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3일 일요일

[맹설] 신령님 프로젝트 #1






















 - 설현아! 설현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애타게 들려온다. 그것은 어딘지 기억 저편에서부터 그리워지는 목소리여서 나는 얼핏 그것이 어머니의 목소리는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끊임없이 침전 중이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없는 끝없는 무의 공간에서 나는 그저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며 고민하고 있었다.


 삶이란 무엇인가...?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 이전에 살아있다는 것의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나는 고뇌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있어 살아있다는 것은 육체적인 생존에서 비롯한 것인가, 아니면 영혼의 자아 인식에서 비롯된 것인가?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 일까?


 - 너는 인간이 아니잖아!!!!!!!!!!!!!


 갑자기 내 어깨를 부여잡고 소리 지르는 새까맣고 날카로운 환영에 나는 깨어났다.


 '위이이이이잉'


 머리맡에서 울리는 휴대폰의 알람 울림소리에 더듬거리며 알람을 해제하고는 피곤한 얼굴을 두 손 가득 쓸어 담는다. 손 안 가득 창백한 식은땀이 매만져 진다. 또 이런 꿈인가...? 부스스한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자 쳐놓은 커튼 사이로 새벽녘의 서늘한 푸른빛이 비추고 있었다. 


 낮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서서는 밤사이에 뒤척여 놓은 잠자리를 정리하였다. 전날 밤의 철야와 악몽으로 조금이라도 더 누워있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여태까지의 습관과 태도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무거운 몸을 매만지며 욕실에 들어가 찬물을 끼얹자 그제야 얼얼한 얼굴에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었다. 


 짧은 준비 후에 부엌에 들어서서는 착실히 본격적인 아침 준비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찌개가 알맞게 보글거리며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이 집의 주인이자 유일한 동거인의 방을 찾아 위층에 올라섰다. 부러 조금 거슬릴 정도로 강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스한 햇살이 비춰들기 시작한 방안에서 침대위에 누워 이불을 머리맡까지 끌어올린 채로 돌돌 말려있는 작은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체구 탓인지 더 길고 풍성해 보이는 갈빛 머리에 짙은 눈썹 아래로 자리 잡은 커다란 두 눈은 지금 있는 데로 찡그리며 인상을 쓰고 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의 초반을 갓 넘겨 보이는 외모의 권민아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여자로부터 무섭게 집어던져진 베개를 가볍게 고개를 숙여 피해내고는 나는 사뭇 정중한 태도로 얘기하였다.


 "신령.... 아니 사장님. 아침 준비 다 되었습니다."






 신령님 프로젝트 #1
                             written by. 녀놘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이 구전을 전달할 수 있을 때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인, 인간에게 미개한 사고체계가 확립되었던 그 당시부터 이 땅의 각 지역들에는 신령님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바라는 염원이 모여 그 바람들이 점점 양기를 끌어 모아서는 만들어낸 신령님이라는 존재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음기로부터 자라난 온갖 악귀와 재앙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것이 곧 신령님들의 사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곁에는 항상 신령님들을 보호하며 그 신력을 대리 받아 사용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또는 그 외의 존재로서의 과거의 기억을 잃고 신령님에게 선택되어 신령님의 곁을 지키게 되는 일명 수호령이라고 불리우는 존재들. 그런 몽환적이고 예스러운 시대가 있었으나 하지만 그것도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로 지금 21세기의 한 복판에서 신령님이란 존재는 그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잊혀진 할 일을 잃은 백수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 태반이라고 생각 되었다. 아니 적어도 내 눈 앞의 저 여자는 그런 존재가 분명하다.


 "아니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그러는데도 그러네."

 "이게 미안하다고 될 일이야? 이 되다만 신령 같으니!!"


 찬미씨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말투에 그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배시시 웃고 있는 여성. 차림새로만 보자면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헐렁한 복장에 간편한 샌들하나를 질질 끌고 있는 영락없는 백수이지만 그래 봬도 명색이 이 지역의 신령님이신 민아신이다. 


 "너 때문에 다 잡은 악귀를 놓쳐버렸잖아! 어째서 이 지역의 경계에다가 술법을 펼쳐 놓은 거야!"

 "그게, 여기가 워낙 인간들이 커플로 많이 지나가는 장소라서 좀 골려주려고 하다가.... 그리고 너도 나를 신령님이 아니라 사장님으로 불러주라. 왠지 생산적이고 유능해 보이잖아."


 조금 멀찍이 떨어진 나무에 기대어 찬미씨와 민아신의 대화를 엿듣던 나는 저도 모르게 가볍게 아려오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냥 백수인 것도 모자라 아무리 심심하다고 해도 그렇지 좋은 일에 사용하라고 주어진 신력을 저런 식으로나 사용하고 다니다니... 역시 최악이다. 민아신. 게다가 사장님 소리는 또 뭐야.... 어째서인지 저 호칭의 고집은 꺾이지가 않아서 지금도 나는 민아신을 아침마다 꼬박꼬박 사장님이라고 강제로 부르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의 시간에는 의식적으로 호칭을 삼가고 있지만.... 아무튼 생산적이고 유능해 보이다니, 그럼 제발 행동으로 좀! 어휴... 어쨌든 이번 건은 아주 질이 나쁘게 되어 버렸다.


 사람의 발길이 조금 뜸한 오전경의 공원의 한 구석. 잘 닦인 산책로와 함께 한껏 녹음이 무성한 나무들로 꾸며진 이곳은, 인간들에게는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은 신령들이 다스리는 각 지역의 맞닿은 경계선이 가로지르는 장소이다. 이 지역의 경계선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서, 일종의 주술적인 형태로 보호되고 있었다. 예컨대 각 지역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신령의 권한이 절대적인 곳으로 아무리 직분이 높은 신령이라도 다른 신령이 다스리는 지역에서는 함부로 신력을 사용한다던가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에 따른 책임도 물론 있기 때문에 각 지역의 악귀 퇴치는 역시 그 지역의 신령이 전적으로 처리하고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하여 이 경계라는 것은 일종의 행정구역의 경계로써 자기 지역의 악귀가 함부로 다른 신령의 지역으로 넘어가지 못 하도록 하는 주술적인 경계 벽을 형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경계의 주술 벽에 못된 장난질을 치다가 주술의 힘이 흐트러져서 찬미씨가 쫓던 악귀가 이쪽 지역으로 넘어와 버렸다는 얘기다. 


 "알았어. 알았어. 이 경계의 주술은 내가 다시 세우면 되잖아. 뭐가 문제라고 그러는 거야."

 "내가 쫓던 악귀가 그 쪽 지역으로 넘어갔단 말이다!!"

 "그것도 내가 잡아 줄 테니 걱정 하지 마."

 "그게 문제라는 거야! 이 얼간이 신령아! 그 악귀는 내가 잡아야 한다고!!"


 어느새 화가 폭발할 듯 치밀어 올라와 있던 것인지 찬미씨의 검은색 일관의 외형에 파르르 털들이 치켜 올라서 있었다. 평소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래가 늑대에 가까운 수인족인 찬미씨는 돋아난 송곳니를 으르렁 거리며 민아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날카롭게 솟아난 손톱 사이로 번뜩이는 두툼한 군용나이프가 잡혀져 있는 것을 본 나는 만일에 대비하여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어쨌든 나의 임무는 민아신을 지키는 것.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 될 것 같으면 아무리 찬미씨라도 막아서야만 한다. 그것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신령님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만 됐어요.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하던 찬미씨의 검은 흑발 위로 희고 고운 손 하나가 자상히 내려앉았다. 그 손을 따라 이어진 시선에 조금 어두운 빛깔에 금빛의 머릿결이 웨이브 지며 풍성히 내려앉은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 하나가 있었다. 반쯤 감긴 듯 한 큰 눈 아래로 자애로운 미소가 걸려있다. 찬미씨를 수호령으로 둔 신령님. 유나신이 찬미씨를 달래며 나섰다.


 "그럼 뒷일은 부탁드릴게요. 민아신."

 "신령님? 하지만....!"


 유나신이 민아신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자 놀란 찬미씨가 유나신을 향해 돌아서서는 뭐라 항변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채 몇 마디를 잇지 못 하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유나신의 손길에 찬미씨는 이내 입술을 한껏 내밀고 풀이 죽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뭐... 그건 걱정 안 해도 알아서 할 거예요. 유나신."


 그저 상냥히 웃고 있을 뿐인 유나신 앞에서 민아신은 귀찮다는 듯이 손만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그런 모습에 유나신의 뒤로 물러난 찬미씨가 또 다시 낮게 으르렁 거린다. 민아신은 그래봤자 네가 어쩔 거냐는 식으로 여전히 놀려대는 투지만....


 골이 아프다. 인접한 두 지역의 신령님. 민아신은 거의 반 백수의 언제나 불성실하고 말썽만 일으키고 다니는 사고뭉치 신령님이지만 반면에 유나신은 올바른 신령님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자상한 분이시다. 과거 동물과 식물들의 신이셨던 유나신은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된 현대에 와서도 동물과 식물뿐만이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언제나 헌신하고 계셨다. 비록 보살펴야 하는 대상이 동식물에서 인간으로 바뀌었지만 그 보살핌의 애정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오백 살도 더 된 민아신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유나신이 그토록 긴 시간을 베풀며 한결같이 보내오신 것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가까운 두 지역의 신령님들이 서로 다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직분도 민아신이 더 높다. 높은 곳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 일까? 저런 얄미운 민아신 벌 줄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직위 상승이라니....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잠시 뒤를 돌아보며 나를 매섭게 째려보던 민아신은 유나신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공원의 바닥 위로 슥슥 대충 발을 놀려 주술의 진 같은 것 하나를 그려 넣었다. 


 "자, 됐지? 이걸로 경계의 주술은 다시 세워졌어. 그러니 이제 그만 가보라고. 그 악귀인지 뭔지도 책임지고 잡을 테니까."


 물론 내가 아니고 수호령이 잡을 거지만 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이번엔 내가 한껏 쏘아보고 있으려니까 민아신에게 유나신은 그럼 그걸로 됐다는 듯이 그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주고는 찬미씨를 이끌고 돌아섰다. 정말로 저렇게 말 한 마디 따져 묻지 않고 가버리시다니 지금이라도 내가 유나신을 대신해 민아신에게 호되게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역시 그런 건 무리겠지. 난 민아신의 수호령이니까....


 "그런데 유나신. 있잖아... 그 팔 말인데."


 돌아서 멀어지던 유나신을 불러 세운 민아신이 유나신의 한 쪽 팔을 가리켰다. 그 가리킨 시선 끝에 긴 소매의 밖으로 드러나 있는 유나신의 가녀린 팔목 위로 꼼꼼히 싸매어져 있는 붕대의 끝이 얼핏 보이고 있었다. 붕대? 민아신이 자신의 팔 끝을 가리키자 유나신은 겸연쩍게 웃으며 자연히 다른 팔로 그 팔을 잡아 가리웠다. 의문이다. 이번의 그 악귀와 싸우다가 다치시기라도 한 것 일까? 찬미씨가 곁에 있는데 유나신이 부상을 당하다니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어쩐지 걱정이 되어 지켜보고 있자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나신의 가리운 그 손을 바라보는 민아신의 표정이 불만을 가득 품은 듯 한 뚱한 얼굴이었다.


 "인간을 도우는 거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걱정을 하려거든 자기 걱정부터 좀 하라고."


 왠지 조금 화가 나있는 듯 한 민아신의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유나신은 잠시 침묵하고 서있더니 이내 다시 온화히 웃으시며 민아신과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시고는 발걸음을 옮기셨다. 급히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를 하는 사이 민아신과 찬미씨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계신다. 저렇게 왜소하고 가녀린 분이였었나...? 유나신의 뒷모습이 어쩐지 오늘따라 위태해 보인다고 느껴졌다. 무언가 손대면  금방이라도 부수러 흩어져 버릴 것 만 같아 겁이 난다. 쉽게 그 뒷모습에 눈길을 떼지 못 하고 서 있는데 다가온 민아신이 내 어깨를 툭 치고는 그대로 지나쳐 저만치 앞서서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키며 걸어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일상의 평범하고 지루한 나날들로 돌아가 유유자적하니 거닐며 가고 있는 민아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야 말았다. 민아신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한 것 일까? 인간을 돕는 것은 신령님들의 의무이다. 아니. 사실 그건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호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는 나는 최소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신령님들은 그런 선한 의지를 위해 아직까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거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 존재의 의미가 무엇에 또 있다는 것 일까...!


 생각들을 쫓기라도 하려는 듯이 복잡해져오는 머리를 내저으며 나는 민아신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내가 수호령으로써 자각하게 된 건 이제 겨우 3개월여가 지났다. 그 이전의 기억들은 수호령이 되면서 모두 지워진 터라 어떠한 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그저 흐릿하고 아련한 향수들만이 머릿속에 부유하고 있었다. 인간이었을 때의 나는 어떤 아이었는지, 어떤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났을지, 다른 가족들은 없었던 건지, 친구는... 학교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막연한 존재하지 않는 추억들이라 거기에는 아쉬움도 절망감도 없이 그저 희미한 그리움만이 존재했다.


 "여기는 두 번째지?"


 민아신의 물음에 잠시의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어 올리자 '가게'의 모습이 보였다. 평범한 상점들과 주택가들이 한적하게 늘어선 골목 사이로 자리한 아담하고 정갈한 건물. 일견 카페나 조그만 잡화상점으로도 보이는 그곳은 여전히 포근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금빛들이 따스하고 적막하게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만 같다.


 왠지 시선을 뗄 수 없는 그 온기에 조금 홀려서는 작게 고개만을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하자 그런 내 모습에 피식 웃고는 민아신은 휘적휘적 먼저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은은하게 딸랑이며 울리는 방울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따라 들어서서는 나는 두 번째로 방문하게 된 가게의 안을 둘러보았다. 밝은 노을빛 아래로 드러난 가게는 몇 개의 테이블과 함께 사방이 조그마한 소품들 같은 물건으로 가득하다. 유리병 안에서 맴도는 푸르게 빛나는 별이나, 무언가의 조그만 알들. 또는 용도 불명의 조그마한 조형물 같은 것 들로 무엇 하나 평범해 보이는 것들은 없다. 그럼에도 그 진열되어 있는 모습들에서 느껴지는 단정함과 정돈됨에 보고 있는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민아신. 설현씨."


 그것은 아마도 이 가게의 주인 때문이겠지.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걸어 나오고 있는 한 인영을 바라보고는 나는 속으로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탈색된 듯 하얀색에 가까운 금빛의 짧은 머릿결. 그리고 그보다도 더 새하얀 피부의 여성은 오늘도 역시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마주하고 멈춰 섰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민아신의 뒤에서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하고 나자 그런 내 모습이 어디가 재밌있었던지 주인은 내 쪽을 흘깃 보고는 입가에 손을 가리고는 웃으시며 민아신에게 물었다. 민아신은 그 질문에 귀찮다는 듯 아무 말도 없이 가까운 테이블로 가 쓰러지듯 앉는다.


 "달달한 걸로 줘."

 "그러실 줄 알았어요."


 심드렁히 앉아 있는 쬐그마한 민아신의 모습을 보며 초아씨가 웃는다. 초아씨. 가게의 주인. '가게'란 특별한 장소였다. 일반적으로는 각 지역에 하나씩 존재하고 있는 것이 보통인 온갖 주술의 도구들과 기묘한 물건들이 모여드는 공간으로, 이곳에는 온갖 시공간이 얽혀들어 각자의 목적으로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들고 있었다. 그 어떠한 신이나 존재도 간섭할 수 없는 오직 가게의 주인의 의지에 의해 유지되는 고유의 공간. 신비하고 기묘한 사연들과 그들의 물건들이 수없이 뒤섞여 만고의 세월에 가라앉아 있는 이곳에서 초아라는 주인의 이름은 묘한 울림을 갖고 있었다. 돌아서던 초아씨가 자연스레 내 쪽을 쳐다보더니 눈짓으로 마실 것을 묻는다. 당황해 고개를 내젓자 초아씨는 그 모습에 다시 웃으시더니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저만치 카운터 쪽을 향해 걸어가셨다.


 "사실 물건이 있으신 건가요?"

 "글쎄......"

 "........."

 "야! 근데 너 신경 쓰이게 자꾸 그렇게 서 있을래?"


 테이블 위로 몸을 뉘이고는 멀뚱거리고 있는 모습에 물었더니 질문을 회피하던 민아신은 갑자기 버럭 이다. 입술 끝을 부루퉁 내밀고는 민아신의 맞은편에 쭈뼛거리며 앉았더니 한심하다는 투로 쯧쯧 혀를 찬다.


 "그렇게 고지식해가지고 요즘 같은 때에 어떻게 살래? 하여간 내가 왜 저런 애를 수호령으로 삼아가지고는...."


 누가 수호령으로 만들어 달랬나!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지만 수호령의 되기 이전의 기억이 없으므로 나는 말 못하는 벙어리마냥 그저 끙끙대며 말없이 눈치를 보고 앉아만 있었다. 누군 저런 신령님 수호령 같은 게 되고 싶어서 된 줄 아나. 분명 나는 강제로 수호령이 된 게 분명하다. 내가 이런 것 원했을 리가....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때마침 다가온 초아씨가 우리 둘 사이를 가르며 음료를 내려놓는다. 뭔가 보기만 해도 질려버릴 것처럼 달아 보이는 거품이 잔뜩 끼얹어진 음료를 민아신은 제 앞에 끌어가서는 방금까지의 짜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글벙글 이었다. 으이구... 저 밉상. 그 모습을 얄미워라 노려보는데 초아씨가 내 앞에도 찻잔 하나를 내려놓으신다.


 "에? 전... 주문한 적 없는데요?"

 "설현씨에게 어울릴만한 차를 골라왔어요. 사양하지 말고 드세요. 아니면 차가 맘에 들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다른 음료로...."

 "아, 아니에요!!"


 찻잔에는 노란빛의 투명한 액체가 맑게 담겨져 있었다. 그렇지만 난 차 값을 치를 물건이 없는데.... 어찌해야 하나 순간 머뭇거리며 주저하다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얼른 입가에 들어 올렸더니 짧은 순간에 들이마신 향이 코 속으로 그윽하니 퍼져나갔다. 입을 갖다 대자 입가에 닿은 찻물에서는 꽃잎의 향 같은 것이 아른 거린다. 꿀꺽꿀꺽. 몇 초간인가 지켜보고 있는 초아씨의 눈동자와 눈앞의 찻잔을 번갈아 눈을 말똥거리며 바라보다가 결국 나는 다급히 찻잔을 입에서 떼어냈다.


 "아, 뜨거!"

 "천천히 드세요. 설현씨."


 초아씨가 웃으시며 한 발짝 물러나신 후에야 나는 낼름 내밀어진 혀를 얼른 바로하고는 머쓱한 마음으로 조금은 여유 로이 찻잔을 손에 들었다. 몇 모금뿐이었지만 어쩐지 몸 안에 쌓여 있던 피로가 스르르 녹아 풀려 나가는 기분이다. 마치 따뜻한 산중의 온천수에라도 몸을 담그고 있었던 것 같다. 긴장이 풀려 버린 채로 감사한 마음이 되어 나는 조용히 차를 음미하게 되었다.


 "배트 같은 걸 하나 사고 싶은데 말야."


 배트? 차의 향과 풍미에 점점 빠져가고 있을 때 어느새 거의 다 비워버린 음료의 컵을 내려놓은 민아신이 퉁명스레 꺼낸 말에 자연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배트라면 야구배트 같은 걸 말하는 건가? 그런 걸 왜 굳이 가게에서....


 "그러신가요? 그런 것이 마침 하나 있기는 하네요."


 옆을 지키고 계시던 초아씨는 이 뜬금없고 황당한 주문에도 조금의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이 조용히 자리를 뜨시더니 자연스레 물건을 찾아 돌아오셨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낡아 빠져 여기저기 이가 빠져있는 썩은 나무뭉치 느낌의 오래된 목재 배트였다. 어떤 악의 같은 것마저 느껴져 오는 그 외관에 민아신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집어 들어 몇 번 휙휙 휘둘러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좀 더 귀여웠으면 좋았겠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아무튼 없는 게 없네. 역시 초아씨야."


 만족한 듯 보이는 민아신의 모습에 초아씨는 그저 살포시 미소 지을 뿐이었다. 조금 더 꼼꼼히 배트를 살펴 본 후에야 민아신은 그것을 누런 종이위로 대충 둘둘 말아 쥐어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가는 이것으로 되겠지? 내 신력을 조금 담아뒀는데."


 민아신이 품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흔들어 보이자 안에서 은은한 액체가 출렁였다. 일정한 기간마다 상부에서 신령들에게 지급되는 성과급 같은 개념의 신력이 담긴 병과 닮았다. 그 병을 받아든 초아씨가 잠시 들여다보시더니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요. 게다가 민아신의 신력이니 더욱더..."

 "아! 그리고 불침의 부적 같은 것도 하나 구입해두고 싶은데."

 "그런 거라면 종류가 많은데요."

 "저 아이의 거니까 적당한 걸로 골라줘. 대가도 저 아이가 낼 거니까 ."


 에에...? 갑작스레 튀어나온 내 이름에 상황을 판단하지 못 하고 눈만 끔뻑이고 있으니 내 쪽을 돌아보신 초아씨가 나를 유심히 보시다가 웃으시며 나를 이끌고 가, 벽의 한 쪽에서 작은 깃털들로 장식된 목걸이 하나를 꺼내어 내 목에 걸어 주셨다. 깃털의 부드러운 감촉이 목가를 간질여 그것을 가만히 매만지며 내려 보았다.


 "백귀의 빙의를 막는 부적이에요. 걸고 계시면 가까운 시일에 도움이 되실 거예요."

 "그게 저... 전 대가로 드릴 만 한 게 없는데요!"

 "이미 받았는걸요."

 "......?"


 내가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초아씨는 하얗게 금빛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마치 초아씨를 둘러싼 공간이 잠시 밝아진 기분이다.


 "제가 드린 차... 맛있게 드셨잖아요."


 멍하니 그 웃는 낯을 바라보았다. 뭔가 굉장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신다고 생각했다. 이미 가게에서의 볼일이 끝난 민아신은 문가에 서서 내가 얼른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 초아씨가 부드럽게 내 어깨를 잡아 돌려 세운다.


 "여기는 가게에요. 절대 물건의 거래에는 차고 넘침이 없어요. 대가는 충분히 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지만.... 어쨌든 감사해요."


 초아씨의 손에 등을 떠밀려 문가에 다가가자 삐딱하니 기대어 서서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민아신이 그제야 몸을 바로 한다. 주변의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저 무관심하고 세상 귀찮은 표정. 그 얼굴에도 초아씨는 미소를 보내었다.


 "이번 일은 조금 힘든 일이신가 봐요?"

 "그냥, 별 거 아니야."


 초아씨의 질문에 민아신은 그저 휘적휘적 가게 밖을 걸어 나가며 손을 흔든다. 언제나 어디 얽매인 것도 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신령님. 어째서인지 새어나오고야 만 한숨을 작게 내쉬며 무슨 생각인지 모를 그 뒷모습을 따라 나섰다. 


 뒤돌아보니 초아씨가 손을 흔들어 배웅해 주시던 가게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장소. 마치 방금까지의 그 모든 게 꿈이었다는 듯이 현실감을 아득하게 만들어 버리는 가게라는 공간. 그 텅 비어버린 골목의 이질적인 공간을 어째서인지 쉽게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쩐지 나의 지금 모습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도, 과거의 기억도 불확실한 채 그저 얼마 되지 않은 어설픈 기억들을 얼키설키 엮어내 간신히 버티고 서서는 산신령과 수호령이라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멍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나의 삶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나는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것 인가.... 그것은 마치 저 눈 앞의 허무의 공간처럼 금방이라도 신기루처럼 손안에서 흩어져 버릴 것 같은 서글프고 두려운 질문이라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네?"


 어느새 곁에 다가온 민아신이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묻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나 서고는 나는 그 꿰뚫어 볼 듯 한 시선에 가만히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외면하였다. 어쩐지 요즘 들어 더 갈수록 이렇게 감정을 추스르지 못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이러고 싶은 게 아닌데....


 "따라와. 유나신이 부탁한 그 악귀 이제부터 잡으러 갈 거니까."


 어쩐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민아신이 내 손을 끌어다가 척척 걸어 나간다. 그 손에 휘청거리며 엉겁결에 끌려가고 있자니 멍했던 정신에 퍼뜩 의문이 든다. 찬미씨와 만난 건 겨우 몇 시간 전의 일이다. 악귀....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알고 계신 거야? 그렇게 귀찮아하는 듯 한 태도이셨으면서 어떻게 된 것일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눈앞의 작은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이 작은 신령님은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어쩐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어와 나는 괜스레 답답해지는 가슴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이런 곳에 있는 건가요....?"


 해가 진 폐학교 건물은 보기만으로도 으스스하다. 학교... 다니고 싶었는데... 어쩐지 계속 그리워했던 학교라는 공간을 이렇게 마주하게 되니 기분이 울적하다.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길이 불편한 산중에 위치해 있던 이 학교는 폐쇄된 채 시내에 새로 건물이 지어진지 오래였다. 버려진 학교라니... 악귀가 숨어들기엔 좋은 환경인지도 모르겠다.


 "왜? 맘에 안 들어?"

 "아니요. 딱히...."

 "그래?"


 대수롭지 않게 척척 학교의 정문을 걸어 들어가며 민아신은 놀리듯 얘기한다. 진짜 맘에 안 들어. 왠지 오한이 스며드는 기운에 허리의 검집을 꼬옥 움켜쥐고는 심호흡을 한 번 한다. 그동안 몇 번인가 간단한 악귀 정도는 퇴치 해 본 적 있었지만 어쩐지 이번엔 자꾸만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해 진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챈 건지 앞서가던 민아신이 나를 돌아보며 가볍게 웃는다.


 "긴장되는 거지?"

 "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

 "쉽지 않을 거야. 그래 봬도 찬미 정도 되는 수호령이 놓친 악귀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가... 감사해요."

 "뭐, 어차피 나는 상관없지만 말이지. 악귀야 내 수호령이 알아서 다 잡아 줄 테니까."


 아.... 간만에 친절하다고 했어. 당했다는 기분에 부들부들 거리며 운동장에 들어서자 잡초가 무성한 황량한 풍경에 음산한 바람마저 한 줄기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게 몸을 긴장하며 학교의 현관가에 다다르자 민아신은 어깨위로 걸치고 있던 그 노란종이 안의 배트를 꺼내어 땅에 짚고는 당연하다는 투로 내게 턱짓으로 학교의 안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자, 그럼 나는 여기서 악귀가 도망치지 못 하게 지키고 있을 테니까 어서 다녀와."


 에에?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저 보고 혼자 들어가라고요?"

 "응!"


 눈만 끔뻑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더니 뭐하냐는 듯이 자꾸 눈썹을 구부리며 턱짓으로 재촉이다. 하아... 이럴 줄 알았어. 저 월급루팡 같은 신령님 같으니라고. 하기사 원래 이런 것이 수호령의 임무이고 저 불량 신령님이랑 입씨름 해봤자 남을 게 없다는 건 뻔 하기에 여기서 더 주저 하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체념하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터덜터덜 학교의 내부로 들어가자 민아신은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눈으로 쫓으시더니 내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바로 기지개부터 켜고는 현관의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셨다. 으으... 나 아직 안 갔다고요. 지금 다 보고 있다!


 코너에 숨어서 얼굴만 배꼼 내민 채 민아신 하는 꼴을 지켜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 이런 것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고.... 아무튼 밤중의 학교는 기분 나쁘다. 그나마도 사람의 온기가 떠난 지 오래인 폐학교는 그 살풍경한 모습을 어둠 속에 가린 채 도사리듯 침묵 중이었다. 적막한 학교 안에는 오로지 내 발걸음 소리만이 아스라이 울려 퍼진다. 끈적끈적하니 몸을 감싸 도는 서늘한 공기를 헤치며 나는 불 꺼진 학교의 복도를 걸어 나갔다.


 - 드르륵


 낡아빠진 문짝을 밀어내자 틈이 어긋난 교실문은 몇 번 삐걱대다가 소음과 함께 열린다. 칠흑 속에서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던 책상과 의자들이 보였다. 다 찢어진 학급 게시판이라던가 곳곳에 굴러다니는 노트나 실내화 같은 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 한켠이 울적해져 왔다. 아무튼 지독한 어둠이다. 수호령이 되면서 어느 정도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어둡다. 근본적으로 빛과 차단 된 공간 안에 들어서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


 문득 어떤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귀를 기울이고 있자 다시금 도도독 발자국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사라졌다. 이번 건은 방금 전보다 더 선명히 들렸다. 누군가 있는 건가? 복도로 나와 소리를 따라가고 있자 그것은 위의 층에서 들리는 듯 머리 위에서 점점 더 뚜렷이 들려왔다. 마치 공기라는 매질이 아니라 직접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위층의 계단을 따라 올라서는데 누군가의 한 인영이 시야를 스치며 사라진다. 여자? 다급히 계단을 마저 올라 사라진 복도를 향해 바라보자 저만치서 그 인영이 교실 문을 열고는 다시금 사라진다. 


 달려가자 여자가 들어갔던 교실문은 닫혀 있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교실 문을 열자 불쾌한 소리를 삐걱대며 문이 열린다. 멈춰 서 바라본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불쾌하고 끈적한 어둠뿐이다. 조금 망설이다 주춤거리며 교실 안을 들어서서는 교탁 앞에서 다시 한 번 살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다. 뭐였던 거지.... 괜스레 애꿎은 입술 끝만 물어뜯다가 포기하고는 돌아서려고 했다.


 흡. 하고는 급하게 숨이 들이쉬어진다. 언제부터인가 교탁 옆의 책상 아래 누군가가 있었다. 바로 지척의 그곳에서 낮게 흐느낌이 들려온다. 어느새.....? 마비된 이성 속에 그저 의문 기호만이 마구 뒤섞이고 있었다. 굳어버린 몸을 움찔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낸다. 정말로 내 몸이 맞는 것인지. 몸이 본능적으로 돌아보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옆을 쳐다보기가 힘들다. 바보같이...! 난 수호령이란 말이야!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홱 고개를 트니 어두운 책상 밑으로 어떤 가녀린 체구의 여인 한명이 울고 있었다. 하얀색 파자마 차림의 복장에 실성한 듯 풀어헤쳐진 검은 머릿결. 신발도 없이 맨발인 발은 엉망으로 망가져 상처투성이로 지독하다. 그것은 어쩐지 지독한 공포심과 함께 묘한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모습이라 어째서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서고 말았다. 


 "저기요.....?"


 악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쉽게 외면하지 못 하고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여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으며 물러섰다. 두 눈이 뜰 수 없도록 꼬매어 진 채 공허하게 어둠만이 가득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얼굴. 그 부르트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 계속해 흐느낌인지 오열인지 모를 소리가 되풀이 되고 있었다.


 "내 딸 어디 있어..... 내 딸 어디 있어....."


 지척에 있는 내가 느껴지지 않는 건지 손만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찾아 헤매듯 애태우며 서럽게 운다. 꼬매진 눈 사이로 끈적이며 흘러내리고 있는 핏자욱들이 검붉게 턱 선을 따라 고이고 있었다.


 "설현아... 내 딸 어디 있니...."

 "아......!"


 틀어막고 있던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간다. 엄마....? 설마 엄마인 걸 까? 과거의 기억 따위 모두 지워져 버린 내게 그동안 그토록이나 그리웠던 엄마라는 단어의 애절함이 주체하지 못 하고 터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흘러버릴 것처럼 맺혀진 눈물방울로 뿌옇게 번진 시야에 방황하며 허공을 가르고 있는 여자의 손이 보인다. 나는 결국 참지 못 하고 와락 다가가 그 여자를 끌어안았다.


 "엄마! 설현이 여기 있어요."

 "설현이.....?"


 온통 오물과 핏물로 끈적하니 달라붙어 있는 머릿결을 쓸어안으며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나는 여자를 품에 더 꼬옥 끌어다 안았다. 뼈가 만져질 것 같은 앙상한 몸에서 시릴 만큼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어 온다.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엄마.


 "설현이? 설현이....?"

 "네! 저 여기...."

 "너는 내 딸이 아니잖아!!!!!!!!!!"


 갑자기 여자의 얼굴이 걸쳐 있던 어깨가로부터 느껴지는 격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는 주저앉았다. 끔찍한 고통에 돌아보자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훤하게 여자의 이빨 자국을 따라 어깨가 뜯겨져 나가 있다. 가빠진 호흡에 헉헉 이며 고통과 의문에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글픔과 비통할 정도의 외로움만이 나와 함께하고 있었다.


 "설설현현아아... 설설현현아아...."


 사방에서 울려 퍼지듯 들려오는 무수히 많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쓰러져 있는 나를 향해 교실 문을 열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서고 있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울렁거리듯 그 모습들이 하나하나 스쳐갔다. 아빠, 언니, 이웃들. 선생님, 친구들.... 수많은 모습들이 괴기한 생김새로 내게 터덜터덜 신음하며 걸어온다. 그 가운데 방금 전의 엄마의 모습이 있었다.


 "설현아........"


 여기저기 갈라져 피가 맺혀진 입술이 자상히 내 이름을 부른다.


 "너는 이제 인간이 아니잖아!!!!!!!!!!!"


 입가가 찢어지며 온통 번뜩이는 더러운 송곳니로 가득한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여자의 모습에 나는 그동안 검집에 담겨있던 검을 힘겹게 빼내어 들었다. 보통의 검과는 다르게 조금 두터운 폭에 사각으로 곧게 뻗은 검신. 낭창함과는 거리가 먼 육중한 감이 느껴지는 중검은 흡사 베기보다 때려서 부수어 버리겠다는 기세의 모양새였다. 


 "크흑."


 고통을 참아내고는 발을 굴러 맞부딪히며 나는 검을 앞세우고는 그대로 들이 받는다는 느낌으로 강하게 악귀들을 밀어붙여 내며 길을 뚫어냈다. 그 위압적인 움직임에 휩쓸려 나가떨어지는 악귀들을 뛰어넘으며 나는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 복도를 달려 나갔다. 헉헉 거리며 바라보자 어깨의 상처는 이미 치유력 때문인지 상당부분 아물어 있다. 이 괴물 같은 몸..... 입술을 꾸욱 깨문다. 그래. 난 이제 인간이 아니야. 이성은 자꾸만 방금 전 그 악귀들이 모두 진짜의 내 가족이나 이웃들, 친구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알아. 안다고! 그까짓 환영들.... 하지만... 하지만, 역시 손을 델 수가 없다. 그저 이렇게 그것들을 피해 달아나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 어떻게든 악귀의 본체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어...!


 달려 나가며 눈을 감고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 본다. 사악한 기운이 그득히 들어찬 이곳에서 그 기운들의 흐름을 느끼려 애써 보았다. 그것은 천천히 머릿속에 이미지화 되어 급한 격류의 흐름처럼 어딘가에서 부턴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래...? 멈춰 서서는 돌아보았다. 복도 저편에서 악귀들이 교실 밖으로 몰려나오고 있는 장소의 아래에서부터 엄청난 악의가 풍겨져 나온다. 바라보고 있는 사이 내가 멈춰 선 것을 보고는 엄마라고 생각했던 악귀가 괴성과 함께 뛰어온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애써 그것에 외면하며 나는 검을 역수로 고쳐 쥐고는 그대로 복도의 바닥을 내리쳤다. 신력이 실린 검이 엄청난 무게로 강타하자 희뿌연 흙먼지와 함께 바닥이 무너지며 그대로 돌무더기와 함께 나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시야를 가리는 먼지를 헤치고 나오다가 순간 움찔하며 나는 멈춰 서고야 말았다. 복도 저편의 어둠너머로 한 여자의 인영 하나가 검은 기운에 휩싸인 채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악귀의 본체구나.... 얼마나 얕잡아 보였으면 드러내놓고 마중을 나와 있을까. 어쩐지 화가 나서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방금 전의 그 환영들의 악랄함까지 배로 갚아주고만 싶다.


 천천히 걷듯이 다가서다 점점 속도를 올려갔다. 급기야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어서는 나는 검을 한껏 뒤로 빼었다가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마치 중세 기병들의 랜스차지에 가까운 엄청난 파괴력이 소용돌이치며 악귀를 향한다. 그에 대응하듯 악귀 주변의 검은 기운들이 모여들어 그 사이를 빽빽이 밀집해 들어왔다. 이를 악물고 몸을 내던지자 단숨에 구름을 뚫고 들어가는 한 줄기 섬광처럼 기운들을 걷어내며 검이 악귀의 눈앞까지 쏘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격돌음과 충격파!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도 검은 악귀의 바로 앞에서 너무도 쉽게 멈춰 섰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막혀버린 검 끝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놀랍다. 악귀를 상대해 본 적은 많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방금 전의 공격은 충분히 강력했다. 뒤를 생각하지 않는 순수하게 파괴력만을 그러모은 공격. 그런 것이 이토록 손쉽게 막혀 버릴 줄은 몰랐다. 당황해 잠시 멈춰 선 사이 비어있는 옆구리를 노리고 채찍처럼 휘둘러져 오는 검은 기운에 아슬아슬하게 뒤로 몸을 굴려 벗어나고는 중심을 잡으며 착지해 바라보자 여자의 악귀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뭐가 웃기 다는 거야. 이를 갈고는 뛰어 올랐다. 힘을 실은 중검이 다가오는 검은 기운들을 차례차례 끊어낸다. 기교나 변화가 적은 우직한 검의 궤적들을 그려내며 나는 다시 한 번 악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자세를 다 잡아 검을 양 손으로 높이 치켜들어 올렸다. 온 몸의 기운 하나하나까지 모아서 끌어낸 힘으로 일격에 때려 부수어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강하게 검을 움켜쥔다. 기합성과 함께 내리치자 번뜩이며 눈부신 섬광과 함께 버티기 힘든 광풍이 몰아쳐 왔다. 휘몰아쳐 오는 기운을 가늘게 뜬 눈으로 버텨내고는 간신히 시야를 회복해 바라보자 터무니없게도 역시나 검은 악귀의 머리맡에서 멈춰서 있었다. 뭐 이런....


 순간 악귀 주변으로 꿈틀대며 안개처럼 퍼져있던 검은 기운들이 삽시간에 모여들더니 거대한 드릴처럼 나를 향해 쏘아졌다. 황급히 검을 들어 올려 막아냈지만 속수무책으로 한참을 날아올라 나는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고통에 신음하며 비칠거리는데 사정 봐주지 않겠다는 듯이 내가 누워 있는 자리로 악귀가 쏘아낸 검은 기운들이 투창처럼 날아들어 온다. 애초에 주술 같은 거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저 이런 상황에서도 특별한 대응책 없이 가진 바 몸으로 대충 때우는 수밖에 없다. 몇 몇 개는 검을 휘둘러 튕겨내고는 나머지는 온 몸으로 그대로 받아내었더니 강타당하는 충격에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나마 무지막지한 항마력을 가진 몸이라서 이정도 버텨준 거지 아니었다면 이미 소멸되어 버렸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검을 박아 넣고 지팡이 삼아 간신히 일어나 서는데 방금 전의 충격때문인지 벌써부터 몸이 후들 거린다. 내 몸의 빠른 치유력을 믿고는 잠시 컨디션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검을 빼들고는 자세를 취하였다. 악귀를 둘러싼 보호의 벽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단하다. 결코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일격에 깨어 부수기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깨어질 때까지 공격할 수밖에 없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중검을 움켜쥔 손에 힘을 준다. 그리고 나는 단숨에 쏘아져 나갔다. 내 진로를 가로막으며 악귀로부터 수 없이 뻗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들을 정면으로 마주해 들어간다. 이런 것에 힘을 쏟을 여유는 없어. 입술을 깨물고는 그대로 검을 앞세운 채 돌격해 갔다. 일부가 그 기세에 휩쓸려 사라졌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몸을 강타한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참아내며 몸이 버텨주기를 바랐다. 어차피 인간이 아닌 몸. 이럴 때 만이라도 내게 도움을 줘. 제발....


 악귀의 앞까지 순식간에 접근해서는 달려오던 그 위력 그대로 강하게 검을 찔러 넣었다. 엄청난 충격음이 터져 나오지만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는 악귀. 하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무리한 힘으로 허리를 비틀며 검을 치켜 올려서는 다시 한 번 악귀를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느껴지는 충격의 진동에 잠시나마 악귀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하지만 아직 이야.... 그대로 회전하듯 빙글 검을 돌려서는 다시 한 번 무자비한 풀 스윙의 베기! 가해지는 힘이 강할수록 속도와 위력이 강해지는 중검의 방식대로 나는 말도 안 되는 움직임과 힘으로 몸을 혹사시키며 한 번 시작하면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끝을 낼 수 없는 무한의 칼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급속도로 악귀의 표정이 굳어가는 게 보인다. 초조해진 악귀가 나를 떨쳐내기 위해 있는 데로 어둠의 기운을 휘둘러 공격을 한다. 하지만 역시 그런 것들을 일일이 방어하는 건 무리. 공격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는 나는 운동의 관성을 무시한 채 계속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의 움직임만으로도 여력이 없어서 들어오는 공격은 그저 몸이 버텨내주기만을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해야만 하는 큰 동작후의 빈틈의 시간을 강제적인 힘으로 무시해 버리고 다음 동작들을 계속해 연계할 때 마다 온 몸의 근육들이 우두둑 끊어졌다가 치유력으로 아물기를 반복한다. 거기에 검은 기운들이 본격적으로 정신없이 몰아치며 때리기를 반복하자 몸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내야 돼. 이를 악물고는 고통을 참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이제는 악귀에게도 여유가 없어 보인다. 이미 보이지 않는 벽은 거의 허물어져 당장이라고 깨질 것만 같은 상태였다. 이제 단 한 번만 더!


 그 순간 악귀가 강하게 나를 밀어내고는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도망치려는 건가?! 이대로 틈을 주게 되면 지금까지 했던 공격이 물거품이 된다. 다급히 마주 뛰어올라 검을 치켜들었다. 당황한 악귀의 시선이 마주친다. 힘을 싣기 위해 발밑의 공기를 단단히 발로 움켜쥐고는 나는 검을 휘둘렀다. 이걸로 끝이다! 마지막 일격에 보이지 않던 벽이 유리처럼 산산이 깨지며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으로부터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온다. 결국 이 무리한 움직임을 견뎌내지 못 하고 검은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악귀의 앞에 내려앉아 나는 악귀의 목가로 부러진 칼끝을 겨누었다. 


 "악의는 없어요. 다만 이대로 계속 악행을 반복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검이 겨누어진 여자의 악귀는 겁에 질린 것처럼 울고 있었다. 좀 전까지의 독기는 거짓이었다는 듯이 너무도 서러운 모습이다.


 "잊혀지기 싫다!! 나는 잊혀지기 싫어!!!"


 여자의 비명과 같은 소리에 당장이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나는 검을 더 가까이 들이 대었다. 


 "이제 그만 받아들이세요. 당신은 이제 원혼일 뿐이에요. 이 이상 더 인간계에 관여하는 건....."

 "그렇다면 너는 왜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뭐? 여자의 말에 다가서던 검끝이 멈춰 선다. 


 "너야말로 잊혀졌다는 것에 두려워하고 있잖아. 남들로부터 모두 잊혀진 채, 이제는 자신조차도 자신을 잊어버린 가여운 존재 같으니라고. 그런 것에 번민하는 네가 어떻게 나를 처단할 자격이 있다는 거야!"

 "저는... 저는....."


 갑자기 지끈거려 오는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래. 악귀의 말이 맞아. 나는 잊혀진 존재. 가족에게도, 이웃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까지. 나의 존재는 이제 이 세계 어디에서도 그 기억을 찾아볼 수 없는 공허한 존재. 나란 아이는 그래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저 괴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모두들 잊혀지고 싶지 않은 거야. 잊혀지는 게 다들 괴롭고 슬픈 걸 거야.... 그러니까 악귀가 되어서라도 남아 있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몰라.


 "쉽게 넘어 오는 구나."

 "뭐?"


 악귀의 싸늘한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다가온 검은 기운이 내 발목을 낚아채 공중에 집어 올리더니 사방으로부터 기운들이 모여들어 내 몸을 감싸며 조이기 시작하였다. 엄청난 힘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힘에 금세 정신이 아득해 진다. 당장이라도 온 몸이 뼈가 으스러져 버릴 것만 같다. 내려 보자 악귀의 몸은 모여든 검은 기운들로 둘러싸여 꿈틀거리는 검은 덩어리처럼 거대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조여 오는 숨에 서서히 눈이 감겨온다. 어차피 잘된 걸지도 몰라. 사실 이대로 계속해 존재해 간다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 돌아볼 한 조각의 과거조차 갖고 있지 않은 텅 비어 버린 인형 같은 삶. 그런 것에 또 무슨 의미가..... 


 "아아.... 악귀를 퇴치하라고 보냈더니 잡혀서 동화되려고 하고 있다니."


 멀어져가던 의식 속에 어딘지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뚜렷이 들려왔다. 희미하게 눈을 떠보자 거대해진 악귀의 아래에 조그마한 체구의 민아신이 그 큰 눈을 부릅뜨고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아신은 내 목 언저리를 가리켰다.


 "초아씨가 준 그 부적. 부끄럽게 하지 마."


 민아신의 말에 힘겹게 목 아래를 내려다보자 초아씨가 주셨던 깃털의 목걸이가 당장이라도 풀어져 흩날릴 듯 빛을 내며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악령이 착용자의 내면에 침투해 오는 것을 막아내어 주는 부적. 그렇구나... 이것이 홀로 나조차 포기해 버리고 있던 나라는 존재를 지켜 내주고 있었구나. 언제나 너무 쉽게도 악귀에게 홀려 버리고야 마는 바보 같은 나를 위해 이럴 것을 미리 알고 초아씨는 이것을... 어쩐지 너무도 부끄럽고 죄스러워 내 자신이 한심해 진다.


 "아무튼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수호령인데 말이야...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민아신의 존재를 눈치 채고는 민아신을 향해 온 몸을 떨며 포효하는 악귀를 향해 민아신은 들고 있던 배트를 들어 올려 보였다. 그 배트의 겉면을 따라 복잡한 문양과 글귀의 부적이 친친 감싸고 있다. 배트를 힘껏 뒤로 잡아 뺀 민아신은 망설임 없이 악귀를 향해 배트를 내질렀다. 엄청나게 경쾌한 타격음. 이미 거대한 덩어리화 되어 검게 거대화 되어져 있던 악귀는 믿을 수 없게도 그 한 번의 휘둘림에 삽시간에 부풀어 오르는 가 싶더니 광풍과 함께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보이지 않던 벽채로 산산조각 나 흩어져 버렸다. 바닥에 떨어지며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쓰며 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그 토록이나 고생해서 간신히 깨부수었던 벽이었는데.... 엉성한 폼으로 배트를 가볍게 휘두르고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서 있는 모습이 터무니없다. 이해할 수 없는 신령님이라고는 항상 생각했지만 가끔가다 보면 정말 상식 밖일 때가 많다.


 비명 같은 원혼의 소리들이 메아리치다가 서서히 옅어져 간다. 검은 기운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스며들기 시작한 달빛에 비쳐 낡은 목걸이 하나가 차가운 바닥에 쓸쓸히 떨어져 있었다. 목걸이를 집어든 민아신이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 내 앞에 던지셨다.


 "이건 아무래도 네가 갖고 있는 게 좋겠다."


 엉겁결에 목걸이를 받아들고는 멀뚱이며 민아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뭘 보냐는 투로 쏘아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쉰다. 


 "그게 아마 이번 악귀의 본질이었을 거야. 그거 초아씨에게 가져다주도록 해."


 일일이 다 설명해 줘야 되고 아, 귀찮아! 따위를 다 들리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민아신을 외면하며 목걸이를 내려다보니 목걸이의 안쪽으로는 웬 여자의 사진이 액자처럼 조그맣게 담겨 있었다. 이 사람이 악귀로 변했던 걸까....? 평범하고 순진한 얼굴이다. 그저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평범한... 악귀로 변질 될 정도였으니 그 죽음이 평탄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여자는 잊혀지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잊혀지고 싶지 않아서 악귀가 되었다고.....


 "신령.. 아니 사장님. 잊혀진다는 건, 결국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 다는 뜻 인가요?"

 "뭐?"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민아신 앞에서 받아든 목걸이를 꼬옥 움켜쥔 채 가슴에 묻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게 되어버리면 존재할 의미조차 사라지게 되어 버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악귀가 되어서라도 남들에게서 잊혀지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존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요.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도 그래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언제나 자신의 행동과 표현들이 남에게 기억되어주길 바라요. 누군가 자신을 보고 반응해 주길 바라고 있어요.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자기가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한다고요. 이렇게 죽어서 까지도...."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저처럼 잊혀져서 저조차 기억하지 못 하는 저란 존재는 정말로 존재할 의미가 있는 건가요?"


 지난 삼개월간 계속해 내속에서 커져갔던 그 마음. 그 서러움과 두려움이 물밀듯이 벅차올라 어느새 눈가가 부옇게 흐려졌다. 바보 같다고도 생각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의 존재에 대하여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나날들. 마치 사방이 그저 무의 공간인 허무한 어둠속에 둥실 떠서는 주변에 의지할 곳 하나 없이 그저 홀로 표류하고 있는 그런 먹먹함과 죽을 듯 한 공허함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못나게도 나는 지금 원망하고 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민아신을... 그동안 민아신을 보아오며 자꾸만 속으로 어긋나게 굴었던 것은 민아신의 불성실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깊은 곳에서는 계속해 원망하게 되고야 말았던 이 어두운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서 인간임을 빼앗아간, 나의 존재성을 앗아간 민아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정말 나란 아이가 너무도 부끄럽다. 그냥 이대로 다 끝나버렸다면 편했을 것 같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숨을 들이켜고 있는 내 모습에 민아신은 있는 데로 머리를 헝클이며 짜증을 부리시더니 긴 한숨과 함께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는 대놓고 내 이마에 작게 손가락을 말아 쥐시더니 톡 하고 때리셨다.


 "야.... 그런 소리를 100여년이 넘게 모두로 부터 잊혀져 살아온 나 같은 신령한테 하면 어떻게 하냐?"


 민아신의 손길은 너무도 가벼웠는데 그 한탄과 웃음기 섞인 짓궂어 보이는 말에 머리에 뭔가 무거운 거 하나로 세게 맞은 기분이 들어 버렸다. 숨이 막히도록 차오르는 울음에 벅차하면서도 나는 그만 내가 큰 실수를 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구나.... 사실 신령님들이야 말로.....


 "우리 신령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잊혀져 이제는 아무도 믿는 자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지 오래야. 그래서 이제는 신자가 없으니 신력도 바닥이 나고 네 말대로 존재의 의미도 사라져 소멸할 일만 남았었지. 그렇게 다 없어져 버릴 뻔 한 우리들이 지금까지 간신히 존재하고 있을 수 있는 건 높은 곳에서 재빠르게  우리의 존재 의미를 바꿔 주었기 때문이야. 균형의 유지자. 신령이니 주술이니 하는 건 이제 찾아볼 수가 없는 요즘 같은 초근대화 문명사회에서 우리는 그 불빛에 숨어 과거에 비해서 더 비뚤어지고 괴이하게 인간의 선을 넘어서 번식해가고 있는 음지의 기운에 한해서 자연의 정화 작용의 일환으로써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양의 기운으로써 사명을 새로이 부여 받게 되었어. 예전처럼 악귀를 물리치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거창한 게 아니야. 그저 자연의 자정작용 같은 하수구 처리장 같은 거지."

 "하지만, 그런...."

 "알겠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끈질길 정도로 악착같이 존재하고 있는 녀석들도 있단 말이야. 그저 보람도 의미도 없이 자연의 순환 고리 역할을 하면서 말이지. 물론 계중에는 유나신처럼 멍청한 짓을 벌이고 있는 과거의 감상에 빠져 있는 존재들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잊혀진 존재들이라도 그 존재의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거야. 그렇지 않아?"


 항상 바보라고만 생각해왔던 맹한 민아신이 이토록이나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어쩌면 내가 해왔던 보잘 것 없는 지난 삼개월간의 고민을 민아신은 1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저 생각 없어 보이는 태도의 뒤에서 지금껏 홀로 고민하며 참아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죄송해요. 그저 전......"


 용서를 구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혀를 차던 민아신은 이내 으쓱 일어나서는 기지개를 키며 달빛이 은은한 학교의 복도를 휘익 둘러 보았다.


 "무리했더니 배고프다. 그럼 오늘은 특별히 맛있는 거 해줘. 육회비빔밥!!"


 갑자기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손가락을 까닥이는 민아신의 모습에 그만 울상이던 얼굴에 작게 미소가 번지고야 말았다.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민아신은 만족했다는 듯 웃으며 복도를 느적느적 걸어 나간다. 


 "아 참! 그리고 말이야. 설현아."

 "네?"


 멀어지던 민아신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내 이름을 부르는 통에 갸웃거리며 바라보았다.


 "모두에게서 잊혀져서 기억해 줄 사람이 없다는 말. 그거 틀렸어."

 ".....?"

 "여기. 나 있잖아. 나!"


 자기를 손으로 가리키며 자기 좀 보라는 듯이 인상을 쓰시던 민아신은 킥킥거리며 장난스럽게 웃으시더니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셨다. 뭐야... 역시 바보 같아. 인적이 사라진 고요한 학교의 복도에 홀로 남아 물끄러미 앉아 있던 나는 왠지 창피함과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 뺨을 매만졌다. 그렇구나... 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있었구나.


 부러진 검을 잡아 조금 전 악귀가 사라졌던 땅에 힘껏 박아 세웠다. 역시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 조금 미숙했던 거야. 그 비석처럼 세워진 검 앞에서 조용히 합장을 하고는 나는 눈을 감고 기원했다. 비록 악귀가 되었지만 이제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고.... 내가 당신을 잊지 않겠노라고....


 기분 탓이었을까? 손에 감겨 있던 목걸이는 마치 내 기도에 대답하듯 흔들리며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


 "이거군요. 이번 악귀의 물건은...."


 민아신의 말에 의해 홀로 가게에 와 있었다. 초아씨는 조심스레 내가 건넨 목걸이를 들여다보고 계셨다. 집중하고 있는 눈이 진지하시다. 낮게 내리깔린 고혹적인 눈. 잠시 초아씨의 주의에서 멀어진 나는 고개를 돌려 가게의 안을 둘러보았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차분한 분위기의 옛 것 냄새나는 공간. 언제와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이 공간이 오늘은 혼자여서 인지 조금은 색다른 기분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고생하셨어요. 설현씨. 안 그래도 마침 이런 물건을 찾고 계신 분이 있었는데...."


 방긋 웃어 보이는 초아씨의 말에 의문스럽게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더니 어느새 초아씨의 옆으로 어둠속에서 스며들어 나오듯 한 인영이 다가와 섰다. 언제...?! 나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키며 바라보니 다가온 존재는 괴이한 차림이다. 사슴의 두개골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검은 로브를 둘러쓴 존재는 초아씨가 내민 목걸이를 받아들더니 몇 번인가 살피고는 만족하였던 건지 그대로 처음부터 없었던 마냥 어둠속으로 또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녹아들어 사라졌다.


 "그럼 이제 제가 설현씨에게 목걸이의 대가를 드릴 차례네요."


 짧게 심호흡을 하신 초아씨는 어디선가 일본도 형태의 검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척 보기에도 검신의 길이가 상당한 묵빛의 검을 초아씨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바라보셨다.


 "방금 전의 손님이 물건을 구해주는 대가로 맡기신 검이예요. 본래대로라면 이건 함부로 거래를 할 만한 물건은 아니지만 이것도 연이 닿은 듯 하니 아마도 설현씨라면 괜찮겠죠. 자, 받으세요."


 내 텅 비어 있는 허리께를 살짝 보시는 통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얼른 검을 받아들었다. 받아든 검의 무게는 원래 쓰던 검 만큼은 아니어도 조금 묵직한 기분이다. 특별한 문양이나 장식도 없이 그저 빛을 빨아들일 것 같은 칙칙한 묵빛의 검집. 살짝 검을 빼내자 시리듯 푸르게 빛나는 검 날에서 어딘지 털끝을 곤두세우는 귀기가 느껴져 왔다. 저주... 받은 건가. 이 검?


 "그나저나 이번 일은 많이 힘드셨죠?"

 "아! 그게... 아니에요. 그저 조금..."


 물어오는 초아씨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는 얼른 검을 다시 도로 집어넣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잊혀진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 두려움. 그런 것들에 대하여 나는 이번 일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그것들에 대하여 명확한 대답을 낼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제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기분이다. 


 "걱정 마요. 설현씨를 보고 있으면 앞으로도 잘 해내갈 거라고 생각이 드니까요."


 햇살을 닮은 자상한 미소에 나는 감사해 했다. 어쩐지 초아씨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진심이 느껴져와 마음이 차분해지고 따뜻해지는 것 만 같다.


 "자! 그럼 이건 서비스에요."


 무언가 봉지에 싸인 물건을 벗기시더니 대뜸 내 입술 사이로 밀어 넣으시는 통에 깜짝 놀라서는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야 말았다. 조심스레 입안을 놀리자 작은 사탕 같은 것이 달콤하게 데구르 굴러간다.


 "몸에 좋은 거예요. 이번에 고생하셨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 악귀와 싸우다가 엉망이 되었던 몸 상태가 잠시 이걸 입에 머금고 있었을 뿐으로 한결 가벼워진다. 초아씨는 사탕을 물고 있는 내 모습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가게의 거래에는 차고 넘침이 없다고 하셨는데 언제나 나는 받고만 있는 기분이다. 과연 초아씨는 나에게서 무엇을 받고 계신 걸까...


 "항상 감사해요. 신경 써 주시고..."

 "아니에요. 감사하시려거든 설현씨의 곁에 있는 민아신에게 해주세요. 그 신령님이야 말로 설현씨를 정말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좀 고집불통에 엉뚱하고 그런 티를 내기 싫어하는 부끄럼쟁이긴 하지만..."

 "네?"


 초아씨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등 뒤에서 조금 앙칼져져 있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한 소리야?"


 화들짝 돌아보자 뜻밖에도 뾰로통해져서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있는 민아신의 하얀 얼굴이 눈 아래 있었다. 나와 마주친 시선에 잠시 인상을 쓰시더니 이내 곧 시선을 피하신다. 그 바람에 어째서인지 나도 어색해져서는 시선을 피해버리고야 말았다.


 "오신 줄 몰랐었네요. 그나저나 오늘은 어쩐 일로...? 설현씨만 보내신 거라 들었는데?"

 "달달한 걸로 줘!"


 투덜투덜 거리며 쏘아보고는 테이블가로 가 털푸덕 앉는 민아신의 모습에 초아씨는 입가를 가리시고는 웃음을 지으셨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온한 몸짓으로 태연히 음료를 만들기 시작하신다. 벌써 몇 백 년이나 인연을 맺어왔을 두 분은 이제는 특별한 말없이도 이런 농만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민아신이 나를 정말로 신경써주고 있다라니... 아직 나에게 다 말해주지 않으신 어떤 숨은 이야기들이 두 분의 이 잔잔한 정적 속에 숨어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역시 그런 건 물어서는 안 되는 거겠지.


 말없이 민아신이 엎드려 계신 테이블가로 다가가 마주 앉자 힐끔 내 모습을 바라보신 민아신은 이내 신경 쓰지 않고 여느 때처럼 홀로 딴청을 피우며 연신 지루하신지 하품을 하고 계셨다.


 언제나 저 불성실한 태도. 무관심한 표정. 뜻 모를 웃음기와 짜증들까지... 조그맣고 가녀린 체구의 신령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원망하던 마음이 모두 깨끗이 지워진 건 아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 모두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이제는 조금은 더 이 신령님을 믿으며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껴져 왔다. 


 사람은 모두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반응해주기를 바란다. 자기가 혼자가 아님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갈구하는 것이 어리석지만 사람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으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살아있어도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계속해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의 정의의 한 부분이 아닐까 나는 미숙하게나마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러니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순간 완전하게 죽게 되는 거라고 그렇게 느껴졌다. 


 '모두에게서 잊혀져서 기억해 줄 사람이 없다는 말. 그거 틀렸어. 여기. 나 있잖아. 나!' 라고 말해주시던 민아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 그걸로 나는 조금이나마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된 걸지도 몰라. 엎드려 있는 민아신의 고개 아래로 빠져나온 민아신의 손 위로 가만히 내 손을 가져가 포개었다. 손아래로 쏙 들어오는 작은 손...


 "뭐...?"


 놀란 민아신이 번쩍 고개를 들고는 나를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령님. 저도 기억할 거예요. 신령님을..."


 그러니 백여 년이 넘도록 혼자였다는 말 이제 안 하셔도 돼요. 이제 제가 기억할 테니까..... 


 얼빠진 얼굴로 그저 나를 바라보시는 민아신에게 나는 말없이 해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신령님 프로젝트 ...fin





_


 장하다! 한 달에 한 편!! 결국 11월의 글도 마감기한까지 어떻게든 완성시켰네요. 이번 글은 설현이의 한우 같은 모습과 튼실한 어깨에 반하여 파이터 설현이를 써보고 싶어서 쓰게 되었.... (아니야!!) 

 보통 글을 쓸 때는 그 당시에 가장 일상에서 신경 쓰이고 있는 부분이라던가 하는 것으로 주제를 잡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ㅁ님의 평소를 관찰하면서 느꼈던 부분들을 가지고 글을 써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관심에 목마른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뭐 그런 문제입니다. 그것들을 산신령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퇴마물 같은 기분으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사뿐사뿐 앨범의 설현이 의상이 너무 맘에 안 들어서요. ^^ (뜬금)

 어쨌든 아직까지도 사람의 존재는 기억에서 기인한다라는 생각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그 사람은 존재하는 것이다. 라는 것... 반대로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소멸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ㅁ님의 태도도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향상심이 강하달까...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달 까... 뭐 그런 부분입니다.

 제목에 #1 이 들어간 건 뒷이야기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계획을 두 편으로 잡았기 때문에 12월에는 이 다음 이야기를 쓸 생각입니다. 이번 편에 등장하지 않았던 지민이와 혜정이도 출연시키면서 미처 다 다루지 못 한 이야기들을 얘기해 볼까 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덕질 안에서 행복하시기 들을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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