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도 방학에 접어들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도 없는지라, 방학 동안에 본가에 돌아가지 않고 자취방에 남아있던 민아를 따라 학교 도서관에 나와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 등록금 마련을 위해 방학기간을 이용해 최대한 열심히 뛰어다녀야 하는 나와는 다르게 민아는 오늘도 천하태평이다. 자취방에서 느적느적 일어나 노트북 하나만 달랑 챙겨 나와서는 거의 밤늦게까지 도서관의 한적한 책상 앞에 붙들고 앉아 있기 일상이다. 가끔씩 들여다보면 아니나 다를까 그 '지구방위대' 라는 사이트 이지만 어찌됐든 그런 것에 도통 관심이 가지 않는 나로서는 민아가 그곳에 푸욱 빠져 있는 동안 그저 그 옆에서 하릴없이 보지도 않는 전공 책만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가 사귀기로 되었다지만 이미 두 달여가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도 우리사이에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민아야."
"네? 왜요 언니?"
".......아니야."
늘 이런 식이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막상 말을 걸어 놓고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망설이고 만다. 다만 이름을 불렀을 때 언제나 생긋 웃으며 돌아보는 민아의 모습만큼은 좋다. 지금은 일단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나중에, 조금 더 나중이 지나서 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다면 그 때 물어도 상관없을 거야.
"저기 민아야 우리 그럼 이제 나가서....."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민아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끌기 원해서 밖으로 나가볼까 권유해보려던 내 말은 민아의 등 뒤에서 들려온 웬 낮고 침착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막혀 버렸다. 소리를 따라 올라간 시선에는 한 교복 차림의 아이가 있다. 한 눈에 봐도 제법 큰 키에 긴 흑발이 단정히 내려앉은....
"어..? 설현아?"
돌아본 민아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몇 배는 커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순식간에 민아의 그 작은 체구가 튕기듯 뛰어올라 여자아이의 품으로 안겨 올랐다. 그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해 하면서도 설현이라 불린 여자아이는 매달린 채 자신의 볼에 마구 뺨을 부비고 있는 민아를 능숙하게 안아 올리고 있었다.
"선배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내려오세요."
"싫은데~ 으히히히."
이게 무슨... 나도 모르게 벌어진 턱이 다물어질 줄을 모른다. 고목나무 매미 붙은 양 달라붙은 두 여인의 실루엣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내게 설현이란 아이가 내가 있다는 걸 발견했는지 가볍게 목례를 한다. 조금 상기된 얼굴에 수줍은 듯 곤혹스러워 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침착함이다. 아니... 익숙함인가? 도저히 침착해질 수 없는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까닥 인사해놓고는 어딘가의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임! 병! 사! 투! 악귀야 물러가라!!!!!!!!!!!!!!!
바르미 돌이 굴러올 때가 더 아픈 법이다.
written by. 녀놘
"방학기간이라 선배님을 찾아뵈려 왔어요."
어느새 민아의 곁에 설현이란 아이가 자연스레 앉아 있다. 애초에 사각의 책상위에 서로 다른 면을 차지하고 민아와 떨어져 앉아 그저 그 느긋하고 단조로운 관조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완전히 분위기속에서 밀려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고등학교 후배란다. 끼어들 이유가 없다.
"떠려니는 여전히 예쁘네. 우쭈쭈~"
문제는 저거. 단 한 번도 내가 보지 못 했던 격한 반응들을 보여주고 있는 민아의 저 태도다. 최소한 자기 옆에 사귀는 사람이 앉아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해 줬으면 한다. 아니. 애초에 지금 민아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고는 있나? 설현이라는 아이가 나타나고부터 지금까지 나에게로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사실 뭐 그건.... 평소에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 였지만 그래도 그것과 이건 엄연히 다른 거잖아!
이제는 완전히 자기 장난감을 갖고 놀듯이 아이를 이리저리 주물주물 거리고 있는 민아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새어 나온다. 하지만 내가 정말 불안해하는 이유라면 그건 저 설현이라는 아이 쪽 때문 일 거다. 장난같이 자꾸만 달려드는 민아에 비하여 민아가 하는 대로 어쩌지는 못 하고 하지 말라는 말로만 반항하고 있는 설현이라는 아이 쪽은 진심 같아 보인다. 그게 여자의? 연인의 육감이라는 것 이지만 너무도 저릿하게 느껴져 온다. 민아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눈치 채지 못 할 정도로 작게 움찔거리며 조용히 내리깐 눈이 언뜻언뜻 민아를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그저 평범한 선배를 바라보는 후배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건 비슷한 심정인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이제 하다하다 교복을 입고 온 어린애에게까지 내가 이런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건지... 내가 알기로 민아는 고3때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 도대체 둘 사이에 고등학교 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귀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가만? 그러고 보니 내가 고백했을 때 민아가 덥석 받아들인 것도 사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해서 였던 게 아닐까? 이미 여자와 사귀어 본 경험이 있었다던가. 예를 들어 저 아이와? 아니야! 그건 아닐 거다. 민아의 태도며 특히나 설현이란 저 아이의 태도를 보아서는 그런 건 역시 아닌 것 같다. 그것보단 굳이 따지자면 저 아이 혼자의 짝사랑? 그래 짝사랑! 물론 선배에 대한 단순한 동경이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일일테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 둘 사이의 관계와 지금 나와 민아의 관계에 차이점이란 게 존재하긴 하는 건가? 민아야 언제나 모든 게 장난으로 착각될 정도로 파악하기 힘든 아이고 그 옆에서면 누구도 진지함을 요구하기 힘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결국 한 방향 사랑이 된 달까. 그러니까 저런 관계라도 사실은 사귀는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째서 결론이 이런 건데! 내 자신이 한심하다. 정말.
"선배가 갑자기 대학에 합격하시고 나서 사시는 곳을 옮기셔서 당황했습니다. 연락도 안 주시고...."
"어? 그래? 그냥 다니는 학교랑 가까운데 에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럼... 찾아와도 괜찮은 거죠? 저."
"당연하지!"
익살맞게 웃으며 설현이의 등을 때리고는 즐거워한다. 확실히 민아는 저런 아이다. 언제 어느 때 어떻게 훌쩍 떠나버리던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서 만나도 똑같을 것 같은 아이. 설현이의 입가에 작은 안도감의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저 아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 이번 방학기간 동안은 선배님 하시는 것을 도와드리기로 계획 했습니다."
"내가 하는 거?"
"그 특이하거나 이상현상 같은 사건들의 정보를 수집하시는 거요. 방학동안 선배 곁에서 도와드려도 될까요?"
"너 그런 거 관심 없지 않았어?"
고개를 갸웃하는 민아에게 설현이가 방긋 웃어준다. 지금껏 저 아이가 여기 나타난 이후로 가장 환한 웃음이었다.
"선배님이 예전에 축제 전 날 밤 운동장의 스탠드에서 해주신 말 있죠?"
"내가 한 말?"
"네. 그 때 저에게 해주신 말이요."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었나?"
다만 여기서만큼은 설현이의 표정이 급속도로 식어버리는 게 보였다. 잠시 딱딱해진 얼굴로 민아를 바라보던 설현이는 무슨 일인지 자리를 일어나서는 뭐라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그만 오늘은 가보겠다는 말만 흘리듯 남긴 채 자리를 떠나 버렸다. 뭐지 방금?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멍해있는데 이제야 나를 돌아보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도움을 구하는 듯 한 민아의 울 상된 얼굴이 보인다. 이 바보. 그런 표정 짓고 있지 말고 따라가서 붙잡으란 말이야! 뭔지는 몰라도 방금은 민아가 실수한 거 같다. 그렇다고 내 입장에 저 맹한 손을 붙들고 일으켜서 등을 떠밀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으휴.
뭔가 완전히 엉망이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며 고개를 파묻어 버렸다. 민아는 어찌할 줄 모르고 설현이가 내려간 계단 쪽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내 쪽을 번갈아 돌아보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 번만큼은 나도 몰라. 나도... 조금은 화났단 말이야!
***
하지만 민아의 걱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자 언제나 우리 둘이 앉는 도서관의 그 책상자리에 설현이가 먼저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민아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일어나 꾸벅 인사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뭔가 산더미 같이 쌓아놓은 용지들 사이를 부지런히 정리한다. 그 모습을 보고는 으아앙~ 하며 아이처럼 달려가 껴안는 민아에게 설현이는 '도와드리기로 했잖아요.'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누가 선밴지 모를 만큼 마음씨가 넓은 아이이다.
어느새 또 찰싹 달라붙어 있는(물론 엉겨 붙는 쪽은 일방적으로 민아였지만....) 둘 사이에서 떨어져 어제처럼 책상의 옆 자리 면에 어색하게 자리 잡아 앉았다. 민아의 걱정은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내 걱정은 더 늘어나기만 했다.
"최근 이 지역 내에서 발생했던, 선배님 사이트에 올라와있지 않은 다른 사건들입니다."
"우와~ 이렇게나 많이, 자세히? 언제 다 조사한 거야?"
정말인 게 언뜻 봐도 엄청난 자료양이다. 민아의 취미를 도와주겠다는 것은 말뿐만은 아니었던 건지 척 봐도 지나치기 쉬운 신문의 자잘한 사건면의 스크랩부터 방송자료까지 꼼꼼히 수집해 놓았고, 무엇보다 직접 뛰어다니며 찍은 듯 한 사진이나 관련 탐문 등의 양이 대단하다. 성실하기도 하거니와 아무래도 앉아 있기 보단 몸으로 뛰는 타입인가 보다. 혈기 넘치는 여고생의 전형 답달까.
"그나저나 선배님 저 분은...?"
"응? 아.... 초아 언니?"
한참을 둘이서 사건자료들에 빠져 있다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는지 설현이가 나를 보며 얘기한다. 분명 민아의 일행일 텐데 어제부터 너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에 본인도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를 돌아본 민아가 벙긋이 웃는다.
"나랑 사귀는 언니야."
야! 민아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책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꾹 쥐어진다. 저 단순무식 미운 스무 살!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너무도 직설적인 그 말에 설현이는 파장이 뒤늦게 전해졌는지 완전히 멍해져서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만 얼굴에 얼핏얼핏 떠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도 고개만 숙이고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원망하다 용기 내어 설현 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초아라고 해요. 민아 고등학교 후배시죠? 잘 부탁드립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깨어난 듯 설현이도 나를 응시하고는 황급히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인사 늦게 드려서 죄송합니다. 설현이라고 해요...."
하여간 정말 민아 저 아이는..... 맞잡은 설현의 손으로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 온다. 이 아이는 지금 도대체 어떤 심정일까? 이 순간만큼은 나도 민아가 원망스럽다. 왜 누구의 마음도 이렇게 헤아려주질 않는 거야!
"우와~ 그럼 이제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재밌겠다!"
우리들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민아는 그런 우리 둘 사이에서 신나하며 좋다고 방방이다. 민아를 샐쭉이 바라보다가 설현 이를 돌아보니 여전히 약간 초점을 잃은 채 멍해져 있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다음 행동을 잊은 듯 여전히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손을 살짝 흔들어주자 그제야 당황해 나를 바라보고는 재빨리 손을 가져간다. 어찌할 줄 모르고 깨물고 있는 설현의 아랫입술이 붉다.
역시 불편해. 이런 건.........
***
"우와 집이다~!"
민아가 현관문을 열고는 도도독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린다. 불편했던 식사시간 이후 오후 늦은 시간이 되도록 도서관에서 자료들을 정리하던 설현 이를 민아가 그냥은 못 보낸다며 현재 살고 있던 자취방으로 끌고 와 버렸다. 민아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라는 말에 설현이도 마다하지 않고 승낙해 버리는 모양새라 결국 나는 그 둘을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불편하다지만 그래도 둘만 남겨 놓고 가버릴 수는 없다. 게다가 사실은 나도 아직 민아의 집에는 찾아가보지 않았다. 나도 아직 못 가봤는데 라는 쓸데없는 경쟁심이 나를 집안으로 떠밀어 낸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가볍게 인사하며 현관문을 들어서자 어지럽게 흩어진 민아의 신발들이 보였다. 역시 혼자 사는, 그것도 민아 같은 아이의 집에서 러브 하우스의 환상을 꿈꾸는 건 무리일거라고 생각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방으로 올라서는데 시작부터 발끝에 옷가지가 걸린다.
"민아야 여기 옷........ 헉!"
옷가지를 주워들고 2LDK의 아담한 거실로 가자 눈앞에 들어온 건 시야가득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온갖 공간을 구석구석 메우며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며 생필품들과 먹다 남은 음식들, 이불이며 베게까지 흡사 아비규환의 광경이 따로 없다.
"선배님 또 이러시깁니까?"
충격에 휩싸여 입만 벙긋벙긋 거리고 있는데 뒤따라 들어선 설현이가 쓰레기더미의 신선님 마냥 쓰레기더미 위에서 홀로 표표히 웃고 있는 민아에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먹거나 쓴 물건들은 그 때 그 때 치우시라고 했잖아요. 잠시 비켜 계세요."
이런 광경에 익숙한 것인지 설현이는 망설임 없이 민아의 방청소에 들어갔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식기들을 찾아서 가득 쌓인 설거지통 위에 모아두고 쓰레기들도 차곡차곡 봉투에 모아 담는다. 큰 바구니 가득 모인 옷가지들은 어느새 욕실로 향해있었다.
"예전 생각난다. 그 때는 설현이가 매일매일 이렇게 내 방 청소도 해줬는데."
허리 한 번 피지도 못하고 묵묵히 열심인 설현의 옆에서 방글거리며 민아가 웃는다. 저런 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잠시나마 저 둘의 고등학교 생활의 단편을 엿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용기 내어서는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청소하고 있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이리저리 물건을 치우고 있자 그런 내 모습을 설현이가 잠시 돌아다본다.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나는 애써 침착하게 청소에 전념하였다. 과거야 어찌됐든 지금 민아의 곁에 있는 건 나야. 그 말만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몇 시간이 걸렸는지 이미 창밖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욕실 안에서 들려오는 세탁기의 덜컹거리는 소리를 느끼며 나는 녹초가 된 몸을 벽에 기대었다. 어느새 환해진 방 안에 민아도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강아지라고 해도 믿겠다. 정말. 노곤 노곤한 느낌에 나른해져서는 평온한 기분에 젖어 있는데 냉장고를 여닫는 듯 한 소리에 시선을 돌리었다. 저녁을 하겠다며 부엌에 서 있는 설현이의 모습. 인정하기 싫지만 대단한 아이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대견하달까.
"선배님. 인스턴트식품들 밖에 없는데요. 식사는 제대로 챙겨 드시라니까요."
설현이의 걱정 섞인 핀잔에 민아는 그저 건성으로 헤벌쭉 미소만 짓는다. 그 모습에 가볍게 한숨짓고는 설현이는 조금 더 부엌을 돌아보다가 손을 탁탁 털어내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민아의 옷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서랍 속에서 몇 가지 옷을 꺼내어 보고는 역시나라는 표정이다.
"다림질도 여전히 안 하시죠?"
"그야 요새는 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참 뻔뻔도 하다. 설현이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미간을 좁히고 쏘아보다가 이내 다림질판과 다리미를 가져와서는 꾸깃꾸깃 엉망인 옷들도 가져온다.
"선배가 아직도 고등학생이었다면 제가 분명 또 정문에서 잡아 세웠을 거예요."
"왜? 복장 불량이라고?"
"당연 하잖아요. 선도부니까."
따스한 온기와 함께 스팀이 푹푹 새어나오는 다림질 광경은 그 온도차 때문인지 아니면 저기 앉아 있는 설현이의 영향 때문인지 나긋하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기분이다. 어느새 다림판 가까이 다가온 민아가 깔끔하게 주름살이 피어지는 옷들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구경하고 있다.
"선배는 언제나 말썽이었어요. 고3이 남들 다 등교하고 고1들 등교하는 시간에 혼자 미적미적 오시지를 않나. 매 번 볼 때마다 이름표 색깔이 달라져 있지를 않나."
"잡히는 걸 주워 입었을 뿐이야. 그게 어쩌다 보니 1,2,3학년 교복이 섞여 있는 곳 이었을 따름이지만. 아무튼 나중에는 제법 깔끔하게 입고 다녔잖아. 설현이가 매 번 찾아와서 교복도 단정히 다림질해 주었으니까."
"선도부로써 단정치 못 한 교복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뿐이에요."
조금은 멀리에서 가만히 기대어 앉아 하나 둘씩 두 사람의 추억을 엿듣고 있다. 지금 이 분위기가 둘 사이에는 매우 친숙했던 예전의 일상 같다. 그곳에는 어떤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서 왠지 지금만큼은 나도 끼어들고 싶지가 않았다.
"구겨지면 다시 사면되지 뭐. 어차피 입다보면 어디다 두었는지 모를 때도 더 많은데."
"그러다 벌 받습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니까 옷 말고도 사들인 냄비만 해도 벌써 몇 개인 거예요. 옷이며 물건들은 일회용이 아니라고요."
"뉘예~ 뉘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도저히 진지해지지가 않는 민아의 모습에 설현이도 단념한 듯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다림질에 집중한다. 그 모습들을 찬찬히 지켜보던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섰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질투심이 폭발해 있었지만 지금은 꽤 차분해 진 것 같다.
"저... 나는 그럼 나가서 뭐라도 사오도록 할께. 아무래도 저녁거리도 필요할 것 같고."
잠시 혼자 있고 싶어 그러고 집을 나서려는데 설현이가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따라 일어난다.
"초아 언니. 저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어?"
당황해 보고 있자 민아가 재빨리 설현이가 앉아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앉더니 손에 척 다리미를 집어 든다.
"그럼 다녀와~ 사실은 나도 매번 이거 볼 때마다 해보고 싶었거든."
그러고는 신난다고 히죽거리며 웃는데 어제부터 민아 정말 밉상이다. 도움이 안 돼. 진짜.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설현이의 눈동자에 괜히 안절부절 만해져서는 나는 한참을 말 한마디 못 하고 있다가 할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 그럼."
***
가까운 마트에서 간단히 이것저것 사들고 나오는데 설현이가 제 손에 들고 있던 봉투에서 음료수 병 두 개를 꺼내어 들더니 하나를 내 앞에 척 들이민다.
"초아 언니. 잠깐 얘기 좀 하실래요?"
".....그래."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난간가에 기대어 서며 들고 있던 음료 병의 마개를 열었다. 때는 바야흐로 무더운 여름이지만 해가 진 밤거리는 기특하게도 제법 선선한 기운이 돈다.
"민아 선배랑은 언제부터 사귀신 거예요?"
"윽."
이렇게까지 다이렉트로 물어오는 거냐? 확실히 요령이 없이 내질러 오는 것이 순수하고 혈기 왕성한 나이답다. 이래서 바르게 자라온 아이들이 더 상대하기 어렵달 까. 돌려 말하기도 힘들고 이해시키기는 더더욱 힘들다. 에휴... 속모를 한숨만 내쉬며 나는 더 고민할 것도 없어 순순히 답해주었다.
"이제 겨우 두 달 정도...?"
"그럼.... 누가 먼저 고백하신 건가요?"
"그야..."
이 질문만큼은 왠지 나도 입이 쓰다.
"내가 먼저 말했어. 좋아한다고...."
"그렇군요."
어쩐지 설현이가 안도하는 분위기라 기분이 우중충해져 버렸다. 하긴... 저 천하의 민아가 남보고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건 정말 특별한 사람일 것 이다. 그러니 설현이도 그것을 먼저 묻고 싶었을 것이다. 민아에게 과연 내가 어느 정도의 의미인가를. 물론 오기로라도 민아에게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어필하고도 싶지만 이렇게 말하면 뭐해도 역시 난 아직 자신이 없다.
"작년 학교 축제 전 날 밤이었어요. 전 학교 신입 선도부생이면서 학생회 임원이라 축제 전 날에 마지막으로 각 동아리의 물품 체크며 야외무대 세팅을 도와드린다고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습니다. 겨우겨우 일이 마무리 되어서 집으로 귀가하려 하는데 어쩐 일인지 야외 스탠드 한 구석에서 민아 선배가 혼자 앉아 있었어요."
침울해져서는 아무 말도 없이 애꿎은 음료병만 만지막 거리고 있는데 설현이가 느닷없이 이야기를 꺼낸다. 아마도 민아와의 추억인 듯 하여 나도 별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 날은 고3 선배님들도 다들 일찍 귀가하시고 밤늦은 시간이라 살짝 걱정되기도 해서 다가가 뭐 하시냐고 여쭤 봤습니다. 그랬더니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밤하늘만 올려다보던 민아 선배가 제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시나요?"
민아가? 글쎄... 민아라면 어떤 말을 꺼내놓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 아이와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도 민아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나? 궁금함은 일었지만 인내심 있게 침묵을 지키고 있자 딱히 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던 듯 설현이는 얘기했다.
"설현아. 저기 저 밤하늘에 별 좀 봐. 우리가 저 별을 바라보는 것처럼 저기 저 먼 곳에 서서 우리를 바라본다면 정말 점만 하겠다. 그치? 라고 멍한 얼굴로 얘기하셨어요."
".....정말?"
무슨 생각인지 모를 민아의 머릿속에서 그런 철학적인 말이 나오다니 사실 의외인지라 놀랍다.
"그 때 전 솔직히 조금 충격 받았습니다. 사실 민아 선배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에게 좋은 인상은 아니었어요. 첫 선도부 활동 날부터 때늦은 등교시간에 다 구겨지고 제멋대로인 교복을 불성실하게 입고 풀어질 대로 풀어진 모습으로 나타났었거든요. 고3처럼 예민한 시기에 홀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지내고 있느라 딱히 학교생활에 적응하지도 못 하고 친구도 별로 없이 헛돌고 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제가 보기엔 그런 것을 떠나 본질적으로 무언가 특이한 선배였어요."
"그래서?"
"전 그런 민아 선배가 그리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꾸 정해진 선에서 어긋나 버리고 자꾸만 돌발행동을 하는 것이 너무 못 마땅했어요. 그래서 틈만 나면 충돌하고 다투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민아선배에게 그 말을 듣고 나서는 뭔가 지금까지의 내가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전 사실 그 시기에 그런 규정과 규율 같은 것에 너무 스스로를 얽매고 있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선배의 말대로 저 먼 밤하늘에서 바라봤을 때 제가 지켜오고 강요했던 그 모든 게 티끌보다도 작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까 허무해지도 하고 그제야 뭔가 마음 한 켠이 해방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야 민아 선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꽤나 속 깊은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그 여운이 아직까지 곁에 남아 있는 것인지 설현이는 잠시나마 밤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새까만 눈동자에 밤하늘의 별들이 촘촘히 박혀와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도 그 날 설현이는 지금의 나처럼 밤하늘이 아니라 민아의 그 커다란 눈동자에 반짝이고 있는 별빛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저 아이도 지금 그 밤하늘 같던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는 것일 테지? 못난 일이지만 질투 난다. 한참 자아의 확립을 위해 필사적으로 방황하고 고뇌하는 거센 여고생시절의 저 아이 때에 민아의 그 말은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설현이가 왜 민아에게 빠지게 되어 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내년에 수능을 보게 되면 언니랑 선배님이 다니시는 대학에 지원할 겁니다."
"뭐?"
갑작스런 말에 당황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자 그런 나를 한 번 슬쩍 바라보고는 설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마트 봉다리를 챙겨서는 휘적휘적 민아의 자취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아서 그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나 지금 고등학생에게 선전포고 당 한 거야?
"기다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설현이의 그 시원하게 뻗은 길쭉한 다리를 쫓아 내달렸다.
빠르기도 해라. 그 잠깐 동안의 추격전으로 녹초가 된 채 민아의 자취방에 둘이 함께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탄내가 진동하는 통에 서둘러 뛰어 들어가 보니 민아가 완전히 울상이 되어서는 우리에게 까맣게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옷가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이거 다 타버렸어요."
어떻게 하냐며 애꿎은 다리미에만 심술을 부리는 모습에 나와 설현이는 누구랄 것도 없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이고~ 민아야.
***
너무 늦은 시간이 된지라 설현이네 댁에는 민아가 전화를 걸어 오늘밤은 자신이 집에서 함께 묵고 갈 거라 사정을 설명했다. 그럼 뭐야? 둘이 오늘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잘 거란 소리야? 그 전화통화를 듣자마자 이성을 잃은 나는 나도 자고 갈 것을 민아에게 선언해 버렸다. 물론 민아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로 승낙해 버렸지만 지금에 와서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후회스러울 뿐이다.
좁은 방안에 이불을 핀 채로 민아를 사이에 두고 나와 설현이 셋이서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이게 이렇게 까지 불편한 일 일줄 몰랐다. 자리에 누운 지 도대체 몇 시간이나 흐른 걸까? 새벽이 깊어가도록 잠 한숨도 들지를 않는다. 잔다는 것이 원래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었나? 눈을 감고 아무리 속으로 숫자를 세어 봐도 잠이 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정신만 말똥말똥해 진다.
슬쩍 눈을 떠 옆을 훔쳐보자 이미 눕자마자 골아 떨어진지 오래인 민아의 모습이 보인다. 이 상황에 참 잘도 자는 민아. 저를 사모하는 여자 둘을 양 옆에 끼고도 참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잘만 잔다. 속앓이 하는 건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한창 원망하는 와중에도 잠꼬대 하느라 뒤척이는 민아의 살결이 스칠 때 마다 움찔움찔 자꾸만 몸이 움츠러든다. 아.... 도저히 이건 잠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마음속의 절규를 내지르고 있는데 문득 민아의 건너편으로 설현이의 반듯한 실루엣이 비쳤다. 교복차림인데다 여벌의 옷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민아의 옷 중에서 그나마 프리한 사이즈의 옷을 골라 입혀놨는데도 어두운 빛 아래 드러난 굴곡은 사뭇 육감적이다. 얼굴은 바르미같이 생겨가지고 몸이 왜 저런 거야? 저런 게 고등학생이라니... 약간 사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고 지나쳐 심통이 난다. 아무튼 저 아이는 그래도 침착한 평소 성격 탓인지, 아니면 역시 그래도 어린아이이기 때문인 것인지 이 상황에서도 몸 한번 들썩이지 않고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나만 손해인 거잖아. 아 몰라. 나도 어떻게든 자고 말겠어. 눈을 감는다. 민아 하나... 민아 둘...
하지만 채 열을 세기도 전에 숫자 세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잠들어 있던 거라 생각했던 설현이가 슬며시 일어나 앉는 것이 느껴졌다. 거짓말! 머릿속에 불꽃이 번뜩 번뜩인다. 어떻게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히 실눈을 뜨고는 바라보자 설현이는 비스듬히 일어나 잠든 민아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내 쪽을 바라보는 통에 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어쩌지 진짜.... 잠시지만 새겨졌던 밤빛에 비치는 설현이의 복잡 미묘한 표정이 망막에 그려졌다. 슬픔. 그리움. 원망. 애증 같은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던 그 심정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 진다.
아직은 어린 아이이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사람이 어느 날 연락도 없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서는 결국 그녀를 찾아갔더니 그 옆에 이미 옆자리가 생겨있었다면 그건 어떤 기분일까. 그런 관계의 셋이서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은 역시 해서는 안 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야속한 죄책감이 자꾸만 나를 힐난해 온다.
결국 참지 못할 감정에 눈을 떠내었더니 그 순간 나는 숨이 막혀 버리는 줄 알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민아를 바라보고 있던 설현이의 얼굴이 어느새 잠든 민아를 향해 코앞에 다가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마주칠 것 같은 입술에 설현이의 감은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뭐... 뭐야 이건...?! 나도 모르게 손이 내뻗어 졌다
"꺄아!"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보다도 민아가 더 빨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민아의 잠꼬대가 더 빨랐다. 안 그래도 이리저리 뒤척이던 것이 키스 직전의 설현이를 온 몸으로 감싸 덮치며 민아는 그대로 설현이를 깔고 누워 버렸다. 당황한 설현이의 짧은 비명소리만이 새벽의 적막을 가르며 내달린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일어나 앉았다. 당혹감에 안절부절못하던 설현이가 눈동자만 굴려 나를 바라본다.
"어... 언니."
"야... 너 지금 그게...."
심히 보기 불쾌한 모습으로 민아의 밑에 깔려 혼자만 제정신인 애꿎은 설현이가 뭐라 변명할 말도 못 찾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다.
"너 당장...."
"꺄아!"
이차 비명과 함께 민아가 다시 구르기 시작하자 그 아래 깔린 채로 설현이는 또 뒤엉켜 격렬하게 방안의 구석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더 이상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그대로 미닫이 형식으로 된 민아의 방문을 소리 내 열고는 밖으로 나가 닫아 버렸다. 어쩐지 발에 힘이 풀려 그러고는 털썩 그 앞에 주저앉아 끌어 모은 무릎 위로 머리를 파묻었다. 방 안에서는 때때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설현이의 나즉한 신음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귓가를 틀어막고는 콩콩 머리를 찧는다. 진짜 최악이야!
그러고는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 일까...? 등 뒤에서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보니 이미 방안에는 햇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돌아보니 설현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마냥 하고 있지만 평소부터 단정함이 몸에 배어 있던 아이의 모습에 군데군데 정리되지 않고 헝클어진 머릿결이며 퀭한 흔적이 감춰지질 않는다.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어요."
그 말만 남기고는 설현이는 뚜벅뚜벅 욕실로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또 멍하니 바라본다. 야!! 내가 생각하는 일이 뭔데!! 그런 말 하면 더 불안해 지잖아!!!!!!!!!
***
오늘은 오전부터 대학가 근처의 토스트가게 아르바이트라 그런 일이 있은 직후인데도 어쩔 수 없이 민아의 집에 그 둘만을 남겨놓고 나와 버렸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어젯밤의 그 광경이 떠올라 머릿속이 지끈 거린다. 아까부터 타닥타닥 영혼 없는 빵조각만이 철판위에 구워지고 있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오늘은 쉰다고 얘기할 걸 그랬나?
"베이컨 치즈 두 개 주세요!"
"아.. 네!"
생각에 빠져있는데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버릇처럼 몸에 배인 웃음을 띠며 화들짝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
"민아야...?"
"히히~"
언제 온 건지 민아가 예의 그 익살스런 미소를 띤 채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반가워하려던 찰나에 시선을 돌려보니 그 옆에 선 설현이가 차마 나와 눈을 마주하지 못 하고 헛기침을 하며 내심 딴청 중이다.
"둘이... 어디 나가?"
"오늘은 설현이 따라서 자료 조사차 직접 현장들을 다녀보려고요."
으흥. 그렇단 말이지? 둘이 집안에 콕 틀어박혀 있는 게 차라리 좋았던 건지, 아니면 오늘 하루 종일 저러고 둘이 손 붙잡고 밖을 싸돌아다닐 게 좋은 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뭐가 됐든 나야 우울할 뿐이다. 아무튼 그렇다고는 해도....
"자, 토스트 완성! 특별히 신경 써서 맛있게 만들었으니까 이거 먹고, 혹시 오늘 나가서 늦더라도 제대로 다른 것도 챙겨 먹고 돌아다니도록 해."
알바생의 재량으로 솜씨 것 특대로 만든 토스트를 눈이 초롱초롱하게 변해서 바라보는 민아의 손에 쥐어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폭풍섭취중이시다. 아직껏 침묵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설현 이에게도 남은 토스트 하나를 건내었다.
"너도 먹고 오늘 민아랑 조심히 다녀오도록 해. 너무 늦지는 말고."
힐끗 나를 바라본 설현이가 한동안 내가 내민 손을 바라보더니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토스트를 가져간다. 서툰 아이지만 역시 착한 아이다. 그래서 더 대하기가 힘든 것 이지만....
"그럼 언니, 다녀올게요~"
뚜벅뚜벅 곧은 자세로 걸어가는 설현이의 옆으로 팔이 빠져라 손을 흔들어대며 방정맞게 멀어져가는 민아에게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린아이를 대할 때의 어른은 꽤나 불공평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라는 푸념이 한숨과 함께 새어 나온다. 방금은 잘한 거지 나?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시간을 보낸 건지도 모르게 목 빠지게 퇴근시간만을 기다리다가 끝을 알림과 동시에 민아의 자취방으로 뛰어가 버렸다. 낮에는 그렇게 어른스럽게 의젓한 척 굴어놓고는 참 어른스럽지 못 한 태도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이제 겨우 두 달도 안 된 짝사랑을 고백한 여자이다. 침착하게 굴 수 있다면 거짓말일 것 이다. 황급히 계단을 밟아 올라가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초인종을 눌렀더니 못난 걱정과는 다르게 선선히 문이 열리며 맹하고 의뭉스런 언제나의 민아가 나를 맞았다.
"어? 초아 언니네?"
"응. 끝나고 잠깐 들렀어."
생각보다 일찍 밖에서 돌아왔었나 보다. 이미 샤워도 끝마치고 옷도 갈아입은 채 쉬고 있었던 건지 오늘 낮에 보았던 옷가지들이 흔적처럼 현관부터 이어져 있다. 이래가지고는 청소해 놓은 게 하루도 못 가겠네.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하나하나 옷가지들을 집어 들고는 집안에 들어섰더니 어째서인지 설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설현이는 같이 안 왔어?"
"아..... 설현이는 아직 밖에서 조사 중일 거예요."
뭐어? 민아 얘는 정말 가끔 보면 혼내줘야 갰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아이를 혼자 서울 한복판에 어딘지도 모를 곳에 혼자 버려두고 왔단 말이야? 게다가 자신을 그렇게도 좋아하는 아이이다. 제발 주위 사람들의 감정에 관심 좀 가져보라고 따져들고 싶다. 그래봤자 그 어떤 것도 저 아이이게 먹혀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는 게 문제지만.
"걔는 너무 활동적이라서 따라다니려면 보통 일이 아니에요. 저는 진작에 탈진해 버려서 먼저 돌아와 버렸어요."
내 생각은 아는지 모르는지 민아는 팔을 내저으며 완전히 지쳤다는 모양새로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하긴 저번에 도서관에 가지고 왔던 설현이가 조사했다던 엄청난 양의 자료들이 떠오른다. 침착하고 성실하기도 하지만 그걸 뒷받침할 만한 행동력과 체력도 겸비하고 있다. 그게 그 아이가 무서운 점일 것이다. 아무튼 별 탈 없이 돌아와야 할 텐데....
찾으러 갈까 생각하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민아의 모습을 지켜보고는 잠시 생각을 접었다. 이런 기회니까 지금이 아니면 물을 수 없을 것 같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민아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민아야."
"네?"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돌아본다. 의심도 비난도 욕망도 애정도 없는 그저 투명하고 반짝이는 눈동자다.
"너에게 설현이는 어떤 아이니....?"
"음... 그야, 좋은 동생이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튀어 나온다. 그 말에 거짓은 없다고 느껴졌다.
"그럼... 나는?"
묻고 있는 입술 끝이 떨려온다. 얼마간의 정적이었을까 민아는 웃으며 예쁜 보조개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좋은 언니요!"
아, 그래. 특별히 어떤 감정이 든 것도 아닌데 눈앞이 잠시 깜깜해졌다. 어지럽게 일렁이며 회복되는 시야 중앙에 티 없이 웃고 있는 민아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 맡에 손을 뻗어 머릿결을 쓸어내려주며 나는 부드럽게 마주 미소 지어 주었다.
".....고마워."
***
"괜찮으신 거죠?"
지은 씨가 나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즐겨하지 않지만 오늘따라 생각이 나서 홀짝이고 있던 술병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응. 멀쩡해요."
민아의 자취방에서 나오자마자 정처 없이 떠돌다가 결국 발길이 간 건 저번 연회장에서의 만남이후 친해졌던 지은 씨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지은 씨가 갖고 있는 특별한 마력 같은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때때로 지은 씨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아도 좋을 것 같은 묘한 기분에 빠지고야 마니까. 그건 마치 어릴 적 갖고 있던 위로인형 같은 것의 분위기와도 닮았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저 비난 없이 있는 그대로를 전부 고스란히 듣고 있어줄 것 같은 느낌. 아무튼 저 걱정하는 얼굴을 보니 괜히 순수하고 착한 사람한테 별소리를 다 했단 후회도 든다.
"처음부터 언제나 줄곧 생각하고 있던 건데요 뭘. 내가 느끼는 만큼 민아가 내게 대해주길 원하는 건 역시 욕심이에요."
"하지만..."
또 한 잔 술을 쭈욱 들이킨다. 살짝 아찔해지는 통에 말하기가 힘들어졌다.
"민아는.... 그런 아이잖아요. 항상 새로운 즐거움을 쫓아 뛰어 다니고 있어서... 그러니까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이쪽을 진지하게 바라봐 주기를 바라기는 힘들다는 걸 알고 있어요. 주의를 돌아보지 못 하고 항상 덤벙거리는 아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걸로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처음부터 민아에겐 장난 같은 거였는데요 뭘...."
"........."
그래.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민아는 정말 장난처럼 내 말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건 그 아이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즐거움 거리였을 테니까.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떻게 사라져 버릴지 모를 즐거움이겠지만 그래도 민아의 곁에서 그 아이의 즐거움으로 잠시나마 머물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느꼈었다. 그래서 시작해 버렸다.
"그런 아이인줄 알면서도 그 모습을 좋아하게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후회하지도, 아프지도 않아요."
"초아씨......"
지은 씨가 다가와 다정한 손길로 내 눈가를 쓸어내려 준다.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 맺혀 있던 눈물방울들이 그 가녀린 손에 흩어져 내렸다. 그 손자욱들을 따라 열기에 데인 듯 화끈거리는 것만 같다.
"거짓말쟁이네요. 정말."
"미안해요...."
어쩔 수 없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미소 짓던 지은 씨가 내 잔을 가져가 그 위에 술을 따른다.
"어? 지은 씨 못 드시지 않아요?"
"괜찮지 않겠어요? 친구가 울고 있는 날 술 한 잔 정도 같이 마시는 건?"
따라낸 술잔을 말릴 새도 없이 단숨에 비워버린 지은 씨가 온통 인상을 찡그리며 술잔을 내려놓는다. 찡그리느라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연신 애꿎은 입안을 부채질 해대는 지은 씨가 고맙기만 하다. 그나저나 지은 씨의 입에서 작은 스파크와 함께 펑펑하는 폭발음이 들려오더니 급기야 매캐한 연기까지 한 줄기 피어오르는데 잘못 본 건가? 내가 벌써 이렇게 많이 먹었나 하는 생각에 볼을 착착 때리고는 고개까지 도리도리 하고 앞을 보는데 언제 새로 따랐는지 지은 씨 입으로 두 번째 잔이 넘어가려 하고 있다. 어느 틈에? 얼른 손을 뻗어 잔을 잡았더니 살짝 풀린 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피식피식 웃는다.
"이거 정말 특이한 연료네요. 히히. 오일이랑은 달라. 아무튼 근데 전 사실 민아씨도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히끅!"
"네?"
잔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소파위로 늘어져 버린 지은 씨가 흥얼거리듯 손을 이리저리 내저으며 얘기한다.
"이런 말 하면 뭐 하지만 초아씨 얘기를 듣다보면 민아 씨는 왠지 껍데기만 있는 것 같아서요. 어떤 것도 제대로 즐기고 사랑하고 슬퍼하지도 못 한다는 건 너무 외롭고 무서운 일이잖아요."
".....껍데기?"
"아! 죄송해요. 민아 씨가 정말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제가 그만 제 예전 생각이 나서... 그건 너무 슬픈 일이거든요!! 아? 아니! 아무튼 죄송해요.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해버렸어요! 히끅!"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 번 내 힘든 것만 생각하느라 내 욕구만 생각하느라 민아의 입장에서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뭐에라도 한 대 맞은 듯 이리저리 짜 맞춰 들어갔다. 왠지 이제야 민아의 시선으로 느끼니 무언가 놓친 것을 알 것만 같은 기분이다.
"지은 씨 미안해요. 저 지금 가봐야만 할 것 같아요."
"옙! 힘네세요르디히!! 히끅!"
방을 나오기 전 소파 위에 쓰러져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지은 씨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지은 씨. 고마워요 정말.
민아의 자취방을 향해 밤길을 내달리면서 자꾸만 생각했다. 이 바보! 바보! 난 왜 여태껏 줄곧 나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나만 아프고 나만 외롭다고 생각했다. 민아가 그저 야속하다고만 생각했지 한 번도 그 마음을 헤아려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아이라는 말로 보기 좋게 속이면서 다가서려 노력하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 즐거움만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 같은 못난 통통볼 같은 민아. 하지만 잠시의 기쁨 외에는 찾아낸 그 어떤 것에서도 일말의 미련도 느끼지 못 하고 다음 것을 찾아 떠나곤 하는 그 아이의 모습에서 그게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 일인지 알아차렸어야 했다. 어디 한 군데에도 안주하지 못 하고 계속해 떠돌아야 하는 그 삶은 얼마나 공허했을까?
'저기 저 밤하늘에 별 좀 봐. 우리가 저 별을 바라보는 것처럼 저기 저 먼 곳에 서서 우리를 바라본다면 정말 점만 하겠다. 그치?' 민아가 했다던 그 말이 떠오른다. 설현이는 그 말 속에서 지금껏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억압된 생각을 깨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지만 그건 설현이 같은 긍정적이고 바른 아이니까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그 때의 민아는 그런 의미로 설현 이에게 그 말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민아는 문자 그대로 그저 끝도 없는 그 광대한 공간에 삼켜져 절절한 허무함만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언제나 특이한 것.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것들만을 집요할 정도로 쫓고 있는 지금의 민아는 사실은 괴로운 거다. 그런 초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면 흔적조차 남기지 못 할 정도로, 돌아볼 생각도 못 하게끔 그 안은 거대한 심연의 구덩이가 파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자취방 앞까지 숨도 쉬지 않고 달려와서는 현관문을 두드렸다. 애가 탄다. 열어! 빨리 열어줘 민아야!
"언니....?"
빼꼼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민아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투로 내 얼굴을 살핀다. 지금 난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안해... 민아야."
민아의 손을 붙들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돌아와 있던 건지 설현이가 조금은 놀란 눈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애써 받아내며 나는 민아를 침실방 안 쪽으로 밀어 넣고는 미닫이문을 닫아 버렸다.
"무슨 일이에요??"
그다지 감정의 기복도 느껴지지 않는 조그만 얼굴이 내게 묻는다. 예전엔 그저 특이한 아이라고만 생각하며 지나쳤던 이런 반응들도 이제는 하나하나 가시처럼 날아와 콕콕 내 안에 아프게 박혀든다. 울컥 눈물이 밀려 올 것만 같아 민아를 꼬옥 감싸 안았다.
"민아야 네가 나보고 내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 마음을 믿으라고 했었지? 미안해 그동안 내가 그 말을 의심했었어. 항상 원망만 하고 외면하고 상처받기 두려워서 제대로 부딪혀 보려 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이제 알았어. 나는 이제 내 마음을 의심하지 않을게. 너를 좋아하는 이 마음은 진심이야. 그러니까 이 마음이 언젠가 내게 닿을 거라는 걸 믿을게. 믿을 거야!"
"..........."
"진짜야!!"
내가 좋아한다 고백했을 때 입맞춤 만으로도 단숨에 승낙해 버렸던 민아는 사실 그때 내가 도와주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 끝도 없는 어두운 심연의 아래에서 누군가 제발 자신의 방황을 멈춰 달라고, 눈앞의 나에게 자신의 손을 잡아 그곳에서 끌어내주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도 진지하게 전해지지 않는 그 마음에 누군가의 진실 된 마음이 전해져 느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 이다. 어린애처럼 또 울음이 터져 버렸다. 미안해. 정말...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멍하니 서서 품에 안겨 있던 민아가 팔을 들어 올려 나긋이 내 머리를 어루만져 준다.
"에이... 언니 제가 말했었잖아요. 그 마음...."
".........."
"......제대로 전달됐었다니까요."
위로해주듯 민아의 입술이 다가와 마주친다. 씁쓸하고 달콤하다. 그 숨결에 이끌려서야 나도 예전에 민아가 얘기했던 민아와 나의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약하지만 확실히 뛰고 있다. 수줍고 어리숙하지만 확실하게 한 박자씩. 두 근. 두 근. 두 근...
어떠한 것도 묻지 않고 민아는 그렇게 나를 한참이나 받아 주고 있었다. 감싸주러 달려 온 건 난데... 정말 바보 같다. 나는....
***
한참이나 후에 방을 나섰을 때는 이미 설현이는 집에 돌아간다는 말만을 쪽지에 남겨 놓은 채 떠나 있었다.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몫 까지 열심히 해나가야 갰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특별히 그 후의 나날들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언제 나처럼 느적느적 일어나 도서관에서 노트북을 끼고 앉아 있는 민아와 그 옆에 오도카니 앉아서 그런 민아를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은 변함없다. 하지만 그 마음은 분명히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는지 민아가 돌아보고는 갸웃거리다가 빙그레 웃어 보인다. 예쁘다 민아는.
"그럼 이제 슬슬 식사 하시러 가시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설현이가 민아의 옆자리에 딱 달라붙어 있는 우리의 책상 포지션 자체는 변화가 없는 걸까? 아... 물론 민아와 설현이가 같이 자료를 정리하고 의논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아냐! 뭐가 어쩔 수 없는 일인 건데!!
"너 어째서 계속 민아를 찾아오는 거야!! 학생이면 공부를 하라고!"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어차피 이번 방학 기간 동안은 집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확실하게 아버님과 오라버님들에게도 말해두었습니다. 조금 충격 받으신 것 같지만 어쨌든 이번 방학 기간에 민아 선배를 도와드리겠다는 제 결심에는 흔들림이 없어요."
저 올곧은 태도며 말투는 너무 대하기가 힘들다. 어째서 설현이는 저 속삭이듯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저리도 강직한 거야!! 저번 일로 밤중에 떠나버리고 조금 충격이 있지 않을까도 했는데 내 생각보다도 설현이는 회복이 빠른 아이였다. 젊은 게 좋다더니 진짜 이건 너무하다.
"언니 빨리 안 오면 저랑 설현이만 가요~"
"선배, 빨리 가요."
머리를 감싸 쥐고 홀로 침체 중이었더니 어느새 민아는 또 설현이 옆구리에 착 달라붙어서는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다. 내가 진짜 못 살아... 하루하루가 믿음과의 싸움이라니.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이시여 제게 믿음을 주소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저기 조그맣게 웃고 있는 민아의 얼굴이 보인다. 환하게 웃고 있는 민아의 모습. 최근 민아가 주위를 향해 짓는 저 웃음이 어딘가 예전보다 조금은 더 진심 같아져 보이는 건 그저 나의 착각일까?
지금까지 나는 민아의 그 깊은 심연의 어둠을 보고 환한 빛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그것에 멍청하게도 몸도 마음도 홀려서 빨려 들어가 버린 멍청한 나방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심연 속에서 무언가 한 줄기 빛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저 한여름 밤의 꿈 마냥 흩어져 내릴 것 같던 따끔따끔한 열병이 사실 꿈이 아니었다.
"같이 가!!!"
이제 망설임과는 안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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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미 돌이 굴러올 때가 더 아픈 법이다. ....fin
***
'투아에 놀러오세요~', '여자를 울리고 먹는 밥은 배탈난다.' 의 다음 이야기 입니다. 벌써 이 세계관의 일곱 번째 글이네요. 이제는 무지개도 만들 수 있겠어요. 정말.
아무튼 지인분이 설현이 사진을 보고는 참 바르미같이 생겼다라고 하시며 바르미 바르미 하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바르미와 투아로 글을 쓸 터이니 저와 픽을 교환하자고 선뜻 제안을 하시는 바람에 홀랑 넘어가 쓰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맴은 제가 그분께 영업했지만 이 설현이의 바르미라는 캐릭터만은 제가 역으로 영업 당한 쪽이라 말은 안 했지만 그동안 남몰래 흠모하고 있었어서 저도 별 말없이 지금이 기회다! 라며 쓰긴 했어요. 그동안 바르미 설현 이에 대한 망상을 부풀리고 있었거든요.. ;;
아무튼 글을 쓴다는 건 정말 자신과의 싸움이란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픽을 쓸 때의 최우선 전제는 일단 뭐니 뭐니 해도 자급자족의 정신인데 한 마디로 자기 망상을 누가 써줄 사람 없으니 자기 스스로 써서 욕구를 충족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잘 쓰고 싶다던가 하는 향상심도 덜 한 것이 사실이고 자기 취향대로 될 대로 써버리는 경향이 강하네요. 그렇다고는 해도 그 유일한 독자라는 사람이 자기 눈에 어느 정도 봐줄만한 글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만족을 하지 않아서 계속 글을 고치고 고치다보면 진이 다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어차피 누구 보여줄 것도 아닌데 그냥 이 쯤에서 그만 둘까... 하다가도 유일하게 보는 저라는 독자가 자꾸 맘에 들지 않는다고 버럭버럭 하기 때문에 또 낑낑대며 쓰고 또 읽고나면 한숨 쉬고 고치고의 반복이에요. 분명 쓰는 동안 망상하느라 재밌었던 글이었습니다만 완성하기는 무척이나 힘든 글이었네요.
아무튼 '투아에 놀러오세요~' 와는 다르게 이 글에서는 딱히 초아나 민아에 대하여 어떤 캐릭터적인 묘사라던가 하는 부분이 많이 적어진 것 같아요. 게다가 이 글의 주인공이 아닌가 싶을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되고 있는 설현이도 그저 분량이 많았다의 느낌이지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네요. 오히려 집요할 정도로 감정만을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라 다 쓰고 보니 확실히 저번 글을 쓸 때와는 뭔가 다른 느낌으로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번이 실제의 투아에 대한 덕심으로 쓴 거라면 이번엔 거기서 만들어진 '투아에 놀러오세요~' 아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그 뒷이야기를 궁금해 했다는 그런 기분 같은 거요? 작가의 말에서 참 별의 별 소리를 다 적고 있네요. 아마도 글을 완성하다가 정신이 해롱해롱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원래 작가의 말에 요런 푸념글 같은 게 아니고 내용적인 면을 적었었는데 이번엔 정말 힘들었었나?;
내용적인 면을 조금 적어 보자면... 이 글의 세계관 자체가 '마마마'를 모티브로 삼았던 만큼 그 영향인지 이번에는 민아 마저도 빛과 그 속의 어둠이 공존하는 캐릭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그런 캐릭터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번엔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쓰다보니, 한 마디로 캐릭터의 감정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결론이 그런 식으로 나게 되어 버렸네요. 언제나 밝기만 하고 주의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아이. 그래서 방 하나 정리하지 못 하는 무신경한 그 아이의 깊은 내면에는 사실 뭐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초아의 시선으로 파고 들어가다 보니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설현이라는 아이에 대해 조금 더 매력을 발산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도 남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시리즈는 다음편이라는 여지가 남아 있으니 잠시 미뤄두기로 합시다. 파루루의 이야기도 그랬지만 언제나 첫 편에서는 온갖 밝은 기분을 써놓고는 두 번째 편에서 그 안에 숨은 내면들을 쓰게 되는 것 같네요. 인류보완프로젝트 같고 아주 그냥 좋습니다. ;;;;
여담이지만 언제나 기다림에 익숙한 마네킹이었던 쏭마네가 상담사 역할을 해주는 건 좋습니다. 쏭마네 살앙해요~!!
그럼 이만 이 횡설수설을 마무리하며 아무쪼록 4차원 총공 민아와 망설임 쟁이 총수 초아가 행쇼하길 바랍니다. 바르미 설현이도 예쁨 받았으면 좋겠는데 혜정이랑 누가 안 써주시나요? 그리고 이제 투아는 제가 독점해도 되는 건가요? 되↗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