움 등을 나타낸다고 했던 작고 어여쁜 꽃...
"이건......."
"봄이구나."
"어...?"
미주언니가 작게 속삭이듯 말해준 봄이라는 글자를 따라해 보았다. 일 년이 언제나와 같던 바니타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계절이라는 것. 봄, 봄... 소중히 조심스레 입안에서 그 단어를 굴려보자 얇은 꽃잎처럼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아든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일단 저길 봐."
미주 언니가 가볍게 고갯짓으로 가리키는 쪽을 의아히 바라보고 나서 나는 비로소 미소 지었다.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들판의 위로 모여들어 있던 사람들이 하늘에 떠 있는 우리들을 향해 팔을 흔들며 환호성 섞인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 가운데 커다랗게 쓰인 종이 위로 또박또박 정성스레 쓰여져 있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어서 오세요. 지구에 오신 걸 환영 합니다.
기분 좋게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주 언니를 마주보며 나는 언니를 껴안고는 그 입술에 힘껏 입을 마주쳐 주었다. 움찔 굳어서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언니의 홍조 띤 모습에 나는 실컷 웃음을 터트렸다.
- 처음 뵙겠습니다. 지구.
.
.
.
.......천공의 바니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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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글을 끝냈습니다아아아아!!!!!!!!!!!! 아... 이번 달은 특히나 힘들었어요. 아! 푸념을 늘어놓기 전에 일단 갑자기 러블리즈로 팬픽을 쓰게 된 이유부터 말해야 겠네요. 막 글을 다 쓰고 나서인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으음... 갑자기 이렇게 된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3월 말부터인가 '러블리즈 다이어리'를 시청하고 뭔가 관련 영상들을 정신없이 찾아보고 하다 보니 어느 샌가 덕심이 커져버렸다. 라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워낙 잡덕이니 시기마다 메인으로 핥는 그룹 말고도 상당히 두루두루 넓게 덕질하기는 합니다만... 스아실 러블리즈는 처음 데뷔 때부터 너무 이미지가 흐린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 '쟤들은 확 뜨기는 글렀는데...?' 라며 혀를 차기도 했었는데 리얼리티 영상이나 각종 예능과 라디오를 섭렵하다보니 어느 샌가 덕심에 콩깍지가 끼어서 이제는 뭘 해도 다 좋아보이게 되었습니다... (망함)
아무튼 덕질은 덕질이고 팬픽을 쓰는 건 단순히 취미 정도이기 때문에 맴덕질을 그만 두는 것도 아니고 맴으로 계속 글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최근 연달아 맴의 2차 덕질 내에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타이밍 좋게 자연스레 갈아타져 버린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맴 2차를 하면서는 이상하게도 그동안 덕질이라면 꽤 오랜 시간을 해왔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기분 나쁘고 안 좋은 추억들이 가득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언제나 혼자 하는 덕질이지만 그래서 더 스트레스도 안 받고 내 멋대로 즐거워하며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즐거웠던 덕질 라이프였는데 유독 맴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불쾌한 기억들은 일단 접어두고 어쨌든 요새는 러블리즈에 정말 푹 빠져서 오랜만에 다시 너무 즐거운 덕질라이프를 하고 있어요. 특히나 신인이라 그런가 더 신납니다. (아싸!) 그런 연유로 쓰기 시작한 글입니다만 사실은 커플링도.... 내 맘대로 '주x류x주'에 처음에는 도대체 뭘 쓸까 고민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미주라는 아이가 남들이 모두 '노' 라고 할 때 혼자서 '예스!' 라고 말 할 수 있는 아이라고 생각돼서 그런 이미지를 잡고 생각하다보니 뜬금없이 이런 글이 나와 버렸네요. 게다가 요새 출근길에서 매번 절 위로해주는 벚꽃과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써보고 싶어서 그렇고 그런 망상의 혼합으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런 얘기가 되어 버렸다는 전개입니다. 으음... 그러니까 한 마디로 똥글입니다. 평범하고 달달하고 훈훈한 주류주의 일상의 편린 같은 연애물이 더 보고 싶었는데 그런 거 없어요. 하지만 요새는 그래도 슬프지가 않습니다. 이미 그런 건 다른 분들이 쓰시는 글들로 많이 봤거든요. 아... 햄볶해. 맴 덕질 할 때는 도대체가 다 정전이어서 어딜 가도 그런 글을 볼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보고 싶은 글도 보면서 제 똥글도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보람찬 덕질이 된 거 같네요. 바람직하다!! 짱이다! 러블리즈 덕질 최고다!!
하지만 역시 똥글은 똥글이라 쓰면서도 수없이 '내가 이런 글을 도대체 왜 쓰고 있나....' 싶은 자괴감에 빠지긴 하였습니다. 이 짓도 이제 그만 두어야 할지도... 아무튼 특별히 누군가의 관심을 바라지 않고 꾸준히 혼자서 즐기고 있을 따름이니 나중에 힘들어 진다면 또 부담 없이 그만둘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마음은 편한 거 같아요. 그래도 당분간은 더 놀고 싶은 마음이니까 제멋대로 이런 글은 이런 글대로 써보면서 더 놀아볼까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본문에서는 쓰지 못 했지만 수정이가 바니타를 떠날 때는 가족과 의견의 마찰이 있고 그것으로 싸우다가 결국 미주를 찾아 가는 내용이라던가, 수트라의 방향이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래도 가르침을 따르는 교육관 큰수정이라던가 하는 내용들도 써보려고 했는데 크게 상관없을 듯 하고 글만 길어질 것 같아 쓰지 않았네요. 그밖에도 지구와 바니타의 관계라던가 전쟁 전후의 상황들, 수트라의 진면목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크게 비중을 두기는 애매해서 다 서술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참고로 바니타라는 것은 '허무함'이라는 뜻으로 이 글의 제목, 천공의 바니타는 천공에 떠 있는 허무함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수트라'는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바니타이지만 실상은 수트라가 두려움으로 시민들을 지배하는 곳이라는 뜻도 있고 수트라가 자신들의 가진 바를 지키고자 지구에 대해 일반 시민들에게 숨기며 두려워하는 겁쟁이들이라는 것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러나저러나 러블리즈 너무 좋아요. ㅠㅠ 그럼 혹시 이런 똥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이 있다면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덕질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