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의 옥상 위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한가롭다. 끝없이 펼쳐진 높고 푸른 하늘. 수업종이 울린 지 오래인 시간에 나는 홀로 옥상의 난간에 기대어 그 아득할 정도로 공허한 공간을 집요할 정도로 응시하고 있었다.
"짜증나."
심통스럽게 발을 차자 뭔가가 발에 툭 채어 난간 아래로 도르르 굴러간다. 난간의 아래는 지난해 임시방편으로 설치해놓은 나무판 같은 것들이 지붕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설계상의 문제점이었는지 학교 한켠에 볼품사납게 움푹 들어간 좁은 공간이 있는데 작년 초까지만 해도 노는 아이들의 아지트로 종종 활용되곤 하던 그곳을 선도 상의 목적으로 지금은 창고용도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다. 어차피 명목상일 뿐이고 사용되지도 않은 채 버려두었을 따름이지만...
"........."
채 1년도 안 된 시간에 발길이 닿지 않아 벌써부터 낡아빠져 썩어 들어가고 있는 추한 공간. 치부를 감추기 위해 가려놓은 그 고독한 공간이 어쩐지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언가 충동적인 느낌에 그 창고의 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달려 내려오느라 살짝 가파 오른 숨을 뱉어내며 나는 낡은 문 앞에 내려앉은 뿌연 먼지와 거미줄들을 헤치고 문을 열었다. 어두운 공간위로 햇살이 비치자 안쪽에 떠다니고 있는 미세한 금빛 먼지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입가를 가리고는 콜록 이며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자 창고의 용도조차 되지 못 한 버려진 공간의 모습이 어둠속에 은은히 윤곽을 띄우고 있었다.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버려진 나무판자라던가 페인트통 같은 것이 굴러다닐 뿐인 존재불명의 장소이다. 그럼 뭔가 라도 발견 할 줄 알았던 건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 먼지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대수롭지 않게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아... 그래도 뭐, 당분간 혼자 귀찮지 않게 지낼만한 곳은 찾은 거 같으니까...
문득 손끝에 스치는 감각에 내려 보니 메말라 갈라진 땅 위로 시들하게 피어있는 작은 풀잎이 있었다. 생기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이런 곳에 풀이라니... 어쩐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푸석한 잎새를 가만히 매만져 주었다.
"무... 물 좀 주세요."
"........!!"
너무 놀란 나머지 펄쩍 일어나 앉아 버렸다.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지만 여전히 시야 안에 들어오는 것은 어둠뿐이다. 뭐야? 방금 그 목소리는? 여기 누구 있던 거야...?
"물 좀...."
연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혼란스러워 진다. 환청이 아니야. 뭐 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발밑의 풀을 노려보았다. 설마.... 너니?
"저기요... 물..."
누군가 내 어깨를 짚는 손길에 흠칫 놀라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 섰다.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어둠속에서 호리호리한 인영이 서서히 햇빛 쪽으로 걸어 나온다. 푸석푸석한 금빛 머릿결에 퀭한 눈에는 색소가 옅다. 탈진 직전의 그 여자가 다시 한 번 부르튼 입술을 열어 내게 말하고 있었다.
"무.... 무울...."
물을 주세요
written by. 녀놘
- 꿀꺽꿀꺽꿀꺽
참 잘도 마신다. 매점에서 사다 준 생수병을 두 손으로 잡아들고는 무릎을 꿇고 참 차분히도 잘 들이키고 있는 여자. 그 아래 내뒹굴고 있는 다 마신 생수병의 숫자를 속으로 헤아려 보며 혀를 찼다. 뱃속에 제습기라도 하나 설치해둔 건가?
"그래서 이 풀이 당신이라고요?"
메마른 땅 위의 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슬쩍 눈을 돌리고는 끄덕끄덕 고개를 흔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푸석푸석하던 풀잎에 묘하게 생기가 돌고 있는 것이 왠지 소름끼쳐 얼른 손을 거두고는 나는 기가 막힌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초아란다. 이름에 들어가는 草 자가 묘하게 신경을 거슬린다. 자기는 이곳에 언제나 홀로 외로이 자라나 있었는데 언젠가 부턴가 사방이 어두컴컴히 막히더니 지금껏 물도 햇빛도 받지 못 하였단다. 처음엔 바보 취급하는 건가도 싶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거의 절반 이상은 믿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제 뭐 할 건데요?"
"네...?"
확실히 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순수한 얼굴을 마주하고는 의심하는 쪽이 되레 죄책감마저 느껴진다. 막 다섯 병째의 생수병을 말끔히 비워내고 내려놓던 여자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 거린다.
"뭘 하다니요?"
"음... 그게 이제 뭘 하고 지낼 건지.... 뭐 그런 거?"
"전 그냥 여기에 자라나고 있을 거예요."
내 말은 질문이 안 된다는 듯 너무도 태연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며 미소 짓는다. 그 꾸밈없는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라나고 있는다... 살아가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는다라는 소리인가? 참으로 식물다운 사고방식이라고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사람이 사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내 삶도 그리 순탄하지가 않다. 잔 고민 없는 여자의 삶이 왠지 부러웠다.
손끝에 매만져지는 풀잎은 오랫동안 빛을 받지 못 해 누런 기운이 군데군데 가득하다. 내가 발견하지 못 했으면 이대로 쪼그라들어 사라져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말은 안 했지만 사실은 이미 저 땅 속의 뿌리까지도 말라 비틀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습으로도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싶어서 입 안이 쓰다.
아... 몰라. 몰라. 풀과 얘기하고 있다니.. 아무래도 내일은 병원이라도 가봐야 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벌써 두어 시간 정도의 수업을 빼먹은지라 슬슬 가봐야 갰다는 생각에, 이제 가보겠다고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더니 여자가 그 큰 눈을 말똥히 뜨고는 나를 올려다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싶어 기다렸더니 머뭇거리던 연분홍 입술이 입을 연다.
"내일... 또 오실 수 있으신가요?"
"내일이요?"
"네...."
내 말을 기대하며 초롱초롱하니 애원하듯 바라보는 눈망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생수병 많이 챙겨 올 테니까 기다려요."
-
3교시의 시작종이 울리는 소리에 맞춰 조금 급한 마음으로 문을 열어젖히자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지는 햇살의 끝에 그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무언가의 허탈감과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나는 품안 가득 들고 있던 생수병들을 그녀의 발아래 우르르 쏟아 내었다.
"갖고 왔어요. 물."
햇살을 받아 투명한 플라스틱 넘어 무지갯빛으로 어른거리는 빛들이 바닥 위에 넓게 번지며 굴러간다. 그 빛깔들을 눈으로 쫓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고는 눈가를 구부리며 가만히 미소 지어 주었다.
"어서 오세요."
"........"
왠지 적막했던 주변의 어둠이 조금 밝아진 기분이다. 어딘지 마음 한켠이 누그러지는 기분에 바보 같이 집에서 화초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엄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 되어버렸다. 식물에게 위안 받고 있다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왜....
그 곁에 풀썩 주저앉으며 나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누가 식물 아니랄까봐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꿈쩍 않고 하룻밤을 보낸 모습이다. 그런 주제에 불평도 불만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어쩐지 이 여자가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뭘 그렇게 봐요?"
"네?"
"아니 됐어요. 어서 물이나 마셔요."
생수병의 입구를 따서는 건네주니 또 살풋 웃으며 말없이 꿀꺽꿀꺽 잘도 들이킨다. 조금 메말라 있는 연분홍 입술 사이를 적시며 하얗고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물이 넘어가는 장면은 어쩐지 묘하게 자극적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보고 있는 내가 갈증이나 목구멍 안쪽이 답답해지는 기분이다.
"여기다가 물 줘도 돼요?"
뭐라도 딴청을 피워야 될 것 같아 둘러보다가 우리 둘 사이에 자리한 풀잎을 가리키며 물었더니 조금 고민하는 듯싶다가 어깨를 으쓱인다. 상관없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풀이라면서 저렇게 물을 들이켜고 있는데 땅위에 자리한 풀에 물을 주는 것과 이 여자에게 마시게 하는 것 양쪽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 싶다. 뭐 아무튼 이렇게나 메말라 있는 풀인데 물이야 듬뿍 줄수록 좋은 거겠지.
생수병을 기울여 물을 쏟아내자 메마른 땅 위로 물이 톡톡톡 몇 방울 팅기더니 이내 어느 샌가 잔잔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메마른 풀잎은 그렇게나 물을 먹었는데도 조금 촉촉해 졌을 뿐 여전히 시들어 있다. 여자의 머리색을 닮은 그 누런 풀잎에 가만히 손을 뻗어내 매만지자 소름끼칠 정도로 바스락 거리는 감촉이 전해져 왔다. 이러다 정말 어떻게 되는 건 아닌지 급작스레 걱정이 몰려온다. 내일은 엄마 몰래 영양제라도 몇 개 훔쳐와야지 안 되겠네. 그거 꽤 비싼 것들 이니까 이 풀, 괜찮아 지겠지?
몇 번인가 더 풀잎을 매만지다가 좁은 창고의 문 앞으로 쏟아지는 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학교 뒤, 산의 뒷자락을 따라 봄의 기운을 맘껏 내비치며 푸르게 움트고 있는 색상들은 따스한 금빛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이 풀도 저기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한껏 평온한 기분을 들게 하는 봄을 보고도 어쩐지 이 풀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여전히 물을 꿀꺽 거리며 기계적으로 생수병을 들이키고 있다.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금빛의 머릿결. 바로 지척에 봄을 두고도 원망도 좌절도 없이 그저 피어나 서 있는 그 모습이 어쩐지 애닳다. 그것이 어쩐지 꼭 나의 모습과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창고 속에 홀로 고요히 앉아 분노도 슬픔도 없이 그저 좁은 문틈으로 보이는 밝은 세상을 바라보며 메말라 가고 있는 삶.... 역시 짜증나. 정말. 어느새 한껏 표정이 구겨져 있었던 건지 어느 사이에 가만히 다가온 여자의 하얀 손이 내 접힌 미간 사이를 쭈욱 다시 늘여다 놓을 때는 정말 깜짝 놀라서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여자를 돌아보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풀을 보고 인상을 쓰시다니 못 됐어요."
"네?"
"저기 봐요. 봄이잖아요. 이제 막 피어나는 저의 친구들이에요. 웃어주세요. 얼른."
여자의 지척에 맞닿은 단호한 표정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 하고 얼어버려 있자 여자의 한쪽 눈썹 끝이 묘하게 치켜 올라간다. 우.. 웃어 주면 되잖아요! 다급한 마음에 입 주변의 근육을 움직이자 바들거리며 입 꼬리 한쪽이 씰룩이며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그 바보 같은 모습을 웃어준 거라 여긴 건지 여자는 됐다는 듯 표정을 풀며 내 이마위의 손을 거두고는 문 밖의 풍경을 아련히도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봄바람에 움트는 저 식물들은 모두 사랑 받고 싶어 하고 있어요. 이제 막 세상에 기지개 키며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잖아요. 아무리 움직이지 못 하고 말하지 못 하는 식물이라도 생물은 누구나 아껴지고 또한 자신도 베풀기를 원해요. 그러니 앞으로는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저 아이들을 바라보지 말아주세요. 아무리 괴롭더라도 저 아이들과 웃음으로 마주해 주세요. 그럼 저 아이들도 당신에게 꼭 웃음으로 보답할 거예요."
여자의 옅은 잿갈빛 눈동자를 따라 그녀의 시선이 안착한 살랑이는 바람에 작게 흔들리고 있는 봄을 돌아보았다. 내게 웃음을 주길 원한다고? 잠시 그 말을 곱씹어 보았지만 결국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알 게 뭐야. 그딴 거 바라 본 적 없다.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히 단절되어 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 어리석은 환상처럼 놓여진 서로에 대한 웃음은 잠시의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어느 때 훅 하고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한 순간의 꿈. 그것이 어딘지 비뚤어진 생각이란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반항감이 불룩 머리를 드밀고 있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그럼 당신도 나한테 웃음을 줄 수 있어요?"
"네?"
어쩌다 그런 질문을 뻔뻔히도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뿔싸 싶은 감정에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그럼요. 저는 풀이니까요..."
"에....?"
여자의 희고 고운 손이 내 얼굴을 더듬으며 둥그런 얼굴 가득 미소를 품어 낸다. 수치심이나 경멸감도 모르는 그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마주하며 나는 그만 마음 한 구석이 조금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저... 전 그만 일어날게요."
나의 나약함이 싫어 벌떡 일어나 서놓고는 무엇 때문인지 차마 나는 발걸음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망설이며 머뭇거리고 있는 나를 여자는 그저 미소 지으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언제든 찾아 오셔요. 저는 그저 이곳에 뿌리 박혀 자라나고 있는 몇 잎의 풀일 뿐이니까요. 언제든 오시면 제가 당신을 향해 밝게 웃어드릴게요."
나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온유하게 비추는 햇살 아래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여자는 온통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차마 손대기도 힘든 그 새하얗고 부드러운 빛 무리들을 바라보며 나는 잘 가라는 인사를 참 슬프고 아름답게도 얘기한다고 생각했다.
-
벌써 1교시가 끝나고 난 때늦은 시간에 교실 문을 열며 들어섰다. 떠들썩하던 교실은 잠시 조용해 졌지만 이내 소란스러워 진다. 이 시간에 내가 등교하는 모습이 이제는 아이들에게도 익숙한 모양새이다.
터벅터벅. 자리로 가 앉으려고 하는데 질리지도 않는지 오늘도 내 책상 위에는 온통 저주의 말 같은 걸로 범벅인 낙서들이 즐비 하였다. 진짜 언제까지 이러려는 거야. 화를 내기도 귀찮다만 등교 때마다 이걸 걸레를 가져와 벅벅 문질러 닦는 것도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제발 그냥 서로 무시하며 없는 사람들처럼 지낼 수는 없는 걸까?
오늘따라 짜증이 나서 대충 걸레로 닦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홱 던져 넣고는 자리에 앉아 여느 때처럼 고개를 그대로 파묻고는 누워 버렸다. 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이제서야 등교를 했것만 마음은 벌써부터 학업종이 울리기를 바라고 있다. 딱히 잠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기기를 바라며 빈둥거릴 뿐인지라 지루한 마음에 목적성 없는 손이 더듬더듬 텅 비어있는 서랍 속을 헤메인다. 그러다 문득 손가락 끝에 무언가 둥그런 물체의 감촉이 느껴져 나는 그것을 요리조리 매만지며 장난치고 놀았다. 약간 오돌토돌하고 부드러운 플라스틱 병의 정체는 다름 아닌 식물영양제 병이다. 그녀의 풀 옆에 몇 번인가 꽂아 주었던 그것 중에 미처 버리지 않고 내팽개쳐준 빈 병 하나가 서랍 속에 굴러다니고 있었나 보다.
여자와의 만남은 처음과 두 번째 만남 이후로도 계속해 이어지고 있었다. 2교시나 3교시 사이 즈음. 아니면 점심시간 이후라던가 때늦은 방과 후. 어느 때 고든 나는 불쑥불쑥 그녀의 곁에 찾아가서 내가 앉아 있고 싶은 시간만큼 내 멋대로 단 몇 분이든 몇 시간이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오곤 하였다. 그것에는 딱히 어떠한 목적이나 의미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항상 그녀의 곁에 찾아가고야 말았다. 품 안 가득 생수병을 감싸 안고 주머니에 매 번 엄마의 화초 사이에서 훔쳐 온 영양제병을 들고서 바보같이 얼빠진 짓을 반복하고 있다.
"이제 좀 건강해 졌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성심껏 물이며 영양제며 듬뿍 담뿍 주고 있는데도 여자의 상태는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다. 오히려 더 갈수록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나는 강박증처럼 더 많은 양의 물과 영양제를 가져다가 맹목적으로 그녀에게 쏟아 부은 다. 왠지 이제 와서는 여자의 상태를 나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나 때문은 아닐까 두려운 의구심마저 든다.
약간 얼이 빠져 있었기 때문인지 입술을 깨물며 방황하던 눈동자가 순간 우연히도 조금 떨어진 앞자리에 앉아 있던 혜정이의 눈과 마주쳐 버렸다. 아이들에 둘러 쌓여 웃고 있던 혜정이는 내 시선에 순간 움찔하며 몸을 굳힌다. 평소대로라면 절대로 이렇게 눈을 마주칠 리가 없었을 텐데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건 분명하다. 아무튼 서로가 너무도 놀랐던 돌발 상황이었기에 우리 둘은 누가 먼저 눈을 피하거나 하지도 못 한 채 한참을 서로 얼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 더 먼저 침착을 되찾았다고 생각된 나도 왠지 지는 것 같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시해 버렸다. 그런 괜한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니었는데.... 잠시 후 숨을 한 번 들이 쉰 혜정이가 보란 듯이 일어나서 내게 다가왔다. 나보다도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저렇게 무표정하면 제법 무게감이 있는 얼굴인데도 어쩐지 내 눈에는 그 모든 것들이 어린내가 난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다가와 팔짱을 끼고는, 책상에 엎드려 누워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혜정이가 빈정대는 목소리로 얘기한다. 아... 귀찮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제발 없던 걸로 하고 무시하고 지나쳐 주면 안 될까? 하지만 어느새 내 앞에 다가선 혜정이의 모습을 보고 주변의 반 아이들이 모여들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웅성이며 지켜보고 있다. 그 시선들에 한층 고무된 혜정이는 어쩐지 더 득의양양해져 있어서, 역시나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버리면 쉽게 끝나버리지는 않겠다고 한탄했다.
"너 본 거 아니야. 다른데 보고 있었어."
"이게 누구 눈깔이 삔 줄 알아?"
짐짓 더 사납게 얘기하는 혜정이의 목소리는 작은 흥분 같은 걸로 고조되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참 단순하고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는 아이이다. 차라리 이럴 때는 그냥 감정을 숨기고 서늘하게 말해주었다면 조금은 더 나도 진지해졌을 텐데. 어쩐지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아 진다고 느꼈다. 어린애 장난 같은 이런 짓들은 이제 그만 좀 하고 싶다. 언제부터 혜정이와 내 사이가 이렇게 된 것이었을까? 언제부터 반 아이들은 나를 향한 이 집단적 따돌림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혜정이는 한 때는 둘도 없이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무슨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너무 소소한 일이라 이제는 그것마저 내 기억 속에선 지워져 있었다. 뭐 그러니 결국 신경 쓰기 귀찮을 따름이다.
"야! 너 어디가!"
그대로 반 아이들의 유흥거리로 주목받고 있는 것도 한심해서 씩씩거리고 있던 혜정이를 남겨두고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버리려고 했더니 혜정이가 다급히 붙든다. 당황하고 화가 난 표정을 얼굴 가득 숨기지 않고 드러내 놓고 있는 저 모습이 참 정겹고도 유치하다. 나는 내 어깨를 붙들고 있던 혜정이의 손을 가만히 내려 보다가 슬쩍 그 손을 치우려 붙잡았다. 그랬더니 혜정이의 다른 팔 하나가 또 내 손목을 강하게 낚아챈다. 그 콱 쥐어진 손으로 느껴지는 압박감에 절로 미간이 찡그려 진다. 손이 붙들린 채로 불쾌한 얼굴로 올려다보니 혜정이가 그런 나를 비웃으며 내려다본다.
"너 또 그 학교 뒤편에 창고 가려는 거지? 요새 애들이 말해주더라?"
"놔!"
"거기 뭐라도 숨겨놨냐? 너 알지? 거기 원래 학생들 출입 못 하는 데라....."
충동적으로 발길질이 나갔다. 악!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내 발에 걷어차여 힘이 빠진 채 다리를 붙들고 혜정이가 물러서자 나는 주저 없이 손길이 닿는 데로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어 혜정이를 내리쳐 버렸다. 일말의 양심도 없는, 상대의 상태라던가 추후에 닥칠 일 같은 것 따위 고려하지 않은 아주 깔끔한 폭행이었다. 세상에는 충동조절장애라는 것이 있다하던데 그것은 아마도 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이럴 때마다 문득 생각하게 된다. 어찌되었든 눈앞의 세상은 언제나 무채색의 의미 없는 것들뿐이어서 거기에는 어떠한 감정도 생기지가 않는다. 기쁨도... 두려움도... 기대도, 희망도 절망조차 없다. 그래서 나는 내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무기질처럼 눈앞의 혜정이를 내리칠 수 있었다.
다급히 달려온 선생님들의 손에 말려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려보니 엎드려 울고 있는 혜정이의 머리께 에서 어딘가 찢어졌는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둘러 쌓여 있던 아이들의 비난 섞인 공포심의 시선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나는 선생님들의 손에 끌려가 상담실 안에 내동댕이칠 쳐지고 말았다. 이윽고 지루할 정도로 긴 질책을 견뎌내고 집에서 엄마까지 불려오고 나서야 나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한동안은 정학을 당한 채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며칠을 보내었다. 닷 새 정도 후에야 지나치듯 엄마가 전학가게 될 거라고 하시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딸이 자기 반 아이를 죽을 정도로 팼다는 데 이런 일에서조차 엄마의 말은 건조하고 무미할 뿐이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바란 데로 되어 버렸다. 침대 위로 몸을 던져 뉘이며 개운하다는 듯이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왜 그런지 마음껏 웃을 수가 없다. 그 학교 뒤 창고 안에서의 여자가 못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 내가 없으니 물도 햇빛도 받지 못 했을 텐데.... 하루가 다르게 서서히 생기 없이 말라가던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점점 푸석해져 가던 금빛의 머릿결... 메말라가던 입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빛 햇살 아래에서 언제나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던 여자는 행복해 보였었다. 정말로 바보 같아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드는 여자라고 원망했다.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나는 옷을 주워 입고 집 밖을 나와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은 비가 오려는지 우중충한 먹구름이 진득하게 끼어 있다. 엄마가 전학을 가게 되었다고 했으니 그건 먼 미래이거나 아니면 당장 내일이거나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 전에 한 번은 꼭 그녀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특별히 만나서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껏 지내왔던 그 학교라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존재여서 일거라고 대충 생각하기를 회피해 버렸다.
교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스럽게도 수업시간인지 지나다니는 아이들이 없었다. 자박자박 입고 있던 후드를 푹 눌러 쓰고는 2학년 교실의 뒤편으로 돌아가 창고 앞에 마주서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창고의 낡은 문은 굵은 쇠사슬과 자물쇠로 칭칭 감겨 묶여 있었다. 어차피 지금껏 방치하였으면서 이제와 딱히 까닭도 없이 이럴 필요까지 있었나 싶다. 신혜정 요 계집애가 제 어머니에게 나에 대한 화풀이로 일러 학교 측에서 조치하도록 저지른 일이었겠지만....
검게 썩어가는 까칠한 나무면의 벽들을 두들기며 여자를 불러 보았다. 쾅쾅. 몇 번이고 두드리며 불러 봐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정말 안에서 어떻게 되어 버린 건 아닌지 스멀스멀 불안이 밀려 올라온다. 대답 좀 해보라고. 이 여자야. 소름끼치는 정적은 어쩐지 지금껏 여자와 지냈던 지난날들이 모두 내 머릿속의 환상이었을 뿐인 것만 같아 두렵다. 어느 샌가 나는 나의 머릿속마저도 신뢰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져 시들어 버린 여자가 저 안의 어둠 속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언뜻 머릿속을 스친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그리도 필사적이었는지 부리나케 학교의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선생님들 구역 옆의 작은 작업용구의 창고 안에서 보기에도 들기에 가빠 보이는 묵직한 해머하나를 질질 끌며 가지고 섰다.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가려다가 잠시 멈춰 서서는 무슨 바람이었는지 나는 발길을 돌려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옥상을 향해 달려 나가는 길에 수업을 끝마치고 나온 아이들이 하나 둘씩 내 모습을 보고 수군대며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겨우 2층 높이의 계단을 올라간 주제에 벌써부터 숨이 가쁘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발칵 열어젖히고는 나오자 아까부터 조금씩 더 어두워지던 하늘에 끝내 촉촉하게 봄비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야! 권민아! 너 뭐 하는 거야!"
비틀비틀 창고가 내려다보이는 옥상 끝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데 불현듯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아프다고 핑계대고 병원에 처박혀 있을 거라 생각했던 혜정이가 학교에 나오고 있었던 건지 나를 노려보며 서 있다. 그다지 많이 다치지는 않았던 건지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저 아이가 튼튼한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힘이 없었던 건지 살짝 의아해 졌다.
남 이사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무시하고는 가려는데 어느새 몰려든 구경하는 아이들 사이로 선생님들이 올라와서 내게 다가온다. 그거 가지고 지금 뭐 하려는 거냐며 자꾸만 내 손에 든 해머를 가리키는데 정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내 주위는 이리도 귀찮은 것투성인지 모르겠다. 그냥 모르는 척 무시해주면 안 되는 것인지. 어차피 나에게 별 관심도 없는 인간들이....
계속해 뒷걸음쳐 멀어지고 있는 나에게로 어떤 남자 선생님 하나가 달려오는 통에 살짝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피하고는 나는 그대로 옥상의 난간을 뛰어 넘어 창고의 지붕위로 올라섰다. 당황한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다짜고짜 창고의 지붕 위를 해머로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간이로 만든 낡아빠진 창고의 목재 지붕이 그 충격에 조금씩 갈라지며 부수어진다. 이걸로 조금이다. 이 학교의 치부덩어리 같이 버려진 창고의 지붕을 없애 버리기만 한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없더라도 여자는 다시 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 이다. 이것만 없으면. 여자가 바라보던 저 너머의 봄과 여자를 가로막던 이 낡고 허름한 벽만 없게 된다면....
"야 이 병신아! 빨리 이리 안 와?!"
갑자기 빗소리에 섞여 적막처럼 고요하던 세상에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진다. 눈가 위로 차박차박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다가온 혜정이가 난간가를 붙잡고 나를 보고 악을 쓰고 있었다.
"너 어쩌려고 그래! 지붕 깨고 떨어져 죽기라도 하려고 그러냐?! 거기서 떨어져도 안 죽어! 빨리 와. 이 바보야!"
뭐 때문에 저렇게 나를 보며 악을 써대고 있는 걸까?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는 그저 혜정이의 그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쩐지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 것만 같다. 멍청이 신혜정과 바보 권민아. 나는 그 향수 깊은 얼굴을 지켜보다 다시 발밑의 지붕을 내려다보았다. 몇 번의 충격으로 인해 이리저리 금이 간 채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 버린 지붕. 그 밑으로 난 컴컴한 어둠이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있는 것을 바라보다가 퍼뜩 여자의 존재가 다시금 떠올랐다.
"야! 멈춰!!"
혜정이의 경고를 무시한 채 있는 힘껏 해머를 휘두르자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무 지붕이 푹 꺼지며 주변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순간 발밑이 붕 뜨며 중력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왔다. 예상보다도 지붕이 더 크게 무너져 내린 것 같다. 몸이 어둠속으로 빨려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어차피 뭐 어찌되든 상관없다.
"이게 진짜......"
시간이 멈춘 듯 무언가에 저지당해 멈춰버린 나는 가만히 눈을 떠 보았다. 붙잡힌 손목의 시선을 따라가자 자꾸만 시야를 가리며 쏟아지는 봄비 너머로 혜정이의 울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린 채로 나는 그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바보같이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야! 빨리 붙잡고 올라오지 않고 뭐해!"
나를 끌어올리려는 혜정이의 손길은 자꾸만 빗물에 흘러내려 미끄러진다. 몇 번이고 시도하지만 스쳐 내려가는 손. 그것들을 마치 텔레비전 속의 재미있는 흑백 콩트마냥 나는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 둘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하고 부서진 나무판들이 자꾸만 끼긱 거리며 몸서리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혜정아 그냥 놔."
"뭐?"
"떨어져도 안 죽는다니까."
"너 미쳤어?!"
웃으며 아래를 손으로 가리켰더니 불같이 화를 낸다. 뭐, 딱히 화낼 만 한 일도 아닌데... 나는 아래로 보이는 창고의 어둠과 혜정이의 손끝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혜정이의 손길을 풀어 버렸다. 버틸 곳이 없어진 몸은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추락해 버렸다. 귓가로 내 이름을 찢어져라 부르는 혜정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톡. 톡. 톡.
차가운 봄비가 눈가를 두드리고 있다. 그 시원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포근하고 개운한 기분에 들썩이자 누군가 따스한 손길 하나가 내 헝클어져 있던 머릿결을 가만히 쓸어 넘겨준다.
"응...?"
눈을 떠보자 눈앞에는 나를 감싸 안아 주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봄비에 촉촉이 젖어 누그러든 금빛의 형상으로 그녀는 나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오셨군요. 다시."
"어..... 네."
"이, 비.... 고마워요."
여자는 한 손을 받치듯 들어 올려 떨어져 내리는 봄비를 느끼며 올려다보았다. 일 년여 만에 다시 느껴보는 걸 테인 자연의 비가 풀잎인 그녀의 몸 곳곳으로 푸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메마름이 거짓이었다는 듯 그녀의 몸은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생수병과 영양제를 날라다 주어도 시들어만 가던 여자가 이렇게 한 순간에 살아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서운함마저 느껴진다.
"이제 조금은 더 웃을 수 있게 되셨나요?"
"네?"
여자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을 수 있게 되다니... 무엇이? 어리둥절해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눈이 휘도록 밝게 웃은 여자가 내 얼굴을 끌어가 이마를 대고는 속삭인다.
"풀을 보면 언제나 밝게 웃어 주세요...."
그리고는 갑자기 쾅! 하는 소음과 함께 창고의 문이 열리는 통에 나는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돌아보았다. 문 앞에는 몇 몇 선생님들과 함께 온통 비에 젖어 숨을 헐떡이고 있는 혜정이가 있었다. 내 모습을 보고는 화를 내는 게 분명한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나를 끌어안고는 울어 버리는 통에 나는 그 품에 감싸여 얼이 빠져 버렸다. 어... 잠깐만 혜정아. 옆에 있던 여자를 돌아보려 눈동자를 굴리자 창고의 안쪽으로는 그저 어둠뿐이었다. 그저 방금까지 여자의 온기가 닿았던 손끝만이 저릿하다.
"야 이 바보야!! 그러다 진짜 크게 다쳤으면 어쩌려고 그래! 왜 이렇게 생각이 없어!! 나는 정말 어디 잘못 되는 줄 알고...."
알아듣기도 힘들만큼 울먹이고 소리 지르는 혜정이에, 가만히 그 손끝을 들어 머리께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존심 강하고 쉽게 휩쓸리기도 하는 아이이지만 속은 또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따듯한 아이. 오랜만에 느껴보는 동갑내기 친구의 그 따스한 체온을 다정히 끌어안아 보았다. 그제서야.... 이제는 나에게도 봄의 풍경의 무채색의 세상을 뚫고 푸르게 번져 나간다. 금빛으로 촉촉이 번져드는 푸르름...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 혜정이를 끌어안아 달래고 있는 동안 초아의 풀잎은 부드럽게 살랑이며 내 옆에 피어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녀가 내게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은 아니었을까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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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어찌된 일인지 내 전학은 취소되어 버렸다. 아마도 혜정이가 부모님에게 다시 학교 측에 압박하여 우리 엄마와도 합의를 한 것이었겠지만... 아무튼 참 치맛바람 강한 부모의 아이이다. 그 제멋대로에 어린애 같은 면이 귀여운 것이지만.
학교생활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집단으로 따돌림 당하던 나날이 언제 있었냐는 듯 다시 평온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때때로 예전 생각을 하면 아이들의 행동이 참 가식적이 라는 생각도 들지만 뭐 딱히 신경 쓰지 않기로 하였다. 어쨌든 무엇보다도 나는 이제 웃기로 약속했었으니까....
그 여자가 있던 창고는 학교 측에서도 없애버리기로 결정했다. 본래부터 용도도 없었던 데다가 안정상의 이유도 있다고 하여 철거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 졌다.
그리고.... 초아는, 그 풀은 내가 집으로 옮겨와 심었다. 작고 앙증맞은 화분에 담겨 피어나 있는 풀잎은 오늘도 금빛으로 살랑이며 푸르게 피어나 있다. 그 창고에서의 마지막 이후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언제나 매일 아침 이렇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언제나 그녀가 내게 밝게 웃어 주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좋아! 오늘도 그럼 밝게 웃으며 시작하도록 하자!
"엄마. 학교 다녀올게요!!"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밝게 웃어주고는 나는 집을 나섰다. 이제 날은 점점 여름이 다가오는 듯 쌀쌀하던 바람도 한껏 온유해져 내리쬐는 햇볕도 조금씩 따가워 지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교복도 갈아입을 때가 되고 있....
"민아 언니!!!"
응? 갑자기 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한적한 아침의 길가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다. 양 옆으로 화단 너머 늘어선 나무와 풀잎 사이를 둘러보다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민아 언니! 여기에요! 여기!!"
에에...? 뭔가에 기시감에 사로잡혀 나는 옆쪽에 있던 나무 한켠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웬 길고 풍성한 흑발을 단정하게 기른 여자애 하나가 나무 뒤에 몸을 반쯤 가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언니가 초아 언니를 살려주셨다는 그 민아 언니 맞죠?"
어...? 이게 뭐야?? 당혹해 내가 눈만 동그랗게 뜨고는 빤히 바라보고 있자 여자애가 발까지 동동 구르며 말한다.
"전 겨울철에 내려 쌓여 있던 잔설(殘雪) 이에요. 이름은 설현(雪炫) 이고요... 근데 이제 조금 있으면 저 다 녹아서 사라져 버릴 것 만 같아요.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민아 언니!"
생긴 건 혜정이 만큼이나 커다란 애가 막 있는 애교, 없는 애교를 다 떨어가며 매달리는데 순간 눈앞이 깜깜해져 온다.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나한테 다들 왜 이러는 건데에!!!!!!!!! 순간 핏기가 확 몰린 머리가 핑 하니 어지럽다. 머리를 부여잡고는 있다가 결국 어찌할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메말라 가던 풀에 이어 이번엔 녹아드는 잔설이라니....
"차가운 곳에 놓아두면 되는 거야...?"
"정말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민아 언니는.... 어?"
다가와 내 손을 붙잡고는 팔짝팔짝 뛸 듯이 기뻐하던 설현이가 갑자기 멈춰 서서는 내 뒤편을 바라다본다. 그 시선에 따라 돌아서자 저 멀리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눈앞에 낯설고도 낯익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녀의 입가가 금빛으로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안녕하세요?"
바람결에 가벼이 날리는 머릿결을 쓸어 넘기며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내 눈에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물기 하나가 또르륵 굴러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참 바보같이도 웃고 말았다.
도대체 나의 앞날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그저 보이는 것은 어둠뿐인 그 길을 걸어가며 느껴지는 것은 온갖 두려움과 허무감뿐이었지만,
이제는 무언가 다른 하나가 내 곁에 함께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웃을 수 있다.
.
.
.
물을 주세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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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지인분이 이제 그 기존에 쓰던 세계관 말고 다른 것 좀 써보라고 하시는 말에 써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초아가 정말 풀처럼 귀엽게 자라나 있는 것을 쓰려고 했던 것일 뿐이었지만 어쩐지 쓰다 보니 최근의 심경이 뒤섞여 우중충한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맹아는 충동조절장애를 겪고 있는 질풍노도의 위험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네요- 허헐... 아무튼 이런 유치뽕짝인 성장물을 좋아하는 저로써는 참으로 힘 안 들이고 완전히 편한 마음으로 되는 데로 마구 써내러 갔습니다. 글에 힘이 빠지니 쓰는 사람은 편해서 좋네요. 홓홓홓-
아무튼 쓰다 보니 참으로 어떤 모 존잘님께 엄청 영향 받았구나 생각해 버렸습니다. 글을 쓸 때는 항상 최근에 읽었던 글들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곤 하는 제 특성상 어쩔 수 없었나 싶기도 하지만은.... 어쨌든 이걸로 10월에도 한 편을 써내러 가기는 완수했네요. 한 달에 한 편! 장하다. 정말... ㅠㅠㅠ 맴 빨리 컴백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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