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여름이다.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빛.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방울. 올라오는 열기로 인한 지독한 짜증... 짜증... 짜증...!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처음 겪는 여름은 후덥지근하기만 하다. 갑갑한 교실에서 아이들에 둘러 싸인 채 때 이른 입시의 스트레스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나는 가열차게 야자를 때려치고 석식마저 마다한 채 아직도 대낮같은 마을의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딱히 뭔가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발길 가는데로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속을 좀 식히고 싶었을 따름 이었다. 결코 어떤 일탈적이고 독특한 이벤트를 기대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에에....? 미주 언니?"
"어? 쪼고딩....?"
나도 모르게 놀라 이름을 부르고 아는 척을 해버린 후에 나는 이미 주워삼킬 수 없이 떡 벌어진 입을 황급히 손으로 가로 막고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일 년 내내 갈아입기는 하는 건지 의문인 파란 츄리닝. 항상 묘하게 풀려 있는 의욕 제로의 눈동자. 그냥 지나쳐 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눈이 마주쳐 버린 후라 어쩌지도 못 한 채 나는 언제나 일관된 모습을 보이는 우리 앞집 자취생 언니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수상한 폼으로 전봇대 뒤에 숨어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목격한 충격으로 순간 얼어 있었다. 아니 저게 지금 뭐 하는 짓이래? 뭔 이상한 짓을 하려고... 근데 가만.. 쪼고딩? 누가 쪼고딩이라는 거야! 내가 댁보다 키도 한참 더 크...!
"빨리 이리 와!"
"읍!"
뭐라 화를 내기도 전에 대뜸 달려든 언니의 손이 내 입을 가리고는 질질 끌고 가 전봇대 뒤의 어둠속으로 집어넣는다. 불의의 습격에 완전히 당해버린 나는 언니의 손에 붙들린 채 발버둥을 치며 한껏 앙칼진 표정으로 눈을 치켜떠 쏘아 봐 주었다. 그랬더니 입가에 검지 하나를 가져다 댄 채 조용하라는 듯이 언니가 작게 쉿 소리를 낸다.
"들키겠어. 조용해."
"뭘 들켜요! 대체 이게 뭐 하는 짓..."
"범인을 잡으려는 거야."
"에엑....?"
뭔 소리 하냐는 듯이 보았지만 미주 언니는 오히려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내게 전봇대 너머 맞은편 건물을 손으로 가리켜 보았다.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학교를 오고가며 익히 보아왔던 다 망해가는 낡은 무인 오락실의 모습이 보였다. 저게 뭐...?
"내 자전거 훔쳐 간 범인을 꼭 잡고야 말겠어!"
......에에엑?!
Old bike game
written by. 녀놘
사건의 진상을 들어보면 이렇다. 어젯날 남들 다 일하러 나간 늦은 오전시간대가 되어서야 밍기적 거리며 일어난 언니는 별 생각 없이 자취방에 앉아서 하품만 늘어지게 하고 있다가 심심한 마음에 이곳 오락실로 향하게 되었단다. 물론 언니가 애지중지 하는 그 자전거를 억척스럽게 타고 온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리고 자전거를 오락실 내부의 출입문 옆쪽에 고이 세워둔 채 언니는 게임에 집중하였다. 그러기를 한 시간여 후에 돌아가기 위해 보았을 때 자전거는 사라졌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특이할 것이라고는 없는 단순 도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자전거 꼭 찾아야 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살짝 톤이 높아진 소리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날 바라보는 미주 언니를 보며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실 언니의 자전거라면 나도 오고가며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 문제는 그 자전거라는 게 당장 고물상에 팔아넘겨도 제값을 받지 못 할 거 같이 낡아 빠진 자전거였다는 거다. 몰개성한 디자인과 함께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처럼 내려앉은 먼지와 잔뜩 녹이 슬어 지저분한 외관, 그리고 바람이 반쯤은 빠져있는 홀쭉한 바퀴. 그나마 좀 특이한 점이라면 핸들 앞쪽으로 요즘 자전거에서는 보기도 힘든 피크닉 풍의 커다란 나무 바구니 같은 게 달려 있다는 것 정도였다. 뭐, 분명 그런 자전거라도 과거에는 자신의 안장 위에 누군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소녀를 태우고 시골길을 가로지르며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던 추억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지금에 와서는 그저 구시대의 폐물이나 다름이 없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런 자전거를 가져갔다고? 애초에 그게 과연 훔쳐갈 가치가 있는지 부터가 의문이다.
"내가 얼마나 아끼던 건데! 꼭 범인을 찾을 거야!"
"네. 네. 알겠다고요.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범인을 찾으시겠다는 거예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은 질문에 미주 언니가 눈을 반짝인다.
"이미 용의자는 정해놨어."
꽤나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탓에 나도 모르게 그러냐 하고 넘어갈 뻔 했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약간 뚱해진 미주언니가 어깨를 으쓱인다.
"용의자는 세 명이야. 파란 견장을 차고 있던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 한 명. 너네 학교 교복을 입고 있던 여자애 한 명. 그리고 웬 중학생 남자애 한 명."
"저기... 도대체 용의자를 뽑은 기준이 뭐에요?"
"그 때 오락실 안에 나를 제외하고 사람이라고는 그렇게 달랑 세 명 뿐이었거든."
뭐야 그게... 그냥 단순하게 같이 있던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뿐이잖아?
"오락실 밖에 있던 사람이 몰래 들어와 가져갔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저 오락실이 문이 엄청 낡아서 누가 들어오거나 나갈 때마다 삐걱거리고 소리가 엄청 크게 나거든. 근데 내가 있는 동안 그 소리가 들린 건 딱 세 번 뿐이었어.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오락실에서 나갔으니 그럼 나보다 먼저 나간 셋중에 범인이 있을 거라는 소리야."
헤에... 평소 마주치며 실없는 언니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리있게 말은 잘 한다. ....그러시단 말이지. 하지만 아직 완전히 납득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락실이면 언니도 저기서 오락하고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럼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못 들었을 수도 있죠."
내가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되묻자 질렸다는 듯이 미주언니가 나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나를 끌고는 오락실 앞으로 다가간다. 이리저리 사방을 기웃거리고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미주언니는 나를 보고는 보란 듯이 오락실의 문을 잡아 당겼다.
- 끼기기기긱
순간 쇠 끼리 부딪히며 긁는 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흠칫 놀라 귀를 틀어막고는 나는 반사적으로 미주 언니를 바라보았다. 정말 굉장한 소리다.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미주 언니는 이제 알겠냐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거 봐. 오락하고 있다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소리가 아니라니까."
"확실히 그렇네요..."
어쩔 수 없이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반쯤 열린 문 안으로 오락실 안을 들여다보자 어두침침한 조명 밑으로 사람 한 명 없이 적막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불이 꺼져 있는 기기들 사이로 몇 몇 군데에서만 조그맣게 불빛들이 점멸하며 소리들을 내뱉고 있다. 정말 유지되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의 폐건물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저기 전봇대에 숨어서는 뭐 하고 계셨던 거예요?"
왠지 꺼림칙한 느낌에 얼른 오락실의 안에서 시선을 떼고는 미주 언니를 돌아보자 당연하지 않냐는 듯 언니가 허리에 손을 척 얹고는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범인은 반드시 범행현장에 돌아온다! 잠복수사라고! 잠.복.수.사."
아아... 그러십니까? 뭐 이제 확실히 이 인간이 여기서 무슨 바보짓을 벌이고 있었는지는 전부 파악되었다. 자, 그럼 이제 궁금증은 모두 풀렸다. 더 이상은 볼일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자, 그럼..." 이라며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돌아서려고 했다.
"야. 그러고 보니 너 나랑 같이 범인 잡으러 다니지 않을래?"
"에엑?"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돌아서던 몸을 붙잡는 손길에 뿌리치려고 허둥거리면서 나는 얼빠진 얼굴로 언니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꾹 참고 들어준 것도 대단한데 이젠 같이 도둑놈을 잡으러 다니자고? 게다가 애초에 우리가 이런 것 까지 부탁할 정도로 친한 사이냐고!
"저, 죄송하지만 전 할 일이 많아서...."
"너 어차피 이대로 집에 가면 할 것 없다고 심심해서 뒹굴고 있을 거잖아."
읔... 순간 정통으로 깔끔하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 한 켠이 시리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이 언니와 이렇게 안면이 튼 것도 휴학생인지 백수인지 구분이 안 갈만큼 늘어지게 하루를 보내는 언니와 하루가 멀다 하고 야자를 빼먹고 오는 내가 서로 놀 사람이 없어 뒹굴 거리다가 우연히 집 앞에서 요 근래 몇 번 마주쳐서 잡담을 나눈 것 때문이었다. 뒤늦게 후회 해봐도 이제와 바쁜 척 해봤자 통할 상대가 아니다.
"그렇게 똥 씹은 표정하지 말고 좀 도와주라. 심심하잖아? 널 위해서도 특별히 부탁하는 거라니까."
참담한 표정이던 내 얼굴이 언니의 말에 더 잔뜩 구겨진다. 말이나 못 하면 덜 밉기라도 하지. 어지간하면 놓아주지 않을 심산인 것 같아서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기사 생각해보면 어찌되었든 간에 확실히 요즘의 나는 따분해하고 있던 것은 확실하다. 왜 그런지 괜히 기분만 붕붕 떠서 손에 잡히는 것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는 해야만 될 것 같은 불안함에 조바심은 가득한 상태이다. 결국 이도저도 못 하는 상태에서 나는 나 몰라라 찝찝한 마음으로 멍하니 짜증만 부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기회에 잠깐 기분전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잡을 생각인데요? 설마 여기서 계속 숨어서 기다리자는 건 아니겠죠?"
졌다는 생각에 한숨을 포옥 내쉬며 물었더니 수락할 줄 알았다는 듯 언니가 고른 치열을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사담이지만 하여간 날백수인 주제에 이러고 웃을 때만큼은 예쁘다고 인정해줄만 하다. 의외로 제대로 꾸미고 다니면 예쁘장한 사람일지도....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잠시, 그 순간 언니는 무서운 기세로 내게 돌진해오더니 그대로 날 낚아채고는 그대로 골목가의 어둠속으로 밀어 붙였다. 언니의 육탄돌격에 그대로 벽에 부딪히며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온다. 이 언니가 진짜...! 하루에 벌써 두 번째 급습을 당한 터라 그대로 확 걷어차 줄까 생각까지 하며 노려보는데 눈앞으로 바로 언니의 옆얼굴이 다가와 있다. ....어라? 이거 너무 가깝지 않아?
"야, 아무래도 네가 행운을 가져다주나 보다. 나타났어. 그 중학생 녀석."
에? 설마? 진짜...?! 당황한 마음도 잠시 잊고 언니의 어깨 너머를 슬쩍 바라보자 확실히 단정치 못 해 보이는 용모의 남학생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평범한 중간키에 제법 핸섬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어딜 보나 평범한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 분위기다. 진짜다! 나타났다! 이런 어이없는 급전개가 가당키나 한 말이야?
"어때? 내 말대로 범인은 반드시 돌아오지?"
"우연이에요. 우.연. 저... 그런 건 아무래도 됐으니까 이제 좀 떨어져 주시면 안 돼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살짝 몸부림치자 그제야 언니가 나를 돌아본다. 당장 고개만 조금 움직여도 서로 맞닿을 듯 한 밀접한 거리. 어쩐지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고는 긴장한 채 돌아본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동안은 제대로 관심이 없어서 보지 못 했던 언니의 예쁘게 생긴 눈동자라던가 오똑 솟아 끝이 둥그스름한 코 그리고 시원한 입매 같은 것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와 박힌다. 어깨와 손을 붙잡힌 채 벽에 이렇게 몰아 붙여져 있으니 이성적으로는 아무 상황도 아니라고 끊임없이 되뇌이지만 어쩐지 심장박동이 자꾸만 빨라져서 터질 것 같다. 얼굴만 잔뜩 붉힌 채로 눈만 깜박거리고는 붉은 기운이 맴도는 언니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더니 나만큼이나 놀라서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있던 언니가 잠시 후에야 뻣뻣하게 굳어 있던 손을 놓고는 퍼뜩 뒤로 물러나 섰다. 화장기 없는 진한 살결냄새가 그와 함께 멀어져 어쩐지 아쉬움을 남긴다. 언니는 한참 후에야 땅바닥만 바라보고는 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사과했다.
"어... 미안. 일부로 그런 게...."
"됐어요.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할래요? 어딘가 가는 거 같은데 따라가 볼까요?"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 갰다고 생각해서 괜스레 이미 우리가 숨은 골목길을 지나쳐 멀어져 가고 있는 남학생의 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소에는 보여준 적 없는 스마일까지 한껏 장착하고서다. 그런데 미주 언니는 그런 내 성의는 보지도 않고 여전히 땅바닥만 보고는 뭐라 시원하게 말도 안 하고 그저 작게 고개만 끄덕여 댔다. 으아... 이 언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렇게 생기지 않은 사람이 왜 이럴 때만 수줍은 척이야. 누구 어색해서 죽는 꼴 보고 싶어?!
속으로 실컷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언니의 손을 붙잡고는 남학생의 뒤를 쫓아가자 뻘쭘거리고 언니가 따라온다. 이리저리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오는 몸. 뭐 하자는 거야 정말! 애써 잡생각들을 쫓아내며 걸어가자니 어느 샌가 남학생을 쫓아 한적한 공원가 주변에 도착하게 되었다. 슬슬 인적도 적어져서 들키지 않도록 숨을 곳을 좀 더 신중히 고르며 벽 뒤로 고개만 빼곰히 내민 채 바라보자 남자애가 공원 안쪽으로 쏙 들어간다. 일단 쫓아오긴 했는데 이후엔 어떻게 해야 할까.... 남자애가 언니의 그 고물 자전거를 끌고 다니는 걸 발견한다면 그게 베스트겠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벌써 날도 많이 저물었고 여기 사람들도 잘 안 오는 곳인데 이런데 오는 걸 보니 좋은 일은 아닌 거 같은데요?"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휙 돌아보자 아까 전부터 줄곧 무슨 생각에 빠진 건지 멍하니 땅만 바라보고 있던 미주언니가 내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고는 살짝 인상을 쓴다.
"야, 너 무슨 서클렌즈나 그런 거 끼냐?"
"네? 그게 뭔..."
"입술에는 뭐 바르는데?"
"아니, 잠깐만. 지금 그런 말이 왜 나와요!"
"아니, 뭐... 오늘 보니까 좋아 보이기에 그거 나도 좀 써볼까 해서...."
아... 정말 언니만 아니었으면 한 대 확 후려갈겨 주고 싶다. 괜스레 얼굴만 확 달아올라져 버려서 헛소리 하지 말라고 어영부영 쏘아주고는 고개를 외면해 버렸다. 이 언니는 왜 아직까지도 아까 상황에서 벗어나지를 못 하고 있는 거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 언니는 구제불능이다. 페이스에 넘어가지 않도록 심호흡을 한 차례 몰아쉬고는 천천히 벽 뒤를 돌아 나와 남자애가 사라진 공원 안쪽으로 다가가자 조금씩 공원 안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음들이 커져갔다.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떠드는 목소리와 시끄러운 엔진소리 같은 것에 의문이 든다.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고 다가가 드디어 안쪽에 이르자 다행히 뒤는 잘 따라오고 있었는지 미주 언니도 내 옆에 다가와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꽤 많이 모여 있나 본데?"
"그러게요."
용의자를 앞에 두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언니는 이제서야 살짝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왠지 안도의 한숨이 세어 나와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풀 너머로 고개를 들고 살펴보았다. 열댓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복이나 교복 차림의 중고등학생들. 어두워진 하늘을 무색하게 할 만큼 잔뜩 밝혀져 있는 화려한 조명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나도 모르게 머리가 아려온다.
"어쩔 거예요. 이제?"
일단의 무리 가운데 킬킬 거리고 웃으며 끼어있는 용의자 남학생. 온갖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배기관의 소음을 웅웅거리고 있는 십여 대의 개조 바이크 중 하나에 올라타 있는 남학생의 모습에 그만 기가 차고 말았다. 설마하니 폭주족이었다니. 자전거에서 개조 바이크는 너무 비약적인 진화 아니야? 불량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행색의 면면들에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는데 부스럭 거리고는 옆에서 수풀을 헤집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 어라?
"야, 거기!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이 인간아아아아!!!!! 말릴 새도 없이 어느새 대뜸 폭주족의 무리 속으로 걸어 나간 미주 언니의 뒷모습에 그만 속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바보다. 리얼 바보다. 저 앞뒤 재지 못 하는 무데뽀적인 성격은 도대체 뭐냔 말이야!!!
"뭐야 이건?"
갑작스레 등장한 츄리닝 차림의 헐렁해 보이는 인상을 한 여자의 모습에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몇몇인가 다가와 미주 언니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위험해! 위험하다!! 빠르게 자신을 포위해오는 남자들의 모습에 미주 언니도 그제야 겁이 나는지 주춤하고는 불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물러나 섰다. 아아... 정말!
"언니!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여기서 뭐해요? 빨리 가요!"
"어... 엉?"
"이 언니가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해요. 죄송합니다. 이해들 하세요."
나도 모르게 불쑥 뛰어나가서는 언니의 팔짱을 붙잡고 질질 뒤로 잡아 끌면서 최대한 해맑게 폭주족의 무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웃는 낯에 침 뱉을 리가 없다. 우리는 지나가던 순진한 시민들입니다. 제발 모른 척 해주세요!
"이것들 뭐야. 너희 거기 안 서?!!"
망했다. 이 언니 때문에 이게 무슨 봉변이야.... 흉흉히 다가오는 남자들을 보며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눈을 꼭 감고는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님 하면서 온갖 신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여러분들 저는 죄가 없어요. 죄라면 그저 앞집에 정신 나간 이상한 언니를 둔 죄 밖에는 없는 걸요. 그러니 벌을 내리시려거든 그건 몽땅 이 언니에게....
"어? 수정이 아니야?"
간절히 기도를 외우고 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뜨고는 바라보았다. 좁혀 들어오던 남자들의 틈새 사이로 저만치 커다란 바이크의 보조석에 올라타 있던 여자 한 명이 나를 보고는 아는 체를 하고 있다. 왠지 누르면 손가락 끝이 푹 파고들것만 같이 말랑말랑하게 생긴 인상의 언니. 달큰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던 지애 언니가 나를 보고는 반갑다는 듯이 웃고 있다.
"야, 걔 놔 줘. 걔 내 동생 친구야."
지애 언니의 말에 미주 언니와 나를 좁혀 들어오던 남자들이 김샜다는 듯이 제각각 한 마디씩을 하며 우리를 쏘아보고는 그대로 무리들의 바이크로 돌아갔다. 저 언니가 여긴 왜....? 중학교 때 친구였던 짝꿍의 언니라 집에 놀러가서 몇 번인가 얼굴도 보고 밥도 같이 먹었던 기억이 있다. 분명 기억 상으로는 지금쯤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나이일 거다. 요즘에 이런 무리들과 어울리고 있던 걸까? 얼떨떨한 기분에 미주 언니와 손을 꼭 부여잡고는 서 있자 지애 언니가 태연히 다가와 나를 바라보고는 놀랐냐고 가볍게 옷을 털어준다.
"근데 무슨 볼 일?"
어미를 생략한 간략한 물음에 뭐라 말해야 될지 망설였다. 그러고 있자니 미주 언니가 또 불쑥 나와서 무리들 사이에 있는 남자애를 가리켜 보았다.
"쟤 말이야. 혹시 내 자전거 가져가지 않았냐고 물어봐 줄 수 있어?"
"자전거? 무슨 소리야...."
앞으로 나선 미주 언니를 올려다보며 지애 언니가 실소를 터트린다. 이리저리 미주 언니를 빤히 관찰하던 지애 언니가 나를 바라보고는 묻는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언니가 어제 12시쯤에 오락실에 갔다가 거기서 자전거를 잃어 버렸대요. 그래서 거기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니는 중이에요."
"흐응~ 그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언니는 이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엔 땡이네. 쟨 아니야."
"네?"
"어제 점심때라면 쟤 우리들이랑 그 근처에서 만나서 놀았거든. 물론 바이크를 타고."
단호히 얘기하는 지애 언니의 말에 더 이상 묻기가 애매해져 버렸다. 정말로 저 남자애가 어제 이 무리들과 어울려 놀았던 건지, 아니면 지애 언니가 일이 복잡해지지 않게 대충 감싸고 도는 건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애초에 이 언니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도 나는 아는 바가 없다. 그저 몇 번 마주친 친구의 언니일 뿐이다.
"믿을 수 있는 거지?"
"뭐?"
하지만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을 사람이 여기 있었다. 숨기지 않고 또 그대로 본심을 묻는 미주 언니의 말에 지애언니의 눈썹 끝이 미묘하게 꿈틀 거렸다. 미주 언니를 쏘아보다가 슬쩍 나를 곁눈질한 지애 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아무튼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도록 해."
"아... 고맙습니다."
돌아선 지애 언니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해보이고는 뭐라 더 할 말이 남았는지 지애 언니를 붙잡으려 하는 미주 언니의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질질 끌며 공원을 빠져 나왔다. 슬쩍 돌아보자 지애 언니는 조명이 화려한 바이크 무리의 가운데에서 즐거운 듯 웃고 있다. 으휴..... 어쩐지 복잡 미묘한 심경이 되어서 나는 유난히도 밝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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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언니가 용의자들을 말할 때 가장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으로 그 남학생을 생각하고 있던 나는 속으로 조금 맥이 빠져버렸다. 확실히 그 남학생은 범인이 아니었다. 상상도 못 했지만 어쨌든 폭주족의 무리였던 그 애는 이리 생각하나 저리 생각하나 언니의 그 낡은 고물 자전거를 탐낼만하지는 않아 보였다. 게다가 확실하진 않아도 지애 언니의 증언도 있다. 뭐 미주언니는 그래도 아직 의심을 다 풀지는 않은 눈치였지만 암만 그래도 나 같으면 밤에는 그런 바이크를 몰고 다니면서 평소에 언니의 그 고물 자전거를 끌고 다니는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남학생을 일단 의심에서 지워버린 우리는 다음 용의자로 나와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던 여학생을 찾아보기로 했다. 같은 학교라고 하니 이번에 찾는 건 조금 용의하려나 했지만 의외로 언니가 말하는 학생을 특정 짓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도대체 조금 긴 머리에 하얀 피부를 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애라는 게 누구를 말하는 거야? 조금 더 설명해보라고 말했더니 "눈도 반달 같고 입 꼬리도 귀엽게 생겼었어. 뭔가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는데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면 더 예뻤을 거야." 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이 사람아.
"야. 너 요새 왜 이렇게 멍 때리냐?"
옆에서 툭 쳐오는 친구의 손길에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모습에 점심시간 이후에 같이 스탠드 위 벤치 주변에 모여 앉아 있던 친구들이 이상하다는 눈길로 바라다본다. 요새는 계속 이런 식이다. 미주 언니가 찾고 있는 그 우리학교 여학생이 누굴까 생각하느라 나도 모르게 자꾸만 딴생각에 집중하고 만다.
"너 요즘 수상하단 말야. 근데 어제 학교 앞에 찾아왔던 언니는 누구야? 엄청 예쁘게 생겼었는데?"
누굴 말하는 거야? 순간 갸웃거려지던 고개가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한 사람에 의해 멈춰 선다. 미주 언니 말하는 거구나...
"그냥 아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 언니가 뭐가 예쁘다고 그러냐."
부러 더 까칠하게 내뱉어 주고는 인상을 썼다. 어제 하교 시간이 조금 안 돼서 우리 학교에서 그 여학생을 찾겠다고 언니가 교문 앞에 찾아 왔더랬다. 예의 그 파란 츄리닝 차림에 금방이라도 자다 온 사람처럼 반쯤 쌍꺼풀이 내려앉아 맹해 보이는 눈을 하고는 교문 앞에 서 있는 꼴에 괜스레 내가 낯이 달아올라서 야단을 쳤다. 근데 이게 웬 걸? 지나가는 학생들이 한 번쯤은 다 뒤돌아보고는 누구냐고 예쁘다고들 수군거리고 지나친다. 이것들이 단체로 눈에 뭐가 씌셨나.... 특히나 남학생들은 대놓고 흘깃 거리는데 어쩐지 그 꼴들이 맘에 안 들어서 옆에서 계속 으르렁 거리고 서서 하나하나 쏘아보느라 진짜 아직까지도 눈이 튀어나올 듯이 아프다.
"게다가 결국 찾지도 못 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한숨을 푸욱 내쉬니 옆에 있던 친구가 더 이상하다는 듯 한 눈길로 바라본다. 아아... 짜증나! 아닌 게 아니라 그 고생을 했으면 뭐라도 건졌어야 할 텐데 결국 수확은 제로. 겨우 알아낸 거라고는 그 시간에 하교하는 학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건 뭔가 이상하다. 석식시간 이후부터 야자 시간 전까지 하교하는 학생이 아니라면 야자가 끝나고 나서야 하교하거나 그 중간 시간 즈음에 하교한다는 말인데 언니가 말한 오락실에서 만난 여학생의 상상 속 이미지와는 어딘지 부합되는 면이 없다. 뭐 꼭 불량학생이거나 모범적이지 않은 사람일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런 대낮에 그 허름한 오락실 안에 혼자 들어와 앉아 있는 여학생이 평소에는 야자까지 꼬박꼬박 하는 학생이라면 왠지 나 스스로에게 개탄스러울 것만 같다.
"아니면 수업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하교한다는 소리인데....."
턱에 손을 괴고는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더니 확실히 이편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마침 언니가 오락실에서 그 여학생을 만난 것도 겨우 점심시간 정도가 지날까 말까 한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 그렇다면 용의자인 그 여학생은 오전 수업 정도만 시간을 보내다가 학교를 나섰다는 소리가 된다. 물론 아예 학교를 안 오고 교복차림 그대로 집에서 나와 밖을 싸돌아다녔을 가능성도 있는 거지만 그건 차후의 가능성으로 생각해 두기로 하자.
그렇다면 수업도 다 안 받고 오전 시간만 잠깐 빈둥거리다가 학교를 떠나버리는 대담한 여학생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얼핏 생각해봐도 그런 사람이라면 수소문해봐서 추려보면 손에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옆에서 다시 친구가 손으로 어깨를 툭 쳐온다.
"야, 너 저기 저 언니 알아?"
"응?"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돌아보니 옆에 있던 아이들이 하나같이 수군거리며 스탠드 아래 운동장의 한 구석을 바라보고 있다. 뭔데 그러는 거야?
"김지연이라고, 고3선배 들어봤어? 저 언니가 원조교제 한다고 소문난 그 언니야."
어...? 친구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점심시간 운동장의 이리저리 시끄럽게 돌아다니는 학생들의 무리 속에서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걸어가고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소문은 몇 번이고 들어 본 적이 있다. 나이 많은 아저씨 차에 타서 가는 걸 봤다느니 모텔에서 나오는 걸 봤다느니 하는 고3 선배의 얘기이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언니....?
"누가 그러는데 애까지 지웠다는 소리도 있더라."
"그래...?"
어쩐지 나도 모르게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살짝 찌푸려진다. 그저 뜬소문일지 어떨지는 모르는 거지만 심리적인 혐오감은 어쩔 수가 없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뿐이지만 벌써부터 학교에는 볼 일이 없는 것인지 가방하나를 등에 메고 걸어가고 있는 선배. 조금 떨어져 있는 거리였지만 이곳에서도 눈에 띌 만큼 묘하게 절룩이며 걷는 걸음걸이가 신경 쓰였다. 그런 불편한 걸음걸인데도 여자는 거릴 낄 것 없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고3인데 저러고 다니는 거 보면 인생 포기한 거 같지 않냐?"
"응? .....그러게."
마치 못 볼 걸 본 것처럼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는 친구의 말에 마지못해 대답하며 이제는 시선의 끄트머리에 걸린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흰 피부에 조금 긴 머리를 하고 있던 예쁘장한 얼굴. 몇몇 수군거리며 바라보는 학생들 속에서도 태연히 웃는 낯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반응도 즐긴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뭐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어쩐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뭐 굳이 내가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다시 용의자에 대한 생각에 집중하기 위해 기억 속에서 빨리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던 나는 순간 멈칫하고 굳을 수밖에 없었다. 어? 잠깐만! 긴 머리. 흰 얼굴. 웃는 낯. 그리고 제멋대로인 하교 시간. 미주 언니가 말한 여자, 저 선배잖아!!!
"윽.... 아이고! 배야!!"
"어? 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야... 나 점심 먹고 배 아파서 조퇴했다고 담임한테 말해."
"뭐?"
"아무튼 부탁한다!"
뒤에서 "야! 거기서!" 하는 친구의 외침을 흘려 들으며 나는 그대로 여자의 뒤를 쫓아 스탠드를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망할. 인정하기 싫지만 미주 언니 말대로 나는 용의자 찾는 데는 타고난 복이 있는가 보다. 벌써 이렇게 두 번째 운이 겹쳐주는 것 보면....
부리나케 내달려 교문 앞에 나와 두리번거리자 저만치 학교를 벗어나 길가로 들어서는 선배의 모습이 보인다. 재빨리 휴대폰을 들어서 통화버튼을 누르자 한참이나 연결음이 이어지다가 아직 꿈나라인건지 비몽사몽한 미주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뭐야... 왜?"
"언니. 당장 집에서 나와서 지금 우리 학교 쪽으로 뛰어 와요!"
"뭐? 어째서어.... 싫어. 잠 좀 자자."
"발견했다고요! 그 우리학교 여학생이라던 용의자!"
"정말?"
알겠다는 소리와 함께 뭔가 후다닥 뒤집어 지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통화가 끊긴다. 좋아. 그럼 나는 이제 미주 언니와 합류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저 선배를 놓치지 않고 미행하기만 하면 된다. 심호흡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뒤를 쫓아 발걸음을 옮기자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괜히 꺼림칙해지는 기분이다. 어휴... 내가 어쩌다 남의 뒤나 밟는 이런 꼴이 되었을까...
여자의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 탓에 미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틈틈이 미주 언니에게 현재 위치를 톡으로 적어 보내주면서 여자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는데 사실 별로 특별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냥 몇 분 째 길거리를 별 의미 없이 배회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딱히 일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홀로 이리저리 미묘한 절름걸이로 걸어 다니고 있는 여자. 타이트한 교복 치마 아래로 쭉 뻗은 새하얗고 가는 다리는 멀리서 보기에 딱히 다친 곳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어디 눈에 안 띄게 오래된 상처라도 있는 것 일까?
"야, 쪼고딩. 한참 헤맸네. 그 여자애 찾았다고?"
"어? 왔어요?"
벽 뒤에 숨어 지켜보고 있는데 미주언니가 헐레벌떡 뛰어 온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부여잡고 구부정하니 서 있는 모습은 역시 별로 몸을 움직이는 데는 소질이 없어 보였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뛰어서인지 고운 턱선을 타고 땀이 진득하니 묻어 흐르고 있다. 일상이 방바닥에서 뒹구는 것뿐인 사람이 오랜만에 큰 운동하셨다. 정말. 속에서 말로는 빈정대고 있었지만 어느새 시선은 언니의 얼굴가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햇살에 반짝하고 빛을 내며 바닥 위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쫓고 있었다. 자꾸만 클로즈업 되어 보이는 언니의 붉은기 맴도는 입술에 목구멍 안쪽으로 꼴깍 침이 힘겹게 넘어간다. 그 날 오락실에서 봉변 이후 요새는 언니를 만날 때 틈만 나면 이 모양이다. 내가 미쳤지. 미친 게 분명해. 저 언니가 뭐라고... 잡생각을 쫓기라도 하듯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다시 벽 너머로 여자를 돌아보았다.
"저 여자 맞죠?"
"잠깐...."
내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벽 너머로 흘깃하며 바라보는 미주 언니. 저만치 가게의 쇼윈도 앞에 잠시 멈춰 서 있는 가녀린 실루엣을 지켜보던 언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는 거 같네. 그나저나 용하기도 하다. 어떻게 찾았대?"
"이번에도 우연이에요. 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가요."
계속 보고 있으면 괜히 잡생각만 더 이어질 것 같아서 얼른 언니를 이끌 고는 여자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동안 선배는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별로 크지 않은 동네를 유유히 그저 걸어가고 있다. 정말로 그냥 남는 시간을 때우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가롭게 산책길을 나선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선배는 확실히 눈길을 사로잡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대놓고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는 교복차림을 입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얼핏얼핏 보게 되는 생글거리고 웃고 있는 예쁜 얼굴에서 어딘지 그대로 빨려 들어가 저 깊은 구렁텅이에 삼켜져 버릴 것 같은 치명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어찌되었든 절대 구설수에서 자유로울 인상은 아니다. 그 향에 꼬이기라도 하듯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떼지 못 하고 멈춰 선 사람부터 수군거리고 빠르게 지나치는 무리, 다가와 말을 걸었다가 금세 달아나는 사람까지 다양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미행 대상으로서는 놓칠래야 놓치기 어려운 쉬운 대상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옆에 미주 언니가 없다라는 전제하에....
"저 여자 예쁘지 않냐?"
또 한 무리의 남자들이 지나치면서 미주 언니를 가리키고 떠들고 간다. 저 앞에 선배만큼은 못 되어도 장난 아니게 신경 쓰일 정도로 미주 언니를 향한 남자들의 시선은 부담스러웠다. 도대체 길거리를 걷는데 뭔 시선이 이렇게 많이 날아와 꽂히는 거야! 헐렁한 츄리닝에 꾸미지 않은 맹한 모습으로 터덜거리고 걷는 모습을 하고도 도저히 은밀하게 미행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목을 끌고 있다. 어째서? 나 혼자 미행할 때는 전혀 이런 일 없었잖아!
"다음부터는 미행할 때 마스크라도 쓰고 와요!"
"왜? 그럼 더 의심스럽잖아. 자연스러운 게 오히려 더 의심가지 않는 법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어휴."
말을 말자. 정말. 남들이 보든 말든 그런 거에는 전혀 의식이 안 되는 타입인건지 태연히 걷고 있는 모습을 보니 울화통이 터진다. 아니 그렇게 얼굴에 철판이 두꺼운 사람이 어째서 그 때 오락실 앞에서는 나 몰라라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쓴다고 했던 틴트는 써봤어요?"
"어?"
"물어봤었잖아요. 예뻐 보인다면서요?"
"...어, 그게..."
그거 말했다고 어느새 얼굴이 확 빨개져서는 시선을 외면하고는 딴청을 피우는 모습을 보니 살짝 얼이 빠진다. 도대체 어느 쪽인 거야? 이 언니는....?
"야, 마트로 들어간다. 빨리 와!"
"에? ......네."
어색했던 건지 허둥지둥 말해놓고는 앞서 걸어가는 미주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즉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도 그렇고 저 언니도 그렇고 중증이다. 뭐 하자냐는 거냐. 이건....
언니를 따라 동네의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마트 안으로 들어섰더니 멀리서도 금세 선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시간대에 교복을 입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여러모로 눈에 띄는 짓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주목받을 만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어째서인지 이 경우에는 옆에 있는 미주 언니의 존재감에 나는 여러모로 주위의 관심으로부터 희미해져 있었다. 마트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미주 언니를 흘깃 거리고 돌아보는 시선들은 무수히 존재했다. 그런 여건인지라 도저히 미행이라고 부르기도 우스운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꿋꿋이 여자의 뒤를 밟고 있었다. 여자가 인적이 드문 애완동물 코너로 돌아서는 것을 보고 몇 칸 떨어진 장난감 코너에 숨은 우리는 조심조심 여자의 모습이 사라진 애완동물 코너로 접근했다.
"조심해요."
따라오는 미주 언니를 돌아보고는 검지가를 세워 입가에 대고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닌 게 아니라 근처에 사람이 뜸해지는 곳이라 조금만 방심했다간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다. 소리 나지 않게 주의해서 다가간 우리는 코너의 안쪽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여자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우리들의 미행은 알아차리지 못 한 것인지 선배는 코너의 한 점에서 머물며 가녀린 손으로 턱을 괴고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별로 크지 않은 동네의 마트답게 애완동물 코너에는 별다른 것 없이 몇 가지 사료들과 용품들만이 진열되어 있을 뿐이다. 고민하던 선배는 작은 캣푸드 캔 하나를 집어 들고는 유심히 캔의 겉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키우는 동물이 있는 것 일까? 어쩐지 선배의 분위기와는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누군가에게 애정을 줄 타입은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그녀가 작은 반려동물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이맛살을 찌푸리고 상상하고 있던 찰나에 선배는 집어들었던 캔을 그대로 자신의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응? 집어넣었다?
"야, 저거....."
살짝 불쾌감을 담은 미주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는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눈앞의 캣푸드를 가방 안으로 연거푸 밀어 넣고 있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집중해 관찰하고 있던 게 아니었더라면 눈치 채지 못 했을 만큼 교묘한 손놀림으로 작은 캔들이 몇 번이고 가방 안으로 사라진다. 분명 감시카메라도 있을 터인데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는 듯 한 태도이다. 돌아보자 미주언니는 그런 여자를 보고는 완전히 자신의 자전거를 훔쳐간 범인으로 확신하는 것처럼 눈빛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기사 저 정도라면 절대 한 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닌 걸로 보인다. 깔끔하게 범죄를 끝마친 선배는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자리를 떠났다.
"어쩔 거예요?"
"뭘 어째. 가서 잡아야지."
힐끗 거리고 불안히 물었더니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던 미주 언니가 짐짓 쎈척을 해보이며 성큼성큼 여자의 뒤를 쫓아 나간다. 어휴... 저 무데뽀하고는. 벌써 여자를 따라 저 앞으로 앞서 간 언니의 뒤를 따라 걸음을 재촉하며 괜스레 내가 죄 지은 마냥 누가 본 사람은 없는지 주변을 안절부절 돌아보며 마트를 빠져 나왔다. 여자를 따라 마트 밖을 나서서 얼마간 더 걷다가 인적이 줄어드는 장소에 들어서자 미주 언니는 단숨에 여자와의 거리를 좁히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만히 톡톡 건드렸다.
"저기, 잠깐만. 네가 마트에서 뭐 하는지 내가 보고 말았는데?"
대뜸 단도직입적으로 내뱉는 미주언니의 말에 여자는 멈칫 하고 멈춰 서더니 서서히 우리를 향해 돌아섰다. 여름의 햇살이 무색할 만큼 창백하리만치 서늘한 흰 빛을 띤 여자의 얼굴에서 예쁜 두 눈이 고이 접혀서 상냥하게 웃고 있다. 학교에 파다한 소문을 흩뿌리고 다니는 선배. 어떤 이유로든 간에 밖에서 같은 학교의 선배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 건 어딘지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다. 둘 사이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선 채 나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선배는 작고 앵두 같은 입술로 자신을 불러 세운 미주 언니를 올려다보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요?"
"어? 그래서 라니?"
망설임 없는 대답. 선배의 반문에 당황했는지 미주 언니의 팔 동작이 조금 커졌다.
"...네가 물건 훔치는 걸 봤다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거죠?"
"어떻게 하라니... 그야 당연히 마트에 가서 사죄하고 물건도 다시 돌려드려야...."
"싫다면요?"
말을 얼버무리고 있는 미주 언니에게 선배는 단칼에 잘라 거절의 의사를 말하고는 다시 한 번 생긋이 웃어 보였다. 그제서야 미주 언니도 허둥대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진다.
"싫다 이거지? 뭐, 좋아. 그나저나 너 나 본 적 없어?"
"무슨 소리에요?"
"며칠 전에 우리 오락실에서 본 적 있지? 내 자전거 네가 가져갔냐?"
미주 언니다운 화법이다. 빙 돌려 말할 것도 없이 미주 언니는 바로 따져 묻기 시작했다. 하기사 저 선배 상대로 말꼬리를 붙들고 말씨름 해봐야 득볼 것도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섬세함이라고는 결여된 언니의 말은 충분히 당혹스러울 만한 것 이었지만 선배는 특별한 표정변화 없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실래요?"
"어?"
"어디서 본 얼굴이다 했더니 그 때 오락실에서 본 분인가 보죠? 근데 왜 저한테 찾아와서 자전거 같은 걸 물어보시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훔쳐갔다는 증거라도 있던가요?"
선배는 빙그레 웃더니 자신의 가방에서 캣푸드 하나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선배의 가녀린 손가락 사이로 붙잡혀 있는 금속성의 캔이 그녀의 손길을 따라 미주 언니의 눈앞에서 흔들어진다.
"아니면 이렇게 도둑질이나 하는 아이니까 틀림없이 그 쪽 자전거도 제가 훔쳤을 거라는 그런 생각인가요?"
"어.. 그거야... 꼭 그런 건...."
"뭐 틀린 생각은 아니네요. 이렇게 물건을 훔치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 쪽 자전거라고 못 훔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뭐야? 훔쳐갔다는 거야, 말았다는 거야?!"
"글쎄요.... 전 가끔 스트레스가 쌓이면 취미로 이런 도둑질은 흔하게 하고 다니거든요. 뭐 필요하다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엄밀히 말하면 저한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들일 때가 더 많죠. 그보다 중요한 건 남들 눈에 띄지 않고 뭔가를 몰래 훔친다는 그 쾌감뿐이에요."
즐거운 표정인 여자를 바라보고 그게 자랑이냐? 라고 묻는 듯 한 얼굴이 되어서 미주 언니는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 당혹감과 불쾌함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미주 언니를 향해 선배는 가볍게 웃더니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잘못 짚으셨네요. 전 아니에요. 우리 오락실에서 봤다고 했죠? 그 날 아저씨랑 만나는 날이라 거기서 잠깐 약속시간까지 시간을 때우려고 앉아 있었을 뿐이에요."
"아저씨?"
"내 봉이요. 꽤 잘나가는 아저씨에요. 마침 만났을 때 찍은 사진도 있는데 보실래요? 어차피 제가 이렇게 말로 해봤자 믿지도 않으실 테니까."
입가 가득 짙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선배는 미주 언니의 앞에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내보여 주었다. 언니의 뒤로 조금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자 액정화면 가득 한 중년의 남성과 눈앞의 선배가 차의 뒷좌석에 앉아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교복 블라우스 상의 단추가 몇 개인가 풀려진 채로 남자의 허벅지 위로 걸터앉은 채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있는 모습인 선배는 남자와 얼굴을 맞댄 채 조금 상기된 얼굴로 예의 그 눈웃음을 화면 안에서 짓고 있었다. 선배가 화면을 조작해 사진의 정보를 띄우자 정확히 미주 언니가 자전거를 잃어 버렸다던 날짜와 동일한 날짜 정보와 함께 자전거 도난을 알아차린 시간으로부터 1시간여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 찍혀 나왔다.
"어때요? 나는 이 날 아저씨 차 타고 바닷가를 보러 다녀왔어요. 그 오락실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바닷가까지 달려서는 해변가 주변에서 차를 세우고 이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믿으실만 하죠?"
"이건...."
예상치 못 했던 갑작스런 사진에 미주 언니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언니는 황당하다는 듯 선배를 바라보고는 금방이라도 뭔가 터져 나올 것처럼 입을 뻐금거리며 부들거리는 손가락으로 선배를 가리켰다.
"너, 이...."
"어쨌든 제가 아니란 걸 아셨을 테니 저는 이만 가 봐도 되겠네요."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인지 채 말을 내뱉지 못 하고 선 미주 언니를 향해 선배는 빙그레 고혹적으로 웃어보이고는 그대로 뒤돌아 서버렸다. 그제서야 미주 언니는 한 발짝 내딛으며 뒤늦게 선배를 붙잡으려 하였다.
"아, 그리고 말이죠....."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붙잡아 세우려 하는 미주 언니를 향해 멈춰 선 선배가 고개를 돌려 바라다본다.
"그래도 의심이 안 풀리신다면 한 번 찾아오세요. 그런 낡은 자전거보다 몇 배는 더 좋은 거 해드릴 테니까."
".....뭐?"
선배의 말에 미주 언니는 완전히 맥이 빠져 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대하며 선배는 그저 생긋이 미소 짓고 있을 따름이다. 마침내 더 이상 미주 언니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선배는 그 때 까지 완전히 대화의 중심에서 물러나 있던 내게 시선을 돌렸다.
"너 우리학교 후배지? 내일 친구들이랑 떠들 거리 하나 더 생겨서 좋겠다?"
미주 언니에 가려서 철저히 존재감을 무시당하고 있던 나에게 선배는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떠들 거리라고...? 우리는 자리를 뜨지 못 하고 선배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히듯 서 있었다. 떠들 거리.... 선배가 남기고 간 그 말을 입안에서 곱씹어 보자 당장이라도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저 여자애는 그럼 어쨌든 아닌 거네?"
아무렇게나 길거리의 벽에 기대 주저 앉은 채로 미주 언니는 표정 없는 씁쓸한 모습으로 내게 중얼거렸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언니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것처럼 머리를 헝클이며 일어나 섰다.
"됐다. 이만 가자."
"네."
"너 학교도 중간에 나와 버렸지? 우리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래?"
웬일이야? 이 구질구질한 반백수 휴학생 언니가 무슨 일로 맛난 걸 먹으러 가자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맛있는 거라도 얻어먹으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해야겠다.
"좋아요."
"그나저나 너 돈은 있지?"
"........?"
"계산해야지. 계산."
당연하다는 듯 한 얼굴로 내 얼굴을 보고 미주 언니가 고개를 주억 거린다. 아.... 어쩐지 방금까지 축 쳐져 있던 것이 기운이 불끈불끈 샘솟는 것 같다. 이마 한 켠에 힘줄이 불끈 솟아오르는 걸 느끼며 나는 미주 언니를 향해 화사히 웃어 주었다. 야, 이! 화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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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새하얀 공간에 나는 미주 언니를 붙잡아 벽에 몰아세우고 바라보고 있었다. 눈부시게 흰 피부 위로 새까만 눈동자가 불안히 떨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 아래 쭉 뻗은 날렵한 콧선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빨갛게 농익은 채 자리 잡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채 온갖 시선과 감각을 끌어들이며 유혹 하는 입술....
입술... 입술... 입술...
어느새 미주 언니의 얼굴대신 입술만이 흰 공간에 두둥실 떠올라 나는 그것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겨 있었다. 완전히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상황이 되어서 나는 그 입술에 서서히 입가를 가져다 대었다.
"내일 학교 가서 얘기할 거리가 생겼네?"
뒤에서 들려오는 나긋하고 왠지 놀리는 듯 한 목소리에 흠칫 돌아보자 지연선배가 빙긋이 웃고 있다.
"학교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할 지 기대되는데?"
지연선배의 홀리듯 꺄르륵 거리는 웃음소리에 나는 귀틀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하지 마. 그만 해. 그만. 제발 그만....!!
"헉...."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나 앉았더니 아침이 밝은 창 사이로 햇살이 밝게 비쳐들고 있었다. 밤사이 더위와 악몽의 후유증으로 진득하니 묻어 나와 있는 식은땀을 손으로 쓱쓱 닦아내자 서늘한 기운이 피부에 내려앉는다. 아... 이게 뭔 꿈이냐.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옆에 던져놓았던 휴대폰을 집어 들어 대충 시간을 확인하고는 주섬주섬 침대 밖을 향했다. 욕실에 들어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자 그제야 좀 기분이 진정되는 것 같다. 입술이라니... 미쳤지, 진짜. 벅벅 얼굴을 문지르고는 눈을 떠 세면대의 거울을 보자 약간 퀭해 보이는 눈동자가 마주보고 있다. 거의 닿을 뻔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술 끝을 매만지고 있다가 급히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정신차리자. 아무래도 어제 그 선배를 만나고 너무 고되었나 보다.
어쨌든 주말이다. 이제 미주 언니의 자전거 사건에 의심되는 용의자도 단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꼭 범인을 잡겠다며 언니는 불타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자기 사는 자취방으로 찾아오라고 어제 헤어지기 전에 언니가 말했던 터라 나는 분주히 나갈 채비를 서두르며 이리저리 옷을 입어보다가 결국 활동하기 편한 가벼운 차림으로 집밖을 나섰다.
집 앞에는 미주 언니가 살고 있는 자취방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곳으로 미주 언니는 항상 내가 야자를 빼먹고 돌아오는 날이면 자취방 앞에 놓여져 있는 평상위에 늘어져 누워서는 심심함에 몸을 비틀고 있기 일쑤였다. 슬쩍 휴대폰의 시계를 다시 확인하고는 나는 왠지 떨리는 마음으로 미주 언니네 문 앞에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한차례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난 뒤에 집 안에서 "네~" 하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어찌할 줄 모르고 완전히 긴장해 버려서는 뻣뻣이 굳어서 있자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얼굴 하나가 빼곰히 고개를 내민다.
"누구세요?"
"네? 아, 저...."
화장기 없는 작고 귀여운 얼굴 하나가 나를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미주 언니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행인건지 불행인건지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마음이 되어서 나는 거의 울상에 가까운 얼굴로 더듬더듬 자기소개를 했다.
"저, 앞 집 사는 아인데요. 여기 미주 언니가 아침에 찾아오라고 해서...."
"미주가요?"
미주 언니의 이름이 나오자 여자는 살짝 반색을 하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라며 물러나 서는 여자는 내 어깨쯤이나 닿을까 싶은 키에 체구도 앙증맞게 생긴 모습이었다. 조금 인상이 희미하기도 했지만 살짝 웃을 때 깊게 파여 들어가는 보조개라던가 여름이라 조금 헐렁하게 차려입은 캐릭터 티가 무척이나 어울리는 용모였다.
"이웃에 사시는 분인가 봐요. 음... 그러니까...."
"아, 저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에요. 이름은 류수정이고... 그러니까 편하게 말 놓으셔도 돼요."
"수정이요?"
어색함에 뻘쭘하게 웃으며 다짜고짜 이름부터 얘기하니 여자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에? 왜... 왜요?"
"아니. 저.... 내 이름도 수정이거든. 이수정. 인연인가 보네요. 아무튼 잘 부탁해. 미주는 저 방에서 자고 있을 거야. 가 봐. 나는 뭐라도 내올 테니까."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꾹꾹 눌러 말하는 듯 한 또박또박한 말투로 얘기한 여자는 그대로 부엌가로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지만 미주 언니와 같이 살고 있다던 언니가 있었다. 그동안 이리저리 집 앞을 지나치면서 미주 언니 외에는 못 보았던 것을 보면 두문불출하는 성격이거나 나와는 생활 시간대가 다른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저렇게 예의바르고 차분한 사람이라니... 어쩐지 미주 언니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성격이라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 잘 상상이 안 간다.
"그나저나 약속은 자기가 해놓고는 아직까지 퍼자고 있다니...."
확실히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이렇게 태평하게 자고 있을 줄이야...! 방금 전 알려주었던 미주 언니의 방 문 앞에 다가가 잠긴 방문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크게 심호흡을 한 번 내쉬었다.
"아침부터 만나기로 약속 했으면 좀 일찍....!! 어?"
쾅하고 호기롭게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서던 나는 그만 호흡곤란에 걸린 사람마냥 뒷말을 삼키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완전히 잠에 취한 채 이불을 저만치 던져 버리고 자고 있는 미주 언니는 옷가지마저 어딘가로 날려버린 채 속옷차림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놀라 커진 눈이 끔벅끔벅 하면서도 야하지 않은 속옷 아래로 충분히 야한 미주 언니의 나신을 훑고 있었다. 뭐... 뭐야. 이 언니 몸매가 이렇게 좋았어? 평소에 늘어진 츄리닝 아래에서나 은연중에 보던 것을 이렇게 대놓고 보자니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민망해 죽겠다.
"무슨 일이야? 아..... 이미주. 너 뭐하는 짓이야!"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건지 어느새 부엌에서 다가온 수정언니가 방에 들어와 그 꼴을 보고는 냉큼 달려가 자고 있던 미주 언니를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자던 중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 미주 언니가 발딱 일어나 앉자 그 얼굴 위로 수정언니가 내던진 미주 언니의 파란 츄리닝이 깔끔하게 꽂아 박힌다.
"손님 왔으니까 얼른 입고 나와! ......수정이는 나 따라 올래?"
표독스러운 말투에서 금세 자상한 말투가 되어서는 내 손을 부드럽게 이끄는 조그만 손길에 나는 두말없이 벌벌 떨며 뒤를 따라 나왔다. 거실의 테이블 앞에 가자 금세 수정언니가 간단한 차와 과다를 보기 좋게 쟁반 위에 올려서 가져온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보기만 해도 아찔해지는 두께의 책들이 겹겹으로 수북이 쌓인 채 필기구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있어서 언니는 얼른 그것들을 주변으로 정리하고는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요즘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거든."
"아... 네."
책들을 흘깃거리고 보고 있는 나를 눈치 채고는 수정언니가 책 하나를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행정학개론이라... 좋은 내용이지. 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외면하고는 여름에 맞게 차갑게 우려 내온 냉차를 들어 올려 마시자 쌉싸름한 맛이 입안을 감돌고는 기분 좋게 사라진다.
"이제 3학년이긴 하지만 미리부터 봐둘 생각이야. 그나저나 공부한다고 미주가 뭐 하고 돌아다니는지는 신경 쓰지 못 하고 있었는데 뭐 나쁜 짓 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지?"
"네? 아... 아니에요. 그런 건. 근데 미주언니 말로는 자기가 스무 살이라는데 정말이에요?"
"응. 뭐 일단은 그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정언니의 말에 어쩐지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정말이었네? 그럼 휴학생이라고는 해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뛰쳐나왔다는 소리인데 역시 이해하지 못 할 언니이다. 그러고 보니 그럼 맨날 나보고 쪼고딩이라고 어른인 척 으스대는 것은 더 기가 차다. 자기도 대학물이라고는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 한 반백수구만. 무슨....
"이 이른 시간부터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 때 양반은 못 되는 건지 미주 언니가 터덜터덜 반쯤은 눈을 감은 채로 걸어 나왔다. 예의 그 파란 츄리닝을 입고는 손목과 발목만 쓱쓱 걷어 올려 미주 언니 나름의 여름 맞이 준비를 끝낸 후다. 그나저나 뭐라고? 약속은 까맣게 잊은 거냐? 참... 저 한심한 인간. 저런 인간이 뭐가 어쨌다고 가끔씩 두근거리곤 하는 건지 내가 못난 년이다.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더니 졸린 눈을 부비우던 미주 언니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수정언니에게로 향한다.
"수정언니~"
"왜?"
"무릎 좀 빌려줘요. 미듀 아직 졸려."
"저리 가!"
대뜸 다가와서는 덩치에 안 맞는 애교를 피워가며 달라붙는 미주 언니의 행태에 수정언니가 질색해서는 물러나 앉는다. 저 언니 진짜 뭐야.... 미주 언니의 입에서 수정언니라는 이름이 불리울 때 무의식적으로 움찔하고 놀라서 바라보고 있자 계속해 달라붙으려 하는 미주 언니의 행동에 급기야는 수정언니가 옆에 있던 책을 집어 들고는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엄청 아파보이는 두꺼운 책으로 퍽퍽 소리 나게 맞고 있으면서도 뭐가 좋다고 웃으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미주 언니를 보고 있자니 살짝 기분이 착잡해진다. 매번 날 수정이라는 이름대신 쪼고딩이라고 부르는 게 설마 이 언니 때문인 걸까 싶은 한심한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나저나 요새 나란 존재는 왜 이렇게 매번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거지?
한참이나 후에 난리통을 벌이던 둘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나는 미주 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쨌든 오늘 여기 온 목적은 미주 언니의 자전거를 훔쳐갔을 것으로 지목된 용의자 중 이제 마지막 남은 한 명을 찾을 방법을 강구해보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남학생은 운 좋게 오락실 앞에서 발견했고 두 번째 선배도 그닥 어렵지 않게 학교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세 번째 중년의 아저씨는 여러모로 찾을 방법이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뭐 미주 언니야 분명 앞 뒤 생각 없이 바로 마을을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자고 할 사람이었지만 이 더위에 내 아까운 주말 시간을 허비하면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었다. 아무리 내 심심함을 달래줄 양으로 미주언니와 서로의 이득을 위해 뭉쳤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의 손해를 감내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그 아저씨 특징이 어떻다고 했죠?"
"음... 글쎄. 나이는 한 서른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고 약간 마른 몸집에 좀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어. 옷은 그냥 활동하기 편한 차림새였던 것 같고 특이할만한 점이라고는 왼쪽 어깨에 달고 있던 파란색 띠 같은 견장뿐이야."
아아... 역시 다시 들어도 쉽게 찾아낼 묘안 같은 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고민에 빠진 얼굴로 뚱하니 앉아있자 우리가 하는 얘기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수정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어왔다.
"무슨 소리들 하고 있는 거야? 아저씨라니? 뭐 하고 있는 건데?"
"응. 그게요. 언니, 사실은 요즘 미주가 있잖아요....."
수정언니가 관심을 가져주자 이게 웬 떡인가 싶은지 혀가 반쯤은 짧아진 듯 한 소리로 미주 언니가 옹알옹알 그동안 우리가 마주쳤던 자전거 사건의 이야기들을 얘기해가기 시작했다. 오락실에서 자전거가 사라졌던 것부터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미행했던 것들까지. 요 며칠 사이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한 수정언니는 마지막으로 미주 언니가 "그래서 미듀는 요새 마음이 아파요. 잉잉. 호~ 해주세요." 따위의 말은 가볍게 무시해 버리고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한 마디로 밀실 아닌 밀실 사건 인 거네."
"네에?"
밀실이라니...? 갑자기 등장한 본격적인 사건 느낌의 단어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바라보자 수정언니가 나를 바라보고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배시시 웃어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정말로 그렇다기 보다는 확실히 재밌는 상황이다 싶어서 말이야. 그 오락실 말이야.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 없고 나간 사람들 안에서 반드시 범인은 존재해야 하는데 미주 말을 들어보니 그 중에 범행의 동기를 가질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결국 상황적 밀실이나 마찬가지인 셈인 거 같은데?"
상황적 밀실? 고개를 갸웃하며 미주 언니 쪽을 바라보자 미주언니가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슬쩍 내 곁에 다가와서 손짓으로 주변에 무수히 쌓여져 있던 책더미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해해. 언니가 추리소설 광이거든."
그제야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 쌓여있는 책더미들 사이로 상당수의 소설책 같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저게 다 추리소설들인 거야....?
"저... 언니 말을 대충은 알겠는데요. 저희는 아직 용의자 중에 아저씨 한 분을 못 찾았어요. 그러니까 아직은 상황적 밀실인가 그건 아닌 것 아닌가요?"
확실히 그렇다. 오늘 미주 언니를 찾아온 것도 전부 그 아저씨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아직 용의자들이 전부 범행동기가 없다고 밝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 그거 말인데. 그 아저씨는 찾지 않아도 될 거야. 그 아저씨는 범인이 아닐 테니까."
"네?"
"음.. 잠깐 있어봐."
갑자기 휴대폰을 찾더니 이리저리 뭔가를 하던 수정언니가 나와 미주언니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이것 봐."
".....다국적 퍼레이드 행사?"
화면에는 시에서 주최하는 행사의 일정과 홍보 사진이 나와 있었다. 이게 뭐? 둘 다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어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정언니를 다시 바라다보자 수정언니가 화면의 한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사실 미주가 자전거를 잃어버렸다고 한 그 날은 시에서 꽤 큰 규모의 행사가 있던 날이었거든. 그 파란 견장은 시민들 중에서 행사 관리를 보조하는 요원들이 차는 표시랑 같아. 그러니까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아마도 그 남자도 행사요원이었을 거라고 보는 게 맞을 거야. 일반 사람이 어깨에 견장을 두르고 다니는 건 패션으로 보기에는 좀 과하지 않겠어?"
"그거야 그렇죠...?"
"아무튼 시에서 관리요원들을 위해서 무료로 셔틀버스를 운영해준 걸로 알고 있어. 자원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니까 말이지. 내 기억으로는 분명 미주가 말한 오락실 건물 근처에서 12시 30분 타임에 버스가 한 번 정차하기로 했었어. 아마도 남자는 그 버스를 타기 위해서 오락실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던 걸 거야."
"그럼......"
"불과 몇 걸음 안에서 셔틀버스를 곧 타야 되는 남자가 자전거를 훔칠 이유 따위는 없다는 거지."
수정언니의 말에 나와 미주언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통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미주 언니가 수정언니를 돌아보았다.
"언니는 근데 이런 건 어떻게 알고 있던 거야? 요즘 집에서 잘 나간 적도 없잖아."
"실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기도 하고 이참에 봉사활동 겸 한 번 행사 관리요원에 지원해볼까 했었거든. 물론 결국엔 안 하고 말았지만...."
미주 언니의 물음에 수정언니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어찌되었든 이걸로 확실히 수정언니의 말마따나 상황적 밀실이라는 것이 들어맞게 되어 버렸다. 결국 미주 언니가 지목한 용의자들 중에서 범인은 없다는 소리인가? 어쩐지 허탈감과 함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무도 자전거를 훔칠 이유가 없었다니....
"하기사 나 같아도 그런 고물 자전거 가지라고 해도 안 가져 갈 건데...."
"뭐?!"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어찌 또 그걸 듣고는 미주 언니가 사납게 돌아다본다. 으이구... 귀는 밝아서 정말. 아무래도 주의를 돌려야 될 필요성을 느끼고는 수정언니를 바라보고 물어보았다.
"저... 그럼 보통 이런 상황일 때는 어떻게 해야 되죠?"
"응?"
"조사해보니 용의자 모두 범인이 아니었다. 그럼 다른 해결방법은 없는 건가요?"
"글쎄.... 이런 경우라면 말이지...."
잠시 턱 사이에 검지 손가락을 받치고는 고심하던 수정언니가 내게 손가락 두 개를 펴 내밀며 보여 주었다.
"일단 첫 번째로는 지금까지 너희가 해왔던 조사의 신빈성을 다시 의심해 볼 필요가 있어.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것들이 전부 옳다고 판단되었을 때 처음 조사방향의 전제 자체를 의심해 보는 거지."
"음.... 그럼 일단 신빈성 부터 따져 봐야 된다는 소리죠?"
"내가 생각하기에 셋 중에 제일 범인이 아닐 확률이 높은 사람은 내가 말했던 거라 민망하지만 그 파란 견장의 아저씨 같아. 시간대도 그렇고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곧이어 버스를 탈 사람이 자전거를 필요로 할 이유가 없어."
또박또박 힘주어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고 있는 수정언니의 모습은 추리광 답게 살짝 들떠 보였다. 미주 언니는 그런 수정언니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로 예의바르게 멍을 때리고 있는 중이다. 으이구 저 화상... 애초에 자전거 사건의 조사는 수정언니와 시작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로 범인이 아닐 거 같은 사람은 그 여자애인데...."
"그 선배요?"
"응. 일단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확실히 사진까지 찍어놨으니까 셋 중에서는 어떻게 보면 가장 신빈성이 높을 수도 있다고 봐. 조금 있다가 남의 차에 타야 될 사람이 자전거를 훔칠 이유는 별로 없지. 번거롭기도 하고. 게다가 미주 그 자전거... 여고생이 타고 다니기엔 이미지가 너무 그렇지 않아?"
"그건 확실하죠."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치켜뜨는 미주 언니를 무시하고 나와 수정언니는 암묵적인 긍정의 표시로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좀 맘에 걸리는 게 있다면 왜 쓸데없는 거짓말을 했냐는 거인데...."
"거짓말이요?"
그 선배가 우리에게 했던 말 중에서 거짓말이 있었다는 것 일까?
"그 차를 타자마자 바로 바닷가까지 한 시간여의 거리를 달려서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고 했는데 그건 거짓말이거든."
"어? 왜요?"
여기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바닷가가 없는 것 일까? 하지만 이내 그렇지 않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가까운 근처에 바닷가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주변에 바닷가가 있지 않아요?"
"확실히 바닷가는 이 근방에 있어. 하지만 중요한 건 이거야."
언니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서는 방금 전 보여주었었던 시 행사의 홈페이지 화면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이 날은 시에서 다국적 퍼레이드 행사가 있던 날이라고 했잖아. 이 행사 때문에 그 날 12시 이후부터 2시까지 도로가 통제 되었었어. 이 행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퍼레이드 행사가 도로에서 있었거든.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지역에서 우리가 말한 그 인근의 바닷가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도로를 통과했었어야만 돼. 한마디로 그 여자애는 그 사진을 바닷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찍었다는 소리야."
"아......"
"뭐,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차에 탄 건 사실이니까 딱히 자전거를 탐낼 이유 같은 건 없긴 하지."
분명 뭔가 석연찮기는 하지만 어쨌든 자전거 도난의 범인으로 몰아붙이기에는 불충분한 근거이다. 게다가 뭐 그런 부분이야 얼마든지 그 언니의 입장에서는 거짓으로 우리에게 말할만한 내용이었다. 곧이곧대로 사실만을 말한 다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니까.
"마지막으로는 그 중학생 남자애인데... 사실 이건 그 측근이 말해준 말뿐인 증거라 그다지 신뢰할만하다고 판단하기는 힘들어. 하지만 더 캐내기도 힘든 일이니까 일단 단념할 수밖에 없겠지."
거기까지 그동안의 조사 상황을 정리한 수정언니는 가만히 눈을 감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도 언니의 말을 들으며 나름대로 그간의 조사들을 머릿속에 정리해 보았지만 역시나 뚜렷하게 범인이라고 의심되거나 명확히 의문을 남길만한 점은 생각되지 않았다. 갈수록 점점 미궁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이라는 것은 어때요? 전제를 다시 생각한다는 말."
"그 경우는 조금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거야."
"예를 들어?"
"애초에 용의자가 세 명이 아니었다던가 밀실이 아니라 누군가 출입할 수 있었다던가 또는 범행동기 자체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도 있어. 아무튼 지금은 최대한 지금까지 모은 결론을 가지고 생각을 정리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아."
흐음... 발상의 전환이라. 요 며칠 간 미주 언니와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벌였던 사건들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기로 했다. 인적이 드문 무인 오락실. 문이 열릴 때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내던 낡은 문. 단 세 번만 들렸다던 소리. 폭주족 남학생. 지애 언니. 안 좋은 소문을 몰고 다니던 선배. 절뚝거리는 다리. 도벽. 캣푸드. 보기 싫은 사진에 나오던 날짜와 시간. 거짓말. 다국적 퍼레이드 행사. 파란 견장. 셔틀버스...... 무언가 이중에서 우리가 놓치거나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걸까? 미처 깨닫지 못 하고 지나쳐 버린 것... 전제가 잘못 되었다라. 하기사 애초에 그런 자전거 아무도 갖고 가고 싶지 않을 거라는 것부터가 문제라니....
"자... 잠깐만요!"
"응?"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서서는 소리친 나를 보고 두 언니의 시선이 의문을 갖는다.
"저... 왠지 누가 범인일지 알 거 같아요."
-
마을과 시내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의 아래에서 우리는 울퉁불퉁한 산길을 헤집다가 가까스로 범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행은 힘들었지만 최근 들어 몇 번인가 해봤던 덕분인지 우리는 그럭저럭 들키지 않고 어쨌든 이 먼 곳까지 착실히 따라왔다. 풀과 나무들로 적당히 시야가 가로막혀 있는 산길 아래에는 캣푸드의 빈 깡통들과 함께 미주 언니의 자전거에 달려 있던 바구니가 있었다.
"드디어 찾았네."
턱 밑까지 송글거리며 맺혀 있던 땀을 걷어내며 미주 언니가 내뱉은 말에 바구니의 앞에 구부려 앉아 있던 여자가 튕겨져 오르듯 일어나 뒤돌아섰다. 새하얀 피부에 까만 머릿결... 매 번 가면처럼 짓고 있던 눈웃음도 잊은 채 당혹한 표정으로 지연선배는 우리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내 자전거 어디다 뒀어. 이 나쁜 녀.... 으읍!"
지연선배를 보자마자 대뜸 달려들려고부터 하는 미주 언니의 입을 틀어막아서 뒤로 던져 버리고는 나는 선배를 마주보고 서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지연 선배는 우리의 등장에 불안해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춤거리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괜찮아요. 저희는 단지 자전거가 어딨는지만 알고 싶어서 왔을 뿐이에요."
".........."
"그 바구니 잠깐 봐도 되죠?"
"거기서 다가오지 마."
단순한 위협만으로는 들려오지 않는 싸늘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서고야 말았다. 어떻게 하지? 안절부절못한 눈동자만 데구루룩 굴리고 있다가 나는 최대한 적의가 없다는 것을 내비치기 위해 떨리는 웃는 낯으로 선배의 표정을 살피며 천천히 선배가 물러난 바구니를 향해 다가가 앉았다. 내 하는 양을 무섭도록 쏘아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며 미주 언니의 자전거 앞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피크닉 풍 가방의 한 쪽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자 방금 전 캣푸드를 보고 짐작했던 데로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 회색빛에 검고 흰 줄무늬가 섞인 모양으로 아직 새끼인건지 앙증맞은 크기에 커다란 눈동자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나를 이리저리 관찰하던 고양이는 이윽고 자신의 앞발을 들어 올려 정성껏 핥기 시작했다. 그 앞발에 어설픈 솜씨로나마 정성껏 꽁꽁 동여맨 하얀 붕대 사이로 상처가 심한 건지 피가 배어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돌봐 주고 계셨던 건가요?"
"........."
"이래서 바구니 같은 게 필요하셨군요."
어느새 미주 언니도 다가와 바구니 안의 고양이를 보고는 대뜸 메롱 하고는 혓바닥을 내보이며 장난을 친다. 그러고는 그새를 못 참고 또 고양이한테 손가락을 물려서 아프다고 안달이다.
"어떻게 찾아온 거지? 이제 어쩔 거야? 변상이라도 해줄까?"
"뭐래. 이 애가 말했잖아. 그런 건 필요 없어. 내 자전거 있는 곳이나 말해."
미주 언니가 뭔 소리를 하냐는 듯 여전히 고양이와 손가락으로 놀아주며 지연 선배를 흘깃 바라보고는 퉁명스레 답한다. 그런 우리 둘을 가만히 지켜보던 선배는 어쩔 수 없겠다는 듯 이내 쓴웃음을 내지었다.
"그 고물 자전거라면 오락실 맞은편 골목의 잡동사니들 속에 있을 거야. 처음부터 거기 틈바구니 안에 있던 거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외관이었으니까 누가 가져가지도 않았을 거라고."
"에엑? 설마 그런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그딴 거 괜히 짐스럽게 누가 가져가기나 하겠어? 그나저나 어떻게 또 의심하게 된 거지? 분명 그 때 떨쳐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말이야...."
갑자기 날 돌아보는 미주 언니의 시선에 눈을 마주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설명은 역시 내 몫인가 보다.
"그냥 운이였을 뿐이에요."
"운이라고?"
장난 하냐는 듯 지연선배의 눈매가 날카로워 진다. 나는 허둥지둥 서둘러 추가로 설명을 덧 붙였다.
"저희는 오락실에 있던 세 명의 사람들을 전부 조사해 보았지만 누구 하나 자전거를 훔쳐갈 이유를 찾지는 못 했어요. 다들 그 이후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타고 다닐 이동수단이 있었고 나름대로 알리바이들도 존재했거든요. 그래서 완전히 새롭게 생각해 보기로 했어요. 어쨌든 저도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거든요. 선배 말대로 그 자전거, 누가 훔쳐 갈만한 물건이 못 되잖아요. 그래서 혹시 자전거를 이동수단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가져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 거죠. 그랬더니 가장 먼저 생각난 게 그 자전거에 붙어있던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였어요. 혹시 그 바구니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 맨 먼저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 선배를 관찰해봤던 거뿐이에요. 돌이켜 보니 선배가 메고 다니는 그 빈 가방도 바구니를 넣기에 알맞은 크기 같아 보였고.... 그러다 운 좋게 정말로 여기까지 따라오게 되었어요. 고양이를 돌봐주고 계시는 지는 여기 와서야 알았네요."
그렇다. 발상의 전환. 처음부터 자전거라는 단어에 담긴 이동수단이라는 의미에 너무 얽매여 있던 지라 우리는 계속해 용의자들의 범행동기도 그렇게 밖에는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물론 미행을 하다가 알게 된 선배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 같은 것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둔 추리였지만 거기까지는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내 말을 끝날 동안 잠잠코 듣던 선배는 어느새 예의 그 웃는 낯으로 돌아와 우리를 보고는 생긋 웃어 보였다.
"그래?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맞게 되었네. 그래. 내가 그 날 오락실에서 그 고물 자전거를 갖고 간 게 맞아. 그 날 아저씨를 만나러 학교에서 나와 걷는데 저 망할 고양이가 길가 구석에서 어디 차에 치이기라도 한 건지, 애들한테 돌멩이를 맞았는지 몰라도 다쳐서 내팽개쳐져 있더라고. 무시하고 가버리긴 했는데 그 오락실에서 나오는 길에 우연히 자전거의 앞에 달린 바구니를 보고는 문득 생각이 났어. 그 안에 넣어두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버렸지. 뭐, 그렇게 된 거야. 그럼 이걸로 된 거지? 자전거가 있는 곳은 알게 되었잖아. 너희들 볼 일이 끝났으면 이제 좀 사라져 줬으면 하는데?"
상냥해 보이는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싸늘한 말에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다. 어쩐지 선배의 주위를 따라 얼음장 같은 벽 하나가 둘러쳐져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왔다. 지독한 배타심. 그 적의감에 몸서리치는데 그러나 저러나 그런 것에 한 박자 둔감한 사람이 있다는 걸 깜박했다. 주변 상황에 조금 동떨어져 있던 미주 언니는 태평한 얼굴로 아직까지 티격대며 놀아주고 있던 고양이를 가리키며 지연선배에게 물었다.
"근데 이 고양이. 상처가 좀 심한 거 같은데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신경 꺼. 어찌되든 너네가 무슨 상관이야."
"기왕 이렇게 돌 볼 거면 집에 데려가지 그랬어? 이 산중에 혼자 두는 건 위험할 거 같은데... 보니까 걷지도 못 하는 거 같고."
"그건 안 돼."
갑자기 딱딱하게 정색하는 말투에 놀라 바라보니 지연선배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분노? 거부감? 아니 그보다는 두려워하고 있다는 기분이다. 집이라는 단어에 왜 저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지? 어쨌든 지연언니는 집으로 고양이를 데려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완고히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이 인적이라고는 드문 산골까지 온 것만 봐도 어쩌면 고양이와 함께 있는 이 모습을 누군가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연선배는 저렇게 얘기하고는 있지만 이 고양이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전해져 왔다. 제삼자가 느끼기에도 그러한데 정작 본인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려 하는 듯 한 모양새다. 선배가 무의식적으로 저번에 사진을 보며 바닷가를 다녀왔다고 했던 것은 어쩌면 이런 연유에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남자와 만나기 전에 고양이를 바구니에 넣은 채로 가방에 챙겼는지 아니면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달려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선배는 고양이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던 자신의 마음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에 괜스레 여유로웠던 척, 무신경한 척 우리에게 바닷가를 입에 담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정성들여 꼼꼼히 감아놓은 붕대에 한 번 더 눈길을 주었다가 지연선배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곳은 아직 어린 새끼 고양이를 혼자 놔두기에는 좋은 장소는 아니다. 너무 외지고 습한데다가 상처도 저대로 놔두면 어찌될지 모른다. 아무리 선배가 돌보러 와준다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고양이 홀로 지내야 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둘 다를 위해서라도 어디론가 안전한 곳에 맡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잠깐이라도, 상처가 괜찮아질 때 까지 저희가 대신 맡아드리건 어떨 까요?"
"응. 쪼고딩 말이 맞아. 그것도 좋은 방법.... 응? 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분위기에 맞춰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얼빠진 얼굴로 돌아보는 미주 언니를 향해 미간을 좁히고 노려보았다.
"미주 언니가 잠시 좀 맡아줘요. 어차피 여기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건 언니뿐이잖아요. 자취생이기도 하고."
"안 돼! 자취방으로 가져갔다간 수정언니한테 공부에 방해 된다고 혼날 게 분명하단 말야!"
"댁만 얌전히 있으면 수정언니 공부하는 데는 방해 될 게 없어 보이던데요?"
"...........싸울래?"
때 아닌 티격태격을 벌이고 있자, 우리의 이야기를 잠잠코 듣고 있던 지연 선배가 웃기지도 않는 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맡기기라도 한대? 그건 내 꺼야. 안 내줄 거라고!"
무섭게 성큼성큼 걸어온 지연선배가 나와 미주 언니가 쭈그려 앉아 보고 있던 고양이가 담긴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뒤돌아 산길을 내려가려 한다. 아뿔싸! 나는 뛰쳐나가듯 일어나 그 뒤돌아 선 가녀린 어깨를 잡아 세웠다. 매섭게 돌아보는 지연선배의 눈길에 움찔하면서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어디로 가시려는 거예요?"
"무슨 상관이지? 난 너희들 따위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이거 놔!"
"선배! 자꾸 그러다 그 고양이 영영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해요. 상처가 심하다고요! 저 고양이는 지금 옆에서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멈칫. 뿌리치려던 지연선배의 움직임이 멈춰 선다. 내 말의 어디 한 구석이 선배의 마음에 동요라도 일으켰던 걸까?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손 안의 바구니를 내려다보던 지연선배가 입술을 꾹 깨무는 것이 보인다.
"좋아. 내 맘대로 해. 어차피 이제 귀찮아지기 시작했었어."
내 품안으로 던져 넣듯 바구니를 내밀은 지연선배가 그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그 쓸쓸하고 왜소해 보이는 뒷모습에 나도 모르게 쫓아 발걸음을 내딛으려 하자 미주 언니의 손이 다가와 내 어깨를 붙든다. 그리고는 지연선배를 향해 외쳤다.
"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맡아두고 있을 테니까 언제든지 보러 찾아와! 네 고양이잖아!!"
미주 언니의 말에 잠시 움찔했던 뒷모습이 이윽고 별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산길을 내려섰다. 절뚝절뚝. 미묘하게 절름거리는 걸음새로 선배의 모습이 저 너머로 사라져 간다. 어느새 선배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지워졌을 때 언제부터 바구니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건지 고양이가 마치 선배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얇은 목소리로 애타게 울어 대었다. 가만히 고양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어째서인지 절뚝거리던 선배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울적해진다.
"괜찮아. 저 아이. 꼭 다시 만나러 올 거야."
미주 언니가 기운차리라는 것처럼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고양이를 향해 손가락을 내민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콱 깨물리고는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댄다.
그 한심한 모습에 한숨과 함께 미소가 번져서 아려오던 눈가를 부비적거리고는 심호흡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무튼 이걸로 미주 언니의 낡은 자전거 사건은 일단락되었나 보다. 심심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줄 요령으로 시작한 짧은 일탈 같던 시간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 되고 나서 느끼게 된 감정은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은 저 하늘 위로 조금 붕 떠올라 있는 것 같고 허탈하기 만한 기분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해피엔딩이야. 그렇지 않아?"
"뭐, 그렇다고 해두죠."
미주 언니의 실없는 말에 다시 픽 실소를 터트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마도 이번 일로 얻게 된 것이라고는 이 무데뽀에 사고는 잔뜩 벌이고 다니면서 정작 일이 커지면 허둥대고 마는 한심한 언니뿐인 것 같다. 힐끗 돌아보니 바보 같게도 가끔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마는 그 예쁘장한 얼굴이 미소를 머금은 채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럼 우리 자전거를 되찾으러 갈까? 자전거를 찾기 전에는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
"좋아요."
그 말이 맞다.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지. 으쌰! 힘을 내고는 우리는 산길을 걸어 내려와서는 곧장 마을로 향했다. 자전거는 지연선배의 말대로 오락실 건너 골목의 각종 잡동사니 동산 한 구석에 고이 세워져 있었다. 워낙 원래부터 먼지와 녹이 슬어있던 낡은 자전거라 달라진 점이라고는 앞에 자랑처럼 붙어 있던 피크닉 바구니 자리가 훵하니 비어있다는 것 정도 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고양이가 울고 있는 바구니를 그 앞에 다시 끼워넣은 언니는 몇 번 바퀴의 페달을 밟아보더니 훌쩍 자전거 위로 올라탔다.
"어때? 사건해결 기념으로 한 번 타보지 않을래?"
"에에...?"
으... 보기만 해도 녹과 먼지로 지저분한 보조석을 바라보고는 질겁하는 얼굴을 하고 있자 뭐 어떻냐는 듯 미주 언니가 연신 고갯짓으로 어서 타라고 가리킨다. 뭐 까짓 꺼 기분이다. 눈을 질끈 감고는 올라타서 미주 언니의 허리를 부여잡았더니 미주 언니가 웃으며 이내 페달을 힘차게 밟아 나간다.
녹이 슨 체인과 성하지 못 한 바퀴가 삐걱거리며 낡은 자전거는 마을을 지나간다.
"언니는 도대체 이 자전거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다 낡아 빠진 자전거를...."
사실 궁금하기로는 처음부터 이것이 가장 신경 쓰였다. 내 질문에 언니는 그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조금 낡았으면 어때. 이렇게 위태위태 가기는 해도 확실하게 굴러가고 있으니까 좋은 거뿐이야."
"그게 뭐에요... 진짜."
바보 같은 대답이어서 그저 웃음밖에 안 나온다. 아무리 낡고 오래되어서 시끄러운 소리만 삐걱거리고 비틀대며 나아가는 자전거라도 굴러가고 있으니까 좋다는 소리야? 그러고 보니 이사람 다 무너져 가는 것 같은 낡은 오락실도 좋아했었다.
"그래도 뭐... 대답이 되긴 하네요."
미주 언니의 등에 볼을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나는 조금은 상기된 얼굴을 하고는 미소 지었다. 어째서인지 저 바보 같은 말에 조금은 위로가 된 것만 같다. 서툴고 비틀거리며 방황하더라도 조금씩 걸음을 내딛다 보면 언젠가 이 답답한 마음이 해소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대로 조금만 더 혼란스러워해도 괜찮지 않을까?
삐걱삐걱. 늦은 오후의 여름 햇살 아래에서 우리는 낡은 자전거 바퀴 소리에 몸을 맡긴 채 유유히 달리고 있었다.
.
.
.
........Old bike game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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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글을 썼습니다. 이로써 한 달에 한 편이라는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생기게 되었던 목표도 1주년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작가의 말을 쓰는 시점에서는 아직 퇴고도 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속단하기는 드물기는 합니다. 기본적으로 퇴고가 절반이상인 부족한 사람이라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남은 이틀은 평일이네? 난 안 될 거야 아마....
아무튼 1년여동안 이 짓을 해오면서 댓글이나 피드백이라고는 가뭄에 콩나듯 받는 그야말로 혼자 놀기의 진수인 취미생활이었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긴 했었던 거 같습니다. 물론 마감일에 쫓기며 매 번 똥을 싸지르는 죄악감도 들기는 했습니다만...
이번의 글은 예전부터 언젠가는 써보고 싶던 추리소설 방식의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초 계획부터 막상 사건이나 트릭 같은 걸 생각해내려니 시간도 촉박하고 떠오르는 것도 없어서 추리소설의 느낌만 살린 단순한 일상물 정도로 가자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번에도 이도저도 아닌 전형적인 마감에 쫓긴 거대한 똥덩어리가 탄생한 기분입니다. 아.... 정말 변비 걸릴 일은 없겠어요. 어쨌든 매우 허술한 내용들로 구성된 글이므로 보시면서 화가 나셨다면 일단 죄송하다고 사죄드리겠습니다. 뭐... 어쩌겠어요. 이미 읽은 거....
언제나 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거지만 제 글은 기본적으로 팬픽이란 것이 가지는 고유한 연애의 감정들에 너무도 무딘 글이라서 항상 반성하고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냥 이런 똥을 싸대는 사람도 있구나. 저러고 혼자 노는 이상한 사람이 있구나 과감히 똥을 던져 주시면 됩니다.
어쨌든 러블리즈가 빨리 완전체로 컴백했으면 좋겠어요. 혼자 놀면서 하는 덕질이라서 어디 커뮤니티 같은 데도 잘 안 돌아다니다 보니 비시즌 때는 즐길 거리가 없단 말입니다! (빼애액!) 다음 활동 때는 지수도 참여할 것만 같아서 벌써부터 기다리는데 두근두근 합니다. 하기사 잡덕이니 메인이 휴식기일 때는 다른 그룹들을 파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요! 그럼 긴 글에 똥글을 읽어 주신 분이 계시다면 이번에도 감사합니다. 1주년 글인데 이런 글이라니... 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즐거운 덕질 하시기들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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