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31일 토요일

[미지수] 경계의 끝에서...














이미주 x 서지수










 경계의 끝에서...
                                 written by. 녀놘







 그녀는 언젠가 부터 창가에 앉아 있었다.




 나는 여느때처럼 한 남자에게 팔리고 있는 중이었다. 성욕에 굶주렸던 미군남성은 늦은 오후부터 나를 격렬하게 밀어 붙여왔다. 같은 동양의 여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체면을 차리기 힘든 동양 남성의 그것과는 달리, 서양 남성의 탄탄하고 괴물같이 거대한 육체는 나를 무자비하게 유린하며 달려들어 왔다. 거의 온 몸이 바스러지는 고통을 몇 번이나 버텨내고 나서야 남자는 나를 놓아 주었다. 나는 몰려오는 극심한 신경통과 몽롱한 정신 속에서 신음 하다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이미 내 옆에서 피를 뒤집어 쓴 채로 싸늘하게 식어 있는 상태였다. 하얗게 뒤집어 져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왠지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는 건 아니다. 시체와 살인마를 눈앞에 두고도 웃을 만큼 내가 무신경한 사람이었던 건 아니니까.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는 입술부터 하얗고 길게 내리 뻗은 턱선을 따라 가슴을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는 피를 세심한 혀 놀림으로 핥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기 몸을 핥고 있는 우아한 러시안 블루 한 마리를 연상케 해 나를 야릇한 감정으로 몰아넣었다. 그녀의 혀끝이 피에 닿을 때마다 바르르 떨리며 환희에 찬 신음성을 뱉어 내는 장면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의 실루엣 뒤로 거대하게 보이는 푸른 달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도 크고 밝은, 푸른 달.




 "푸른 달이 뜨는 날에 여자 피를 빨면 재수가 없다고 들 하지."




 목소리에 놀라 그녀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거짓말처럼 여자는 사라져 있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며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나는, 한참만에야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일어나 집안을 돌아다니며 내가 만졌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수건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빠진 것이 없나 확인이 끝나자 나는 미련 없이 방문을 닫고, 도망치듯 더럽고 좁은 골목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이틀 정도 지난 후에 여자는 어둠이 깔린 내 집의 창문 사이로 나타났다. 그동안 나는 혹시라도 군에서 나를 잡아가진 않을까 내심 불안해하며 집안에 웅크리고 있었기에 여자를 다시 만났을 때의 내 모습은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여자는 내 곁에 다가오더니 코를 움켜쥐며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넌 먹을 수 없겠어."




 당황해 하는 나를 붙잡아 일으켜 세운 그녀는 다짜고짜 나를 욕실 안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얼떨결에 샤워를 하고 몸을 말리며 나와 보자 그녀는 내 집의 좁은 부엌 식탁위에서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곳이 없어. 당분간 여기서 살아야겠다."




 내 의사 따위는 물어 본 적도 없이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한 태도로 고개를 주억 거렸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관을 내놓기를 요구했고 어리둥절해 있던 나는 방금 내가 나왔던 욕실의 작은 욕조를 그녀에게 빼앗겨 버리고야 말았다. 욕조 안으로 몸을 구겨 넣으며 여자는 버릇처럼 인상을 구겼다. 그녀가 너무 좁고 축축하다고 불만을 터트리긴 했지만 그 곳이 내가 사는 낡고 오래된 집에서 사람 하나를 쑤셔넣기에 가장 알맞은 공간이었던 지라 어찌 해 줄 순 없었다.




 다음날 날 사줄 남자를 찾지 못한 체 씁쓸히 집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내 침대 위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언젠가 축하할 만 한 일이 생겼을 때 마시려고 사두었던 싸구려 와인은 이미 반 이상이 여자의 하얗고 가는 목덜미 너머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자는 마시던 술잔을 들어 올리며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멋진 밤이지? 빌어먹을 세상을 위해서 건배!!"

 "집어 치워요."




 그날 밤 나와 여자는 그녀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욕실 안으로 기어 들어갈 때까지 집안에 있던 모든 술을 끄집어 내와서는 먹고 마시며 파티를 벌였다. 다 헐고 망가진 싸구려 레코드판의 지글거리는 음악에 맞춰, 알 수 없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정신없이 춤을 추면서 우리는 실컷 욕을 퍼붓고 깔깔 거리며 웃었다.




 다음 날 좋지 못 한 몸 상태에 영업은 포기해야만 했다. 대신에 나는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잠깐 장을 보기로 결정하고 집을 나섰다. 혼자 있는 집에서 요리를 해 먹었던 게 언제였더라...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오랜만에 거리상들의 볼 것 없는 시들시들한 채소들 앞에 기웃거리며 앉아 있다가 그녀와의 저녁 식사라는 생각이 들어 털고 일어났다. 발길이 멈춘 건 정육점 앞이었다. 꼬깃꼬깃한 지폐를 손에 쥐고서 최대한 핏기가 묻어나는 고기가 어떤 것인지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으니 주인이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를 위 아래로 몇 번인가 의심스레 훑어보던 주인은 갑자기 돈이 부족하냐고 물으며 은근한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황급히 얼마 되지 않는 양의 고기를 계산하고는 가계에서 빠져 나왔다. 서둘러 걷고 있던 등 뒤에서 갈보 년이 비싼 척 한다는 주인의 외침이 들려와 잊지 않고 힘껏 중지 손가락을 들어 올려 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하얗게 곰팡이가 슬어있던 프라이팬을 서둘러 씻고 나서 사 온 고기를 올려놓았다. 그 순간 나는 내 앞에 난감한 고민이 놓여있음을 깨달았다. 흡혈귀는 과연 생고기와 조리된 고기 사이에서 무엇을 더 좋아하느냔 말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싸구려 고깃덩이를 손에 들고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얼마 안 되던 고기를 절반으로 나눠 한 쪽만을 프라이팬 위에 올려 놓았다. 집안에 얼마 없던 그릇들은 전부 이가 깨진 체 싱크대 위에 음식물들과 함께 썩어가고 있었기에 나는 그대로 프라이팬 위에서 소금과 어제 먹다 남은 술을 붓고 밑간을 해야만 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설탕과 간장통 같은 것들도 어디선가 끄집어내긴 했지만 역시나 프라이팬 위에서 즉석으로 양념으로 졸여졌다.



   
 식탁위에 널브러져 있던 어젯밤의 난장판 같은 흔적들은 전부 커다란 봉투 속으로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아 집 앞에 던져 버리고, 그 위에 방금 졸여 나온 고기를 올려놓았다. 먹기 좋은 향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다가 서랍구석 쯤에서 굴러다니던 작은 양초를 가져와 불을 붙였다. 내 집에서 먹기엔 제법 그럴 듯한 저녁상이 차려지고 나자 그 뒤부터는 계속 식탁의 한 쪽에 앉아 욕실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젯밤의 과음 탓인지 그녀는 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비틀거리며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턱 밑에 괴고 있던 팔을 풀고 나니 오랜 시간 눌렸던 턱 밑에서 지릿지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이미 다 식어버린 저녁을 권하자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흡혈귀가 이런 것 먹는 것 봤어?"




 혹시나 해서 조리하지 않고 남겨둔 생고기를 내밀어 보았지만 역시나 바보취급 당할 뿐이었다. 그녀가 아무것에도 손을 데지 않고 내 침대로 걸어가 쓰러져 버렸기에 나도 음식을 멀리 치워 버렸다. 이미 나도 식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내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나를 손짓해 부르며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건 내 침대에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내가 제일 즐겨먹는 게 뭔 줄 알아?"




 옆자리에 앉은 나의 목덜미를 혀로 핥으며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온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타고 내려오는 그녀의 끈적한 혀가 몸에 닿을 때마다 마치 불에 덴 듯 화끈거리며 경련이 일어났다. 그녀는 얼마동안인가 나를 쓰다듬고 보듬어대다가 자연스럽게 내 고개를 잡아 돌리고는 먹기 좋은 각도로 내 목덜미가 노출되게 만들었다. 그녀의 벌린 입에서 차가운 입김과 함께 번뜩이는 송곳니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아아...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너는 마치 부유하는 유령 같았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너는 마치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 속에 서 있는 시체 같아. 말해봐. 너에게 죽음이란 뭐지?"

 "황홀한.... 아름다움."

 "......마치 죽여 달라는 소리 같군."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어느새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내게서 방금 죽음이 떠나갔다. 나는 삐걱거리며 흔들리고 있는 내 집의 창문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날 화들짝 놀라 깨어났을 때는 이미 오후의 햇살이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비스듬히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프라이팬 위에 바짝 말라 버린 채 몇 마리의 파리 떼에 점령 당해있는 졸인 고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집 앞 골목 사이로 힘껏 던져 버렸다. 어디선가 굶주린 개 몇 마리가 컹컹 거리며 달려와 그것들을 서로 다투어 물어뜯는 것을 지켜보고 서 있다가 문 앞에 거칠게 침을 뱉고는 돌아섰다.




 침대위에 웅크리고 앉아 손질하지 않아 부스스해진 머리를 매만지면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오늘도 일을 하러 나가지 않는 다면 당장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해야 했지만 그런 것쯤 어찌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일조량이 좋지 않은 집안은 금세 어두워 졌다.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남겨져 있다 보니 어젯밤의 감촉들이 불현듯 살아났다. 그녀의 차가운 혀끝이 내 목을 핥고 내려갔던 느낌들을 되살리며 손길을 갖다 대자 아직도 그녀의 타액들이 내 목에 말라붙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을 곧추세워 그 하얗게 말라붙은 타액위로 바짝 세운 두 개의 손톱 끝을 밀어 넣으며 그녀가 날 물어뜯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뜯겨져 나간 경동맥 사이로 뜨거운 선혈이 꿈틀대며 솟구쳐 오른다. 그녀의 핏기 없는 입술이 달려들어 게걸스레 빨아들일 동안에 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 피가 그녀의 하얗고 우아한 목덜미 너머로 꿀꺽거리며 사라지는 것을 상상하며 난 환하게 웃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죽음이 될 것이었다.




 그 날 밤 무심결에 욕실의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꽤나 허탈한 심정이 되어 버렸다. 내 집의 좁은 욕실 안에서 그녀는 어젯밤 물었던 누군가의 피로 온 몸을 적신 체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내게서 떠났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잠시 식사를 하러 나갔을 뿐이다. 그제야 나도 요 이틀 사이에 아무것도 먹은게 없다는 것이 생각나 배가 고파졌다.




 그 날부터 나는 더러운 뒷골목 사이에서 유혹한 남자들을, 거르지 않고 매번 집안으로 끌어 들였다. 언제나 나의 룸서비스에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그녀는 숙식과 서비스에 대한 성의로 시체의 뒤처리와 함께 남자의 바지주머니 속에서 나오는 묵직한 지갑을 내게 던져주곤 했다. 나는 그 생활이 못내 불안하긴 해도 썩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다만 가끔씩 그녀의 송곳니가 남자가 아닌 내 목에 날아와 박히기를 바라는 날이 많아지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내가 데려온 남자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물고 한참을 게걸스레 빨아대던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며 묘한 코맹맹이 소리로 중얼 거렸다.




 "흡혈귀들 끼리는 어떻게 섹스 하는지 알아?"




 내가 고개를 젓자 그녀는 반쯤 풀린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며 야릇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피를 빨아."




 죽어서 차갑게 식어 버린 혈관 사이로 타인의 뜨거운 혈액이 타고 돌 때 흡혈귀는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 빠져든다고 했다. 흡혈을 통해 상대의 체온이 자신의 몸을 덥히며 온 몸을 타고 돌 때 그녀는 상대의 기억이며 영혼 따위가 피와 함께 녹아들어와 자신의 몸 속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어가는 착각이 든다고 했다. 그녀는 그것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끝내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와 활동 시간대가 비슷했기에 나는 낮에는 주로 잠을 잤다. 가끔씩 남자들의 지갑 속에서 빼낸 돈을 들고 장을 봐오는 일이 있긴 했지만 되도록이면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낡아빠진 집안은 언제나 어두웠다.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막아 놓은 집안에서, 나는 촛불 하나를 세워두고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욕실에 쭈그려 앉아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좁은 욕실에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가녀리고 연약해 보였다. 낮 동안에 그녀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알기에 나는 한시라도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기가 두려웠다. 그런 고민을 털어 놓을 때면 그녀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너희들보다 월등히 먹이사슬의 위에 있는 포식자야. 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누구야?"




 한숨을 내쉬며 나갔던 내가 그 날 저녁 데려온 건 비실비실해 보이는 중년의 동양남성이었다. 물론 좋은 먹잇감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날 거리에서는 도통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또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그녀가 스스로 먹이를 찾기 위해 내 집을 떠날거라는 생각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 밥맛떨어지는 식사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집어 넣고, 오만상을 찌푸린 체 피를 몇 번 빨다가 그대로 남자를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내던져진 남자가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 위로 피를 뿜어내며 비명을 질러대자 나는 어찌해야 될 지 알 수가 없어졌다. 불쾌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던 그녀는 남자의 비명소리에 짜증이 났는지 단숨에 달려들어 앙상한 목을 비틀어 버렸다.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온 집안에서 가빠진 내 호흡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려왔다. 지금까지 그녀의 아래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수 없이 보았지만 처음으로 사람이 살해 됐다는 실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허덕이는 내 숨소리가 신경이 쓰이는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 속에서 나는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이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왜? 무서워?"




 그녀의 질문에 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눈 깜짝할 새에 내 팔목은 그녀의 우악스러운 손에 붙잡혔다. 침대 위로 나를 던져 넣은 그녀는 나의 목덜미 사이로 고개를 파묻으며 낮게 그르릉대는 소리를 내었다. 목덜미 옆으로 불어오는 그녀의 흥분된 입김을 느끼며 나는 두려움과 함께 기대감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 사실은 그녀가 내 목 깊숙한 혈관 사이로 송곳니를 밀어 넣을 거란 상상만으로도 벌써 아래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끝내 그녀가 날 쉽게 물어주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를 내려다 보는 그녀의 눈이 어느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차 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절망했다. 그녀는 부들거리며 굳게 다물고 있는 입술 사이로 신음하듯 물었다.




 "잊을 뻔 했어. 네가 무서워한 것은 뭐지? 죽음이야? 죽음이 너를 두렵게 만드니?"




 내가 지금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단 사실을 그녀가 이미 알고 있다는게 그녀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묘하게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 보았다. 핏기 없이 새하얀 얼굴 위에 떠있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타이르듯 달싹였다. 그것이 마치 그녀 자신과 나 모두를 향한 것 같았다.




 "알고 있니? 지하의 여왕은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아. 너는 아직도 경계 밖으로 걸어나갈 자격이 없어."

 "그렇다면 내가 죽음을 무서워하게 될 떄까지 당신은 날 물어주지 않을 건가요? 말해봐요. 난 어떻게 해야 죽음을 무서워 할 수 있죠?"

 "글쎄....."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목덜미를 가져다 대었을 때 나는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내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녀는 자신의 목을 물라고 명령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망설이고 있자 그녀는 손수 내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괴물 같은 힘에 꼼짝도 못 하고 있을 때 그녀는 벌어진 내 입안으로 자신의 목을 끼어 넣더니 힘껏 내 턱을 닫아 버렸다.




 흡혈귀의 그것에 비해 너무도 작고 초라한 내 송곳니가 그녀의 차갑고 얇은 피부 속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짧은 신음성을 흘리며 움찔하는 모습에 황급히 입술을 떼어 내려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내 얼굴을 더 깊숙이 자신의 목으로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자신의 손에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쥐어 졌을 때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 하게 돼. 죽음은 곧 상실의 고통이란다. 너에겐 그것이 없어.' 끈적이는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푹 파묻힌 체 혀끝에 닿아 오는 그녀의 메마른 피부에서는 비릿한 맛이 나고 있었다.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그녀가 마셔온 희생자들로 부터 몸에 베인 피 냄새란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탐닉하고 싶어졌다. 순식간에 다시 재생되어 버리곤 하는 그녀의 강인한 목을 붙들고 물어뜯으면서 나는 긴긴 시간동안 이어졌을 그 아름다운 영혼들의 절규 속에 내가 녹아들어 가기를 원했다.




 어느새 나는 한 마리의 뱀파이어가 되어 있는 듯 했다. 그녀를 밀어 붙여 올라타고, 거칠게 살점을 물어뜯으며 그녀의 신음성이 점점 하이 톤의 소프라노가 될 때마다 나는 환희에 차올랐다. 그녀의 영혼을 흡수하고 쾌락을 선물해 주는 대가로 나는 한층 죽음에 가까워지는 내 자신을 느꼈다. 마침내 내가 완전히 탈진하여 그녀의 품으로 쓰러졌을 때 그녀가 내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부어오르고 여기저기 갈라져 피 흘리고 있는 내 입술을 섬세한 손길로 매만지면서 빙그레 웃었다.




 "You're my little werewolf."




 그녀의 미소가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그곳에 정신을 빼앗겨 버린 나는 그녀가 내뱉는 말들을 제대로 듣지 못 하였다. '오직 늑대인간만이 뱀파이어를 물어 죽일 수 있어.' 스치듯 지나친 그녀의 말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그날 밤 그녀의 미소와 함께 웃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부터 그녀는 종종 남자들의 피를 빨다가 몽롱한 시선으로 날 찾고는 했다. 그럴때면 언제나 자신의 목을 물어줄 것을 나에게 졸라왔기에, 그녀의 제멋대로이고 고집불통인 성격을 아는 나는 매번 이기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들어 새하얀 목덜미를 물어뜯어 주고는 했다. 그 즈음해서 나는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그녀가 줄곧 나를 바라보며 남자들의 피를 빨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서둘러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별 생각 없이 현관문 앞까지 걸어온 나는 현관문의 손잡이가 낡은 문짝의 일부와 함께 우악스럽게 뜯겨져 나간 것을 보게 되었다. 순간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컴컴한 집안으로 무작정 뛰어 들어가다가 불현듯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고통과 함께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무언가 차가운 것이 얼굴을 때리고 쏟아지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힘겹게 눈을 떠 보자 양동이를 들고 내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누런 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찌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주먹이 먼저 날아왔다. 뼈에 금이 갔는지 순식간에 광대뼈 주위가 얼얼하게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묶여 있던 의자 위로 축하니 늘어져 있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 중에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작달막한 키에 머리를 박박 깎은 남자는 내 눈 앞으로 금팔찌 하나를 들이밀고는 흥분된 어투로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는 있었지만 그 금팔찌가 무엇인지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얼마 전 그녀가 먹어치운 중국계 남자의 팔목에 달랑거리고 있던 그것 이었다.




 대머리의 남자는 쉬지 않고 떠드는 와중에도 틈틈이 잊지 않고 주먹이나 발을 휘둘렀기 때문에 나는 점점 의식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어 졌다. 그나마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는 건 그녀가 무사할지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남자가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 올렸을 때 좁은 실내의 문 밖으로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 몇 분간 복도를 가득 메우며 들려오던 총소리는 이내 잠잠해졌다. 당황한 대머리의 남자가 욕설을 퍼부어 대면서, 제각각 총이나 나이프 따위를 꺼내어 들고 있던 무리 중의 한 남자에게 등을 떠밀며 나가보라고 명령했다. 쭈뼛쭈뼛 거리며 문 앞으로 다가간 남자가 조심히 문에 귀를 가져다 대자, 그 순간 문과 함께 남자의 허리가 끊어져 나가며 솟구쳐 오르는 피보라와 함께 거무죽죽한 내장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누구 하나 침 한 방울 삼키지 못 하던 정적 속에서 천장에 진득이 늘러 붙어 있던 내장 한 덩어리가 철벅하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 말을 잊었던 무리속에 곧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오자,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뻥 뚫린 문을 향해 남자들은 일제히 총을 쏴 대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납탄의 폭력에 의해, 덜렁거리며 간신히 붙어있던 문짝의 일부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부숴지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광란에 휩싸인 사격이 끝나지 않을 것 처럼 이어지던 중에 갑자기 건물의 불이 일시에 나가 버렸다. 당황한 남자들이 마구잡이로 욕설을 내뱉으며 어둠속에서 허둥대는 소리를 잠잠코 듣고 있다가 나는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향내 하나가 방 안으로 섞여 들어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어둠 저 편에서 섬뜩한 소리와 함께 피가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남자들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아대자 마치 플래시가 터지고 있는 것처럼 단편적인 영상들이 방안에 떠올랐다. 남자들의 포화가 집중되는 곳에는 뽑혀진 머리에서 피를 뿜어내면서 총알세례에 걸레조각처럼 터져나가는 시체하나가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남자들 사이에 의문이 생겨나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다시 피를 흩뿌리며 또 다른 머리 하나가 잘려 나갔다. 순식간에 방 안은 난장판이 되어 사방으로 총알과 피가 난무하는 아비규환이 되어 버렸다. 착실하게 신체 일부가 해체되며 죽어가는 남자와 그 옆에서 동료의 총알 세례를 받고 쓰러지는 또 다른 남자.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등부터 쑤셔 박혀진 강인한 손에 의해 척수가 뽑혀져 나가기도 하고, 울고 불며 문 밖으로 달려 나가다가 몸이 양분되어 죽는 남자도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지옥 같던 광경이 끝나고 잠잠해진 방안에서, 그녀는 머리가 박박 밀어진 남자의 잘린 머리를 쳐들고 떨어지는 피를 받아 마시며 서 있었다.




 "말했잖아. 난 포식자야. 낮 동안에 나에게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난 밤이 되면 너희들을 먹으러 돌아다닐 거야."




 창백하게 식어버린 남자의 머리를 내던지며 그녀는 내가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렇게 애기했다. 다가와 의자에 묶여있던 밧줄을 끊어준 그녀는 그대로 나를 바닥에 방치한 채로 다시 뒤돌아섰다. 그녀를 따라 일어서 보려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붙들린 채로 구타당했던 몸은 자꾸만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버렸다. 이미 부어오를 대로 부어올라 뿌옇게 번진 시야에 방 문 앞에선 그녀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거 알아? 흡혈귀들은 다들 너처럼 경계에 선 자들이야. 잃을 것들이 없는 놈팡이들 뿐이지. 그래서 살지도 죽지도 못 해. 그런 것들을 받아주는 건 결국 어정쩡한 경계의 한 가운데 뿐이야. 그런건 도저히 추천해줄 만한 삶이 못 되지. 난 이제 떠날 거다.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느새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몇 번이고 말을 꺼내려 노력해 보았지만 메마르고 갈라진 목구멍에서는 색색 거리는 탁한 음만이 튀어 나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날 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 반짝였다고 생각했다.




 "정말.... 물고 싶다. 너."




 그 말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처음 그녀와 만났던 그 날 처럼, 이미 방문 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저기 상하고 피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절뚝대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살던 골목 전체가 새까만 밤하늘을 밝히며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 행색을 보고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구경꾼 중에서 한 명이 어느 집에선가 불이 붙어 골목 전체로 옮겨 붙었다는 소리를 해 주었다. 나는 그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가늠해 보고 그 최초로 불이 났던 집이 내 집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 어두운 집의 방안에서 낮부터 타고 있었던 양초의 작은 불꽃이 저녁이 되도록 타오르다가 결국 순식간에 집안으로 옮겨 붙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그 화제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마을이 다 보이는 낮은 동산위에 앉아서 새벽녘이 되도록,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낡고 지저분한 골목길이 화염에 휩쓸려 타오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을 포함한 어두운 인생 전부와 짧았지만 가장 강렬했던 그녀와의 추억 전부가 깨끗하게 타오르는 장면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새벽동이 떠오를 때 쯤 조용히 발길을 돌려 마을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나에게는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다.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은 삶과 죽음 양 쪽에서 모두 버림받은 인생을 살게 되어 있었다. 지금껏 경계에 서 있던 나는 그러나 이제서야 한층 죽음에 가까워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상실의 고통을 느낀 건 그녀만이 아니었으니까.... 이젠 나에게도 상실이 고통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씩 만들어 갈 상실의 두려움들이 차곡차곡 쌓여갔을 때, 어느날 그녀는 나에게 다시 찾아와 묻게 될 것이다. - 너는 죽음이 두려운가? - 




 ......나와 그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경계의 끝에서... (fin)









 10월의 글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어찌되었든 할로윈을 기념한다는 변명거리로 리네이밍 한 '경계의 끝에서...' 입니다. 그렇지만 글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 이름이 밝혀지지 않으므로 리네이밍 조차도 아니게 되는군요. 완전 우울한 글을 보고 싶다던 어느분의 리퀘로 탄생한 글이다보니 그당시 지금까지 써왔던 글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쓰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해피엔딩이 아니면 싫어!" 라는 위주다 보니 결국 엔딩만큼은 조금 틀어서 약간의 희망을 남겨 두었었습니다. 아무튼 죽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썼던 글이고 소재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뱀파이어도 사용하면서 여러모로 실험적이고 도전적이었던 글이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쓰는 것 자체는 생각보다 너무 술술 막힘없이 써져서 아마도 이런 글이 나올만한 시기를 잘 탔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지금 쓰라면 이런 글 못 쓸지도.... 

 이어지는 다음 글이 있으니 남은 이야기들은 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림의 사막' 에서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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