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9일 월요일

[설맹초] 굴러온 돌도 때론 아픈 법이다.

























굴러온 돌도 때론 아픈 법이다.
                                          written by. 녀놘





 대문의 낮게 삐걱 이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을 자극한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마음 한 구석을 할퀴어 놓을 것만 같은 그 소리에 벗어나고 싶은 것처럼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대로 내 방에 들어가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다. 아까부터 가빠 오른 숨결에 입술을 악물고는 서둘러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의 대청마루 쪽으로 들어섰다.


 "이제 오느냐."

 "........"


 낮게 깔린 묵송(墨松) 같은 목소리에 퍼뜩 멈춰 서서는 고개를 들자 모여 있는 오라버니들 사이로 우뚝 서 계신 첫 째 오라버니의 모습이 보였다. 속내를 짐작키 힘든 깊은 눈매가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에 선 셋째 오라버니는 벌써부터 더운 콧김을 씩씩 거리고 있었다. 짧게 잘린 스포츠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나를 가리키더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설현이 너! 어제도 외박하더니 지금이 몇 신줄 알아?!"

 "셋째야. 진정하고 목소리 좀 낮춰라."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한 셋째 오라버니의 모습에 둘째 오라버니가 그 어깨를 잡아 힘겹게 말린다. 유서 깊은 유도 도장가의 자제 답지 않게 둘째 오라버니는 선이 연하고 갸냘펐다. 그래서인지 산 원숭이 같은 셋째 오라버니를 말리는 모습이 위태위태하기만 하다. 단정한 콧대 위에 내려앉은 둘째 오라버니의 안경이 안쓰럽게도 들썩인다.


 "저, 피곤해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서서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나는 그 말만을 짧게 내뱉고 내 방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 올라섰다. 허나 두어 계단을 밟기도 전에 내 손목을 잡아끄는 우악스런 손길에 돌려 세워 지고야 말았다. 내 행동에 당황한 건지 손을 풀어버린 둘째 오라버니를 떨쳐내고는 셋째 오라버니가 나를 붙들고 황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내게 뭐라 말하려는 듯 몇 번이고 열리는 입이 채 소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자꾸만 더듬거린다.


 "설현이 너 지금 오빠들 말을 무시하는 거야?"


 간신히 뱉어낸 셋째 오라버니의 말에는 그저 당혹감만이 어려 있다. '막내야....' 하는 그 어깨 너머로 넋을 읽은 듯 한 둘째 오라버니의 주인을 잃은 목소리도 들려온다. 어찌 보면 반항이라고도 부르기 힘든 이 사소한 행동에도 충격을 받을 정도로 나는 오라버니들에게 그동안 그 토록이나 얌전하고 예의바른 아이였던 걸까....? 나는 정말로 그런 아이가 맞는 거야? 하지만 그 언니에게는.... 갑자기 지끈거리며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에 이를 악물었다. 피곤하다. 이대로 제발 그냥 모든 걸 잊고 쓰러져 잠들 수 있게 누구도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싶다. 가지 못 하게 내 손을 붙들고 있는 셋째 오라버니의 손길이 너무나 거추장스럽다.


 "놓아주세요. 오늘은 정말 쉬고 싶어요."


 셋째 오라버니의 손을 털어내고는 빠져나오려 하는데 짜증스럽게도 그 손이 더 강하게 나를 잡아 옥죈다. 몇 번이고 더 손목을 흔들어도 그 손이 나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제발 절 좀 혼자 내버려 둬요! 정말로 화가 솟구쳐 뭐라도 말해야 갰다 입을 여는데 내 말을 막으며 셋째 오라버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묻는다. 그 묻는 얼굴의 이마에 한줄기 식은땀이 송골송골 내려 앉아 주욱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설현아. 너..... 설마 사귀는 사람 생겼냐?"


 벌어진 턱을 다물지 못 하고 있는 셋째 오라버니의 모습을 보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한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이 순간 멍해졌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시야 속에서 어디선가 가볍게 흩날리는 긴 머릿결과 장난스런 웃음기가 스쳐 지나쳤다는 착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이런 게 보이는 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자 내 어깨를 잡아챈 셋째 오라버니가 나를 흔들며 몰아세우고 있다.


 "진짜 그런 거야? 어? 너 오늘 뭐 했어? 응? 무슨 일 있던 거 아니지?"

 "셋째야!"


 둘째 오라버니가 허둥지둥 달려와 셋째 오라버니를 말려낸다. 어깨를 흔들리고 두 오라버니의 사이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조금 전 환영처럼 나타난 민아 언니의 잔영이 애달플 정도로 머릿속에서 잊혀지질 않는다. 하지만 그 옆에 따라 같이 흩날리는 짧은 색연한 금발이 자꾸만 눈가를 간질이고 있다. 그 금빛에 어째서인지 정말로 무언가의 감정이 갑자기 폭발해 버릴 것 만 같았다.


 "그래요! 저 사귀는 사람 생겼어요!"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참을 수 없이 힘들어서 결국 머릿속의 그 금빛이 사라져 버릴 만큼 마음 저편부터 쥐어짜내 외쳐냈다. 그 외침에 옥신각신하던 두 오라버니가 일순간 멈춰 버린 채로 내 모습을 벙쪄 바라보고 있다. 한 올. 한 올. 하지만 시야를 가리며 떨어지는 얇은 금발들은 여전히 눈가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지워내려 할수록 더 번져나가는 얼룩처럼 얄밉게도 더욱더 나를 옥죄어 온다.


 "설현아, 너 진짜... 누구야 도대체! 내가 당장....!"


 셋째 오라버니의 손길에 힘줄이 불끈 솟으며 나를 끌어와 잡아당긴다. 그 성난 얼굴을 보니 어디선가 그만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고야 말았다. 나 좀 그냥 놔두란 말이에요! 당겨지는 움직임을 교묘히 되받아 그대로 어깨로 들이 받으며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몸을 들어올렸다. 셋째 오라버니의 훤칠한 몸이 그대로 끌려와 마루 위로 패대기쳐 지며 귀청을 찢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아으....."

 "상관하지 마세요. 전 이제 오라버니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린애가 아니에요."

 "설현아!"


 깔끔하게 매치기를 당해 대자로 늘어져 버린 셋째 오라버니와 굳어 버린 둘째 오라버니를 버려둔 채로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첫째 오라버니는 그저 뒤편에 묵묵히 서 지켜보고 계실 뿐이었다. 계단을 올라와 내 방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면서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쫓기듯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그대로 문을 잠그고 침대위로 쓰러져 내렸다. 벌써부터 후회가 밀려온다. 비겁하게도 오라버님들을 상대로 화풀이를 한 자신에게 혐오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조금 전 민아 선배의 자취방에서 있던 일들이 떠올라진다. 민아 선배님을 도울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꽤 늦은 시간이 되어, 선배의 자취방으로 돌아갔을 때는 엄연한 밤중이었다. 어젯밤 선배의 집에서 자고 간다고 오라버니들에게 민아 선배가 연락드리기는 했지만 다음날이 되어 이 늦은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없었으니 오라버니들이 걱정하고 계실 거라 생각이 들었었다. 


 하루만 더 자고 간다고 말해 볼까? 거실의 바닥에 들러붙은 채로 아직까지 저녁도 제대로 챙겨 드시지 않고 뒹굴 거리면서 내가 돌아와 저녁을 챙겨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민아 선배의 모습을 보니 갈등이 되었다. 역시 선배 곁에는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내어 들려던 때였다.


 초인종을 누를 생각도 못하고 애타게 현관문을 두드리던 소리. 문을 연 민아 선배의 가녀린 손목을 붙들고 내 시야를 간질이며 침실의 안 쪽으로 들어가던 금빛의 단발머리...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닫혀버린 미닫이문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자 갑자기 뭔가 마음 한켠에 쿵 하고 무거운 벽 하나가 나와 저 공간 사이에 내려앉았다는 착각이 들어왔다. 아무런 말도 접촉도 없었지만 스치고 지나간 초아 언니의 눈빛만으로도 가슴께가 먹먹해진다.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 수 없어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가가서는 미닫이문에 손을 대려던 나는 흠칫 놀라 손을 거두고야 말았다. 그저 평범한 미닫이 문일 뿐인 것이 어째서 인지 만져서는 안 되는, 다가가서는 것처럼 나를 서늘히 밀어낸다. 차마 내뻗지 못 한 손을 가슴 안에 모으고 바보처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얇지만 단호한 미닫이문의 너머 느껴져 오는 것은 터질듯이 부풀어 오른 무언과의 애정과 열망이다. 그 온기를 느끼며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선배의 곁에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지금 그 옆에 자리 잡고 있는 건 저 금빛의 언니라는 사실을... 선배의 곁을 지켜주는 건 굳이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라는 잔인한 진실이 아찔할 정도로 사무치게 파고들어 온다.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나는 돌아간다는 짧은 메모만을 남긴 채 도망치듯 선배의 집에서 나와 버렸다. 


 "바보같이... 그런 주제에 또 도망쳐 버렸어."


 어두운 방 안에서 그러쥐고 있던 베개를 구기며 더 깊숙이 고개를 파묻었다. 내 자신의 문제로 애꿎은 오라버니들에게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짜증까지 부리고 말았다. 그저 이번에도 피하고 싶어 달아나 숨어 버렸다. 엉망이다. 오늘 하루는.... 


 "설현아. 잠깐 얘기 좀 하면 안 되겠니?"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둘째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문 너머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앉아 놓고도 나는 차마 문을 열어드리지 못 하였다.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고만 있자 한참을 기다리던 정적 끝에 짧은 한숨과 함께 둘째 오라버니의 발걸음이 돌아서는 것이 들렸다. 침대 맡에 앉아서는 흘러내린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갈등하고 있던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결국 내 방의 문을 열었다. 복도 저편에 힘없이 터덜거리며 멀어지시던 둘째 오라버니가 그 삐걱 거리는 소리에 돌아보시고는 내 엉망인 얼굴을 가만히 들여 보시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이셨다.


 "고맙다. 막내야."


 다가와 방에 들어오신 둘째 오라버니는 스탠드의 불을 키고는 한 켠에 놓여 있던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앉았다. 소침하게 가라앉은 내 모습에 그 눈에 걱정과 안쓰러움이 가득하다. 너무 일찍 여위어 기억에 남지 않은 어머니를 대신해 언제나 내게 어머니 역할을 해준 건 눈앞의 이 둘째 오라버니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무뚝뚝한 큰 오라버니와, 언제나 놀리고 장난치기만을 좋아하는 개구쟁이 셋째 오라버니 사이에서 언제나 둘째 오라버니만은 내 편에서 따듯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하루 종일 책을 읽느라 시력이 나빠지게 되어 끼게 된 선이 둥근 안경을 고쳐 쓰며 둘째 오라버니는 내게 할 말을 고르고 계셨다.


 "별 일은 없는 거지. 설현아?"

 "네......"


 어떠한 답변도 되지 못 했을 그 대답에 둘째 오라버니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려주실 따름 이었다.


 "방금은 이해해라. 셋째가 저렇게 날뛴 건 그 아이가 너를 너무 아끼기 때문이야."

 "알아요. 오라버님."


 항상 나를 못 살게 굴었지만 어려서부터 바빴던 다른 두 오라버니를 대신해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준 게 셋째 오라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말끔히 써 놓은 숙제에 먹물을 붓는다던가 열심히 닦아놓은 집안에 모래를 뿌리고 다닌다던가 하는 것이 일상 이었지만 학교나 마을에서 내게 문제가 생기면 어디선가 나타나서는 상대방을 흠씬 두들겨 놓고 보란 듯이 씨익 웃던 것도 셋째 오라버니였다. 언제나 그러고는 첫째 오라버니에게 귀가 잡혀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던 어린 시절의 그 개구진 모습이 떠오른다. 


 "네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쓸데없는 걱정에, 달려가서 상대방에게 무작정 주먹질을 하고도 남을 녀석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셋째한테는 내가 잘 일러둘 터이니 걱정하지는 말거라.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기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가볍게 웃으시며 얘기하시던 둘째 오라버니가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느릿한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신다. 그 손길에 답답했던 마음도 어느새 조금은 쓸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오래전의 추억을 되짚고 계신 듯 초점이 흐려진 둘째 오라버니의 눈이 따듯한 온기로 점점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내가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형제들끼리 많이 걱정했단다.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그러다가 우연히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온 것뿐이다."

 ".............."

 "아무튼 설현이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마냥 언제까지고 우리의 막내일 줄만 알았는데... 지금 오라버니들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조금 혼란스러운 것뿐이야. 그러니 이해하렴. 이런 철없는 모습을 네게 보여 미안하구나."


 애정 섞인 그 따스한 손길에 가슴이 꽉 죄어 오는 것 같았다. 죄송한 건 저예요. 그 짧은 말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쉬이 소리 내어 나오질 않는다. 그저 어떤 감정이 한 움큼 꽉 틀어 박혀 목줄기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서 사과드려야 하는데.... 오늘은 왜이리도 끝까지 막내로써의 알량한 투정과 응석을 부리고 싶은 건지 못내 내 자신이 미워진다.


 "네가 무슨 일을 한다 해도 오라버니들은 모두 우리 막내의 편이야. 그러니 기운을 잃지 마렴.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잠자리에 들어라."


 마지막으로 몇 번인가 내 어깨를 다독거린 둘째 오라버니가 스탠드의 불을 끄고는 조심히 내 방문을 닫고 나가신다. 나뭇결이 쓸리는 그 작은 마찰음을 신호로 온 몸이 기운이 빠져나가 노곤해진 것처럼 나는 침대위로 쓰러져 내렸다. 머리를 뒤흔들 것처럼 침대의 출렁임이 등을 타고 전해져 온다. 아직도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내가 겪고 있는 지금 이 심정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의미를 정의할 수 없기에 더더욱 미칠 것만 같다.


 "민아 선배님...."


 입안에 넣고 불러보면 톡 하고 터져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 맑은 빛의 구슬 같은 이름을 되뇌어 본다. 처음엔 그저 은혜를 갚고 싶다는, 보답해 드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선배의 집에서 고등학교 한 학년의 시간을 보내오는 동안 그것은 나에게 조금은 다른 의미로 변질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반 년 만에 찾아간 선배와의 만남에서 선배의 입으로 사귀게 되었다는 초아 언니를 소개 받고 그렇게 동요할  까닭이 없었다. 이유 없이 감정적이 되고 내 마음을 알 길 없이 방황하게 돼서 평소에 해본 적 없는 행동들만 일삼게 되었다. 그래서 실례도 많이 했다. 왠지 인정할 수 없어서, 민아 언니의 곁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도 어색해서 자꾸만 안달이 났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오늘밤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한 여름의 치기어린 어린아이의 불장난처럼, 허망하고 아름다운 불꽃의 자취만을 기억한 채 어둠 속에 사그라져 버렸다. 이제는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진실에서 도망치지 말고 받아들여 인정해야만 할 때인지도 모른다. 내가 없어도 민아 언니는 이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것을. 내가... 내가 선배에게 그리 특별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불 꺼진 어두운 천장위로 달빛에 비쳐 들어온 밤나무의 그림자가 어지럽다. 오늘밤은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

 눈을 떴을 때 한 여름의 이른 태양이 이미 새벽녘의 창밖을 비추고 있었다. 이대로 침대에 파묻혀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인다. 하지만 오랜 습관은 얄궂게도 나를 가만히 놔두지 못 하고 금세 일으켜 앉히고야 말았다. 이제 뭘 해야 되지? 그럼에도 갈 길을 잃은 허망한 맘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씻는 둥 마는 둥 세수를 마치고는 언제나 처럼 단정히 교복을 차려 입은 모습으로 마당을 나섰다. 딱히 어떠한 목적도 의미도 없다. 그저 방학동안 도와드리기로 했으니까, 선배와의 약속은 약속이니까... 라는 공허한 마음뿐이다.


 "오늘도 나가는 것이냐?"


 이른 새벽인데도 언제부터 나와 계셨던 건지 첫째 오라버니가 요리두건과 앞치마를 하신 모습으로 마루 위에 서 계셨다. 속내를 짐작키 힘든 깊은 눈매에 나는 시선을 떨궈 피하였다. 


 "네..."

 "이제 조금 있으면 아침수련 시간이다."

 "오늘은 빠지도록 할게요. 죄송합니다...."

 "들어와라. 아침 준비 해 놨다."


 뭐라 내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첫째 오라버니는 뒤돌아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입술만 깨물다가 결국 거역하지 못 하고 머뭇거리며 마루 위로 올라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미리 앉아 계시던 둘째 오라버니가 내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어 주신다. 


 "막내 일어났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자 둘째 오라버니의 옆에서 머리 위로 얼음주머니를 올려놓고 낑낑대던 셋째 오라버니가 힐끔 나를 바라보고는 끄응 하는 신음 소리만 말없이 흘리고는 외면한다. 모른 척 조용히 앉아 있었더니 어느새 소복이 쌓인 밥 그릇 하나가 내 앞에 내어 진다. 남매들에게 모두 밥그릇을 놓으신 첫째 오라버니가 자리에 돌아가 앉는다. 


 "자, 먹자."


 첫째 오라버니의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같이 묵묵히 식사를 시작한다. 한 마디 주고받는 말도 없는 조용한 식사이지만 이 시간을 나는 어려서부터 좋아했었다. 소박한 온기가 풍기는 이 검소한 상 앞에 앉아 있으면 표현력 부족한 우리 남매들 사이에도 어쩐지 소곤거리는 말없는 대화가 오고가는 듯 한 분위기다. 그래서인지 집안에 문제가 있을 때는 우리 남매는 언제나 이렇게 상을 대하고 앉고는 했었다. 왠지 이렇게 앉아 있으면 긴장되었던 마음도 풀어져 정말로 애정하는 따듯한 가족이 언제나 내 곁에 있다는 걸 절실히 실감하게 되고는 한다. 왠지 위로 받고 용기를 얻는 기분이다. 어느새 말끔히 비워낸 그릇을 앞에 두고 나는 잠시 길게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내뱉었다. 어젯밤은 차마 못 했었지만 왠지 지금이라면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라버니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내 말에 대번에 셋째 오라버니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작게 들려온다. 그런 셋째 오라버니의 옆구리를 찌르며 둘째 오라버니가 히죽대며 웃으셨다. 


 "아니다. 오라비들이 극성이지. 안 그러냐? 셋째야."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죄송해요."

 "뭐?! 잠깐? 그게 정말이야 설현아?!"


 갑자기 머리위에 이고 있던 얼음주머니를 던져 버리며 셋째 오라버니가 내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흥분해 소리치신다. 그럴 줄 알았다느니, 우리 막내가 남자를 사귈 리가 없다느니 하면서 자꾸만 고래고래 외치는 모습에 지끈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이제부터 저도 정말 용기 내어 진지하게 다가가볼까 생각중이에요. 그 사람한테..."

 "응?"

 "왠지 이렇게 오라버니들을 보고 있으니 내가 기운이 빠져 있어선 안 될 것 같아서요."


 오라버니들을 둘러보며 밝게 웃어주었더니 마치 내 말이 그대로 찬물이 되어 끼얹어진 것처럼 일순 동작이 멈춰버린 셋째 오라버니가 그 굳은 표정 그대로 둘째 오라버니를 돌아다본다.


 "제 지금 뭐라는 거예요? 형."

 "이제부터 사귀겠다는데....?"

 "설현이... 너!!!!!!"


 아니나 다를까 발작을 일으키듯 난리치는 셋째 오라버니와 말리는 둘째 오라버니의 모습에 한숨이 새어 나온다. 고개를 내저으며 일어나 서자 그런 내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시던 첫째 오라버니가 팔짱을 낀 모습 그대로 지그시 눈을 감으신다.


 "다녀올게요. 오라버님."

 "그래. 조심히 다녀오너라. 막내야."


 따스함이라고는 조금도 묻어 나오지 않는 무뚝뚝한 말투이지만 어쩐지 눈물이 핑 돌 것만 같다. 황급히 방을 나서 집을 나오자 환한 여름의 햇살이 눈가를 간질이며 비추었다.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올려다보자 하늘은 눈부시게도 맑은 모습으로 반짝이고 있다. 


 "그럼..... 이제 가볼까."


 민아 선배에게로....


.

.


.



 굴러온 돌도 때론 아픈 법이다.  ...fin



-

 '바르미 돌이 굴러올 때가 더 아픈 법이다.' 의 번외격 글이자 어김없이 진행된 인류 보완 프로젝트 설현 편입니다... - _-; 전편에서 다루지 못 했던 설현이에 대한 배경설정들을 조금 더 자세히 적어보고 싶어 적게 되었습니다. 왜 저리도 설현이는 군대 같은 말투를 쓰는 건지, 예의라던가 규칙에 목숨을 거는지, 집안일에는 왜 저리 또 능숙한 건지 등등 에 대하여 사실 전편에서는 초아의 시점에서 계속 진행되다 보니 서술할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라고 하고 작가의 역량 부족 and 멘탈 붕괴라고 밝힙니다) 


 비교적 짧은 분량에 부담 없이 써서 그런가 정말로 부담 없는 어처구니없는 글이 되었습니다만 설현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걸로 조금이라도 전편의 매력 제로 설현이에서 살짝이라도 매력 포인트가 상승하기를 못 난 덕후가 빌어 봅니다. 최근 정말로 글이 써지지 않아서 도대체가 무슨 문장이 이따위인 건지 자괴감에 빠져있는 녀놘이 외칩니다. 미안하다~!!!!!!!!!! 


 .....라고 작가의 글은 마치려고 했으나 조금 더 할 말이 떠올랐어요. 그러고 보니 이 설현/맹아/초아 의 구도는 애초부터 뭔가 한계점이 있었다라고 피드백을 받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사귀게 된 투아 앞에 설현이가 나타나는 형식인데, 맴아이들은 이렇게 서로서로 빼앗으려고 하는 구도보다는 서로 감정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 한 채 속앓이 하는 알콩달콩한 관계 쪽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에요. 흑흑흑 이건 투아를 먼저 써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싹 다 뒤엎고 패러렐이라도 외치며 다시 써야 되나 고민까지 했었답니다. 여담이지만 그러고 보니 요새는 투아보다는 맹초라고 부를 때가 많네요. 땡초인데 맹한 맛 날 것 같고 좋습니다. 데헷. 적고 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됐을 잡담뿐이었네요. 아무튼 이번 글도 읽어 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설현이 살앙해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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